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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안이씨 역사. 정자 및 재실
1. 제공재실
● 4세 이등
생년 : 1378생-
1444년 봉헌대부
포항시 북구 대잠산
현재 재실터만 전해짐
영일 대잠에 4세 이등재실터만 전해져 오는 것은
1세 2세 3세 할아버지묘는 없다고 보여진다
영일 대잠에는 이양길의 죽음으로 받은 봉토들은 임진왜란으로
12대에 전부 몰살당하므로 인하여
대잠산에 있든 청안이씨 선조 묘소와 땅은 절손됨으로써
5세 이유미의 사위인 권수해자손의 땅으로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일제시대에 산소유권은 산의 묘지수로 등록 하였다
세종실록
이등(李登)의 처 해주오씨(吳氏)는 18세에 청안이씨 가문에 출가하였으나 나이 27세에 지아비가 서울에서 죽었는데, 그 시체를 거두어 집 북쪽 산에 장사지내고, 시조모 섬기기를 친정부모 같이 하고, 매양 초하루 보름이면 묘에 나아가 제사를 지냈다.
세종실록 (세종 26년)/조선왕조실실록 태백산본/ 날짜 1444-07-01(음)/ 분류 고전국역서 > 역사 > 사서류(史書類)/ 세종 105권, 26년(1444 갑자 / 명 정통(正統) 9년) 7월 1일(무신)
박종우(朴從愚)를 광덕 대부 호조 판서(光德大夫戶曹判書)로, 윤계동(尹季童)· 이등(李登)을 모두 봉헌 대부(奉憲大夫)로
2. 덕산서사,
● 9세 이팽수 생년 :
1919년 3.1운동 3년후
조선의 독립이 점점 멀어져가든 시기에독립운동가와 경북의 유림들이
왜적과 대척점에 있는 청안이씨 가문의 이팽수의 재실을 창건함으로
조선의 백성들에게 독립의 정신을 일깨우고자 창건한 선조들의 유산
이팽수 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전투에 참여 하였으며 汶川會盟에 참여하여 동지들과 뜻을 같이 하였다 ,홍천 영천 울산등지에서 적을 무찌르고, 6월에는 경주성 탈환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탑동 지역에서도 왜병에 맞서 싸운 전투에서 상당한 공로를 세웠다. 그 후 이팽수 는 무과에 급제하여 伏兵將으로 울산 西生浦 의 방어를 담당하였었다. 서생포 전투에서 왜군의 막대한 군사력을 끝내 극복하지못하고 33세의 나이로 순절하였다. 이런 그의 공적이 인정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0년 가까이 되는 1783 년(정조 7)때였다. 정조는 참판이라는 벼슬로 그를 칭송하고, 즉 가선대부병조참판(嘉善大夫兵曹參判)으로 추증하고, 표충각(表忠閣)을 세웠다
이팽수 의 공로는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 의 묘갈명(墓碣銘),
또한분의 영의정을 지낸 양암(陽菴) 정존겸(鄭存謙)의 정려비문(旌閭碑文)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청대 권상일(淸臺 權相一) 의 묘지명(墓誌銘),
左承旨를 지낸 艮翁 李獻慶 의 招魂辭,
縣監을 지낸 藥南 李憲洛 의 招魂墓詩,
禮曹參判을 지낸 耳溪 洪良浩 와 金尙集 의 旌閭記,
3 .표충각,
● 9세 이팽수
정조7년 계묘(1783년8월29일(무자)
진사(進士) 이술현(李述賢)의 상언으로 인하여 하교하기를,
“이와 같은 절의(節義)가 지금까지 민몰(泯沒)된 것은 어찌 조정의 흠결이 아니겠는가.
경주(慶州)의 이팽수(李彭壽)가 목숨을 바친 사적을 도신에게 분부하여 믿을 만한 글을 참고하고 사림의 여론을 널리 채취하여 이치를 따져 장문하게 하라.” (일성록)
正祖 7년 (1783) 나라에서 ‘忠臣之門’ 이라는 旌閭를 세우도록 命 했다
正祖8년(1784) 3월20일 병조참판으로 증직하고 표충각을 세웠다
대사헌 을 지낸 청대(淸臺)권상일(權相一, 1679~1759)의 묘지명
領議政을 지낸 樊巖 蔡濟恭의 墓碣銘
左承旨를 지낸 艮翁 李獻慶의 招魂辭,
縣監을 지낸 藥南 李憲洛의 招魂墓詩,
縣監을 지낸 藥南 李憲洛의 招魂墓詩
禮曹參判을 지낸 耳溪 洪良浩와 金尙集의 旌閭記,
영의정을 지낸 陽菴 鄭存謙의 旌閭碑文
碑의 높이는 199Cm, 너비 54Cm, 폭 23Cm,
비의 篆額은 ‘참판 이공 정려비’ 라고 하였고,
표충각’ 이란 扁額 글씨는 예조 판서 김노진이 썻다.
신도비( 안강 대동리 대박골)
영의정 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이 짓고 춘추관(春秋館) 수찬관(修撰官)
금파 이정병(弘文館 琴坡 李鼎秉 경주 양좌동출신)) 이 쓴
신도비(神道碑)가 묘소 아래에 있다
4.상모정
● 16세 이수인(李樹仁) 호는 구암(懼庵) 두항거사(杜巷居士)
생년 : 1739(영조 15)∼1822(순조 22)
정의 : 조선 순조 때의 성리학자(性理學者).
생 애
본관은 청안(淸安)자는 성안(性安)이고,
정조7년(1783) 식년시 사마시(司馬試) 일등(一等)
두항거사(杜巷居士)이며, 아버지는 동도팔사(東都八士)의 한 사람인 위현(渭賢), 어머니는 영월신씨(寧越辛氏)로 명상(命相)의 딸이다
정종로(鄭宗魯) 등과 교유하였다.
1796년 관찰사(觀察使)의 천거를 받았으나 소명(召命)에 불응하였다.
그 후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이 되어
정조에게 절용애민(節用愛民)의 방법으로 사회의 폐단을 구제하도록 건의하였다.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조선 후기의 유학자 구암(懼庵) 이수인(李樹仁:1739∼1822)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의 제자들이 건립한 정자로,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산대리 피일마을 어귀에 있다. 본래는 직산서사라는 이름으로 건립되었는데 이후 화재로 소실되어 중건하면서 상모정(尙慕亭)이라고 개칭하였다. 정면 4칸·측면 2칸 규모이며, 가운데 2칸 대청 양쪽으로 온돌방을 배치한 중당협실형으로 구성되었다.
@정조 20년 6월 3일 정축 1796년 청 순치(順治) 1년
○命嶺南道薦人李樹仁、李楨國、禹載岳、鄭煒、金台翼, 給馬起送。 道臣李泰永, 以五人行誼才識, 薦聞故也。
이태영이 천거한 영남의 5인에게 역마를 주어 보내라고 명하영남에서 천거한 이수인(李樹仁)·이정국(李楨國)·우재악(禹載岳)·정위(鄭煒)·김태익(金台翼)에게 역마를 주어 보내라고 명하였다. 이는 감사 이태영(李泰永)이 5인의 행실과 학식이 뛰어난 것으로 추천하여 올렸기 때문이었다.
@승정원일기 정조 20년 8월 1일 계유 17/18 기사 1796년 嘉慶(淸/仁宗) 1년
○ 李冕膺, 以吏曹言啓曰, 今六月初三日, 慶尙監司李泰永啓本, 才行表著人, 生員李樹仁·李禎國, 幼學禹載岳·鄭煒
@승정원일기 정조 20년 8월 13일 을유 기사 1796년 嘉慶(淸/仁宗) 1년
@정조실록 정조 20년 8월 14일 병술 1796년 청 순치(順治) 1년
영남에서 이수인·우재악을 불러 올려 만나다
영남에서 임금의 부름을 받고 올라온 이수인(李樹仁)과 우재악(禹載岳)을 불러 보았다. 재악은 충정공(忠靖公) 우현보(禹玄寶)의 13대 손이고, 수인은 임진난에 순절한 증 참판 이팽수(李彭壽)의 7대 손이다.
@승정원일기 정조 20년 8월 21일 계사 8/11 기사 1796년 嘉慶(淸/仁宗) 1년,
@정조실록 정조 20년 10월 7일 기묘 1796년 청 순치(順治) 1년
정최성이 상소하여 이수인·우재악에게 관직을 제수하지 말도록 청하다
장령 정최성(鄭最成)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영남에서 불러들인 이수인(李樹仁)과 우재악(禹載岳)이 아뢴 말은 듣기에 놀라웠으니, 침랑장(寢郞將)에 제수한다는 명을 다시 거두어 들이소서."
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리고 이어 전교하기를,
불러들인다는 명목으로 올려보내게 하여 관직에 제수까지 해놓고는 그로 하여금 낭패를 보고 돌아가게 한다면, 미처 부름에 나아오지 않은 자들이 장차 이것을 보고 경계하여 자취를 감추기에 급급해 할 것이다. 이후로는 더욱 힘을 기울여 장려함으로써 명령을 믿을 수 있게 해야만 훌륭한 인재를 불러들일 수 있을 것이다. 여러 도에서 미처 올라오지 않은 자들을 각 도의 관찰사들에게 분부하여 속히 올려보내게 하라. 표창하고 부르는 사람 속에 들지 않았다고 해서 부름에 응하지 않고 한결같이 망설이기만 하는 자를 어찌 의리에 맞게 처신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국가의 체모가 달려 있는 일이라서 그대로 방치해 둘 수 없으니, 해조로 하여금 호서와 영남의 관찰사를 엄히 신칙하게 하라."하였다.
@승정원일기 순조 18년 1월 2일 경자
前假監役李樹仁· 前參奉金允秋, 前奉事玄丕承, 以上
今加通政, 朝官年八十以上, 依定式加資事承傳
@승정원일기 순조 18년 1월 25일 계해 副護軍 李樹仁·
@승정원일기 순조 18년 2월 5일 계유 李樹仁·金允秋·權瑢爲 僉知
@승정원일기 순조 18년 2월 10일 무인 僉知中樞府事 權瑢·李樹仁
@승정원일기 순조 18년 2월 22일 副護軍 李樹仁·
@순조 22년에 돌아 가셨다
업 적
그는 경사자집(經史子集)을 통독하고 이황(李滉)의 「사칠변(四七辨)」·「성학십도(聖學十圖)」와 이언적(李彦迪)의 「태극변(太極辨)」을 주로 연구하였다.
5,삼괴정 (三槐亭)
경주 강동면 다산리 533번지
● 9세 이방린 생년 1574-1624 1583
자 덕화 호 동호 계미별시 병과
통훈대부 행안동대도호부 판관겸부사
생년 1547(선조 7) 졸년 1624(인조 2)
● 9세 이유린 1553년-1644
자덕형 호 퇴와
통훈대부 훈련원첨정
● 9세 이광린 1555년-1621
자 덕희 호 수와 1594 갑오 단독별시 병과 창신교위 훈련원봉사
1815년 건립한 조선후기 정자
삼괴정三槐亭은 경주시 강동면 다산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정자로서 1992년 7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68호로 지정되었다. 이 정자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경주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동호 이방린 선생과 동생인 유린·광린 삼형제를 추모하기 위해 7대손 이화택이 1815년(순조 15)에 건립한 정자이다.
1812년 정자 짓기를 합의하고 3년여의 기간끝에 계유년 마침내 12칸의 큰 정자를 완성했다. 삼괴정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삼형제가 의병으로 출전하기에 앞서 현재의 정자터에 괴나무(회화나무) 한 그루씩을 심어놓고 출전한 것에 연유한다.
삼형제가 심었다는 괴나무는 고사해 지금은 없었지만 그 뿌리가 자라 다시 자라 신록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 정자는 본채와 외삼문으로 구성된 배치이고, 전체적으로 ‘丁’자형의 평면으로 되어 있으며 지붕은 홑처마에 맞배지붕을 잇댄 가적지붕 형식이다. 경사진 대지에 터를 잡아 전면은 누각으로 꾸미고, 출입은 뒤쪽으로 하게 했다. 전면에 대문이 있고 왼쪽에 일각문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경주에서 의병 일으켜 공을 세운 동호이방린 선생
이방린 선생은 경주판관이었던 박의장, 의병장 권응수와 함께 영천성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웠는데, 이때 화포장火砲匠이었던 이장손이 만든 비격진천뢰를 사용해 경주성을 탈환했다. 이는 ‘관감록’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방린 선생은 계연 전투에도 공을 세우고 안동대도호부 판관 겸 부사를 역임했다.
한편, 당시 그 뛰어난 공적과 위대한 업적은 후손들의 자랑이었지만 조정에서는 적절한 포상이 없어 향인들이 두고두고 개탄했다고 전한다. 형제들의 여유만만한 태도와 더불어 돈독한 우애와 남다른 효성은 두고두고 청안 이씨 가문의 모범이 되었다.
대청 한복판 뒤쪽으로 놀라운 공간이…독특한 공간구성 수법 사용
평면은 정면 3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으나 특기할 사항은, 다시 대청의 한복판 뒤쪽으로 ‘필경재必敬齋’칸이 뒤쪽으로 더 빠져 나가도록 하고 높이를 대청보다 50Cm 정도 높게 위치하도록 독특한 공간구성을 한 ‘놀라운 공간’이 나타난다.
일자형 평면의 구성에서 세로로 2칸의 누마루방이 접해있어 매우 특이한 평면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 또한 정자 전면에는 기둥에서 돌출한 누마루 형식의 툇마루가 있고 계자각 난간이 설치되어 있었다. 대청마루아래에는 정자를 받치고 있는 장정의 몸통보다 굵은 원기둥들이 듬직하게 무게 중심을 잡고 있었다. 그 위에는 작은 원기둥과 마루 위 중앙 3곳에 팔각기둥을 각각 세워 건물의 격을 한층 높이고 있었다.
필경재必敬齋, ‘화수당花樹堂’, ’포죽헌苞竹軒’
건물의 정면에 삼괴정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고, 2개의 방에도 각기 현판을 달았다.
대청의 필경재는 이방린을 의미하며 상청上廳이라 부르고 있으며 좌,우측방은 ‘화수당’, ’포죽헌’이라 하여 두 동생을 상징하고 있다고 한다.
화수당은 한달에 한 번씩 화합하듯이 큰 자리를 마련했다고 하며 의로움을 일컬었다.
포죽헌은 정자의 토대가 더부룩하게 자란 대나무 같이 견고하고 상부의 치밀함은 무성한 소나무같다는 뜻으로 제목을 붙여 시가를 읊고 노래를 부르고 즐겼다고 한다. 뒤편 필경재에서는 예법과 음악을 또한 즐겼다고 한다.
이방린 선생의 22대손이자 문유사인 이진준(53)씨는 “백 수십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필경재 한켠이 풍우에 기와가 벗겨지고 서까래까지 떨어져 붕괴의 위험에 처했다. 후손인 이용관은 자재와 경비를 부담하고 목공을 구해 일을 시작하고 문중노소가 힘을 모아 관리해 수리를 마쳤다”고 전했다.
문화재 지정이후 보수할 당시의 고기와가 뜰의 한켠에 차곡차곡 보관돼 있었다. 정자의 출입문인 대문은 외삼문 3칸으로 가적지붕 형식의 대문으로 정자의 본채 형식을 그대로 축소한 양식의 대문이다. 이 대문의 양식은 전국에서 두어군데 뿐이라고 한다. 건물이 서향의 배치인 관계로 정면의 창호에는 햇볕을 차단하며, 우천시 비를 막을 수 있도록 외부에 판장문을 덧대었다.
6,호동재사,
● 이선도 자 사임 초휘 행도 호 영사제
생년 숭정기묘1639-숙종무수 1718
배 철성이씨 용헌원후 충의위 여 민
청안인 영사제 이선도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재실
빔의골안쪽에세운 재실이다
7,강구정
● 이운현(李運賢)
산대리 792번지에 있다
청안인( 淸安李氏)정와(靜窩) 이운현(李運賢)을 추모해 후손들이 70여년전 뒷산대에 세운 정자다.
8,서림정,(西林亭)
● 이주빈(李周彬)
청안인( 淸安李氏)덕와(德窩) 이주빈(李周彬)을 추모해
후손들이 세운 정자다. 정자 앞에 50여 평의 연못이 있었으나
지금은 연못이 없어지고 그 흔적만 있다.
뒷산대 서쪽, 칠평천과 28번 국도사이에 있다.
3칸 2칸에 양쪽 방, 가운데 마루를 배치했으며 원기둥, 팔작지붕이다.
9,수졸재,
● 이두경(李斗經)
경주시 안강읍 산대리 표충각길 37-3
(守拙齋) 청안인(淸安李氏) 수졸 이두경(李斗經)을 추모해
후손들이 100여년전 뒷산대에 세웠다. 산대리 792번지에 있다.
인와 이술현의 조부이며 유고가 있다
10,어은정,(漁隱亭)
● 이이초(李彛初)
청안인(淸安李氏) 이이초(李彛初)를 추모해
그 후손들이 1970년에 산대리 394번지
새터 마을 가운데에 세운 정자다.
3칸 팔작지붕에 가운데 마루 양쪽에 방을 배치했다.
11,죽오정
● 이양초(李養初)
(竹塢亭) 청안인(淸安李氏) 죽오(竹塢) 이양초(李養初)를 추모해
후손들이 세운 정자. 본래 풍산금속에 있던 것을 1973년 구불안 마을 어귀로 옮겼다.
12,창암재
경북 영천시 고경면 창상리 효자로 148-3
창암재는 청안 이씨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건립한 재사로, 육군 3사관학교에서 단포리 방향으로 호국로를 따라 300여m 직진하면 창상리 방향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산 아래 길을 따라 1.7㎞ 이동하면 창상리 솔밭마을이 나오는데, 이 마을 초입의 우측에 창암재가 있다.
창암재는 마을 초입 평지에 북향하여 배치되어 있다. 정사각형의 대지에 재사와 관리사 건물이 배치되어 있고 일곽은 블록담장을 둘렀다. 재사 우측에 출입구가 있는데 별도의 담장은 시설하지 않았다.
재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로, 평면은 가운데 둔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 1칸씩을 드린 형식이다. 좌 측방 배면에는 벽장을 설치하여 평면을 확장하고 전면에는 툇마루가 놓여 있는데 청판은 장마루를 깔았다.
정지한 대지에 기단은 자연석 2단 규모로 축조하고 외피는 시멘트 모르타르로 마감하였고, 기단 중앙에 기단면을 일부 파서 1단의 계단을 만들었다. 초석은 넓적한 자연석 초석을 놓고 기둥은 모두 각주를 세웠다.
창호는 방의 경우 정면과 측면에 설치하였는데 정면은 쌍여닫이 세살문을, 양 측면에는 외여닫이 세살문을 달고, 청방간 출입문은 아래 굽널을 끼운 쌍여닫이 세살문을 달았다.
대청은 정면에 4짝 여닫이문을 설치하여 마루방을 이루게 했고 뒷벽은 판벽으로 꾸미고 쌍여닫이 판문을 달았다. 기둥 상부에는 납도리와 장혀를 수장하여 간략하게 구성하였으며, 가구는 3량 구조로 대들보 위에 짧은 동자대공을 세우고 종도리를 받게 한 형식이다. 처마는 서까래만 쓴 홑처마에 지붕은 팔작지붕 형식이다.
13,보헌재
경북 영천시 임고면 서리
11세 이신을 모시는 재실이다
14.영모재 일명 대박산장
● 5세 이지 1416-
호 퇴은 1456년원종공신3등 중직대부금성현령
자연안이주 현령후 두동생과 호서에서 이주
영모제 연혁
영모제 연혁
1 ,1658년 안강 입향조 금성공 이지묘소 안강읍 서금성제방내있든 묘소를 안강읍 남 대동 대박골로 이전 하면서 재실을 세웠다
2,1797년 불당곡 재실무너짐
3,봄과 가을에 재계하여 제사를모심
4,구암 이수인 할아버지와 이술현할아버지 재종 증조부할아버지가 중건하고자 종친과 의논하여 여러모로 노력 하였으나 갑자기 돌아가심
5,삼종조 할아버님께서 선부형의 뜻을 따르고자 하여
1820년 경진년에 얼마간의 기금을 모으느라 팔구년 동안 애쓰셨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신 채 또한 돌아가셨다
6,족부이신 상사공 할아버님과 백부님의 유지를 받들어, 진행함
7,십년이 지난 1837년 정유년에, ‘불당골’ 동편 언덕 정남향의 옛터에 재건의 역사를 시월초에 착공하리라 정하고, 일을 시작한지 수개월에 엄동이 끝나고
8,1838년 초봄에 낙성하니,
두간 대청 양끝이 방이요, 서쪽에 부엌 한 간이 딸리고, 동쪽은 지형에 따라 다락 두간이 ㄱ자 형으로 꺾여 있다. 산 아랫 사람으로 하여 수호하게 하여, 춘추로 자손들이 재계하여 제사 받들고 음복하는 곳으로 삼았다.
9,상사공이 내게 이르시기를
‘이 재실이 질박하게 이루어지고,
또한 대동의 박곡에 위치해 있으니,
어찌 ’대박‘이라 이름하지 않으리요“
10,이제 장차 우리문중의 자제들로 하여금 제사를 마친 뒤나.
족친의 모임 끝에는 , 여기서 학문을 강독하고, 여기서 저술하며, 갈고 닦아 인격을 성취하여. 외모며, 본바탕이 아름답게 빛남에
이른다면 그 영광스러움이 어떠하다 하리요!“하신다.
내 옷깃을 여미며, “그러하다면 더욱 다행이로소이다!”하고, ‘
우리집 박이 장차 질박함에 치우치는 폐단이 없게 되리로다“.
하며, 감히 중건의 전말과 건물이름을 짓게 된 의의를 적어
무궁한 후손들에게 보이는 바이다.
11,인와 이술현 할아버지는 이계 홍상서께 글을 청하였더니,
이계웅이 이르시되,
”좋도다! 그 이름이여! 경주는 옛날 신라의 큰 도읍지로,
내가 경주부윤으로 있었을 때, 그 순박한 풍속을 기특히 여겼더니,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어,
이제 자네네 선재에 그 이름을 얻었도다!“ 한다.
돌아와 드디어 크게 써서 문미에 걸고,
성안(구암 이수인)에게 그 자초지종의 전말을 기술한
기문을 짓게 하는 바이다.
(인와 이술현(1765년(영조 41) 을유식년사마시(乙酉式年司馬試)에 진사(進士) 3등으로 합격 벼슬 동몽교관),
구암 이수인(정조7년(1783) 식년시 사마시(司馬試)일등(一等) 장원
벼슬 부호군 1818년(순조 18)에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작호가 내려졌다)
위 할아버지 두분은 당대에 유학자로서
큰명성을 얻으신 분들이다 인와 문집과 구암문집이 있다)
12,1972년 임자년에 약간의 보수를 하였으며, 보수에 대한 기문은 충원공 22세 李潤洛 이 쓰고 현판은 보존되어 있다.
13. 2009년 9. 14. 이영만 서울 종친회장의 영모재 새 단장과 조상의 유산을 잘 가꾸고 보존하여 문화재로 등재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에 자극 받아 산대 문중에서는 여러차례 영모재 중수에 대해 문회를 개최하고 의견을 듣고 방법을 생각 해 오던중 .
14. 2011. 6. 6. 딱실에 있는 밭을 매수 할 사람이 있으니 이 기회에 밭을 매도하고 영모재를 중수 하기로 결정.
15. 2011. 7. 6. 영모재 공사 계약.
16. 2011. 7. 15. 공사 착공.
17. 2011. 7. 22. 추진위원회 구성.
위원장; 산대 문회장 이 현 태
위원; 성환, 장식, 진도, 수혁, 재태, 영준, 총무 ; 원락
18 영모재는 가급적 원형 그대로 복원 유지 키로하고, 기와는 신기와 구기와 60% 40% 비률로 하고, 목재는 연목 240개 중에 신재 144개, 구재 96개를 쓰고 육송으로 하기로 함.
19. 총 공사비는 111,700,000 원으로 하고, 울타리공사, 전기, 수도, 화장실은 공사 내역에서 제외 했다.
20. 공사 담당은 문화재 건축을 전문으로 하는 청안이씨 계파 李 鎭 道氏로 선정 하였고, 이 진 도 씨는 우리 덕산서사 崇義齋도 지었다.
15. 저곡재사
10세 이경춘 부 이팽수
자 시매 부호군 증 절충장군
생 만력 7년 을묘 5월27일 1579 – 숭정후 임오1642년 2월2일 졸
경북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 호국로 2229-16
16, 오봉재
오봉재(五峰齋)
이규혁(李奎赫) : 1886∼1963
언양읍 대곡리 810번지 반구(盤龜)마을에 있는 청안이씨(淸安李氏) 문중의 재실. 선무원종공신 퇴사재(退思齋) 이응춘(李應春)의 후손 구린(龜隣) 이용필(李容馝)의 다섯째 아들 오봉(五峰) 이규혁(李奎赫 : 1886∼1963)의 덕행을 추모하여 그 손자 이영태(李榮泰 : 一洛)가 추원지심(追遠之心)으로 1995년(을해) 중추(仲秋)에 고택(故宅)을 정비하여 현판을 걸고 오봉재(五峰齋)라 하였다.
현판글씨는 오봉의 종손(從孫) 이중천(李重泉) 이홍락(李弘洛)이 쓰고, 오봉재창건기(五峰齋璡建記)는 청람(淸嵐) 최이락(崔二洛 : 본관 경주)이 지었으며, 아들 죽포(竹圃) 이진각(李鎭閣)의 구연당시(龜蓮堂詩)와 죽포가장(竹圃家藏)이 전한다.
17,한강재
● 5세 이기 1430계사 12월17일-1476 병신5월14일졸
자 국충 호 신제 청평군
1456원종3등공신
통훈대부행장기현감겸경주진관병마검절제도사
배한명회사위 손숙돈
경북 경주시 외동읍 개곡공단길 30-47
한강재(漢江齋)및 신재정(愼齋亭) 청안인 신재(愼齋) 이기(李基)의 덕행을 추모하여, 조선 고종 32년(1859)에 후손들이 토점 서북쪽 한강지 위에 세운 재실로 10여년전에 개축했다. 이기는 장기 현감을 지냈으며 입실 청안문중의 입향조이다. 그 후손에서 영풍정 이계수, 낙의재 이눌 등 임란창의 의사 16위가 나왔다. 신재정은 한강재 남쪽에 나중에 세운 부속건물이다. 이곳에는 청안이씨 임란창의의사 12위의 추모비가 나란히 서 있다.
18,모은정
모은정(慕隱亭)
언양읍 대곡리(大谷里) 반구대 아래(884-3번지)에 있는 청안이씨(淸安李氏) 문중의 정자·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퇴사재(退思齋) 이응춘(李應春)의 후손 구린(龜隣) 이용필(李容馝 : 1849∼1906)이 포은(정몽주)선생의 유덕(遺德)을 사모하여 정각을 지을 것을 원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1920년(경신) 그 아들 일봉(一峰) 정혁(正赫 : 1871∼1952)이 여섯 아우(章赫·鳳赫·能赫·奎赫·晙赫·左赫)와 더불어 긍구(肯構 : 아버지의 사업을 아들이 계승하여 성취함)했다. 바로 앞에 있는 반구서원, 집청정(集淸亭) 등과 더불어 주변의 경치가 빼어나 가히 절경(絶景)이다.
모은정기(慕隱亭記)는 숭정오임술(崇禎五壬戌 : 1922)년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이 쓰고 상량문은 이중구(李仲久)가 지었다.
차모은정운(次慕隱亭韻)에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석암(石庵) 이규린(李奎麟)·경석(耕石) 최해종(崔海鍾)·창은(蒼隱) 박종하(朴鍾河)·낭산(朗山) 이후·파평(坡平) 윤수(尹銖)·달성(達城) 서장성(徐章聲)·서장호(徐章顥)·풍산(豊山) 류철우(柳喆佑)·학성(鶴城) 이석정(李錫井)·아들 정혁(正赫)·삼종(三從 : 8촌) 주혁(周赫)외 박정환(朴楨煥)·이기혁(李基赫)·하석희(河錫熙) 등 많은 선비들의 글이 있다. 바로 옆에 사서각(賜書閣)이 있다.
시업주(始業主) 구린 이용필의 손자요, 육봉(六峰) 준혁(晙赫)의 아들로 20세기 후반 한국 한문학의 대가인 동초(東樵) 이진영(李鎭泳 : 1919-1993) 선생의 학문의 연원(淵源)이 된 곳이기도 하다.
19,사서각(賜書閣)
언양읍 대곡리 반구마을 반구대 아래의 모은정(慕隱亭) 바로 옆에(884-2번지) 있는데, 증병조참판 이운춘(李運春, 淸安人 : 1748∼1823)이 정조 때 조정에서 근무할 때 내사서책(內賜書冊) 5질(帙)과 선전청(宣傳廳) 12관(官) 좌차도장(座次圖章)을 장서(藏書)하여 지켜온 서각(書閣 : 書室)으로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다.
이운춘은 선무원종공신 퇴사재(退思齋) 이응춘(李應春)의 후손 증좌승지 관국(觀國)의 아들로 자는 현보(顯甫)이고 호는 운암(雲岩)이다. 정조 8년(1784 : 갑진) 무과에 급제하여 사복시내승(司僕寺內乘)으로 제수되고, 이듬해 선전관(宣傳官)으로 조정에 입시(入侍)하여 국왕(정조)으로부터 뜻을 밝히는 글을 써보라는 명을 받고「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이란 10자를 썼는데 왕이 칭찬하고 용벼루(龍硯) 1조와 봉필(鳳筆 : 고급 붓) 3자루를 하사하였다.
순조 3년(1803 : 계해) 어느날 밤 인정전(仁政殿)에 화재가 났을 때 이를 진화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워 왕으로부터 총애를 받았고 사후에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으로 추증(追贈)되었다.
아들 지연(志淵)은 장단부사(長湍府使), 승연(昇淵)은 선전관으로 사복시내승(司僕寺內乘)으로 복무하다가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특채되면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올랐고, 뒤에 다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귀성부사(龜城府使) 등 여러 고을의 수령(守令)을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20,수경정(修敬亭)(각석만 남아있음)
수경정
반구대 연화산(蓮花山) 아래(반구마을 동북쪽 대곡리 796번지 옥유동(玉乳洞)골짜기)에 있었던 청안이씨(淸安李氏) 문중의 정각·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퇴사재(退思齋) 이응춘(李應春)의 후예 구린(龜隣) 이용필(李容馝)의 둘째 아들 이봉(二峰) 이장혁(李章赫 : 1872∼1948)의 독서지소(讀書之所)라 하여 1930년대에 세운 것인데, 지금은 폐허되어 전하지 아니하고 <玉乳洞>이란 각석(刻石)만 남아 있다.
21,남계정(南溪亭)
이태립을 모시는재실
경북 경주시 화곡리 소재, 청룡등 제 1위 (靑龍嶝 第一位)
자 여제 호 남계
승사랑 군자감봉사1551-
군자감(軍資監)을 지낸 청한인 이태립(李台立)을 추모하여 그 후손들이 세운 정자다.
임진왜란 때 창의 의사로서 청한이씨가 배출한 16의사 중에 한사람이다.
1950년대에 광산(光山) 아래 못밑마을에 세웠다.,남계정
22,영풍정 詠風亭
이계수 1567- 1637
자 한서 호 영풍정
1598년 용영위부사직 1634훈련원첨정
영풍정(詠風亭) 선조 23년(1590) 청안인 영풍정(詠風亭) 이계수(李繼秀)가 세운 정자이다. 이계수의 자는 한서(漢瑞)로 명종 22년(1567)에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문천회맹(蚊川會盟) 등에 참가 경주, 울산, 대구 등지에서 전공을 세우고, 용마양위부사직이 되었으며 선조 38년(1605)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에 다시 의병을 일으켜 진격하던 중 강화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말에서 떨어져 71세로 순절했다. 지금의 정자는 1957년에 후손들이 신기마을 남쪽에 새로 세웠다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입실리 신기마을 남쪽에 있다. 조선 중기의 무신 영풍정(詠風亭) 이계수(李繼秀)가 1590년에 건립한 정자로 1957년 후손들이 현재의 자리로 왔다
22, 청학정
청계 입향조
12세 이이상 1596-1668
자 운하 호 청계당
1632년 문사련 정언
포항시 청계리
23 학반제
한태 영환
학반제
24 심원정
자 사후 호 심원당 성균진사
6세 이육을 모시는재실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재실자리터
25.상모제
울산시북구 상안동 톡곡길 9-1
영풍정
울산재실
26.죽산재
경주시 안강읍 노당리 1400번지
묘 안강읍 죽전동 자좌
8세 이세의 1511-1552
6세 이흥방의손자
자숙경 호 서강
장사랑 행헌릉참봉
27.남안정
경북 경주시 외동읍구어1리
칠송당 영풍정 정랑공파 3파가 지은정자
28.숭모재
경주시 외동읍 구어리 816-1
6세 이흥방 모시는재실
자복초 호 모와
성균진사 현릉봉사
29, 나만재
경북 경주시 외동읍
7세 이의감 재실
30,반구정
반구정은 정유재란 때 소실됐다 복원돼 1800년대 중반까지 남아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울산읍지(1902년, 1934년)에는 ‘울산부의 동쪽 서부촌에 위치하고 퇴사제 이응춘이 지었다
이응춘
울산시 중구 학성동 퇴사재
31, 영동제약 정사
죽장면 현재 알수 없음 기록만 남았음
32.풍락루
17세 이관영 면천군수 안산군수
소오재문집
4권 2책. 석인본. 1855년(철종 6) 이채원(李綵源)·이윤락(李潤洛)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계명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권1·2에 시·만사 165수, 서(書) 10편, 권3에 제문 17편, 발(跋)·묘지 각 1편, 서(序) 3편, 문(文) 1편, 권4는 부록으로 만사 19수, 뇌사(誄辭) 2편, 애사 1편, 제문 21편, 행장·묘갈명·묘지명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서(書) 가운데 「상구암선생문목(上懼菴先生問目)」은 이기설(理氣說)·예설(禮說)·경전·주자서(朱子書) 등에 관해 광범위하게 질문한 내용이다. 특히, 근도(近道)의 ‘근’자의 뜻과 선비의 수신방법의 요체에 대하여 문의하고 있다.
「옥원강석문답(玉院講席問答)」은 옥산서원에서 강석을 열었을 때 질의, 응답한 내용을 적은 것으로, 『대학』의 지선(至善)과 정정(定靜)·근도·격물(格物) 등의 물음에 답한 내용이다.
면천읍성 내에 2007년 복원된 풍락루(豊樂樓) 안내문에서는 1851년 면천군수 이관영(李觀永)이 건물을 짓고 군민들의 풍요를 빈다는 의미에서 풍락루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쓰여있다. 각종 인터넷 정보는 1851년 또는 1852년으로 되어 있다.
이관영은 1851년 10월 26일 승정원일기에 면천군수를 보임 받으며 등장한다. 이관영은 청안이씨로 음서로 출사하여 여러 곳에서 군수를 했으나, 이기설(理氣說)과 예론(禮論) 등에 강점이 많은 학자였다. 특히 문장에도 밝아 시(만사), 각종 묘지명 등 200여 편의 글을 남겨 전 4권의 소오재 문집을 남긴다.
이관영은 면천군수로 만 5년을 근무한다. 조선시대 그 어떤 군수보다 근무기간이 길다. 그것은 이관영 개인의 정치적 처신과 지역 군민들과의 소통이 좋았다는 반증이다. 면천군수를 거쳐 간 조선시대의 역대 군수들의 행적은 지극히 소략하다. 겨우 이름 정도를 알 수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박지원을 제외한 대부분이 그렇다.
이관영은 면천군수로 부임한 다음해 1852년 금영각사등록(충청감영기록)에 행적이 나타난다.
10월 말 전라도 함평을 떠난 세곡선이 안흥 앞바다를 지나다 파도에 쓸려 당진 초락도에 좌초한다. 세곡선에는 천여석의 세곡이 실려 있었다. 지역 책임자인 당진현감 장익(이관영과 같은 날 보직을 받았다)이 달려 왔고 급보를 받은 충청관찰사는 이관영을 수습 책임자로 임명하고 군졸과 백성을 동원 현장 수습을 맡긴다.
이관영은 장익과 함께 좌초한 세곡선에서 곡식 200여 석을 꺼내고 인근 바다를 탐색하여 20여 석을 더 건져내면서 사건을 마무리 짓는다. 장익은 당진문화원 앞 비석군에 이름이 보인다. 나름 공적이 있는 사람이다.
이관영의 행적은 더 이상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이관영이 면천을 떠난 다음해 암행어사의 보고서에 다시 등장 한다. 1857년 충청도 암행어사로 파견된 서승보는 혈기왕성한 35세의 관원으로 충청도를 탐문하며 홍산 군수와 수어사를 징치하고 태안관아에서는 그 유명한 어사출도를 하면서 관아의 모든 창고와 서류를 봉고한다. 태안군수 오치영이 안면도의 금송을 무단으로 벌채하여 상인들에게 팔고 태안에 자신의 별장을 건축한 것이 밝혀져 의금부에 나포되어 처벌을 받는다.
이관영은 전직이었지만 재직 시 대규모로 면천읍성 보수와 관아보수 공사를 벌여 세수를 탕진했다하여 서승보의 탄핵을 받았지만 용서 받는다.
이관영이 현판을 지은 풍락루는 당송시대의 문인들의 문학에 등장하는 루정의 명사다. 면천성의 원기루, 원경루, 반월루, 군자정 등이 모두 남조시대 이후 당송 시대의 루정 문학의 명사들이라면 이해가 빠르다. 박지원이 골정제를 보수하고 지은 정자 ‘취옹희우정’도 구양수와 소식의 행적에서 취해 온 것이다.
이관영은 아름답고 찰진 시를 많이 썼다. 안산군수 면천군수 등을 거치며 고향 경주안강으로 내려가 말년을 보내던 그의 시 한수를 소개 한다.
슬프다.
횐 머리의
한없는
이 아픔을
늙은 아이
엉엉
울어도
어쩔 수가
없구나.
33.왕산재
2세 호남파 중시조 충간공 이한번을 모시는 재실
34,숭모제
이기남 1533-1605
자 사일 호 석탄
이기남을 모시는재실
鄭李一庵
35, 호남 석송대바위
석송대의 주인 이기남은 성리학에 능한 학자로 송강 정철과 절친했고, 여러 관직에 천거됐으나 사양한 유학자요 지식인으로 장성군 장성읍 단광리 분묘 이장지에서 조상의 묘를 이장 하던 중 500여년 전에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신이 원형 상태로 보존돼 있는 것을 발견되어 화제를 모았다.
석탄(石灘) 이기남은 조선 중기 선조시대 사람이지만 생몰년도는 명확하지 않다. 특히 관 안에는 ‘황룡부주’(黃龍負舟·누런 용이 배를 지고 간다)는 제목의 시부(詩賦)가 적혀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1927년에 간행된 장성읍지(長城邑誌)에 “석송대는 장성면 기산리 계곡 가 깎아지른 절벽에 있는데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과 석탄(石灘) 이기남(李箕南)이 노닐던 곳이다.[石松臺 : 在長城面岐山里懸崖壁立溪上, 鄭松江、李石灘遊息處]”고 전하고 있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이 지은 석탄이공묘표(石灘李公墓表)에도 송강이 불대산(佛臺山) 중턱에 지어 이기남을 불러 교유했다며 정이암에게 쓰다 3수(題鄭李庵 三首) 시가 노사집에 전히고 있다.
달국등의 이끼 위 걸으니 / 澾局磴蘚步
쓸쓸히 옷소매 바람 차갑네 / 悽悵風袂寒
산이 막아서 끊지 않았다면 / 若無山隔斷
눈 들어 대주도 보리라 / 擡眼大珠看
구름 끼어 종소리도 습하고 / 雲擁鐘聲濕
돌 서늘해 바둑 소리 잠겼네 / 石凉碁響沈
산 사람이 경 해설 마치고서 / 山人說經罷
손 모아 올라온 이들 위로하네 / 叉手慰登臨
객 베개에서 산 샘물이 울고 / 客枕山泉鳴
신선 시비엔 바다 달 둥그네 / 仙扉海月圓
서로 만나 한 마디 말도 없이 / 相逢無一話
함께 흰 구름 짝하여 잔다네 / 共伴白雲眠
석송대 폭포
36,정이일암(鄭李一庵)
정이일암(鄭李一菴)은 송강(松江) 정철(鄭澈)과 처사(處士) 석탄(石灘) 이기남(李箕南)이 강학과 공부했던 강마도의지소(講曆道義之所)로
그들의 첫자를 따 정이일암(鄭李一菴)이라고 이름했다.
이후 사라졌던 것을 1894년(고종31)에 중수하였으며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요 항일의병활동에 참여하고 당시 추앙받은 문학절의(文學節義)로 세속과의 인연을 끊고 율리전사(栗里田舍)에서 후진을 양성했던 석음(石陰) 박노술(朴魯述 1851 철종 2~1917)이 중수기와 시를 남겼다. 그는 시에서 이렇게 감흥을 나타냈다.
우뚝 솟아 구름 덮인 산, 북쪽을 바라보니/정상의 작은 암자 백세 길이 전해오네
약초는 걷는 길 곁에 향기 물씬대고/경숲 사이 꽃들은 담소하던 자리에 더욱 빛나네
석탄선생의 맑은 절개, 심양의 도연명이요/송강(정철) 상국의 풍류는 낙사(낙사기영회)의 현인
조야(朝野)의 출처야 다르지만 의기가 친밀하여/별천지에 두 분 앉아 망년지우(忘年之友) 맺었어라
송강 석탄 성씨로 지은 암자 이름 처음 붙일 적 생각하니/백세의 세월 전광석화처럼 흘렀건만
두 분의 밝은 바람, 끊임없이 울려오고/차가운 달 바라보니 서로 잘도 비추네
송강의 발자취 묻은 바위 위 꽃은 시들고/석탄 머물던 뜰 앞에 휘 늘어진 버드나무
우리의 속진 언제 말끔히 씻어볼까/천추 길이 붉은 꽃, 푸른 잎 피는 아름다운 계절
이후 6.25때 소실되면서 최근 마을 가까이 옮겨 신축했다.
이기남(李箕南)은 성리학에 능한 학자로 김인후(金麟厚)·박 순(朴 淳)·정 철(鄭 澈)·기효간(奇孝諫) 등과 도의로 사귀었고, 선조 때 동몽교관(童蒙敎官)·사헌부 감찰 등에 천거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기호(岐湖) 이문룡(李文龍)은 변이중(邊以中)·박광옥(朴光玉)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박광옥과 함께 고경명(高敬命)의 막하에서 활약하였으며 백의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고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었다.
在長城面佛臺山處士石灘李箕南與松江鄭相國澈講曆道義之所菴之名以是子孫世子文靖
公鄭實詩曰庵額遺扁尙宛然風流勝曾至今傳剡溪興發王公棹香社歡迎白傳筵契誼芝蘭應
共臭聲名膾灸競推賢從今世世宜修好美事將看續舊年李道明詩曰鄭李名庵尙宛然兩翁遺
跡世爭傳連床講道當時事修契論心此日筵逸士高風慚後裔德門餘慶繼前賢重修舊會從今
始一席逢迎指每年
37.행주기씨 정려각
석탄 이기남 선생의 며느리 행주기씨 열려각
장성군 장성읍 기산리 외기마을
장성 공설운동장이 있는 장성대교를 지나 문예회관쪽으로 좌회전해서 가다 보면 감나무집이라는 식당이 있다.
감나무집 뒤편에 작은 동산이 하나 있는데 이곳 맨위에 열려각이 하나 있다.
아주 오랜세월 세상에서 멀어져 초라하게 지내다 지금은 장성군에서 복원 및 정화 작업을 하고 있다.
이기남선생의 3자 이문룡의 처 행주기씨 정려각이다.
장성문향고등학교 우측 동산에 있는 이 정려는 원종공신증통정대부 사헌부 감찰 이문룡의 처 행주기씨정려이다.
행주기씨는 정유재란때 왜적을 피해 가족과 산속에 피해 있던 중 적병이 쫓아오자 아이를 업고 강에 뛰어들어 번사 하였는데 시신을 찾지 못했다.
3일후 이공에게 현몽하여 사람을 보내 보니 아이를 등에 업은 기씨 부인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심한 악취로 뱃사람이 근접을 꺼리자 이공이 축문을 읽어 영혼을 위로 하니 맑은 바람으로 바뀌어 사라졌다.
기씨 부인의 절의f를 전해들은 조정에서는 1604년(선조37년) 정려를 포상 하였으며, 그 사적이 동국삼강록에도 실렸다. 정려각의 정확한 창건 연대를 알 수 없으나 1604년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1845년(헌종 11년) 부인의 7세손 방신이 중수 하였고, 그 후 1888년(고종 25년)에 다시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한 남편인 이문룡공은 장성군 유탕리 소재 불 태산 자락에 자리한 정이 암이란 암자터가 있는데 이 정이암은 송강 정철과 석탄 이기남의 첫자를 따서 정이암이라 했다.
송강 정철과 동문수학 하고 후학에 정진 했던 석탄 이기남의 3자이며 정철의 제자이기도 했다.
이문룡은 송강의 문인으로 학문이 깊고 무술에 능했다. 임진왜란 때 어가용만 호종 했다가 6년 만에 호환 했으며 그 공으로 통훈대부 사헌부 감찰에 제수 되었다.
정유재란때 아우 경룡과 같이 의병을 모집해 산속에서 연마 하던 중 적병의 습격으로 처 기씨를 잃었다.
부인이 죽자 분위기가 탱천하여 말을 타고 적진으로 뛰어 들어 왜군 우두머리를 죽이고 적환에 맞아 순절했다. 학림서원에 배향 되다가 현재 광주 충의 사에 배향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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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글씨는 오봉의 종손(從孫) 이중천(李重泉) 이홍락(李弘洛)이 쓰고에서 이중천(李重泉) 아니고 이홍락의 호가 중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