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인디포럼2008에선 총 46편의 작품이 상영된다. 작년에 비해 규모는 작아졌지만, 한국 독립영화의 근성과 힘을 보여준 영화제답게 다양해진 프로그램으로 독립영화의 확장을 꾀한다.
주류영화 바깥에서 색다른 영화보기를 제안하는 비경쟁 독립영화 축제 인디포럼이 올해로 13번째를 맞았다. 인디포럼2008의 정신은 예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디포럼2008이 내세운 슬로건은 독립영화인들이 한데 힘을 모으자는 의미의 ‘편대비행.’
최신 독립영화의 흐름을 짚어보는 신작들에 포럼기획전, 국내초청전 등의 프로그램과 일본 독립영화의 흐름을 한눈에 읽을 수 있는 일본 독립영화 특별전도 함께 열린다. 신작 59편, 포럼기획전 2편으로 총 61편의 영화를 상영했던 작년에 비해 신작 29편, 국내초청전 4편, 포럼기획전 6편, 일본 독립영화 특별전 7편 등 총 46편이 상영된다. 초청전이나 특별전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신작의 수가 준 것은 아쉽지만, 만듦새는 탄탄해져 질적인 향상을 이뤘다는 자체 평가다.
인디포럼2008이 주목하는 것은 영화와 공간이다. 공간의 정서 속에서 인물의 관계를 설명하는 작품들이 다양한 장르에 담겼다. 장르 가운데는 다큐멘터리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국내초청전 4편 중 다큐멘터리가 3편일 정도로 그 비중이 높다. 전체 상영작의 절반이 여성 감독 작품이라는 점, 애니메이션의 약진도 주목할 만하다. 김도형 기자
인디포럼2008 영화제
기간 2008년 5월 30일(금)~6월 5일(목)(7일간)
장소 인디스페이스(구 중앙시네마 3관), Cinema 상상마당
문의 02-720-6056, www.indieforum.co.kr
개막작
<파인더>
김미영 | 2008 | 53분 | HD | Color | Fiction
<파인더>는 석산 촬영에 감정을 투사하는 커플의 엇갈린 관성적 관계를 바라본다. 여주인공 정선은 석산 연작 사진 작업을 하는 애인 현웅의 조수로 촬영에 나선다. 하지만 거만하고 자기중심적인 현웅은 정선을 무시하거나 윽박지르기 일쑤. 뷰파인더 속, 채석장의 깎아진 형상은 상처나 맨살을 드러낸 두 주인공의 내면에 조응하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만 대상을 바라볼 뿐이다.
김미영 감독은 “현웅과 정선의 관계는 얼핏 착취와 피착취 관계로 보이지만, 오래된 연인들에게 흔한 모습”이라며 “각자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는 온전할지라도 함께할 때는 엉망진창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각본과 연출을 겸한 감독은 구체적이고 내밀한 상황 연출 속에서 관계와 인물의 감정을 드러내는 섬세한 대사를 구사한다. 예컨대 이틀간의 온갖 사건들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왜 이렇게 됐을까?”라고 묻는 정선에게 “싫으면 관두면 될 거 아니야”라고 대꾸하는 현웅의 대답은 두 사람의 바랜 관계를 요약하고 있다. 공간과 그 안에 있는 인물의 관계를 조합하는 구성, 극적 긴장이 탄탄한 대사의 치밀함까지 밝은 미래가 기대되는 감독의 준작이다. 유주하 기자
폐막작
<낙타는 말했다>
조규장 | 2008 | 75분 | 35㎜ | Color | Fiction
여기 세상의 모든 악덕을 다 갖춘 남자가 있다. 담배로 호흡하고 욕으로 말하며 술로 보내는 하루, 타고난 한량 기질까지. 감옥에서 막 출소한 주인공은 가족들에게조차 환영받지 못하고 죽은 어머니의 통장만 건네받는다. 동네가 재개발에 들어간다는 소문에 유산을 털어 농지도 사고 과부와 재혼도 하지만 상황은 꼬이고 인생역전은 요원하다. 의처증이 있으면서 자신은 퇴폐업소를 들락거리고 부인을 애지중지하면서도 구타하는 이 어설프고 우스꽝스러운 악한의 모순이 의외로 쉽게 와 닿는다. 배우의 호연으로 완성된 인간 말종 캐릭터의 리얼리티에 어쩔 수 없이 감정이입하는 난감한 체험인 것이다. 이런 공감이 가능한 이유는 감독은 우리 이웃에 있을 법한 낙오자의 개인적 문제를 가져와 사회적인 시선으로 조명하기 때문이다. 그 단서를 영어 원제 ‘A camel doesn’t leave desert’에서 찾을 수 있다. 낙타는 자신을 착취하는 뜨거운 태양과 매서운 모래바람 아래서만 존재 가치가 있기에 떠날 수도 없다. 그러나 엿 같은 동네에서 주인공은 그런 증명보다 오아시스를 찾아 헤맨다. 박홍식 기자
플래닛 스튜디오의 일본영화 특별전
올해 인디포럼에선 일본 플래닛 스튜디오(Planet Studio)의 독립영화 특별전을 연다. 플래닛 스튜디오는 독립영화를 제작, 배급할 뿐만 아니라 고전영화와 젊은 신인 감독들의 작품을 상영한다. 일본의 인디포럼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독립영화 제작의 핵심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극영화는 물론 실험적인 영화를 꾸준히 만들어 새로운 가능성을 도모하고 있다. 이번에 상영되는 일본 독립영화 특별전은 암울한 정서를 바탕으로 하지만 희망을 놓지 않는 영화들이 상영된다. 지진으로 부모를 잃은 청년이 우연히 만난 소녀를 동생이라 믿으며 납치하는 <헤이트 할레루야 Hate Hallelujah>, 기억력이 단 하루뿐인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의 이야기 <나이트 인 게일 Night in Gale> 등은 고통으로 가득한 삶 속에서 타인과의 소통을 시도하는 긍정적인 몸짓을 보여준다.
<낮술>
노영석 | 2007 | 115분 37초 | HD | Color | Fiction
<낮술>은 심각하지 않은 독립영화다. “독립영화를 재미있고 맘 편하게 보고 싶었다”는 감독의 바람처럼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관객을 웃음 짓게 한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터지는 웃음, 다음 장면을 자꾸 기대하게 만드는 게 이 영화가 지닌 힘이다. 영화는 실연에 괴로워하던 혁진이 술김에 친구들과 강원도 정선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약속 당일 정선 터미널에 도착한 사람은 혁진뿐. 이왕 온 김에 여행을 즐기고자 하는 그에게 고약한 일들이 연달아 펼쳐진다. 유머가 주인공 혁진의 어수룩함이나 어이없는 사건들로 빚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여행 내내 혁진은 진지하나, 거의 침입에 가까운 외부적인 상황과 맞물려 그의 고민이나 고통, 여행자로서의 설렘과 환상은 한낱 개그로 전락하고 만다.
이러한 순간의 되풀이로 영화는 완성되며, 여기서 ‘낮에 마시는 술’은 혁진이 타인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해주면서 번번이 그를 난처한 상황에 빠트린다. 감독의 첫 연출작인 데다가 모니터링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촬영된 탓에 종종 포커스가 나가는 기술적 미흡함도 있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면에서는 노련함이 엿보인다. 음악과 미술에 능한 노영석 감독이 각본부터 촬영, 편집, 미술, 음악에 이르기까지 전부 도맡게 된 건 자신감 때문이 아니라 실제 돈과 시간, 스탭이 한참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2008 전주국제영화제에서 JJ-st★r상을 수상했다. 서남영 기자
<아이들>
윤성현 | 2008 | 31분 30초 | Digi-Beta | Color | Fiction
고등학생 태준과 범석은 또래 사이에선 나름 군림하는 아이들. 태준은 왕따 진욱의 연을 부순 후, 미안한 마음에 함께 연을 고치며 가까워진다. 그러나 태준이 왕따와 친해지는 것이 못마땅한 범석은 태준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감독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인 군대에서 시나리오를 완성해, 아웃사이더와 인사이더의 경계가 선명한 남자 고등학교에 풀어놓았다. 영화는 뚜렷이 나눌 수 없는 인간의 양면성을 두 명의 주인공을 통해 보여준다. 누구보다 강한 의지가 있는 왕따와 연을 쫓는 순수를 가진 불량소년이란 정형화되지 않은 캐릭터의 만남은 성장영화의 관습조차 신선하게 만든다. 이런 이중성은 범석의 이유 있는 왕따 혐오에서도 드러난다. 비밀에 싸인 그 이유는 관객의 상상력에 맡겨놓았다. 당신의 이유, 당신의 선택을 찾아보시길. 박홍식 기자
<인생의 취미>
장경순 | 2008 | 14분 52초 | 35㎜ | Color | Fiction
이원은 와인광이다. 고상한 취미의 그는 박사지만, 교수 사회에선 실패한 정치가이며 사모하는 소믈리에에겐 귀찮은 남자일 뿐이다. 교수 임용에서 후배에게 밀리고 여자에게마저 외면당하던 날, 그의 눈에 비친 것은 퇴짜 맞은 논문도, 자신을 내친 지도교수의 싸늘한 표정도 아닌, 원로교수 연구실 한편에 놓인 국내에 여섯 병밖에 없다는 전설의 와인 로마노 꽁티! 와인을 둘러싼 소심한 모험을 그린 <인생의 취미>는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미국산 공장 와인이 1등에 당선됐던 실화를 연상시킨다. 지식인들의 위선과 현학을 비꼬지만 풍자극으로만 정의할 수 없는 기묘한 엔딩과 의외의 선택이 기다린다. “풍자로 보이면 풍자가 아니”라는 감독의 말처럼 장르 관습에 길들여진 관객들의 허를 찌른다. 아기자기한 반전을 거듭하는 기민한 플롯의 변주에 짧은 러닝타임이 아깝게 느껴질 정도. 박홍식 기자
<네쌍둥이 자살>
강진아 | 2008 | 21분 8초 | HD | Color | Fiction
합창대회를 준비하는 네 명의 여고생이 옥상에 모인다. 제각각인 성격과 신통치 못한 실력 탓에 아옹다옹하는 소녀들. 그때 난데없이 파란 추리닝을 입은 남자가 불쑥 나타나 소리를 지르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뛰어가며 소녀들의 합창을 훼방한다. 뿔난 여고생들, 남자의 정체를 알고 화들짝 놀란다. “타인의 행동에 인색하지만 자신에겐 너그러운 사람들의 마음을 풍자하고 싶었다”는 감독은 수수께끼 같은 전반부를 ‘그것이 알고 싶다’ 풍의 사회 고발 프로그램으로 변주하며 끝낸다. “여러 가지 생각을 가지고 사건을 배치했지만 영화 자체를 재밌게 봐줬으면 한다”는 감독의 말처럼 주제 못지않게 엉뚱한 발상과 유머가 즐겁다. 사건을 재구성하고 관객을 시험하는 도발적인 형식을 두 개의 낯선 서사 안에 녹여낸 분방함이 돋보인다. 유주하 기자
<철탑: 2008년 2월 25일 박현상씨>
변해원 | 2008 | 14분 | DV | Color | Documentary
남자는 두 달째 철탑에서 살고 있다. 음식은 도르래 밧줄을 타고 전달된다. 철탑 바로 아래에서는 동료들이 카바이드로 불을 지피고 투쟁에 한창이다. 남자는 교통 관제탑에서 홀로 고공농성 중이다. <철탑: 2008년 2월 25일 박현상씨>는 GM 대우 부평공장에서 일하다 하청업체 폐업을 이유로 해고당한 노동자들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사람 할 짓 못 된다고 말하면서도 내려가지 않는, 내려갈 수 없는 남자에게 차가운 현실을 반영하듯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카메라는 철탑 속 남자와 땅 위의 동료들, 교통이 혼잡한 서울 시내를 번갈아 오간다. “다들 경제를 살리자고 말하지만 그 전에 사람부터 먼저 살렸으면 좋겠다”는 대사가 절실하게 다가온다. 서남영 기자
<125 전승철>
박정범 | 2008 | 20분 51초 | HD | Color | Fiction
하나원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된 탈북자 전승철은 담당 형사의 소개로 면접을 준비한다. 면도를 하고 양복을 입고 눈썹을 가리는 앞머리를 손수 잘라보지만 거울 속 승철의 표정은 어둡다. 담당 형사를 따라가 면접을 본 공장에서는 월급 40만 원에 중국 출장을 제의하지만 그나마 비자가 나오지 않는 탈북자로선 할 수 없는 일이다. 125라는 숫자는 하나원이 위치한 안성 지역에서 받을 수밖에 없는 주민번호 뒷부분의 세 자리 숫자로 귀순자들에게는 낙인 아닌 낙인이 된다. 전승철 씨는 실존했던 탈북자였으며 이 영화의 주연을 맡으려고 했으나 위암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2001년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에서 <사경을 헤매다>로 대상을 차지했던 감독은 “행복한 삶을 찾아 목숨을 걸고 남한에 내려온 탈북자들이 자본주의의 무게에 짓눌려 극빈층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아이러니한 현실을 보여주고자” 연출을 결심했다. 유주하 기자
<너의 세계>
서재경 | 2008 | 13분 | HD | Color | Fiction
‘달리기’를 통해 존재 의미를 찾는 인물을 다루는 영화. 육상대회에 출전한 소녀는 경기장 트랙을 벗어나 도로를 달리고 들판을 달려 땅의 끝, 바다에 도착하지만 사실은 달리는 도중 경기장에서 쓰러져 혼수상태이다. 무의식의 세계에서도 소녀는 계속 달려 바다 속을 떠돈다. 무한히 전진하고자 하는 욕구 앞에 객관적인 잣대는 무기력해지고 꿈과 현실의 경계마저 모호해진다. 의사는 코치에게 그녀가 깨어나도 다시 달릴 수 없을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녀는 어느덧 바다에서 나와 돌아오고 있는 중이며 이제 소녀 앞에는 스스로 부여한 선택의 순간이 기다리고 있다. 삶이 고통스럽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으나, 삶의 정직한 증거로써 고통을 긍정하게 만드는 영화다. 서남영 기자
<동결>
정미나 | 2008 | 28분 36초 | Digi-Beta | B&W | Fiction
가뜩이나 불경기에 겨울을 만나 더욱 까칠해진 커플의 이야기다. “겨울에는 별로 행복한 적이 없었어”라는 대사처럼, 겨울은 주인공 지나에게 힘든 시간이다. 수업에서 같은 조를 이룬 학생은 지나를 밤에 불러내 억지로 연습시키고, 항상 어딘가로 떠나자고 하는 남자친구는 지나의 돈으로 중고차를 사더니, 결국 지나의 친구를 좋아하게 됐다고 고백한다.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아이스크림 가게 일은 손목이 아파 도저히 할 수가 없다. 카메라는 소소한 일상을 비교적 담담하게 담아내지만 큰 사건 없이도 그들의 하루가 힘겹게 느껴지는 이유는 겨울만이 갖고 있는 특유의 분위기 탓이다. “컬러는 겨울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단 하에 선택된 흑백 화면이 계절감을 확 살려내고 있다. 서남영 기자
<본보야지 월드투어 2008>
조민석 | 2008 | 19분 | Digi-Beta | Color | Fiction
<본보야지 월드투어 2008>은 어느 동네에나 한 명쯤 있을 법한 ‘바보’ 기준 씨의 영어 발음 연습을 ‘인간극장’ 풍의 TV 다큐물로 꾸며 소개한다. 영화는 기준 씨가 색연필과 크레파스 따위로 지도 위에 꼼꼼하게 계획해둔 세계 여행을 따라가는데, 콜라주 기법을 바탕으로 만화적 상상력과 효과음을 더한 이 판타스틱한 여행은 사실 기준 씨가 살고 있는 이죽동 근처를 맴도는 상상 여행이다. 동네 녹차밭이 스리랑카의 계단식 경작지, 담배 비닐하우스는 쿠바 담배농장이 되는 식인데 기준 씨가 수집한 엽서에 그려진 세계 각지의 사진과 이죽동 근처의 전경을 교차편집해 발랄하게 화면을 꾸몄다. 스탭들의 모습에 곁들여 여행과 관련된 티켓, 입장권 등을 망라해 보여주는 엔딩 크레딧까지 공들인 가내 수공업식 특수효과가 그득하다. 유주하 기자
<도시에서 그녀가 피할 수 없는 것들>
박지연 | 2008 | 12분 45초 | Digi-Beta | Color | Animation
집 한 채가 크레인에 걸려 바람에 흔들린다. 여자가 살고 있고 그녀를 방문하는 고양이까지 있다. <도시에서 그녀가 피할 수 없는 것들>(이하 <도시에서>)은 라우엔스타인의 1989년 아카데미 수상작 와 닮은 듯 다르다. 가 좁은 판 위에서 아귀다툼을 하다 판 자체가 뒤집어지며 공멸한 군상들의 초상이라면, <도시에서>는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집으로 찾아오는 전 애인의 횡포에 저항하는 여자의 독백이다. 박지연 감독은 자신이 상경한 후 도시에 정착하지 못해 느꼈던 불안을 공중에 걸린 집에 가둬 표현한다. 집을 늘 기울게 만드는 남자를 늑대나 개가 아닌 고양이로 묘사한 점 또한 필요에 의해서만 사람을 찾는 고양이의 속성을 잘 포착한 연출. 독특한 잔혹동화 취향이라면, 여지없이 추천한다. 박홍식 기자
온라인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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