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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자르기
김 병 총
능선을 타고 네번째의 계곡을 건너자, 곧 수풀이다.
반딧불 세 개가 눈앞에서 일렁거리더니, 약속처럼 꼭같이 풀더미 속으로 스며간다. 벌레들이 어우러져 울고 있다.
건너온 구릉 쪽에서 워렁워렁 토해내는 폭포소리가 그의 덜미에서 차츰차츰 가늘어진다. 벌레소리는 그나마 그것들을 한없이 잡아먹어간다.
바람이 갑자기 산속의 냉기를 밀고 나온다. 허리께까지 자란 풀잎들이 곱게 드러눕는다. 잠시 벌레는 숨을 죽이고, 무슨 낌새를 챈 그는 재빨리 몇걸음 앞의 바위 위로 훌쩍 날아가서 가볍게 내려선다. 옷자락이 나래처럼 펼쳐지더니 사뿐 접힌다.
그의 눈은 어둠속으로 꿰뚫어간다. 갈 지(之) 자로 찢는 번개의 빠름새로 눈길이 닿는 곳에서 떡갈나무 잎새가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본다. 댓발치 앞이다. 발걸음을 잠시나마 멈추게 만든 장애물을 그는 용서 않기로 한다.
찰나에 칼빛은 왼쪽 허리로부터 빠져나가 어둠을 파랗게 베어버린다. 칠흑(漆黑)의 틈으로 영겁(永劫)이 건너뛰는 바람이 작은 달무리를 잠깐 남긴다. 물체는 두 동강으로 투둑 어김없이 공중을 튀어, 더미 속으로 내려앉는다.
“독사로군.”
그는 중얼거리고 나서, 다시 바쁘게 수림 사이로 든다. 바람이 귓바퀴에서 워워 맴돈다. 한사코 공기를 잘라 등성이를 지쳐오른다.
빽빽한 수림 속의 주위는 몹시 암담하다. 공중을 쓸던 영롱한 별들은 겹겹으로 쌓아붙은 잎사귀들 뒤로 숨는다. 그는 축지(縮也)의 행마로 날며 더욱 속력을 낸다. 운신(運身)을 늦굴 이유가 없다. 그의 눈은 어둠일수록 더욱 보석으로 밝아져서 어떤 길도 거리낌이 없다. 그는 바투 다가온 왕바위의 좁은 틈새로 쉽사리 빠져나간다.
오래전에 그는 여기서 거대한 수펌의 목을 베었다. 어둠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기 전이어서, 느닷없이 덮쳐오는 물체의 압박만 가늠하면서 놈을 순간에 단칼로 쳤다. 흔들림 없이 꼿꼿이 서서, 적이 돌진하여 지척으로 와 닿기 전에 간발을 선수(先手)하여 요절내었다. 어깨를 통해 심장으로 감지되던 서릿발같이 차가운 쾌감.
문득 바위 뒤루부터 몇점의 횃블들이 확 달겨들었다. 사문(師門)의 형제들이 불빛에 흔들렸다. 그들 사이로 사부(師父)께서 천천히 걸어와서, 그를 대해 섰다.
“넨 줄 알았다.”
횃불속에 박힌 맥랍색의 염하게 굳어진 얼굴.
“방금 돌아오는 길입니다.”
황홀한 기분에서 깨며, 그는 황급히 납 (納劍)한 뒤 허리를 굽혔다.
“맡긴 일은?”
“무사히 전달했읍니다. 별다른 장애는 없었읍니다.”
“수고했다. 자세한 건 나중에 듣자.”
웬지 사후의 태도는 싸늘했다. 어려운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온 데에도 별로 달가와하는 바가 아니어서 그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무언가를 경계하여 쏘아오는 눈길을 그는 피할 밖에 없었다. 유 자광(柳子光) 대감에게 사부의 서찰을 비밀하게 전하고 온 것뿐이었다. 그러한데 그는 사부로부터 버림받기 시작한다는 기미를 보았다. 그것은 배신의 아픔으로 아로새겨졌다.
사이에, 사부는 나뒹굴어진 범의 몸뚱이를 찬찬히 살피고 있었다.
“숨결을 남겨두었군!”
꾸짖는 목소리 였다.
“그럴 리가!”
그는 실색했다. 분명히 멈의 숨결을 결딴내었노라 기억 되었다.
그는 허리를 구부려 범의 목덜미와 가슴을 황급히 되살폈다. 피범벅이 된 뱃가죽이 가늘게 들먹거렸다.
“기술이 멀었다는 증좌다. 비켜서서 쳤느냐?”
“곧장 서서 은림세(隱林勢)로 요격했읍니다.”
“그 때문이다. 간발의 틈을 주고, 발검(拔劍)에서 요략세(捺掠勢)로 향해 갔음이 옳았다.”
“준좌격협 (樽坐擊脅) 의 술(術)을 말씀하시는지요?”
“용검(用劍)의 요령이다. 적강(敵强)일 때 이쪽은 허실(虛實)의 틈을 보여줘라. 격(激)한 적을 유(柔)로 물리침이라. 강하게 성급히 맞서면 기(氣)가 흔들리는 법.”
“기억 하겠읍니다.”
“교만한 생각 때문이었다. 범 울대의 깊이도 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잘못입니다.”
“숨결이 남은 한, 한 방울의 피도 퉁겨난 일이 없다 해서 자랑스러울 일이 못된다.”
그는 대꾸를 못했다. 다시 사부의 싸늘한 눈길이 불빛을 뚫고 쏘아왔다. 그는 모골이 송연했다.
“검술이란 무언가?”
“극기(克己)의 도(道)라 알고 있읍니다.”
“상대를 벨 땐?”
“미물일지라도 목숨을 완전히 끊어주라 이르셨읍니다.”
“왜 그러한가?”
“도의, 근본이 어짐〔仁)이기 때문입니다.”
“알면서도 너는 잘못했구나.”
“깨달음이 부족한 탓입니다.”
“연마를 게을리했다.”
벌써 여섯 해 전의 일이다. 산채를 떠난 지 지금 그는 다섯 해 만에 다시 돌아온다.
청년은 비천(飛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운다. 출신을 몰라 성(姓)씨를 가지지 못했다.
산채의 사정장(射亭長)으로 있는 소야용(巢野翁)은 비천이 열네 살이 되었을 때 그들이 산채로 들게 된 내력을 말해주었다.
――북한강 하류였지. 잉어를 잡으러 나섰다가 우연히 널 발견했어. 모래밭 상자 속에서 강보(襁褓)에 싸인 채 넌 잠들어 있었단다. 골격을 눈여겨봤더니 무인(武人)으로서 대성할 것 같앴어. 산채로 들어 사부께 자넬 부탁했지. 하지만, 거들떠도 보지 않고 내게 묻더군.
“임자는 무어 아는 게 있는가?”
“궁시(弓矢)를 조금 볼 줄 압니다만, 비천한 재주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걸 쏘아 맞히게.”
사부는 백보 거리의 나무 위에 앉은 참새를 대뜸 가리키며 내게 명하더군. 나는 참새의 목을 과녁으로 하여 살을 적중시켜 떨어뜨렸지.
“과연 대궁인(大弓人)이로다!”
사부는 감탄해 마지않았지. 대궁인이 무슨 뜻인지 아나? 태조대왕의 명궁도 그려하였지만, 중국인이 아국(我國)의 뛰어난 궁술을 시기하여 이(夷)라 했는데, 더우기 우리더러 동이(東夷)라 불렀지. 이를 풀어쓰면 동쪽의 활 잘 쏘는 사람(大弓人) 일세.
만일 내가 그 시험에 실패했더라면 오늘의 네가 있을 수가 없지. 비로소 너를 산채에서 기를 수 있도록 허라을 받아낸 거니까.
“작금에 사정(射亭)의 우두머리로 명한다. 사문(師門)의 형제들을 가르치게.”
그리하여 나는 사정 장(長)이 됐네,
어느덧 자네의 뛰어난 재질이 사부의 눈에 들기 시작했네. 그럴수록 무례하지 않도록 조심하게. 검술은 이미 사부와 버금하게 됐네. 곧 수제(首弟)의 명예가 내릴 걸세. 더욱 충성심을 보여야 하네. 때가 오면 자네는 성(姓)씨를 찾게 될 걸세. 그날까지는 아예 무과(武科)에 응시할 수도 없으니, 부지런히 무도(武道)에만 정진하세.
비천이 느끼기로는 양부(養父) 소야의 얘기속에 으스스한 어떤 비밀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았다. 출생부터가 석연찮은 무엇이 있었고, 소야옹이 궁술 외의 그 어떤 것도 감추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의심은 더욱 굳어졌다. 그러나 비천의 질문에 그는 더 대답하지 않았고, 말대로 소야옹은 활만 만지고 지냈다.
다만 그는 사부 백수(白首)의 과거를 덧붙여서 간단히 일러주었다.
一―사부는 특히 검술에 있어서 박 원종(朴元宗) 대감과 쌍벽이었지. 함께 검문(檢門)에 들어 배웠고, 뒤에 박 대감은 무관직 (武官職)에 기용되었다가 반정(反正)을 주동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일등이 된 걸세. 때맞춰 산채의 전 사부 정 대인(鄭大人) 께서는 정체불명 의 괴한들에게 자살(刺殺) 됨으로써 멸문되었지. 후에 산채로 돌아온 백수가 새 검문을 열어 사부가 되셨단다.
비천이 알고 있는 산채의 비밀은 이것뿐이었다. 그외의 것은 소야옹도 말하지 않았다. 간혹 그가 사부의 서간을 품에 넣고 유 자광 대감의 저택으로 밀파되곤 했는데, 어떤 내용들이 건네지는 것이며 왜 그런 짓거리가 필요한 것인지도 비천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런 의혹 중에서도 비천의 무술은 일취월장했다. 도제(徒弟) 가운데서도 단연 빛났다. 그리하여 스물이 채 못되어 수제(首弟)가 되며, 사문의 비술(秘術)을 혼자 전수받았다.
비천이 사정으로 나가 도제들과 궁술을 교사받고 있었다. 교범 소야옹이 소리쳤다.
“우선 자세부터다. 정준(正準)의 집중은 좋은 자세에서 나온다. 현(弦)을 내인(內引)함에는 근육을 퍼서 어깨힘을 다하여 탄력이 극도에 달하도록 하고, 심기(心)를 옹객침중(雍客沈重)케 하여 때를 기다려 발사한다. 발사!”
소야용이 비천의 옆으로 다가왔다. 시위를 당길 것을 포기한 자세로 비천은 소야의 얼굴을 뜨악하게 바라보았다.
“어인 일이옵니까? 새삼스럽게 사술의 기본을 다시 강습하심은?”
“일이 그렇게 됐다. 연마가 끝나거든 조용히 내 방으로 오라. 오늘밤 안으로 와야 한다.”
“알겠읍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소야용의 얼굴은 비장한 무엇을 담고 있었다.
비천은 사부에게로 먼저 불리어갔다. 그도 느닷없는 밀명이었다.
“오늘밤 안으로 떠나라. 도착하거든 은밀하게, 지체없이 이걸 전해라.”
산채를 내리기에 앞서 가만히 소야옹께 인사를 하러 갔다. 노인의 신색은 역시 많이 지쳐 보였고, 그는 걱정스런 눈으로 비천을 살피며 말했다.
“역시 몸조심을 해 야겠구나.”
“소자는 걱정 없읍니다. 양부(養父)께서나 항상 무고하시기만 바랄 뿐입니다.”
“그런 일이 아니다. 때가 이르렀나보다.”
“무슨 뜻이온지요?”
“이번에는 네가 당분간 산채로 못 돌아올 길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조심해라. 결코 목숨을 헛되이해서도 아니된다.”
“무슨 말씀이온지 짐작도 못하겠읍니다. 다만 저는 지금 사부님의 명령을 받고 유 대감 댁으로 서찰을 전하러 갈 뿐이옵니다.”
“벌써 알고 있다.”
소야용은 주위를 살피고 나서, 품속으로부터 서찰 한 봉을 꺼내었다.
“만일 일이 생기거든 구월산 이각(怡覺) 스님을 찾아뵈어라. 그리고 이걸 전해라. 아마 이번에는 너를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
“다시 말하거니와 목숨을 가벼이 말라. 알겠느냐. 언젠가 말했었지. 너는 성씨를 되찾아야 한다고. 어쩌면 이각한테서 네 출생 비밀의 얼마간은 듣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결코 목숨을 스스로 결단내서는 아니된다.”
더욱 모를 소리뿐이었다. 한없이 미심쩍어져서 머엉히 서 있을 때, 소야는 결연히 명하였다.
“길이 멀다. 어서 가보아라.”
“제 출생에 관한 비밀이라면, 알으켜주십시오.”
소야용은 돌아앉은 채 이미 대꾸가 없었다. 비천은 물러나올 밖에 없었다. 양부의 서찰을 품에 넣고는 인사했다.
“소자 돌아올 때까지 편안히 계십시오.”
유 자광의 사랑채에서 비천이 사흘째 묵고 있었다. 전에 없이 그는 은밀하게 불리어갔다.
“글을 아느냐?”
쏘아보는 유 자광의 작은 눈이 독기를 담고 있었다.
“아옵니다.”
“이 서찰을 보여줄까?”
그는 소름끼치게 웃었다.
“무엇이옵니까?”
“우선 거래해둘 일이 있구나.”
“거래라는 말씀은…….”
“네 칼은 얼마나 무서우냐?”
“예에?”
“백수를 벨 수 있겠느냐?”
“제 검문의 사부님이십니다. 감히…….”
“베지 않겠단 말인가?”
“죽임을 당할지언정 사부님께 칼을 뺄 수는 없읍니다. 검문의 도(道)이오며, 사문의 계율입니다.”
“사문의 계율?”
“그렇습니다.”
“그건 바로 백수의 계율 아닌가?”
“분명하옵니다.”
“널 베랬다!”
유 자광은 화난 듯이 보료 위에다 서찰을 던졌다.
“베십시오. 사부님의 뜻이라면.”
“그러니까 거래를 트자 이르지 않았느냐.”
“무문(武門)에 거래는 없읍니다.”
“군사부(君師父) 일체이나, 네겐 부모가 우선하였다.”
“그 말씀은…….”
“백수는 네 부모를 죽인 원수이니라. 몰랐느냐.”
“예에?”
“원수를 갚지 않으면 효(孝)가 아니다.”
“심히 놀리시지 마십시오.”
“너는 멸문한 정 대인의 막내아들이다. 명심하여라. 사부를 척살한 백수를 네가 척살한대서 이치에 어긋나진 않으리라. 부모와 형제를 죽인 네 원수, 그 아들이 그를 벰은 마땅한 효가 아니겠는가.”
“어찌하여 저를 살리시고 사부를 베도록 이 엄청난 비밀을 알려주십니까? 괴롭습니 다.”
“순리(順理)를 지키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나는 백수가 이미 필요없어졌다. 그간에 정의(情誼)를 유지해왔지만, 그는 항시 위험한 인간이었다. 가서 베어버려라. 네 칼을 겁내고 있다. 네 출생 비밀을 감지했을 때 그는 탄식했을 게다. 이미 너는 사부의 검술을 능가해버렸거든.
“사부는 애초 저를 거두셨는데, 왜 이제는 버리시논 겁니까?”
“말하지 않았는가. 너와 그 사정창이라는 노인의 정체를 이제사 깨달았다는
거다.”
“그렇다면 양부의 안존도 위태로운 것입니까?”
“그럴 수밖에. 이 서신을 읽어라. 자세히 전말이 적혔다. 노인은 궁술 외에도 모든 무술에 뛰어난다구나. 그와 너의 정체를 숨기느라고 궁술 외엔 쓰질 않았단다.”
“좋습니다. 가서 사부를 베겠읍니다.”
“가만히 베어와야 한다. 성공하면 네게 천금을 내리겠다.”
비천은 거기서 물러나왔다. 그러나 금방 산채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원수의 칼은 아직도 무섭게 살아 있다. 사문의 형제들도 이미 비천이 배신자로서 파문되었음을 알고 있을 터였다. 양부의 목숨도 위태롭지만, 사부가 유 자광을 의심했다면 비천이 살아서 돌아올 경우에 대비하여 소야옹을 인질로 살려두었음이 필시였다. 오히려 서둘지 않음으로써 양부를 안존케 함이라고 비천은 믿었다.
이제는 비천이 갈 곳은 구월산뿐이었다.
소야의 서찰을 받아든 이각의 눈에서는 눈물이 방울로 맺혔다. 이상한 눈물이었다. 대오각성한 스님이라면 눈물이 없는 법. 그렇다면 이 눈물의 뜻은 무엇일까. 비천은 알 길이 없었다.
이각 스님은 복면을 하고 있었다. 때문에 비천은 그. 새로운 스승의 얼굴을 영영 볼 수 없었다. 그것은 비천이 다섯 해 통안 이각에게서 여러 비술을 배우고 떠날 때까지 그러하였다.
그리고 이각의 검술은 사문의 술법으루서는 상상도 못할 고급한 것이었다.
“도통(道通)은 곧 신통(神通)이라. 신통은 속인의 신바람인 것이니, 무인(武人)의 그것과 무인(巫人)의 영험은 다를 바가 없느니라. 고로, 무사는 무당의 영력(靈力)부터 불러올 줄 알아야 한다. 어떻게 불러오는가. 우선 방위(方位)이다. 좋은 자리에 서서 옳은 자세를 유지함이라.”
비천이 특히 검술을 사사받을 떼마다 이각이 되풀이해서 기억되도록 해주었는데, 너무도 심오한 것이어서 처음에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그러나 3년이
지나고 있었을 떼 그는 차츰차츰 검술을 영력으로 포용할 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검의 술(術)을 넘어서 검의 도(道)의 경지로 가고 있다는 뜻이다.
이각은 다시 말하였다.
“무(巫)는 무엇인가. 하늘(一)과 땅(一)을 연결(ㅣ)하니 공(工)이 되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무인(巫人)이라 하였다. 공은 또 무엇인가. 공(工), 즉 공(空)이니 모자(宀)를 쓴 사람(人)이라. 모자를 씀이란 도(道)의 최고 경지란 뜻이다. 웬고 하니, 만물이 허망하여 빈것임을 깨달을 때 기실은 다른 가득함을 동반하니, 곧 열반(涅槃)과 해탈(解脫)의 경지라. 비로소 모든 번뇌로부터 자유로와지고 네 칼도 자유로울지니, 이때에 검도(劍道)의 명인(名人)임을 자부할 수 있을지라. 그리하여 모든 도법 (徒法)은 영(靈)이 있는 하늘과 육(肉)이 사는 땅을 잇는 사람이 서서, 공(工)으로 감이라. 공(工)은 공(空)이며 공(空)은 또 원(圓)이니, 항시 둥글게 공(工)의 선을 따라 걷는다.”
이것들은 이각이 터득한 도범으로서 택견과 창술과 검술에서 공히 사용되며, 그 운용함에 있어 진수(眞髓)를 비천은 빠짐없이 배웠던 것이다.
떠나는 날이 왔다. 비천은 다섯 해 동안 모든 무술에서 최고 경지로 이끌어 준 스승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이제 떠나겠읍니다.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대사님의 얼굴을 뵙게 해주십시오.”
이각은 대답 대신 옛날 비천이 소야의 서찰을 들고 처음 산속을 찾았을 때 보인 그 눈물을 반짝 빛내었다.
“대사님!”
“그렇지 않다. 속세와의 인연을 버린 나다. 때문에, 소야가 어린 너를 처음 안고 왔을 때도 나는 스승 되기를 거절했던 거다. 그만큼, 인세(人世)의 업(業)을 벗어난 몸. 그렇지만 어찌하랴. 동문(同門)의 정의(情誼)와 네 죽은 아비와의 인연은 끝내 벗어나지 못했구나. 자, 그냥 가거라. 나를 만나지 않은 걸로 하라. 정말, 소야의 간절한 부탁이 아니었다면 내 어이 이토록 무서운 응보(應報)를 허락했을 것인가! 아아, 이는 인업(因業)일 밖에! 나무관세음보살……”
비천이 수목을 벗어나오자, 동산의 달은 얼굴을 내밀고 있다. 요요한 사방은 파랗게 깔린 달빛으로 해서 몹시 처연하다.
가파른 계곡이 나타난다. 산채로 통하는 오솔길이 시작되고 있다. 뒤로는 억센 풀들이 덮인 편편한 언덕. 비천은 거기서 잠시 숨을 몰아쉰다. 산채의 불빚이 아득하게 깜박거린다.
어느 쪽으로 향해 방향을 잡을 것인가를 두고 잠시 망설인다. 그 순간이다. 등줄기를 타고 갑자기 전율의 냉기가 흐른다. 살기(殺氣)다. 사방에서 점점 가까와진다.
비천은 점잖게 소리친다.
“나서라!”
잠깐 사이에 수풀더미 속에서 구림자 다섯 개가 불쑥불쑥 솟아나온다. 그중의 한 자가 소리친다.
“누구냐? 허락 없이 산채로 든 자가.”
“허락이라니. 날 모르겠느냐?”
“엇! 비천 수제(首弟)님이시닷!”
“왜 놀라느냐?”
“돌아오시지 않흘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어째서?”
“그건…….”
“누가 그러더냐?”
“사부님의 말씀이 제셨읍니다.”
“사부님께선 그간 평안하시냐?”
“무고하십니다.”
“지금 어디 계시냐?”
“동굴 속으로 드신 지가 보름이나 됩니다. 심기(心氣)를 단련중이신 것 같습니다.”
“가서 뵙겠다.”
“안됩니다. 누구든 얼씬 말라 이르셨읍니다.”
“난 수제다.”
“그렇지만, 달리 분부는 없었읍니다.”
비천은 잠시 생각한다. 산채로부터 사라졌을 떼 사부는 어떤 판단을 했을까.
유 자광이 나를 없앤다는 약속을 지킨 걸로 생각했을까. 만일 살아서, 적으로 돌아올 경우를 대비해두었을까. 유 자광은 역적모의를 진행중이었고, 사부는 엄청난 옛 살해극을 저질렀는데, 그들 서로가 그 점을 서로의 약점으로 잡아 비밀한 맹약을 해둔 것을, 이것이 깨어졌음을 알고는 있을까. 그동안 사문의 규칙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위계는 얼마나 변했을까. 그리고 소야 양부의 안부는.
비천은 별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을 쭈욱 둘러본 뒤에 입을 연다.
“사문의 정다운 형제들이었다.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다. 모름지기 내게는 나의 일이 있는 법. 사부님을 뵙고 인사를 드러야 한다. 길을 열어라.”
“허락할 수 없읍니다.”
“나는 가겠다.”
비천은 몇 발짝 걸어나간다.
“서랏! ”
한 자가 소리친다. 그것을 신호로 다섯 도제 (徒弟)들이 동그랗게 울을 치더니, 칼을 빼든다.
“기어코?”
“사문의 법이니까!”
“도리 없군. 그대로 해보라.”
순간, 다섯 장정의 칼날이 비천을 향해 짓쳐든다. 동시에 비천의 칼이 먼저 둥근 달무리를 그려버린다. 네 덩이의 몸뚱이가 등걸 무너지듯 풀썩풀썩 자빠진다.
마지막, 앞의 장정은 비명을 지르며 칼을 떨군다.
“아아앗, 목숨만…….”
그자는 이미 몽달손목이다. 비천은 그의 목에다 날을 댄다.
“바른대로, 묻는 말에 답하라.”
꿇어앉은 그자는 고통에 얼굴이 찌그러져서, 시꺼먼 피를 손목에서 쏟아내고 있다.
“사부님의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돌하오지 않을 거라 말했다면서?”
“나중에는, 돌아오실지도 모른다는 주의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배신자의 얼굴로 나타나신다고 했읍니다.”
“내가?”
“깊은 사정이야 아무것도 모릅니다.”
“언제부터 날 기다렸는가?”
“이태 전, 그러니까 소야옹께서 돌아가신 날부텁니다.”
“돌아가셨다구?”
“목매 자살하셨읍니다.”
“아아, 다 틀렸다.”
“예에?”
“아니다. 왜 자살하셨는가?”
“수제님의 출생 비밀과 어떤 관계가 있었다는 정도 말고는 알지 못합니다.” “사부께서 그러셨냐? ”
“아니올시다. 저자의 입을 통해서입니다. 저자가 바로 수제님의 비밀을 샅샅이 캐고 다닌 책임자니까요. 제 말로는 달래 아가씨한테서 들었노라 그랬읍니다.”
비천은, 이미 영영 잠이 든, 곁에 누운 자의 얼굴을 잠시 쏘아본다. 사부의 딸 달래에게 몹시 추근거리던 자.
달래. 그녀는 어느 날 밤에 비천의 방으로 몰래 숨어든 적이 있다.
자정이 넘었을 시각에 비천은 그날의 수련을 모두 끝내고 있었다. 그는 구릉
의 폭포 옆에서 환청술(幻聽術)을 수련했다. 폭음속에서도 작은 기척을 드러내는 무술이었다. 내공(內功) 무술은 기(氣)가 맑지 못할 때는 듣지 못한다. 그러나 기가 흐트러져 있을 경우에도 기척을 잡아내려면 오랜 연마가 필요했고, 그 성과의 기틀은 단좌법(端坐法)에서 비롯된다. 비천이 적어도 환청술법에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갈 즈음이었다.
방으로 들어서기 전, 문득 방의 어둠속에서 사람이 누워 숨쉬고 있음을 깨달았다. 필시 그것은 여자였다. 살기를 엿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없었다.
우선 마음을 놓으면서 방문을 열었다. 봉창문의 틈새를 통해 흘러들어온 달빛에 누운 여자의 얼굴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달래였다.
“어떻게 왔어?”
“달빛이 참 좋지?”
부스스 일어나앉았다. 속옷차림이었다. 젖봉우리가 뽀오얗게 내비쳤다. 나래 접는 나비처럼 달빛이 그 위에 앉았다.
“밤이 늦었는데?”
“오빤 쫓아낼 생각만 해.”
“사부님께 야단맞는다.”
“몰래 온걸?”
“더욱 나쁘지.”
“비천 오빤 내가 싫어?”
“그렇지는 않다. 년 이쁜 처녀다.”
“오라비와 밤새껏 같이 있을래.”
“안돼.”
“난 가지 않을걸?”
“쫓아낼 테다.”
“맘대로 하렴.”
달래는 어느새 그녀가 펴논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버렸다. 도화색 뺨과 이슬을 담은 듯한 촉촉한 눈빛이, 특이하게 음성(淫牲)이 강해뵈는 여자. 요요한 사방과 이슥한 때와, 무엇보다 고운 처녀의 향기로운 냄새가 그를 뒤흔들었다. 스무 살의 비천, 아래쪽이 팽팽하게 솟아났다. 그는 오래 머뭇거릴 수가 없게 되었다. 사문의 법은 남자 스무 살일 때 여자를 가까이 해도 좋다며 금법에서도 풀어주지 않았는가.
그러나 무사는 인종(忍從)의 덕 (德)부터 연마된다. 달래가 어떤 뜻으로 자리를 함께 하겠다는 건지, 아직 그 사실도 알 수 없지 않은가. 비천은 스스로의 욕정을 삽시에 죽여버렸다.
“일어나!”
이불을 걷어냈을 떼 비천은 깜짝 놀랐다. 그는 눈부신 듯 망연히 서서 달래의 발가벗은 몸을 내려다보았다. 달빛 한 줄기가 가리마를 가르며 젖가슴에서 음모쪽으로 달려내렸다.
“바보!”
“일어서라니까!”
“아빠의 명령이야!”
달래는 싸늘하게 되쏘았다. 이제까지의 정감(情感)이라곤 조금치도 없는, 하얀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그렇다. 이제 생각이 난 것이다. 기도(氣道)와 혈맥 (血脈)을 짚는 수련을 수없이 쌓아왔지만, 아직 여자의 것은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 사부는 그걸 연마하라는 건가. 아닐 것이다. 아니라면 무엇 때문일까. 달래가 스스로 욕정 때문에 찾아온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어떤 함정 일 수도 있다.
“뭘 겁내고 있어?”
여자는 담담히 말했고. 비천은 그녀의 눈 깊숙이를 쏘아보며 심기(心氣)를 읽었다. 그러나 알 수 없었다. 달래의 마음은 웬지 혼란스러울 뿐이지 그 정체를 자세히 내뵈지는 않았다.
“어서 가져.”
여자는 재촉했다.
“그렇다면.”
비천은 하나씩 옷을 벗기 시작했다. 사문의 율법에서 강간이 기다리는 것은 죽음이다. 다만 화간은 장려된다. 차라리 그것을 통하여 성(性)의 강인성을 무한히 탁마(琢磨)해야 한다. 그러나 여자에게 혈도를 찔려 몽롱한 쾌락감에 빠져들어도 무사로서는 수치다. 잘못하면 죽게도 된다. 적어도 달래 정도의 무예에 걸려서도 정기(精氣)를 몽땅 빼앗기지 말란 법이 없지 않는가. 그만큼 달래는 마성(魔性)의 혼령과 육체를 가진 여자로 소문이 나 있지 않았던가.
모험심이었다. 그리고 사문에서 내리는 모처럼의 시험을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여자를 굴복시킬 결심이다.
비천은 달래를 껴안았다. 그런 후 성기(性器)를 달구어진 칼처럼 세워 달래의 그것에다 쩔러넣었다. 그녀는 신음소리를 내었다.
일곱번째의 행위가 끝날 때까지 서로의 손가락 끝이 몸 구석구석의 급소 가까이로 수없이 오갔다. 가늠하는 척, 흑은 어루만졌으며 때때로 위협을 주었다. 그런 중에서도 그들의 몸뚱이들은 달구어질 대로 달구어졌다.
달래가 먼저 지친 듯했다. 덩달아 비천의 몸에서도 맥이 쑥 풀려 혼백이 달아나는 듯이 느껴졌다. 그럴 때 쾌감은 가시고 혼미한 잠이 엄습해왔다. 지루한 혼돈이었다. 비몽사몽인 듯 눈앞의 물체들이 가물거렸고, 그의 하체는 한없이 풀려버렸다.
一ㅡ내가 졌어!
속으로 탄식하며, 얼굴을 모로 제꼈을 때 달빛의 가느다란 빛발이 눈가로 스치며 지났다. 순간, 위험을 감지했다. 서둘러 운신하여 황급히 기를 모았다.
하체의 감각이 가만히 살아났다. 아직도 닿아 있는 그녀의 하체는 식어가는 듯했다. 그랬는데 갑자기 그녀의 허벅지가 경직되는가싶더니 후닥닥 몸을 뒤챘
를다. 동시였다. 그녀의 팔이 허공을 휘둘려 은색 무지개블 잡아왔다.
찰나에 비천은 달래의 배 위로부터 한 바퀴 굴러떨어진 다음 공중으로 수리처럼 떴다 내려앉으며 달래의 팔을 잡아비틀었다. 손목에서 비수가 힘없이 굴러떨어졌다.
“너였구나!”
비천은 신음처럼 내뱉었다. 달래는 다시 아까의 그 새하얀 웃음을 흘렸다.
“언놈이 시켰나?”
“시키긴.”
“나를 노린 건?”
“나를 범한 남자는 누구건 죽인다.”
“그럼!”
“그래, 맞았어. 모두 그렇게 죽어갔지. 하지만 비천 오빤 죽일 생각이 아니었어.”
벌써, 산채에서도 일곱 명의 정정한 사내들이 감쪽같이 죽어갔던 일이다. 해뜰 무렴이면 그들은 동편 계곡에서 벌거벗긴 채 한결 같은 위치에 칼을 맞고는 절명해 있었던 것이다.
살인자의 정체가 거론되었을 때, 사부는 한마디로 잘라버렸다.
“여자를 범한 놈일 게다. 우리 검문의 계율은 저렇다!”
비천은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절륜의 정력을 갖추는 수련을 했노라 자신하고 있었는데, 달래의 엄청난 음성을 감당하지 못하고 깜박 죽었던 게 아닌가. 수치스러웠다. 그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런 자세로 달래에게 물었다.
“왜?”
“나를 이겨내는 남자를 찾고 있었어. 그렇지도 못한 게 나를 범했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 없어. 수치심에서 없애버려야 속이 풀려.”
“대담해줘. 날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그랬지?”
“응.”
“어째서?”
“아빤 그런 감정을 용서 안하실 거야. 마음으로 좋아한 거.”
“나를?”
“살아남은 남자는 비천 오빠가 첨 이야. 마지막 남자이기도 하고.”
“마지막?”
“아빠의 명령은 끝났어. 약속이었지. 내가 졌을 때 살생은 끝난다구.”
“못 죽어줘서 안됐군.”
“여덟 번째의 남자만은 한사코 없애버리라는 엄명이셨는데.”
“여덟번째로 날 선택한 건 누군가? 너? 사부님?”
“그건 말해선 안된다. 대신 비밀 한 개 알려줄께. 아빠가 널 미워해.”
“거짓말! 날 수제로까지 만드셨다.”
“이유 같은 건 나도 몰라. 나 그만 갈래.”
달랙는 옷을 주섬거려 입고는 밖으로 고양이처럼 빠져나갔다. 분명히 그녀 볼 위에서 이슬방울 두어 개를 본 것 같았다.
비천은 다시 죽은 자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이자는 어떻게 지금까지 달래의 비수를 피할 수 있었는지 의아스럽다. 달래는 지금 어떻게 있는가. 정작 살인을 그만두었는지.
“손목이 아픈가?”
몽달손을 굽어본다.
“살려주신 은혜에 비하면……”
“약속이니까 목숨을 붙여둔다. 이 길로 하산해라. 다시는 산채로 돌아와선 안
된다.”
“고맙습니다.”
비천이 돌아서는데, 다시 몽달손이 부른다.
“수제님!”
“왜 그러느냐?”
“조심하십시오.”
“알고 있다.”
“그럼…….”
비천은 스무 발짝쯤 걸어나간다.
그때 등뒤로부터 느닷없는 비명이 솟는다. 몽달손이 내지른 소리다.
“으아악…….”
“쯧쯧.”
비천은 혀를 찬다. 그러면서 소리 쪽으로 돌아선다.
“으하하하, 비천! 게 섰거라!”
벌써 서른 명쯤의 사내들이 울을 치며 다가오고 있다.
“범포였군.”
웃고 있던 자는 벌써 몽달손을 벤 후 납검하고 있다. 외눈이 번쩍거린다.
“기 다렸다.”
“마중치고는 고약하군.”
“섭섭한 것도 잠시겠지. 곧 베어줄 테니까.”
“왜!”
“몽달손한테서 자세히 들었을 텐데?”
“영문을 모르겠다. 사부님께 바로 사실을 묻겠다.”
“부르시기 전엔 뵙지 못한다.”
“수제의 자격으로서다. ”
“하하하하하, 비천은 이미 수제자가 아닐세.”
“자넨가?”
“그렇다. 비천은 사문에서 파문당했으니까. 배신했거든.”
“그런 일 없다.”
“변명은 무사의 수치다.”
“사실을 말할 뿐이다.”
“넌 돌아오지 않았다. 배신은 그것으로 확실해졌다.”
“돌아올 수 없었다.”
“으흐흐흐흠, 어리석은 ! 간신 유 자광의 밀명을 띠고 살아서 돌아왔지? 그동안 게서 뭘 했나? 그 역적과 어떤 도모를 했나? 그자는 반정공신도 아니면서 성은을 입은 주제에, 사림파(士林派) 거세를 다시 들고 나왔고, 은혜입은 반정공신들에까지 모함했다. 이제 되레 탄핵을 받기 시작했으니 죽을 날도 멀지 않았다.”
“나와는 무관한 소리다.”
“다시 말하마. 죽은 네 아비, 물론 사부께서 처치하셨다. 반정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놀라운 소문이로군. 그렇다면 무령부원군(유 자광)과 동맹한 사부께서도 반
정파였더란 말인가? 잘못 들은 게지.”
“잘못 듣진 않았다. 차라리 우복(유 자광), 그 간사스런 자가 반정파가 아니었다. 기회나 틈타는 놈이니까. 위기에 처했을 때 우복을 구한 분이 누군지를 아는가? 바로 사부께서 그를 비호하셨다. 반정을 숨어서 이끈 인물이 우복이었노라고. 때문에 무령부원군에 봉해진 거다.”
“그렇군. 벼슬이나 얻을 수 있을까 하고 그래서 사부께선 유 대감을 내세운 거로군.”
“함부로 주둥아릴 놀리지 마라. 사부께선 다만 섭섭해 하실 뿐이다. 우복은 끝내 그 근성을 버리지 못해 사부님을 배반했지 않은가. 복수는 꼭 이루어질 것이다. 이미 박 원종 대감께 전날의 사소한 감정을 풀고, 우복의 비위 전말을 알렸으니까.”
“잘 들었다.”
“우복의 끄나볼도 살려둘 수 없지.”
“그렇겠군.”
“이제 곱게 목을 내놔라.”
“한 가지만 더 알고 싶다. 소야용은 왜 살해했나?”
“모른다. 다만 사부께서 자살을 명하신 거다. 네 가문이 사부님에 의해서 멸문될 때 너를 구해 내왔기 때문일 거다. 뻔뻔스럽게도 하필 사부의 검문으로 찾아올 건 뭔가. 제 발로 죽으러 찾아온 꼴 아닌가. 결국 그 어리석은 노인이 네 아비와 동문이었음이 탄로나버렸지. 따라서 네 정체까지도.”
“그래, 왜 나를 사부의 검문으로 데려왔다던가?”
“망령이었어. 배워서 복수하랬다나? 그렇게밖엔 할 수 없었겠지. 당대의 검술로선 사부님을 당할 자가 없었으니까.”
비천은 이를 갈며 신음한다. 눈은 이글거려서 달빛에 찰나진다. 먼저 칼을 빼든다.
“길을 비켜라!”
“꼼짜마라. 네 목은 벌써 내 주머니 속에 든 거나 마찬가지다.”
“범포 따위에게 내어줄 목이 아니다.”
“뭣들 하느냐! 어서 이놈을 베어랏!”
범포의 호령에 도제들은 흠칫 뛰어서 다가든다.
“너희들이 내 급한 마음을 붙잡는구나. 불쌍하지만 일이 급하니 어쩔 수가 없지. 자 나서라!”
순간, 핏방울이 무지개를 이룬다. 뽀오얀 서릿발이 흩날린다. 도제들이 족제비들처럼 바쁘게 다가왔다가 썰물처럼 무너져나간다. 날빛들의 쇳소리뿐이다.
한 떼의 동체가 마지막으로 넘어지면서 방어선이 뚫린다. 잠깐, 소리가 잠든다. 그 저쪽에서 징그럽게 웃고 선 범포의 얼굴이 나타난다.
“솜씨가 썩 좋아졌군.”
“네놈은 살려주고 싶은데?”
“건방진 놈 같으니라구!”
“우린 옛적에 가장 친하게 지냈지.”
“내 왼쪽 눈은 비천의 창날에 다친 거지.”
“그랬지만 넌 나를 용서했고, 그렇게 멋진 놈이었어.”
“맞아. 네가 배반자의 길을 걷기 전에는.”
“난 원수를 갚아야 해.”
“번뇌를 씻고 불제자가 되렴.”
“나의 길이 아니다.”
“염락관민 (濂洛關閘)의 학(學)이 근사한 인간을 버렸군.”
“어쩌다 우린 다른 길로 가게 됐을까?”
“그런 인연이었겠지.”
“효(孝)의 길은 그래서 어렵다. 자, 간다!”
“오너라!”
그들의 싸움은 단 두합에서 끝난다. 범 의 몸뚱이가 풀썩 내려앉는다.
비천은 천천히 납검한다. 달빛은 등성이에 즐비한 시체들 위로 무심히 내린다. 다시 범포의 시체 위로 눈이 간다. 비천은 잠깐 눈을 감는다. 한마디를 중얼거린다.
“아침 이슬.”
어느새 비천은 동굴 앞까지 다가가 선다.
“사부님, 제가 돌아왔습니다.”
조금 뒤에 안으로부터 우렁우렁 대꾸가 나온다.
“누구냐?
“그간 무고하셨읍니까?”
“비천인가?”
“살아서 돌아왔읍니다.”
“어디에 숨어 있었는가?”
“그건 묻지 마십시오.”
“왜 나를 찾는가?”
“사부님의 목을 얻으러 왔읍니다.”
잠시 기다린 후에, 안으로부터 대답이 나온다.
“덤불에서 기다려라.”
비천은 거기서 돌아나온다.
계곡을 건너자 곧장 산채다. 그는 본당의 둘레로 쳐진 돌담을 거리낌없이 지
나서 덤불 쪽을 향한다.
작은 개울이 가까와진다. 물장구 소리가 난다. 누군가가 멱을 감고 있다.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가본다. 달래다. 별빛으로 멱을 감는 듯, 은하수에 선 듯, 우뚝 선 여자의 계곡들 사이로 파란 물빛이 빠져나간다. 고기비늘같이, 여자의 살은 여전히 싱싱하다. 젖무덤이 봉긋 솟아난다.
비천은 불쑥 앞으로 걸어나간다.
“어마!”
앞에 선 비천을 보자 달래는 급히 팔로 가슴을 감싸며 물속으로 반쯤 잠겨든다.
“언제 오셨어요! 정말 돌아오시리라고는…….”
달래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다.
“기어코 돌아왔지!”
비천의 목소리는 다르게 떨려나온다. 그래, 원수의 딸인 것이다. 산채를 떠나가기 얼마 전에 목숨까지 뺏으려 했던 여자. 어차피 베어버려야 한다.
비천은 검자루를 사려쥐며 그녀의 앞으로 다가간다.
“엄마아!”
갑자기 바위 뒤로부터 사내아이 하나가 뛰어나온다. 놀란 비천이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선다.
“그렇군.”
비천이 닦은 비상한 육감의 그믈로서도 또다른 생명이 거기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기색을 잡지 못한 터이다. 아이는 살기(殺氣)를 가지지 않는다. 적의(敵意)가 없는 순수 때문이었노라, 비천은 깨닫는다.
그는 주춤거리며 묻는다.
“애는 누구냐?”
여자는 목이 메인다.
“눈물은 왜 홀리느냐?”
“꿈인가 생각했어요·…· 살아 계시리라곤·…….”
“나를 기다렸더란 말인가? 왜?”
달래는 고개를 떨구며, 지친 듯한 울음을 울먹인다.
그새 아이는 달래 곁으로 달려가 붙어 서 있다. 비천을 향해 눈을 사납게 굴리며 살핀다. 무언가를 깨달은 달래는 아이를 앞으로 밀어내며, 분명히 말한다.
“인사드려라. 아빠이시다…….”
비천은 순간에 눈을 감아버린다. 비수 같은 것이 가슴을 찔러옴을 느낀다. 생성하고 있는 우주의 대섭리 같은 것, 인연은 사리를 따져가며 열매 맺도록 하지는 않는구나, 비천은 탄식한다.
“어쩌란 말인가, 이 무거운 업보(業報)를!”
그는 검을 거둔다. 아이를 유심히 본다. 아이도 아비를 본다. 초롱초롱하여, 적의를 살라버린 눈. 웃는다. 부디 이 아들의 눈에는 보은(報恩)의 세상만 있게 하소서, 비천은 누구에겐가 속으로 빈다.
“옷을 입으시오. 아이를 데리고 어서 하산하시오. 곧 뒤따라가리다.”
달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덤불에서는 사부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 달빛을 받고 우뚝 서서 칼을 가슴에 껴안고 있다. 주위로 억새풀이 쭈볏거리며 솟았다.
“피할 생각은 없다. 어차피 난 너를 베어야 하니까.”
“그럼 검을 뽑아들겠읍니다.”
비천은 공손히 읍한 뒤에 칼을 뺀다. 달빛이 번쩍한다. 그 사이로 촌각의 틈도 주지 않고 사부의 칼끝이 짓쳐든다. 비천도 공중을 날아 사부의 등을 후려친다. 동시에 사부도 몇 척 앞으로 날아올랐다가 황망히 내려앉는다.
“빈틈없는 조천검법 (朝天劍法)이다!”
사부의 얼굴은 금세 하얗게 변색된 채 부르짖는다.
“그렇습니다.”
검술의 실력을 요량할 생각으로 슬쩍 급습한 것이었는데, 사부는 비천의 뜻하지 않았던 칼놀림에서 충격을 받고 만다. 아침 햇살처럼 빠르고 날카로운, 그러고도 아침 태양처럼 장엄한 검법, 사부 백수가 평생에 얼마나 이룩하고자 했던 술법이었던가. 터득할 수가 없다면 이와 겨루어 격퇴술이라도 만들고자 했지만, 그조차 영영 완성하지 못했던 조천검법, 그런데 그것을 완전히 연마한 비천이 바로 눈앞에 나타난 터이다.
“으음! 이각의 짓이로구나! 아직 살아 있더냐?”
백수는 신음소리를 낸다. 조천검법을 완성 했던 무사는 아직 이각 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저에게만 전수해주셨움니다.”
“도저히 그를 이길 수가 없었다. 불태워 죽였는데, 살아 있었다니!”
“흉하신 얼굴을 노상 복면하여 감추고 사셨읍니다.”
“명은 하늘에 있었구나! 자, 그럼 나서봐라. 너를 통하여 그를 이겨보자.”
“그럼 갑니다.”
작은 달무리들이 수없이 어우러진다. 쟁그렁거리면서 불꽃이 틘다. 작고 아름다운 꽃밭들이다. 그 사이로 휘익, 수리처럼 날아서 날개를 접고 또 편다. 잼싼 제비다.
두 식 경이다. 백수는 그새 지첬다. 이마에서 몇 개의 땀방울을 떨군다. 한 덩이의 작은 달이 그의 목덜미 위에 머문다. 헐떡이는 숨결이 달을 부숴놓기 전에, 비천은 그것을 베어버린다. 백수는 넘어지며 칼을 떨군다.
“용서를 빌진 않겠읍니다.”
“받을 이유도 없지. 한데, 숨결을 남기지 말라 일렀다. 이각도 대단치 않았나보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부께선 저더러 검의 극기와 어짐을 가르쳐주셨습니다.그러고도 몸소 말씀을 더럽혔읍니다. 검자(劍者)의 명예를 욕보이셨읍니다. 사부께 전날의 말씀은 돌려드려야겠기에 잠깐 숨결을 남겼을 뿐입니다. 이제 편안이 가십시오.”
말을 끝낸 비천은 칼을 크게 휘두른다. 찰나에 달빛이 잠깐 잘라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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