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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44:20-30
찬송가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예레미야 42장에서 유다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찾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며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이든 순종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애굽으로 피난을 가려는 백성들을 막아서며 애굽으로 가지 말고 유다 땅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의 경고를 듣고도 유다 백성들은 그 말을 무시하고 거부하며 애굽 땅으로 내려갑니다. 오늘 본문인 예레미야 44장은 애굽 땅에서 우상숭배에 다시 빠진 사람들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평화와 풍요, 그리고 결핍과 고난이 있을 때(20-30절)
(20-21) 예레미야가 남녀 모든 무리 곧 이 말로 대답하는 모든 백성에게 일러 이르되 너희가 너희 선조와 너희 왕들과 고관들과 유다 땅 백성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분향한 일을 여호와께서 기억하셨고 그의 마음에 떠오른 것이 아닌가
애굽 땅에서 유다 백성들은 평안을 찾습니다. 애굽 땅에선 바벨론 군대의 말발굽 소리도, 예루살렘의 통곡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애굽이 세워둔 거대한 성벽과 나일강의 풍요, 풍부한 무역과 경제, 지중해 용병들의 강력한 무력이 유다 백성들을 철통같이 지켜주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애굽 땅까지 피난을 온 사람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고, 애굽으로 도망쳐 온 것이 얼마나 잘했는지, 빵이 있고, 안전이 있고, 평화가 있다고 확신합니다.
우리를 숨 막히게 하는 고난을 피하고, 평화와 풍요를 찾아 살아가는 성도의 삶은 절박하고 중요한 현실의 과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깊이 공감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문제는 고난을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의지하는가입니다. 눈앞의 고난을 피하겠다는 명목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애굽으로 도피하는 선택은 잠깐의 고난을 피하려다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평화와 풍요가 나쁜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없이 누리는 평화는 거짓 평화입니다. 하나님 없이 세상의 타협으로 얻은 안락함은 우리 영혼을 기둥부터 썩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과자를 바치던 일을 멈추었기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칼과 기근에 시달렸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착각입니다. 21절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 거리에서 분향한 일을 "기억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는 유다 백성들을 핑계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고난 앞에서, 우리도 유다 백성들과 같은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사업이 힘들어지고, 일상의 바쁨이 우리에게 시간이 없다고 재촉할 때, 우리 영혼의 부패를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 없이 누리는 평화를 향해 달려갑니다. 세상의 우상과 돈을 향해 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께 향하지 않는 우리의 삶을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모든 동기를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로 더 이상 하나님을 찾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유다 백성들을 향해 다시 말씀하십니다.
(22-23) 여호와께서 너희 악행과 가증한 행위를 더 참을 수 없으셨으므로 너희 땅이 오늘과 같이 황폐하며 놀램과 저줏거리가 되어 주민이 없게 되었나니 너희가 분향하여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며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율법과 법규와 여러 증거대로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재난이 오늘과 같이 너희에게 일어났느니라
22절에서 하나님은 '더 참을 수 없으셨'다고 합니다. 참을 수 없다고 하시는 하나님은, 더 이상 인내할 수 없고, 하나님의 참을성이 바닥났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참다'는 히브리어 동사는 감정적인 억제를 의미하는 것만 아니라 '용서하다' '감싸 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더 참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시점은, 백성들이 악한 행위를 저지르는 실수를 할 때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망하고, 우상 숭배를 해야 살 수 있다면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정면으로 부정할 때였습니다. 22절은 하나님이 감정적으로 폭발하셔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 더 이상 죄를 용서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 유다 백성들을 향한 심판의 선언입니다.
23절에서 예레미야는 백성들의 죄목을 율법과 법규와 증거대로 행하지 않았다고 성경적인 용어를 총동원하여 고발합니다. 유다 백성의 범죄는 계명 한두 개를 어긴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과 맺은 언약 전체를 지속적으로, 또 조직적으로 어긴 것이었습니다. 유다의 멸망은 바벨론이라는 이방 제국이 군사적으로 우월했기 때문도 아니고, 백성들의 주장처럼 하늘의 여왕에게 제사를 멈췄기 때문도 아니고, 어차피 이루어지는 운명이나 우연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적하기로 작정한 유다 백성의 삶이 멸망의 한복판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결핍과 고난이 있을 때, 반대로 평화와 풍요가 있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고 의식하는 마음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이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따르지 않고 내 욕망대로 삶을 살아낸 불순종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 인생에 주어진 평화와 풍요가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고 세상을 의지한 불순종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삶의 상황과 환경이 어떠하든,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은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고 있는지,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는지를 확인하십시다. 오늘 우리의 마음을 점검하십시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고 의지하여 우리 삶이 하나님 안에서 살아나고 살아내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지켜보시는, 깨어 있는 하나님(24-27절)
(24-25) 예레미야가 다시 모든 백성과 모든 여인에게 말하되 애굽 땅에서 사는 모든 유다 사람이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와 너희 아내들이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이루려 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서원한 대로 반드시 이행하여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전제를 드리리라 하였은즉 너희 서원을 성취하며 너희 서원을 이행하라 하시느니라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애굽 땅으로 이끌고 간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남녀와 모든 여인, 그들의 아내들까지 남녀를 구별하지 않고 모든 백성을 지칭합니다. 구약성경은 주로 남성 가장들을 대상으로 잘못을 정죄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0절에서 '남녀 모든 무리'를 향해, 24절에서 '모든 여인에게', 25절에서 '너희 아내들'까지 이례적으로 남녀 구별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25절에서는 유다 백성들이 말했던 그들의 고백이 언급되는데, 백성들이 하늘의 여왕을 향해 자신들의 서원을 이행하고 분향하고 전제를 드리겠다고, 자신들의 종교적으로 다짐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은 예레미야 7장 18절에서 나오는 자식들은 나무를 줍고, 아버지는 불을 피우고, 여자들은 가루를 반죽하여 과자를 만들어 하늘의 여왕을 향해 제사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여왕을 향해 제사하는 것이 단순히 성전이나 성막, 제단에서 제사하는 것만이 아니라, 유다 사회의 가장 작은 가정까지도, 가정의 안방과 부엌까지도 함께 묶여 있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를 하는 것이 남자들만의 주도적인 종교행위가 아니라, 남녀를 구별하지 않은 가족 전체의 배교를 다시 언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가족 구성원이 다 같이 하늘의 여왕을 향해서 분향하고 전제를 드리겠다고, 잘못된 약속을 기어이 자신들의 힘으로 관철해 내겠노라 집요하게 고집하는 이 모습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너희가 그렇게 서원하면, 너희 서원대로 이행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백성들의 행위를 인정하거나 허락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고집하는 죄의 길을 아무런 제재 없이 그대로 가도록 내버려 두시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은 언제나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고, 고난과 멸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이 세상 끝날,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은 사람들을 사망의 구덩이로 인도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자신의 탐욕을 향해 나아갈 때, 하나님이 내리시는 또 다른 심판은 그 고집스러운 집착의 길을 끝까지 가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우리 욕심대로, 우리 고집대로 꺾이지 않고 세상에서 형통하게 이루어질 때, 어쩌면 그 순간이 주님께서 이 세상 속에 내버려 두시는 심판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벗어나, 신앙을 타협하면서 얻어낸 성공과 재정, 그 안락함은 우리를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히려 내 고집스러운 계획이 주님의 손에 의해 막히고 좌절되는 것이 나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은혜입니다.
(26-27) 그러므로 애굽 땅에서 사는 모든 유다 사람이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나의 큰 이름으로 맹세하였은즉 애굽 온 땅에 사는 유다 사람들의 입에서 다시는 내 이름을 부르며 주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는 자가 없으리라 보라 내가 깨어 있어 그들에게 재난을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니 애굽 땅에 있는 유다 모든 사람이 칼과 기근에 망하여 멸절되리라
26절에서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고 맹세하는 사람들이 없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백성의 입에서 지워진다는 것은 더 이상 모든 관계가 단절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모의 관계가 끊어지고, 왕과 백성의 관계가 끊어집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7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깨어 있어' 재난을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깨어 있겠다고 하시는 이 동사는 예레미야 1장에서 살구나무 가지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내가 지켜보겠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1장에서 하나님은 유다 백성의 구원을 위해 밤낮으로 '지켜보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셨는데, 이제 44장에서 하나님은 유다 백성의 심판을 '지켜보시는' 깨어 있는 하나님이 되십니다.
유다 백성들은 애굽으로 피난하여 애굽의 성벽이 자신들을 안전하게 숨겨줄 것이라 믿었지만, 세상의 요새 한복판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깨어 있는 시선은 그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삶에서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시선에서 벗어난 삶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믿음 없는 사람들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세상의 지식과 능력, 돈과 직장, 이런 애굽의 요새를 의지하여 살아가는 그 모습을 하나님은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가도 하나님의 시선은 우리의 숨은 죄를 향해 깨어 계시고,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누구도 자신의 죄악을 핑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성취됩니다(28-30절)
하나님을 피하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피할 수 없습니다. 결국 누구의 말이 맞는지 확인하게 됩니다.
(28) 그런즉 칼을 피한 소수의 사람이 애굽 땅에서 나와 유다 땅으로 돌아오리니 애굽 땅에 들어가서 거기에 머물러 사는 유다의 모든 남은 자가 내 말과 그들의 말 가운데서 누구의 말이 진리인지 알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결국 성취되고 세워집니다. 28절에서 하나님은 '누구의 말이 진리인지 알리라'라고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의 말, '애굽으로 도망쳐 우상을 섬겨야 산다'는 말 중에 결국 어떤 말이 역사 속에 성취되는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의 모습에선 애굽 땅에서 사는 것이 평화와 번영, 풍요를 보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과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이 지나갈 때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만이 남게 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히 서게 됩니다. 사람이 의지하는 그 어떤 것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한순간에 사라지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땅에 떨어지지 않고 성취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의 성취를 예언하며 성취될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표징을 제시하십니다.
(29-3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이 곳에서 너희를 벌할 표징이 이것이라 내가 너희에게 재난을 내리리라 한 말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그것으로 알게 하리라 보라 내가 유다의 시드기야 왕을 그의 원수 곧 그의 생명을 찾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손에 넘긴 것 같이 애굽의 바로 호브라 왕을 그의 원수들 곧 그의 생명을 찾는 자들의 손에 넘겨 주리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 대신에 선택했던 애굽의 바로 호브라 왕이 몰락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바로 호브라 왕은 당시 막강한 군사력과 풍요를 자랑하며 '신조차도 내 왕위를 흔들 수 없다'고 자만했던 왕이었습니다. 애굽으로 도피한 유다 백성들에게 호브라 왕의 막강한 군사력과 애굽의 웅장함은 마음속에 안도감을 허락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유다의 시드기야 왕을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긴 것 같이, 너희가 신처럼 의지하는 바로 호브라 왕도 그의 원수들의 손에 넘겨 주겠다'고 하십니다. 역사 속에서 바로 호브라는 자신의 신하와 반란군에 의해 생포되어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고, 애굽은 바벨론의 침공 앞에 흔들렸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선택했던 세상의 힘이 하나님의 손가락 하나에 허망하게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애굽 땅으로 도망친 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경험하고도 '우상을 섬기지 않아서 망했다'는 생각을 가졌고, 애굽 땅에서 누리게 된 평화와 풍요는 하나님 없는 삶을 더욱 누리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위험을 앞둔 자리에서만 아니라, 삶의 상황과 환경, 가정 깊숙이 모든 곳에서 우상숭배를 지켜 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지켜 보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오늘 우리의 두려움을 질문하고 오늘 우리의 감사를 주님 앞에 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보시고, 주님의 손이 항상 나의 도움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주님 아닌 것에 우리의 삶을 의탁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시고, 우리의 고집스러운 모습을 내버려 두실 것입니다.
결핍과 고난의 삶을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리고, 하나님 아닌 곳에서 평화와 풍요를 찾는 유다 백성들은 결국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가 단절됩니다. 세상의 영광은 덧없이 스러져가고 하나님의 말씀만이 성취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인생에 결핍과 고난이 찾아올 때 우리 슬픔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지 마십시다. 반대로, 우리 삶에 평화와 풍요도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서 찾지 마십시다. 우리에게 주어진 결핍과 고난, 평화와 풍요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의식하십시다. 우리 눈에 보기 좋은 것을 선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것을 선택하십시다.
오늘 우리의 선택이 애굽으로 도망친 유다 백성처럼 세상의 물질과 능력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의지하고자 하는 우상의 신을 벗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우리의 도움의 손이 되어 주시고, 하나님의 강한 손과 편 팔이 오늘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는 애굽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살아내는 성도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결핍과 고난이 찾아올 때는 그 슬픔의 원인을 주님께 돌리고, 평화와 풍요가 주어질 때는 그 근원을 주님 아닌 다른 곳에서 찾으며 거짓 평화를 참 평안으로 착각하며 살아왔던 우리의 죄를 고백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등지고 세상의 힘을 의지하여 걸어가는 그 길까지도 하나님은 낱낱이 기억하시고 지켜보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의지하고자 했던 우상의 신을 벗기를 간절히 구하오니, 우리 손에 성령의 검 곧 주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게 하여 주시옵소서. 칼과 기근 같은 현실 앞에서도 주님의 살아 계심을 두려워하며 오직 주님의 강한 손과 편 팔을 의지하고, 주님의 말씀만을 우리 삶의 반석으로 삼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눈에 보기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것을 선택하게 하시고, 오늘 우리 삶이 결핍과 고난의 자리이던지 평화와 풍요의 자리이던지 늘 깨어 주님을 의식하며 살아가기를 결단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리시고 지켜보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유다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발견했던 평화와 풍요처럼, 지금 내 삶에서 하나님보다 든든하게 느끼는 나만의 '애굽'과 붙잡고 있는 '하늘의 여왕'은 무엇입니까?
2. 하나님 아닌 것에 드린 서원과 다짐이, 나의 가족과 일상 속에 고집스럽게 붙들고 지키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3. 나를 깨어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시선 앞에서, 오늘 하루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갈 나의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작성: 송주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