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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창작21 2010년 여름호 발표작
잔치국수 아홉 그릇
홍구보
30년 동안 다니던 직장을 퇴직하자 제일 큰 사단은 잠이었다. TV 연속극이 끝나는 11시가 되면 머릿속이 하얗게 되고, 눈꺼풀을 누가 강제로 잡아당기는 것처럼 더 버틸 재간이 없어 잠이 들어버렸다. 그러나 새벽 3시가 되면 어김없이 눈이 번쩍 뜨여졌다. 평상시는 말할 것 없고, 모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꼭지가 돌 정도로 술을 마신 날 새벽에도 잠이 깼다. 그때부터 고역이 시작되었다. 아내가 깰까 도둑발로 화장실에 가 소변을 찔끔거려 누고, 다시 잠자리에 들어도 바람 나 도망 간 여편네처럼 잠이 돌아오지 않았다. 어찌어찌 뒤척이다 잠깐 눈을 붙이면 코끝에 된장국 냄새가 나고, 아내가 식탁에 밥그릇 놓는 소리가 들리고, 창밖은 훤해져 있었다. IMF 때도 그랬다. 공장장이라는 사람은 ‘구조조정’이란 엄포를 연일 쏘아댔다. 노조는 소금 절인 배추처럼 맥을 못 추고, 아내는 누렇게 부은 얼굴로 눈물을 찔끔거렸다. 나 또한 구조조정 대상이 되었을 때를 대비해 제 1, 제 2의 대안을 세웠지만 하룻밤 새 수십 채 집을 짓고 허는 꼴이었다. 읍소하는 마음으로 엄포가 나만을 피해가기를 비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 뒷걸음질 하다 쥐 잡듯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나에게 생겨버렸다. 바로 글쓰기였다. 반복되는 교대근무와 건조한 일상생활이 켜켜이 쌓여졌을 뿐, 그 세계는 딴 세상 이야기였다. 초등학교 때는 친구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키에 상당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친구들과 선생님은 특별활동 시간에 당연히 운동부에 들어갈 줄 알았지만 나는 ‘글짓기반’에 성큼 들어가 키 큰 불만을 글로 썼다. 그러나 사춘기를 지나고 성인이 되었을 때, 편지는 물론 인터넷 댓글조차 쓰기 부담스러워졌다. 매년 5월 1일 ‘노동절’만 되면 단지 덩치가 크다는 이유로 배구나 줄다리기 선수로 차출되었을 뿐 노동부 주관의 ‘근로자문학제’는 기웃거리기조차 하지 않았다. 그 쪽은 내 큰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쪽이라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지나쳤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해 사월은 달랐다. 오전에는 근무 대신 공장 곳곳으로 다니며 청소하거나 잡초를 뽑고, 오후에는 강당에서 교육을 받았다. 밤에는 사측과 맥없는 노조를 씹으며 소주를 마시고 밤늦게 집에 가도 잠이 오지 않았다. 몸은 지치고, 마음은 죽을 고생을 하던 시기였다. 큰 돼지 한 마리 잡아 매년 치르던 체육행사도 취소되었다. 행사 없는 노동절을 앞둔 사월이었다. 식당 앞 게시판에 붙어있는 ‘근로자문학제’ 광고지를 보게 되었다. 그걸 보는 순간 ‘한 번 응모 해 봐?’ 라는 객기가 생겼다. 입선만 해도 상금은 물론 제주도 여행의 부상까지 주어진다는 문구에 맛이 갔기 때문이었다. 정말 단 하루라도 바싹바싹 말라가는 공장과 집을 떠나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배고픈 놈 제사보다 젯밥에 눈길 더 가듯이 그렇게 어쭙잖은 글쓰기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날부터 당장 글쓰기에 매달렸다. ‘노동자가 노동자 이야기를 쓰는데 뭐 어때?’라는 배포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 때 마침 우리 부서는 공장 전역을 다니며 고철을 줍는 일을 할 때였다. 나는 ‘고철단상’古鐵斷想 이라 제목부터 정해놓고 괴발개발 초고를 썼다. 그걸 몇날며칠 밤잠 안자고 목수가 재목을 톱질하고, 대패질하고, 끌로 구멍 파 짜 맞추듯 다듬기를 반복했다.
출근을 하여보니 우리 조가 오늘 작업해야 할 할당량이 하달되어 있었다. 고철장의 바닥에 파묻힌 잔고철을 모아 빈 드럼통에 넣는 작업이었다. 해는 아직 동녘바다에 멈칫거리고 있었지만 우리는 안전모를 착용하고, 안전모를 쓰고, 안전화를 신고 작업장에 자리를 잡았다. 계절은 봄이지만 제법 싸늘한 날씨였다. <중략> 공장의 거대한 구조물은 깊은 잠에 빠진 듯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30여 년을 밤낮 쉬지 않고 시멘트를 생산 출하하던 공장이었다. 성장일변도의 경기에 내수조차 부족하여 수출은 중단되고 각 시멘트공장은 증설을 거듭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가동 중단사태까지 올 수 있단 말인가. IMF 한파는 백두대간을 가로질러 어김없이 이곳까지 오고야 말았다. <중략> 교대근무에 익숙했던 동료들은 주간근무로의 전환과 수당 실종으로 인한 감봉에 불안해하였다. 처음에는 시간만 나면 모여앉아 IMF의 실체와 이렇게까지 된 원인규명에 각자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정리해고의 당위성과 회사의 존폐위기, 분사 등 자구책 노력에 자기만큼은 빠졌으면 하는 바람이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중략> 이 큰 덩치에 이까짓 잔 고철을 줍는 일까지 해야 하다니! 모두 맥쩍은 마음이 가득해서일까. 으깨어진 외자 박스가 타는 드럼통 옆으로 모여 한겨울의 화덕불 쬐듯이 손바닥을 펼쳤다. 한기가 어느 정도 가시자 이 이상한 국가적 기현상이 자기들 탓이 아니라는 듯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고철에 대한 이야기가 시나브로 나왔다. <중략> 엿장수, 엿판 등 엿에 대한 이야기가 한참 나오다 7, 80년대 경비실에 근무했다는 오 반장의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컸다. 그는 그 시절, 최고 부서가 경비과 였다고 했다. 마치 범죄자를 찾아내는 경찰처럼 경비원은 사규 위반자를 적발하고 보고 처리했다. 무엇보다도 경비실에는 출퇴근 카드를 찍는 타임레코드란 기계가 있어, 경비원의 위세는 대단했다고 했다. 경비원이 요구하면 어느 누구라도 몸수색과 소지품 검사에 응해야만 했다. 인권유린이라는 반발은 감히 엄두도 못 내었다. 퇴근자의 빈 도시락에 구리선과 시멘트가 가득 들어있는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중략>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은 물질의 풍요 속에 살면서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쓰레기대란’이니 ‘음식쓰레기’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만큼 버리는데 익숙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낟알 하나라도 아끼고 고마워했다. 가을햇살에 콩깍지에서 제멋대로 튕겨져 나간 콩 한 알이라도 찾아 모았다. 밥그릇 가장자리에 붙은 밥알 하나라도 버릴 때는 어른께 심한 꾸지람을 들어야만 했다. 또한 집집마다 헛간과 거름터가 있었다. 무엇하나 버리는 것 하나 없이 낡은 것은 헛간에 보관하고, 탈만한 것은 군불 땔때쓰고 그 재는 밭에 내었고, 썩는 것은 거름터에 내어 푹 썩혀 퇴비를 만들었다. <중략> 점심때가 되자 모두 허리를 두드리며 일어섰다. 처음의 어수선한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잘 정돈된 고철장이 되어 있었다. 협협했던 마음도 사라지고 보람도 생겼다. IMF에 대처하는 마음이 고철 줍듯이 한다면 두려울 게 없을 것만 같았다. 우리가 아니었다면 2백 리터 드럼통 4개에 가득 채워진 고철은 영원히 땅 속에 그냥 썩혀질 것이 아니었던가?
다행히 이 글은 입선작으로 채택되어 바라는 바대로 제주도여행을 다녀오는 영광을 안았다. 그러나 행운은 거기서 끝이었다. 여행 내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불안이 현실화 되고 말았다. 내가 속한 부서가 분사分社가 된 것이다. 새로운 회사이름을 지어 담당 과장이 사장이 되었다. 전과 똑 같은 일을 계속했지만 퇴직금이 주어졌다. 노동조합 가입을 원천적으로 허용하지 않았고, 임금도 30% 이상 삭감이 되고, 정년이 기존회사보다 3년이 짧아지는 등 각종 복지혜택도 동결되었다. 사람 마음은 간사했다. 막상 공장에서 영원히 퇴출되지 않은 것에 감읍하다가도 작업복 디자인과 색상이 본청회사와 차별화 되어 지급되자 자존심이 극도로 추락되었다. 대다수 동료들은 새 작업복을 아예 입지 않고, 본청회사의 로고가 새겨진 헌 작업복을 고수하는 걸로 자존심을 지키려 했다. 그나마 나는 ‘근로자문학제’에 입선한 덕으로 문사文士라는 호칭이 계속 따라다니자 그게 뭔 벼슬인 양 어깨에 힘주며 하청회사에 다녔다. 그게 지난 10여 년 동안의 이야기였다.
퇴직 후에도 이 ‘문사’ 덕을 보리라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고기 먹어본 놈이 고기 맛을 알듯이 공모에 한 번 입선하자 글쓰기에 자신감이 생겼다. 백일장이 열리는 곳이면 거리에 구애받지 않고 부지런히 참여했다. 상금을 받으면 모두 책 사는데 투자하고 취미를 아예 운동에서 독서로 바꾸어버렸다. 또, 상금이나 상품이 푸짐한 라디오 편지쇼에도 글을 보내 공중파에 이름 석 자도 입적했다. 꿈도 야무지게 꾸었다. 칠순 때는 그동안 써놓은 글을 책으로 엮어 지인에게 선물로 주자는 꿈이었다. 그러나 ‘문사’란 꼬리표 때문에 수모를 당한 날도 있었다. 골프채 한 번 잡아보지 않은 나를 골프 치는 친구들 모임에 초대한 이는 공기업 이사로 근무 중인 김 군이었다. 그는 불알친구이고 퇴직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는 식의 순수한 의도였다. “홍 문사, 퇴직했다면서? 여 친구들 모였는데, 같이 술이나 한 잔 함세!” 그의 전화를 받고 찾아간 곳은 전통 있는 중화요리집 밀실이었다. 이미 좌중은 불콰하게 술이 올라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친구들은 하던 말을 마저 해야겠다는 듯 건성으로 인사하고, 서로 낄낄거리며 서울에서 부산 가 듯 골프 이야기를 이어갔다. 다들 넉살좋은 입담으로 지지 않겠다는 듯 말꼬리를 잡아 업어 치고 매치고 볶아댔다. 그들은 퇴직한 나를 앉혀 놓고 아직 현역으로 일하는 잘 난 인생을 자랑하고 있었다. “홍 문사, 요새는 글 쓸 시간이 많아 좋겠네?” 떠들썩한 좌중이 잠시 중단되자 김 군이 툭 던진 말이었다. “백수가 글은 뭔 글?” “무슨 소리야? 한 번 문사는 영원히 문사지. 라디오에도 나왔다며?” "근데, 저 떡두꺼비 같은 손에 볼펜이 잡히나?“ “이, 무식하기는? 요새는 다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지.” “아, 독수리 타법?” “근데, 글을 쓰면 돈이 생기나?” “돈? 공부 잘 한 놈들이 돈 잘 버는 거 봤어?” “맞다. 힘 좋다고 싸움 잘하는 것도 아니지.” “그래, 니가 오리 궁둥이면서 골프를 잘 못치는 거나 같네?” 좌중은 다시 골프 이야기로 넘어갔고, 나는 그 틈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났다. 김 군이 따라 나오며 속삭였다. “소싯적에 너한테 맨날 얻어맞던 놈들이 오늘 밤, 돈 좀 벌었다고 흰소리 쳤다고 이해해라. 나는 니 힘보다 글재주를 더 부러워했지만 말야.” 김 군의 덕담에 대꾸할 것도 없다는 듯이 그 자리를 피했지만, 그 날 밤의 수모는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그 수모는 ‘불안’이라는 불에 기름을 붓는 꼴로 잠을 더 못 자게 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아파트 경비직만큼은 일단 접자’라 각오한 것이 흐지부지될 정도였다. 그렇게 묵은지처럼 자신을 삭히던 나날이 지났을 때였다. 그날도 생활정보지의 구인란과 시청 게시판을 보며 체크하던 중 눈에 번쩍 뜨이는 구인 광고를 보았다. 노동부 주관의 ‘사회적기업설립지원사업’에 선정되었다는 ‘시민행복발전소’란 비영리단체에서 문사를 찾고 있었다. 그 단체가 하는 일 중의 하나가 각 마을에 숨어있는 이야기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나는 그 일이 마치 나를 위해 있는 것처럼 자기소개서를 써서 사무실을 찾았다. 실장은 한 눈에 믿음이 가는 얼굴과 듬직한 체구의 40대 초반이었다. 그는 내 이력을 보더니 선생님 같은 분을 찾았다며 반갑게 맞았다. “작은 사연 하나가 명품 마을을 만드는 시대입니다. 개성 있는 대문 하나가 골목길의 정경을 바꾸고, 나무 한 그루 숲 하나로 명품 지자체로 변모할 수 있습니다. 우리 단체는 주민 스스로가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게끔 정체성을 찾아주고, 기획하는 곳입니다. 선생님 같으신 분이 꼭 필요합니다.” 젊은 실장은 명품을 들먹이며 나를 들뜨게 했다. 비록 계약기간은 6 개월이고, 임금은 법정 최저생계비로 책정되었지만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었다. 내가 맡은 일은 국제항구가 있는 ‘송정마을’의 실태를 파악하고, 재미난 이야기를 찾아내 기록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실태를 파악하는 자체가 어려웠다. 옛날 같으면 역전이나 골목에 끌려가 선방부터 맞을 만큼 큰 덩치라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묻기도 전에 경계부터 해버렸다. 가족관계나 방 수, 소득 여부, 이사 온 계기나 년도 등 실태조사서에 적힌 대로 물으면 “당신 공무원이요? 큰 놈 치고 싱겁지 않은 놈 없다더니 별 걸 다 묻네!”라며 피했다. 젊은 실장도 새삼 내 큰 덩치를 보며 실태조사는 여성 회원에게 맡기겠다고 했다. 대신, “선생님, 이야기 수집은 더 어려울 수 있어요. 주민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한 몸이 되어야 거미꽁지에서 거미줄 나오듯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라 당부했다. 또, 수집하는 도중 수시로 이야기를 정리해 글을 써서 보고하라는 숙제를 냈다. 그러나 실장 말대로 주민 속으로 들어가기 쉽지 않았다. 동네를 몇날며칠을 돌며 말이 먹힐 대상을 찾았으나 결국 진창에서 차바퀴 헛돌 듯 했다. 그들에게 나는 개밥의 도토리일 뿐이었다. 시내 상가 쪽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예 물건을 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채고 소 닭 보듯 여겼다. 그러나 사람 사는 동네가 아니던가. 시장통 입구에 있는 ‘항구약국’에 들어갔을 때였다. 약사는 대머리가 시원하게 벗겨졌지만 나이는 많지 않게 보였다. 박카스 한 병을 달라하자 피로회복용 알 약 하나를 서비스로 주며 말을 걸었다. “무슨 일 때문에 우리 동네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십니까?” “재밌는 이야기 좀 찾으려구요.” “그걸 찾아 어디다 쓰려구요?” “엿 봐꿔 먹지 않을 테니 염려 붙들어 매시고, 약사님이 좀 도와주세요.” “글쎄, 증세를 이야기해야 처방할 것 아니요?” “글 쓰려고 그래요.” “글? 좋습니다. 허기사, 말은 뱉어지는 순간 허공에 사라질 뿐이죠. 우리 송정 이야기는 이제 거의 다 전설이 되어가니 빨리 기록에 남겨야죠. 내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 사람들은 술 한 잔 들어가야 무슨 이야기든 술술 나오지요.” “술술 나오는 집이 어딘데요?” “저어기, 시장통 송정집에 가면 아마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 판 벌어졌을 거요.” “불쑥 찾아가, 뭔 말부터 걸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가보면 알거요. 만약에 안 끼워주면 날 팔아요.” 약사는 골치 아프면 자기를 약 대신 쓰라며 처방까지 시원스럽게 내줬다. 시장 입구에 있는 ‘송정집’문을 열자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이 화차를 삶아 먹었는지 귀가 먹먹할 정도의 큰 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천정이 머리에 닿을 듯 낮아 목을 구부리자 그들은 자기들 보고 인사를 하는 줄 알고 묵례로 답했다. 구석 자리에 앉으며 막걸리 한 주전자를 주문하자 그들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입이 근질거려 못 참겠다는 듯 낮게 뱉는 소리가 들렸다. “덩치는 전 장군 만한 게 쪼잔하게 한 주전자가 뭐야?” “키 크다고 전 장군과 비교해?” “저 키는 강호동이 키만 하지만, 전 장군은 이봉걸만 했지. 그러니 마셨다하면 한 자리에서 한 퉁자를 거뜬히 마셨지.” 내 큰 덩치가 그들의 안주거리가 된 이상 기회다 싶어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그들 자리로 갔다. “저, 항구약국 약사가 가보라 해서 왔습니다.” “무슨 일 땜에 그러는 거요?” “그냥 막걸리 한 잔 나누며 이야기 좀 듣고 싶어서요. 그런데 아까 전 장군이라는 분은 술을 잘 마셨는가 봐요?” 그들은 약사 말대로 약효가 들어서인지 자리 하나를 내주었다. 그러나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하던 이야기를 마주 끝내야 시원하다는 듯 다시 목청을 높였다. 항구 중앙부두에 있는 항만청사를 인근 마을로 옮기고, 그 자리에 석회석 저장시설을 짓는다는 소문에 대해 갑론을박이었다. 만에 하나 그렇게 된다면 주민들이 합심 단결하여 끝까지 반대해야 한다. 그러나 기득권자와 그 아류들은 찬성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또다시 동네가 화합은커녕 분열되지 않겠는가. “가만, 그건 그때 가서 다시 논의하기로 하고, 댁이 아까 뭐라 물은 것 같은데?” “조금 전에 언급하신 전 장군이라는 분, 정말 한 자리에서 막걸리 한 퉁자를 다 마셨습니까?” “그럼, 어디 술뿐인 줄 알어? 힘도 장사였지.” “역도나 씨름 같은 운동은 안 했습니까?” “그런 건 안 했어. 타고난 장사였어. 댁 같이 키만 멀대 같이 큰 사람은 그 옆에 가지도 못했지.” 그 후에도 술집에서, 슈퍼 앞 파라솔 밑에서 송정의 이야기를 들었다. 소나무와 정자가 많은 동네라 해서 붙여진 송정松亭은 오랫동안 선비의 고장으로 통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역이 들어서고 인근마을에 북삼화학, 삼화제철, 묵호항 등이 개발되면서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정작 그들이 화려했던 시절이라고 자랑한 때는 60년 대 부터였다. 명사십리와 송림, 전천강이 어우러진 해수욕장, 때마침 이웃 마을에 있는 시멘트공장이 준공되고 매년 증설을 거듭하는 공사가 있어 최고의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70년대에 들어서자 항구개발이란 국책사업으로 서서히 망가지기 시작했다. 해수욕장 일대와 마을 앞으로 드넓게 펼쳐진 옥토, 수많은 집이 항내수면이 되고, 주민이 하나 둘 떠나고 말았다. 항구는 결국 날개 잃은 새 꼴처럼 송정을 만들어, 남아 있는 사람들 가슴 속에 한과 울분만 점점 더 쌓이게 했다. 항구에서 날려 오는 분진 때문에 여름에도 창문을 열 수 없고, 흰 빨래는커녕 장독대의 장 단지를 열어 햇볕을 쪼이게 할 수 없었다. 선박이 입출항 할 때마다 부두 너머 마을까지 지진 같은 진동이 집안으로 들어와 불안하게 했다. 또, 현재 눈앞에 펼쳐지는 일들이 하나 같이 마음에 들지 않다고 했다. 마을 자체가 늙다 보니, 길거리나 상가로 드나드는 행인은 항구에서 나온 외국인 선원이 더 많을 정도였다.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전통의 초등학교는 분교 수준의 학생들이 다닐 뿐이었다. 그들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것들은 이미 전설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분노 때문일까. 화려했던 이야기 뒤에는 꼭 송정의 주먹과 힘 자랑 이야기가 많았다 그중 ‘똥장군’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었다. 이름 가운데 ‘동’자가 들어있고, 장사를 존칭하기 위해 장군이라 붙인 이름이었다. ‘동 말 할 때는 강조하기 위해 똥이라 발음했다 장군’이야기는 송정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었다. 두 장군은 ‘송정집’에서 들었던 전동석과 전국대회 유도부문 메달리스트인 오동찬 이었다. 오동찬의 명성은 그 당시 전국에 알려진 반면 전동석은 골목대장 수준밖에 되지 못했다. 그러나 많은 송정 사람들은 전동석을 이야기 했지, 오동찬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그는 덩치나 힘 어느 쪽도 전 장사와 비교가 안 되었다. 단지, 한식집을 하는 모친 덕으로 먹는 걱정 없이 자라 힘이 좀 세었고, 대학 다니다 운 좋게 메달을 땄을 뿐이라고 평가절하 했다. 그러나 몇몇 사람은 “오동찬이 배운 사람답게 말 잘하고, 점잖고, 예의가 발라 송정 최고의 신사였지 않았냐?” 라 치켜세웠다. “신사? 권력 있고 돈 많은 사람에게는 설설 기고, 약하고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을 무시했고, 무엇보다 고향을 떠난 후 한 번이라도 찾아왔냐?” 라 벌떼처럼 덤벼들며 반박했다. 할 수 없다는 듯 ‘똥장군 이야기’에서 오동찬을 빼고 ‘전동석 이야기’만을 글로 쓸 수밖에 없었다.
전 장군 이야기
송정에는 장사가 유난히 많았다. 그들은 기골이 장대하고, 뼈는 통뼈이고, 어깨가 딱 벌어지고, 가슴팍과 팔뚝에 삼두박근 이두박근이 딴딴하게 들어찼고, 장딴지가 어른 두 손으로 감싸도 안될 만큼 굵었다. 춥고 배고픈 시절에도 이들은 타고 난 힘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운동으로 몸을 단련하는 후배들은 장사들을 자기들 잣대로 평가했다. 힘은 싸움할 때나 써먹는 거며, 일할 때 쓰는 것은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여겼다. “그 형 운동할 때 보니 가빠가 끝내주더라.” “야, 가빠가 좋으면 뭐하냐? 그건 만든 기고, 진짜 심(힘)은 뻑대가 커야 제대로 쓰는 거라구.” “웃기네! 가빠 좋고, 뻑대가 크면 뭐하냐? 싸움할 때는 재빠른 게 최고지.” “돌려 차고, 정권 지르면 뭐하냐? 큰손에 잡히면 끝장인데.” "누가 잡힌데? 심만 세면 뭐하냐? 깡다구 하나 없으면 우리 송정 선배가 아니지.“ 보릿고개를 모르는 후배들은 타고 난 장사가 천성이 착해 싸움 자체를 안 했다며 비하했다. 그러나 생활전선에서 일하는 어른들은 송정의 전동석 장사 덕을 톡톡히 보았다. 60년 대 초 삼화제철소가 돌아갈 때였다. 전기나 용광로 송풍 기술이 없는 대다수 사람들은 하청회사에 적을 두었다. 그들은 고철을 종류별로 분류하거나, 철광석의 미분광을 주먹 크기로 뭉치는 등의 단순노동을 했다. 작업장에는 검은 분진이 풀풀 날려도 마스크를 쓴다거나 장갑을 끼지 않았다. 늘 배고프던 시절이라 힘쓰는 일이 아닌 것만으로 그따위 먼지쯤은 아무것도 아니라 듯 여겼다. 하청 일 중 가장 힘든 일은 분광석을 소결광으로 만들 때 생겨나는 큰 덩어리를 오함마로 깨는 거였다. 다들 두세 번만 오함머를 쳐들어 내리쳐도 입에 단내가 나고 헉헉대었다. 그러나 송정의 ‘전동석’ 장사는 오함마를 아이들 장난감 여기듯 했다. 한 자리에서 스무 번이나 내리쳐도 식은 죽 먹기 식이었다. 땀 하나 나지 않고 덩어리 소결광을 처리했다. 의리를 목숨처럼 여기는 송정사람들은 십시일반 밥이며 막걸리를 추렴해 ‘전’ 장사 배를 곯지 않게 했다. 대신 다른 마을 사람들은 아예 자기들 조에 끼지 못하게 훈기를 주고 똘똘 뭉쳤다. 전 장사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몸집이 유난히 큰 송준모 영어선생이 제자의 큰 덩치를 보고 골려주기로 했다. 유도 유단자인 송 선생은 자신이 유단자임을 감추고 한 판 붙자고 명령을 내렸다. 별 어려운 일이 아니고, 친구들이 부추기던 터라 얼떨결에 송 선생과 마주 선 순간 전동석이 벌렁 자빠지고 말았다. 송 선생이 전광석화처럼 달려들어 업어치기 기술을 걸었기 때문이다. 큰 덩치가 자빠지자 친구들은 송 선생의 기술에 대한 찬사 보다는 허우대가 멀쩡한 놈이 힘도 한 번 못쓰나? 라는 힐난의 비명을 질렀다. 얼굴이 벌겋게 변한 전동석은 송 선생에게 다시 한 번 하자며 졸랐다. 유도나 씨름 기술이 없던 터라 허리띠를 잡고 그냥 한 번 용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그 용은 어머니가 오줌 눈 아이 바지 내리듯 그냥 아래로 힘을 약간 쓴 것에 불과했다. 그러자 송 선생의 기술은 어디 장 보러 가고, 무릎이 그냥 접히면서 엉덩이가 맥없이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때서야 학생들은 ‘그럼, 그렇지!’라며 구경 자리를 떠났다. 전 장사 일화 중에 제일 많이 알려진 것은 ‘잔치국수 아홉 그릇’이다. 어느 날 오후, 명동골목길에서 전 장사와 마주친 후배는 인사를 깍듯이 하고 안부를 물었다. “아이고, 선배님 어디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 대답 대신 검지를 입술에 대며 그냥 지나치자 후배는 뒤따르며 인사를 거듭했다. 그러나 끝내 “오냐!”라는 인사 없이 훠이적거리며 가자 덜컹 겁이 났다. 때마침 전 장사의 친구들이 낮술에 취해 골목길을 좁은 듯 휘저으며 오고 있었다. “아이고, 선배님들 안녕하십니까? 그런데 전 장사님이 무슨 화 나는 일이 있었습니까?” “아니, 조금 전까지 우리랑 같이 있었는데?” “이상한데요. 조금 전에 제가 인사해도 입조심 하라며 그냥 지나치시던데요.” “가만, 말로 그랬어?” “아니요. 손가락을 입에 대며 말없이 지나던데요.” 후배의 답을 듣던 선배들은 골목이 떠나가듯 박장대소 했다. 후배는 점점 더 이상해 웃음이 잦아지자 제발 이유를 좀 알자며 되물었다. “막걸리 반 퉁자에다 잔치국수 아홉 그릇이 목구멍가지 차올랐다는 이야그다.” “예? 뭔 말인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뭔 말인고 하니 말야. 조금 전에 우리들은 전 장사와 함께 철도 관사에 사는 친구 형 잔칫집에 가서 거나하게 대접 받았지. 그런데 우리 전 장사가 잔치국수를 자꾸 시키는 거야. 누가 세어 봤더니 열 세 그릇을 먹더래. 그래서 그건 너무 많으니 남들한테 아홉 그릇 먹더라고 말하자 약속했지. 그런데 잔치국수 먹기 전에 막걸리 한 퉁자 중에 그 친구가 혼자 반 퉁자를 마신 상태였거든.” “하이코, 많이도 자셨네요. 역시 장사구만요. 그런데 왜 조용하라고 손가락을 입에 댔는데요?” “햐, 이 친구 딱하네. 국수가 막걸리에 팅팅 불어 목구멍까지 차올라 말하면 튀어 나올까봐 입을 꼭 다물고 자물쇠 같은 손가락을 댔다 이 말이야. 알간?”
실장은 재미있다며 그 후의 일화를 취재해보라 권했다. 그러나 글로 적은 행적 외에는 어느 누구도 다른 일화를 기억해 내지 못했다. 삼화제철소가 망한 후 다른 직업이 있었는지, 언제 죽었는지 등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었다. 단지 사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주로 외형에 대한 이야기만 들려줄 뿐이었다. “얼굴이 유난히 거무틱틱했지.” “흑인은 아니고 핀리핀 사람들 피부 같았지.” “거보다 태국 사람 같지 않았나?” 또, 걷는 폼에 대해서도 조금씩 달랐다. “떡메 같은 발로 팔 자 걸음이고, 팔도 아령 하듯이 팔꿈치를 꺾어 올렸지.” “팔 자는? 뒤끔치에 스프링 달린 것처럼 아예 땅에 닿지 않고, 앞발로 겅중겅중 걸었지. 그래 걸으면 큰 덩치가 더 크게 보였지.” “손가락은 노상 호두알 굴리며 놀지 않았어.” “호두가 아니고 쇠다마지.” “그래? 내 기억에는 엄지와 중지를 꽈 딱 딱! 소리 낸 것 같은데?” 또, 글 속에 나오는 전 장사의 친구들을 수소문 해 보았다. 그러나 그와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도 하나같이 타지로 이사 갔거나 타계해 근황을 알 수 없다고 했다. 마치 바닷가 과부촌의 남편들처럼 한 날 한 시에 같은 태풍으로 사라진 것 같았다. “맞아, 깜박 잊었네. 그들 전부 삼화제철소에 다녔지. 거기 다닌 사람들 다 일찍 죽었잖아?” “왜 지?” “뻔하지. 그땐 요새처럼 마스크가 있나, 방진복이 있나? 집진시설이 있었나? 그 먼지 구뎅이 속에 일하느라 폐가 시커메 죽었지.” 그들이 다녔다는 삼화제철소는 1943년 일본인에 의해 건설된 남한 최초의 제철소 였다. 해방 이후에는 정부 소유의 공장이었지만 운송난과 원료, 연료 부족으로 가동과 중단을 반복해야만 했다. 급기야 1958년 민간인에게 불하되어 겨우 10여 년 가동되다, 1969년에는 영원히 폐기되고 말았다. 일거리 자체가 없던 시절이라 가동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다녔다. 그러나 근무 환경 자체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고철단상’에서 표현된 ‘해는 아직 동녘바다에 멈칫거리고 있었지만 우리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안전모를 쓰고, 안전화를 신고 작업장에 자리를 잡았다.’ 에 나오는 마스크나 안전화는 상상 자체가 되지 않을 때였다. 또, ‘전 장군 이야기’에 ‘작업장에 검은 분진이 풀풀 날려도 마스크를 쓴다거나 장갑을 끼지 않았다. 늘 배고프던 시절이라 힘쓰는 일이 아닌 것만으로 그따위 먼지쯤은 아무것도 아니라 듯 여겼다.’ 는 전동석의 힘을 강조하는 글이었지 작업환경 따위는 아니었다. 나 못지않게 항구약국 약사도 전동석의 행적을 알고 싶어 했다. 사방팔방으로 수소문해 전 장사의 인척 중 한 분밖에 안 계신다는 누님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어디 가서 사는 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항구약국 약사가 급히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조금 전 전 장사의 누님이 약 사러 왔다 갔어요.” “그래요? 어디 산데요? 뭐 좀 알아봤습니까?” “궁금증이 다 풀어졌어요. 그런데 난데없이 오동찬 이름을 거론했어요.” “전국유도대회 우승한 그 오동찬 씨요? 그럼 두 장사가 친구 사입니까?” “전 장사가 네 살 더 많지요.” “친구 사이도 아닌데, 오동찬을 왜 거론했대요?” “전 장사 누님 말이 오동찬 때문에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했어요.” “왜요?” “뻔하지요. 후배인 오 장사에게는 후배들도 많이 따르고, 수단이 좋아 돈도 잘 버는데, 전 장사는 제철소 하청회사나 다니며 그 좋은 힘을 겨우 먼지 구뎅이에서 함마질이나 한다고 주위에서 놀렸다는 거예요. 일종의 자격지심이라 봐야겠죠.” 약사는 엄청난 비밀을 털어놓는 사람처럼 말문을 닫다니, 약 진열장 밑에 있는 냉장고에서 박카스 두 병을 갖고 와 권했다. 차고 신 맛에 눈을 찔끔거리며 겨우 반을 마셨지만, 그는 갈증 난 사람처럼 눈 깜빡할 사이에 마시고 뚜껑을 닫았다. “전 장사가 어떻게 죽은 줄 알아요?” “가만, 그 이야기 전에 제철소가 문 닫은 후 어떻게 살았데요?” “나도 궁금해 누님에게 물었더니, 고개 절레절레 흔들며 눈물부터 흘립디다.” 눈물의 사연은 배고픔이었다. 제철소가 1969년 폐업으로 영원히 문을 닫자 권 장사는 갑자기 할 일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좋은 힘을 쓸 데가 없었다. 겨우 앞뜰로 나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300평 남짓 밭에 농사짓고, 소출한 농산물을 리어카에 싣고 시장에 내는 일이 고작이었다. 검은 얼굴이 점점 더 검어지고, 걸음걸이는 점점 더 비척거렸다. 스프링 걸음걸이도, 쇠다마도 손에서 떠나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전 장사를 전설의 인물로 서서히 치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동찬은 시멘트공장 회장이 대한유도협회 회장을 겸해 있어 그 인연으로 공장의 하청업자가 되었다. 기름진 얼굴이 점점 더 허여멀겋게 되어 인물 좋고 풍채 좋은 사장으로 통했다. 전 장사는 날이 갈수록 집을 나서지 않았다. 사람들이 뒷전에서 오동찬과 비교해 비웃는 힐난을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집안에서 하는 일은 막걸리를 마시는 일밖에 없었다. 그래도 제철소에 같이 다니던 동료들이 가끔씩 찾아올 뿐이었다. 그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시름시름 앓더니 하나 둘 죽었다. 그때마다 술 마실 일이 생겨 좋다는 듯 더 술을 마셨다. 유일하게 나가 일하던 앞뜰 밭이 항구개발에 매수되자 전 장사는 돈 걱정 없이 술을 더 마셨다. 그 돈이 바닥이 나자 맥없는 배를 식칼로 그었다. “누님이 연락받고 가보니 피가 방안에 그득하더래요. 그런데도 워낙 큰 덩치고 힘이 좋아 그런지 병원에서 응급조치 후에 살아나더래요. 참, 글 쓰는 양반이니 혹시 일제강점기 때 벌써 우리 마을에 항구를 개발하려 했다는 말 들어보셨소?” “아니요. 그 때도 옆 동네인 정라진이나 묵호가 항구였잖아요.” “그 항구가 작아 제철소 전용 항구를 만들려고 했대요. 또, 전천강을 준설해 원료 싫은 배가 제철소까지 갈 수 있게 설계까지 했다는 거예요.”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하는 겁니까?” “만에 하나 제철소 전용 항구가 생겼다면 전 장사가 좀 더 살지 않았을까요?” “병원에서 살아났다면서요?” “송정마을 전체에 들리는 소리가 불났을 때 소방대에서 울리는 싸이렌, 역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기차 기적소리였지요. 그러다 1979년 항구가 완공 되고부터 방파제를 지나 부두에 접안할 때 내는 선박의 고동 소리가 제일 컸지요. 그런데 병원에서 퇴원하던 그날 밤, 전 장사가 선박의 고동소리처럼 알 수 없는 괴성을 세 번 지르고 난 후 조용하더라는 거예요. 누님이 하도 이상해 가보니 이미 대들보에 목을 매어 축 늘어져 있더라는 거예요. 옛 송정의 전설이 그렇게 사라진 거죠.” 갑자기 시간이 정지된 듯싶었다. 약사도 나도 한 동안 말없이 텅 빈 거리를 내다보았다. 덩치 큰 러시아 선원이 조선족 여인을 따라 약국으로 들어왔다. 청바지를 입은 러시아선원의 커다란 엉덩이와 짧은 셔츠 밑으로 옆구리 살이 삐집어 나온 조선족 여인이 코앞에 보였다. 조선족 여인은 검지로 머리를 툭툭 치며 “두통약 게보린!”을 달라했다. 그들이 짙은 향을 남기고 약국을 나가자 다시 침묵이 흘렀다. “전 장사 누님 덩치는 얼마나 큽디까?” “홍 문사만 하지요.” 우리는 우문우답을 했다는 듯 피식 웃었다. 약국을 나와 송정명동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은 텅 비어 있고, 선술집에서 나온 불빛만이 비쳐져 어두웠다. 그 어둠 속에서 우람한 체구의 전 장사가 스프링 걸음으로 다가오는 환상에 젖어 옆으로 비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전 장사는 먼저 죽은 동료를 만난 듯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우직하고 슬픈 눈을 쳐다보며 떡두꺼비 같은 손을 잡자 내 몸이 허재비가 된 듯 그의 품에 안겨 버렸다. <끝> <단편소설> 창작21 2010년 여름호 발표작
잔치국수 아홉 그릇
홍구보
30년 동안 다니던 직장을 퇴직하자 제일 큰 사단은 잠이었다. TV 연속극이 끝나는 11시가 되면 머릿속이 하얗게 되고, 눈꺼풀을 누가 강제로 잡아당기는 것처럼 더 버틸 재간이 없어 잠이 들어버렸다. 그러나 새벽 3시가 되면 어김없이 눈이 번쩍 뜨여졌다. 평상시는 말할 것 없고, 모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꼭지가 돌 정도로 술을 마신 날 새벽에도 잠이 깼다. 그때부터 고역이 시작되었다. 아내가 깰까 도둑발로 화장실에 가 소변을 찔끔거려 누고, 다시 잠자리에 들어도 바람 나 도망 간 여편네처럼 잠이 돌아오지 않았다. 어찌어찌 뒤척이다 잠깐 눈을 붙이면 코끝에 된장국 냄새가 나고, 아내가 식탁에 밥그릇 놓는 소리가 들리고, 창밖은 훤해져 있었다. IMF 때도 그랬다. 공장장이라는 사람은 ‘구조조정’이란 엄포를 연일 쏘아댔다. 노조는 소금 절인 배추처럼 맥을 못 추고, 아내는 누렇게 부은 얼굴로 눈물을 찔끔거렸다. 나 또한 구조조정 대상이 되었을 때를 대비해 제 1, 제 2의 대안을 세웠지만 하룻밤 새 수십 채 집을 짓고 허는 꼴이었다. 읍소하는 마음으로 엄포가 나만을 피해가기를 비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 뒷걸음질 하다 쥐 잡듯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나에게 생겨버렸다. 바로 글쓰기였다. 반복되는 교대근무와 건조한 일상생활이 켜켜이 쌓여졌을 뿐, 그 세계는 딴 세상 이야기였다. 초등학교 때는 친구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키에 상당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친구들과 선생님은 특별활동 시간에 당연히 운동부에 들어갈 줄 알았지만 나는 ‘글짓기반’에 성큼 들어가 키 큰 불만을 글로 썼다. 그러나 사춘기를 지나고 성인이 되었을 때, 편지는 물론 인터넷 댓글조차 쓰기 부담스러워졌다. 매년 5월 1일 ‘노동절’만 되면 단지 덩치가 크다는 이유로 배구나 줄다리기 선수로 차출되었을 뿐 노동부 주관의 ‘근로자문학제’는 기웃거리기조차 하지 않았다. 그 쪽은 내 큰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쪽이라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지나쳤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해 사월은 달랐다. 오전에는 근무 대신 공장 곳곳으로 다니며 청소하거나 잡초를 뽑고, 오후에는 강당에서 교육을 받았다. 밤에는 사측과 맥없는 노조를 씹으며 소주를 마시고 밤늦게 집에 가도 잠이 오지 않았다. 몸은 지치고, 마음은 죽을 고생을 하던 시기였다. 큰 돼지 한 마리 잡아 매년 치르던 체육행사도 취소되었다. 행사 없는 노동절을 앞둔 사월이었다. 식당 앞 게시판에 붙어있는 ‘근로자문학제’ 광고지를 보게 되었다. 그걸 보는 순간 ‘한 번 응모 해 봐?’ 라는 객기가 생겼다. 입선만 해도 상금은 물론 제주도 여행의 부상까지 주어진다는 문구에 맛이 갔기 때문이었다. 정말 단 하루라도 바싹바싹 말라가는 공장과 집을 떠나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배고픈 놈 제사보다 젯밥에 눈길 더 가듯이 그렇게 어쭙잖은 글쓰기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날부터 당장 글쓰기에 매달렸다. ‘노동자가 노동자 이야기를 쓰는데 뭐 어때?’라는 배포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 때 마침 우리 부서는 공장 전역을 다니며 고철을 줍는 일을 할 때였다. 나는 ‘고철단상’古鐵斷想 이라 제목부터 정해놓고 괴발개발 초고를 썼다. 그걸 몇날며칠 밤잠 안자고 목수가 재목을 톱질하고, 대패질하고, 끌로 구멍 파 짜 맞추듯 다듬기를 반복했다.
출근을 하여보니 우리 조가 오늘 작업해야 할 할당량이 하달되어 있었다. 고철장의 바닥에 파묻힌 잔고철을 모아 빈 드럼통에 넣는 작업이었다. 해는 아직 동녘바다에 멈칫거리고 있었지만 우리는 안전모를 착용하고, 안전모를 쓰고, 안전화를 신고 작업장에 자리를 잡았다. 계절은 봄이지만 제법 싸늘한 날씨였다. <중략> 공장의 거대한 구조물은 깊은 잠에 빠진 듯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30여 년을 밤낮 쉬지 않고 시멘트를 생산 출하하던 공장이었다. 성장일변도의 경기에 내수조차 부족하여 수출은 중단되고 각 시멘트공장은 증설을 거듭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가동 중단사태까지 올 수 있단 말인가. IMF 한파는 백두대간을 가로질러 어김없이 이곳까지 오고야 말았다. <중략> 교대근무에 익숙했던 동료들은 주간근무로의 전환과 수당 실종으로 인한 감봉에 불안해하였다. 처음에는 시간만 나면 모여앉아 IMF의 실체와 이렇게까지 된 원인규명에 각자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정리해고의 당위성과 회사의 존폐위기, 분사 등 자구책 노력에 자기만큼은 빠졌으면 하는 바람이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중략> 이 큰 덩치에 이까짓 잔 고철을 줍는 일까지 해야 하다니! 모두 맥쩍은 마음이 가득해서일까. 으깨어진 외자 박스가 타는 드럼통 옆으로 모여 한겨울의 화덕불 쬐듯이 손바닥을 펼쳤다. 한기가 어느 정도 가시자 이 이상한 국가적 기현상이 자기들 탓이 아니라는 듯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고철에 대한 이야기가 시나브로 나왔다. <중략> 엿장수, 엿판 등 엿에 대한 이야기가 한참 나오다 7, 80년대 경비실에 근무했다는 오 반장의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컸다. 그는 그 시절, 최고 부서가 경비과 였다고 했다. 마치 범죄자를 찾아내는 경찰처럼 경비원은 사규 위반자를 적발하고 보고 처리했다. 무엇보다도 경비실에는 출퇴근 카드를 찍는 타임레코드란 기계가 있어, 경비원의 위세는 대단했다고 했다. 경비원이 요구하면 어느 누구라도 몸수색과 소지품 검사에 응해야만 했다. 인권유린이라는 반발은 감히 엄두도 못 내었다. 퇴근자의 빈 도시락에 구리선과 시멘트가 가득 들어있는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중략>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은 물질의 풍요 속에 살면서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쓰레기대란’이니 ‘음식쓰레기’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만큼 버리는데 익숙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낟알 하나라도 아끼고 고마워했다. 가을햇살에 콩깍지에서 제멋대로 튕겨져 나간 콩 한 알이라도 찾아 모았다. 밥그릇 가장자리에 붙은 밥알 하나라도 버릴 때는 어른께 심한 꾸지람을 들어야만 했다. 또한 집집마다 헛간과 거름터가 있었다. 무엇하나 버리는 것 하나 없이 낡은 것은 헛간에 보관하고, 탈만한 것은 군불 땔때쓰고 그 재는 밭에 내었고, 썩는 것은 거름터에 내어 푹 썩혀 퇴비를 만들었다. <중략> 점심때가 되자 모두 허리를 두드리며 일어섰다. 처음의 어수선한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잘 정돈된 고철장이 되어 있었다. 협협했던 마음도 사라지고 보람도 생겼다. IMF에 대처하는 마음이 고철 줍듯이 한다면 두려울 게 없을 것만 같았다. 우리가 아니었다면 2백 리터 드럼통 4개에 가득 채워진 고철은 영원히 땅 속에 그냥 썩혀질 것이 아니었던가?
다행히 이 글은 입선작으로 채택되어 바라는 바대로 제주도여행을 다녀오는 영광을 안았다. 그러나 행운은 거기서 끝이었다. 여행 내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불안이 현실화 되고 말았다. 내가 속한 부서가 분사分社가 된 것이다. 새로운 회사이름을 지어 담당 과장이 사장이 되었다. 전과 똑 같은 일을 계속했지만 퇴직금이 주어졌다. 노동조합 가입을 원천적으로 허용하지 않았고, 임금도 30% 이상 삭감이 되고, 정년이 기존회사보다 3년이 짧아지는 등 각종 복지혜택도 동결되었다. 사람 마음은 간사했다. 막상 공장에서 영원히 퇴출되지 않은 것에 감읍하다가도 작업복 디자인과 색상이 본청회사와 차별화 되어 지급되자 자존심이 극도로 추락되었다. 대다수 동료들은 새 작업복을 아예 입지 않고, 본청회사의 로고가 새겨진 헌 작업복을 고수하는 걸로 자존심을 지키려 했다. 그나마 나는 ‘근로자문학제’에 입선한 덕으로 문사文士라는 호칭이 계속 따라다니자 그게 뭔 벼슬인 양 어깨에 힘주며 하청회사에 다녔다. 그게 지난 10여 년 동안의 이야기였다.
퇴직 후에도 이 ‘문사’ 덕을 보리라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고기 먹어본 놈이 고기 맛을 알듯이 공모에 한 번 입선하자 글쓰기에 자신감이 생겼다. 백일장이 열리는 곳이면 거리에 구애받지 않고 부지런히 참여했다. 상금을 받으면 모두 책 사는데 투자하고 취미를 아예 운동에서 독서로 바꾸어버렸다. 또, 상금이나 상품이 푸짐한 라디오 편지쇼에도 글을 보내 공중파에 이름 석 자도 입적했다. 꿈도 야무지게 꾸었다. 칠순 때는 그동안 써놓은 글을 책으로 엮어 지인에게 선물로 주자는 꿈이었다. 그러나 ‘문사’란 꼬리표 때문에 수모를 당한 날도 있었다. 골프채 한 번 잡아보지 않은 나를 골프 치는 친구들 모임에 초대한 이는 공기업 이사로 근무 중인 김 군이었다. 그는 불알친구이고 퇴직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는 식의 순수한 의도였다. “홍 문사, 퇴직했다면서? 여 친구들 모였는데, 같이 술이나 한 잔 함세!” 그의 전화를 받고 찾아간 곳은 전통 있는 중화요리집 밀실이었다. 이미 좌중은 불콰하게 술이 올라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친구들은 하던 말을 마저 해야겠다는 듯 건성으로 인사하고, 서로 낄낄거리며 서울에서 부산 가 듯 골프 이야기를 이어갔다. 다들 넉살좋은 입담으로 지지 않겠다는 듯 말꼬리를 잡아 업어 치고 매치고 볶아댔다. 그들은 퇴직한 나를 앉혀 놓고 아직 현역으로 일하는 잘 난 인생을 자랑하고 있었다. “홍 문사, 요새는 글 쓸 시간이 많아 좋겠네?” 떠들썩한 좌중이 잠시 중단되자 김 군이 툭 던진 말이었다. “백수가 글은 뭔 글?” “무슨 소리야? 한 번 문사는 영원히 문사지. 라디오에도 나왔다며?” "근데, 저 떡두꺼비 같은 손에 볼펜이 잡히나?“ “이, 무식하기는? 요새는 다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지.” “아, 독수리 타법?” “근데, 글을 쓰면 돈이 생기나?” “돈? 공부 잘 한 놈들이 돈 잘 버는 거 봤어?” “맞다. 힘 좋다고 싸움 잘하는 것도 아니지.” “그래, 니가 오리 궁둥이면서 골프를 잘 못치는 거나 같네?” 좌중은 다시 골프 이야기로 넘어갔고, 나는 그 틈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났다. 김 군이 따라 나오며 속삭였다. “소싯적에 너한테 맨날 얻어맞던 놈들이 오늘 밤, 돈 좀 벌었다고 흰소리 쳤다고 이해해라. 나는 니 힘보다 글재주를 더 부러워했지만 말야.” 김 군의 덕담에 대꾸할 것도 없다는 듯이 그 자리를 피했지만, 그 날 밤의 수모는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그 수모는 ‘불안’이라는 불에 기름을 붓는 꼴로 잠을 더 못 자게 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아파트 경비직만큼은 일단 접자’라 각오한 것이 흐지부지될 정도였다. 그렇게 묵은지처럼 자신을 삭히던 나날이 지났을 때였다. 그날도 생활정보지의 구인란과 시청 게시판을 보며 체크하던 중 눈에 번쩍 뜨이는 구인 광고를 보았다. 노동부 주관의 ‘사회적기업설립지원사업’에 선정되었다는 ‘시민행복발전소’란 비영리단체에서 문사를 찾고 있었다. 그 단체가 하는 일 중의 하나가 각 마을에 숨어있는 이야기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나는 그 일이 마치 나를 위해 있는 것처럼 자기소개서를 써서 사무실을 찾았다. 실장은 한 눈에 믿음이 가는 얼굴과 듬직한 체구의 40대 초반이었다. 그는 내 이력을 보더니 선생님 같은 분을 찾았다며 반갑게 맞았다. “작은 사연 하나가 명품 마을을 만드는 시대입니다. 개성 있는 대문 하나가 골목길의 정경을 바꾸고, 나무 한 그루 숲 하나로 명품 지자체로 변모할 수 있습니다. 우리 단체는 주민 스스로가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게끔 정체성을 찾아주고, 기획하는 곳입니다. 선생님 같으신 분이 꼭 필요합니다.” 젊은 실장은 명품을 들먹이며 나를 들뜨게 했다. 비록 계약기간은 6 개월이고, 임금은 법정 최저생계비로 책정되었지만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었다. 내가 맡은 일은 국제항구가 있는 ‘송정마을’의 실태를 파악하고, 재미난 이야기를 찾아내 기록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실태를 파악하는 자체가 어려웠다. 옛날 같으면 역전이나 골목에 끌려가 선방부터 맞을 만큼 큰 덩치라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묻기도 전에 경계부터 해버렸다. 가족관계나 방 수, 소득 여부, 이사 온 계기나 년도 등 실태조사서에 적힌 대로 물으면 “당신 공무원이요? 큰 놈 치고 싱겁지 않은 놈 없다더니 별 걸 다 묻네!”라며 피했다. 젊은 실장도 새삼 내 큰 덩치를 보며 실태조사는 여성 회원에게 맡기겠다고 했다. 대신, “선생님, 이야기 수집은 더 어려울 수 있어요. 주민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한 몸이 되어야 거미꽁지에서 거미줄 나오듯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라 당부했다. 또, 수집하는 도중 수시로 이야기를 정리해 글을 써서 보고하라는 숙제를 냈다. 그러나 실장 말대로 주민 속으로 들어가기 쉽지 않았다. 동네를 몇날며칠을 돌며 말이 먹힐 대상을 찾았으나 결국 진창에서 차바퀴 헛돌 듯 했다. 그들에게 나는 개밥의 도토리일 뿐이었다. 시내 상가 쪽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예 물건을 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채고 소 닭 보듯 여겼다. 그러나 사람 사는 동네가 아니던가. 시장통 입구에 있는 ‘항구약국’에 들어갔을 때였다. 약사는 대머리가 시원하게 벗겨졌지만 나이는 많지 않게 보였다. 박카스 한 병을 달라하자 피로회복용 알 약 하나를 서비스로 주며 말을 걸었다. “무슨 일 때문에 우리 동네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십니까?” “재밌는 이야기 좀 찾으려구요.” “그걸 찾아 어디다 쓰려구요?” “엿 봐꿔 먹지 않을 테니 염려 붙들어 매시고, 약사님이 좀 도와주세요.” “글쎄, 증세를 이야기해야 처방할 것 아니요?” “글 쓰려고 그래요.” “글? 좋습니다. 허기사, 말은 뱉어지는 순간 허공에 사라질 뿐이죠. 우리 송정 이야기는 이제 거의 다 전설이 되어가니 빨리 기록에 남겨야죠. 내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 사람들은 술 한 잔 들어가야 무슨 이야기든 술술 나오지요.” “술술 나오는 집이 어딘데요?” “저어기, 시장통 송정집에 가면 아마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 판 벌어졌을 거요.” “불쑥 찾아가, 뭔 말부터 걸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가보면 알거요. 만약에 안 끼워주면 날 팔아요.” 약사는 골치 아프면 자기를 약 대신 쓰라며 처방까지 시원스럽게 내줬다. 시장 입구에 있는 ‘송정집’문을 열자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이 화차를 삶아 먹었는지 귀가 먹먹할 정도의 큰 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천정이 머리에 닿을 듯 낮아 목을 구부리자 그들은 자기들 보고 인사를 하는 줄 알고 묵례로 답했다. 구석 자리에 앉으며 막걸리 한 주전자를 주문하자 그들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입이 근질거려 못 참겠다는 듯 낮게 뱉는 소리가 들렸다. “덩치는 전 장군 만한 게 쪼잔하게 한 주전자가 뭐야?” “키 크다고 전 장군과 비교해?” “저 키는 강호동이 키만 하지만, 전 장군은 이봉걸만 했지. 그러니 마셨다하면 한 자리에서 한 퉁자를 거뜬히 마셨지.” 내 큰 덩치가 그들의 안주거리가 된 이상 기회다 싶어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그들 자리로 갔다. “저, 항구약국 약사가 가보라 해서 왔습니다.” “무슨 일 땜에 그러는 거요?” “그냥 막걸리 한 잔 나누며 이야기 좀 듣고 싶어서요. 그런데 아까 전 장군이라는 분은 술을 잘 마셨는가 봐요?” 그들은 약사 말대로 약효가 들어서인지 자리 하나를 내주었다. 그러나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하던 이야기를 마주 끝내야 시원하다는 듯 다시 목청을 높였다. 항구 중앙부두에 있는 항만청사를 인근 마을로 옮기고, 그 자리에 석회석 저장시설을 짓는다는 소문에 대해 갑론을박이었다. 만에 하나 그렇게 된다면 주민들이 합심 단결하여 끝까지 반대해야 한다. 그러나 기득권자와 그 아류들은 찬성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또다시 동네가 화합은커녕 분열되지 않겠는가. “가만, 그건 그때 가서 다시 논의하기로 하고, 댁이 아까 뭐라 물은 것 같은데?” “조금 전에 언급하신 전 장군이라는 분, 정말 한 자리에서 막걸리 한 퉁자를 다 마셨습니까?” “그럼, 어디 술뿐인 줄 알어? 힘도 장사였지.” “역도나 씨름 같은 운동은 안 했습니까?” “그런 건 안 했어. 타고난 장사였어. 댁 같이 키만 멀대 같이 큰 사람은 그 옆에 가지도 못했지.” 그 후에도 술집에서, 슈퍼 앞 파라솔 밑에서 송정의 이야기를 들었다. 소나무와 정자가 많은 동네라 해서 붙여진 송정松亭은 오랫동안 선비의 고장으로 통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역이 들어서고 인근마을에 북삼화학, 삼화제철, 묵호항 등이 개발되면서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정작 그들이 화려했던 시절이라고 자랑한 때는 60년 대 부터였다. 명사십리와 송림, 전천강이 어우러진 해수욕장, 때마침 이웃 마을에 있는 시멘트공장이 준공되고 매년 증설을 거듭하는 공사가 있어 최고의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70년대에 들어서자 항구개발이란 국책사업으로 서서히 망가지기 시작했다. 해수욕장 일대와 마을 앞으로 드넓게 펼쳐진 옥토, 수많은 집이 항내수면이 되고, 주민이 하나 둘 떠나고 말았다. 항구는 결국 날개 잃은 새 꼴처럼 송정을 만들어, 남아 있는 사람들 가슴 속에 한과 울분만 점점 더 쌓이게 했다. 항구에서 날려 오는 분진 때문에 여름에도 창문을 열 수 없고, 흰 빨래는커녕 장독대의 장 단지를 열어 햇볕을 쪼이게 할 수 없었다. 선박이 입출항 할 때마다 부두 너머 마을까지 지진 같은 진동이 집안으로 들어와 불안하게 했다. 또, 현재 눈앞에 펼쳐지는 일들이 하나 같이 마음에 들지 않다고 했다. 마을 자체가 늙다 보니, 길거리나 상가로 드나드는 행인은 항구에서 나온 외국인 선원이 더 많을 정도였다.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전통의 초등학교는 분교 수준의 학생들이 다닐 뿐이었다. 그들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것들은 이미 전설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분노 때문일까. 화려했던 이야기 뒤에는 꼭 송정의 주먹과 힘 자랑 이야기가 많았다 그중 ‘똥장군’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었다. 이름 가운데 ‘동’자가 들어있고, 장사를 존칭하기 위해 장군이라 붙인 이름이었다. ‘동 말 할 때는 강조하기 위해 똥이라 발음했다 장군’이야기는 송정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었다. 두 장군은 ‘송정집’에서 들었던 전동석과 전국대회 유도부문 메달리스트인 오동찬 이었다. 오동찬의 명성은 그 당시 전국에 알려진 반면 전동석은 골목대장 수준밖에 되지 못했다. 그러나 많은 송정 사람들은 전동석을 이야기 했지, 오동찬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그는 덩치나 힘 어느 쪽도 전 장사와 비교가 안 되었다. 단지, 한식집을 하는 모친 덕으로 먹는 걱정 없이 자라 힘이 좀 세었고, 대학 다니다 운 좋게 메달을 땄을 뿐이라고 평가절하 했다. 그러나 몇몇 사람은 “오동찬이 배운 사람답게 말 잘하고, 점잖고, 예의가 발라 송정 최고의 신사였지 않았냐?” 라 치켜세웠다. “신사? 권력 있고 돈 많은 사람에게는 설설 기고, 약하고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을 무시했고, 무엇보다 고향을 떠난 후 한 번이라도 찾아왔냐?” 라 벌떼처럼 덤벼들며 반박했다. 할 수 없다는 듯 ‘똥장군 이야기’에서 오동찬을 빼고 ‘전동석 이야기’만을 글로 쓸 수밖에 없었다.
전 장군 이야기
송정에는 장사가 유난히 많았다. 그들은 기골이 장대하고, 뼈는 통뼈이고, 어깨가 딱 벌어지고, 가슴팍과 팔뚝에 삼두박근 이두박근이 딴딴하게 들어찼고, 장딴지가 어른 두 손으로 감싸도 안될 만큼 굵었다. 춥고 배고픈 시절에도 이들은 타고 난 힘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운동으로 몸을 단련하는 후배들은 장사들을 자기들 잣대로 평가했다. 힘은 싸움할 때나 써먹는 거며, 일할 때 쓰는 것은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여겼다. “그 형 운동할 때 보니 가빠가 끝내주더라.” “야, 가빠가 좋으면 뭐하냐? 그건 만든 기고, 진짜 심(힘)은 뻑대가 커야 제대로 쓰는 거라구.” “웃기네! 가빠 좋고, 뻑대가 크면 뭐하냐? 싸움할 때는 재빠른 게 최고지.” “돌려 차고, 정권 지르면 뭐하냐? 큰손에 잡히면 끝장인데.” "누가 잡힌데? 심만 세면 뭐하냐? 깡다구 하나 없으면 우리 송정 선배가 아니지.“ 보릿고개를 모르는 후배들은 타고 난 장사가 천성이 착해 싸움 자체를 안 했다며 비하했다. 그러나 생활전선에서 일하는 어른들은 송정의 전동석 장사 덕을 톡톡히 보았다. 60년 대 초 삼화제철소가 돌아갈 때였다. 전기나 용광로 송풍 기술이 없는 대다수 사람들은 하청회사에 적을 두었다. 그들은 고철을 종류별로 분류하거나, 철광석의 미분광을 주먹 크기로 뭉치는 등의 단순노동을 했다. 작업장에는 검은 분진이 풀풀 날려도 마스크를 쓴다거나 장갑을 끼지 않았다. 늘 배고프던 시절이라 힘쓰는 일이 아닌 것만으로 그따위 먼지쯤은 아무것도 아니라 듯 여겼다. 하청 일 중 가장 힘든 일은 분광석을 소결광으로 만들 때 생겨나는 큰 덩어리를 오함마로 깨는 거였다. 다들 두세 번만 오함머를 쳐들어 내리쳐도 입에 단내가 나고 헉헉대었다. 그러나 송정의 ‘전동석’ 장사는 오함마를 아이들 장난감 여기듯 했다. 한 자리에서 스무 번이나 내리쳐도 식은 죽 먹기 식이었다. 땀 하나 나지 않고 덩어리 소결광을 처리했다. 의리를 목숨처럼 여기는 송정사람들은 십시일반 밥이며 막걸리를 추렴해 ‘전’ 장사 배를 곯지 않게 했다. 대신 다른 마을 사람들은 아예 자기들 조에 끼지 못하게 훈기를 주고 똘똘 뭉쳤다. 전 장사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몸집이 유난히 큰 송준모 영어선생이 제자의 큰 덩치를 보고 골려주기로 했다. 유도 유단자인 송 선생은 자신이 유단자임을 감추고 한 판 붙자고 명령을 내렸다. 별 어려운 일이 아니고, 친구들이 부추기던 터라 얼떨결에 송 선생과 마주 선 순간 전동석이 벌렁 자빠지고 말았다. 송 선생이 전광석화처럼 달려들어 업어치기 기술을 걸었기 때문이다. 큰 덩치가 자빠지자 친구들은 송 선생의 기술에 대한 찬사 보다는 허우대가 멀쩡한 놈이 힘도 한 번 못쓰나? 라는 힐난의 비명을 질렀다. 얼굴이 벌겋게 변한 전동석은 송 선생에게 다시 한 번 하자며 졸랐다. 유도나 씨름 기술이 없던 터라 허리띠를 잡고 그냥 한 번 용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그 용은 어머니가 오줌 눈 아이 바지 내리듯 그냥 아래로 힘을 약간 쓴 것에 불과했다. 그러자 송 선생의 기술은 어디 장 보러 가고, 무릎이 그냥 접히면서 엉덩이가 맥없이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때서야 학생들은 ‘그럼, 그렇지!’라며 구경 자리를 떠났다. 전 장사 일화 중에 제일 많이 알려진 것은 ‘잔치국수 아홉 그릇’이다. 어느 날 오후, 명동골목길에서 전 장사와 마주친 후배는 인사를 깍듯이 하고 안부를 물었다. “아이고, 선배님 어디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 대답 대신 검지를 입술에 대며 그냥 지나치자 후배는 뒤따르며 인사를 거듭했다. 그러나 끝내 “오냐!”라는 인사 없이 훠이적거리며 가자 덜컹 겁이 났다. 때마침 전 장사의 친구들이 낮술에 취해 골목길을 좁은 듯 휘저으며 오고 있었다. “아이고, 선배님들 안녕하십니까? 그런데 전 장사님이 무슨 화 나는 일이 있었습니까?” “아니, 조금 전까지 우리랑 같이 있었는데?” “이상한데요. 조금 전에 제가 인사해도 입조심 하라며 그냥 지나치시던데요.” “가만, 말로 그랬어?” “아니요. 손가락을 입에 대며 말없이 지나던데요.” 후배의 답을 듣던 선배들은 골목이 떠나가듯 박장대소 했다. 후배는 점점 더 이상해 웃음이 잦아지자 제발 이유를 좀 알자며 되물었다. “막걸리 반 퉁자에다 잔치국수 아홉 그릇이 목구멍가지 차올랐다는 이야그다.” “예? 뭔 말인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뭔 말인고 하니 말야. 조금 전에 우리들은 전 장사와 함께 철도 관사에 사는 친구 형 잔칫집에 가서 거나하게 대접 받았지. 그런데 우리 전 장사가 잔치국수를 자꾸 시키는 거야. 누가 세어 봤더니 열 세 그릇을 먹더래. 그래서 그건 너무 많으니 남들한테 아홉 그릇 먹더라고 말하자 약속했지. 그런데 잔치국수 먹기 전에 막걸리 한 퉁자 중에 그 친구가 혼자 반 퉁자를 마신 상태였거든.” “하이코, 많이도 자셨네요. 역시 장사구만요. 그런데 왜 조용하라고 손가락을 입에 댔는데요?” “햐, 이 친구 딱하네. 국수가 막걸리에 팅팅 불어 목구멍까지 차올라 말하면 튀어 나올까봐 입을 꼭 다물고 자물쇠 같은 손가락을 댔다 이 말이야. 알간?”
실장은 재미있다며 그 후의 일화를 취재해보라 권했다. 그러나 글로 적은 행적 외에는 어느 누구도 다른 일화를 기억해 내지 못했다. 삼화제철소가 망한 후 다른 직업이 있었는지, 언제 죽었는지 등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었다. 단지 사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주로 외형에 대한 이야기만 들려줄 뿐이었다. “얼굴이 유난히 거무틱틱했지.” “흑인은 아니고 핀리핀 사람들 피부 같았지.” “거보다 태국 사람 같지 않았나?” 또, 걷는 폼에 대해서도 조금씩 달랐다. “떡메 같은 발로 팔 자 걸음이고, 팔도 아령 하듯이 팔꿈치를 꺾어 올렸지.” “팔 자는? 뒤끔치에 스프링 달린 것처럼 아예 땅에 닿지 않고, 앞발로 겅중겅중 걸었지. 그래 걸으면 큰 덩치가 더 크게 보였지.” “손가락은 노상 호두알 굴리며 놀지 않았어.” “호두가 아니고 쇠다마지.” “그래? 내 기억에는 엄지와 중지를 꽈 딱 딱! 소리 낸 것 같은데?” 또, 글 속에 나오는 전 장사의 친구들을 수소문 해 보았다. 그러나 그와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도 하나같이 타지로 이사 갔거나 타계해 근황을 알 수 없다고 했다. 마치 바닷가 과부촌의 남편들처럼 한 날 한 시에 같은 태풍으로 사라진 것 같았다. “맞아, 깜박 잊었네. 그들 전부 삼화제철소에 다녔지. 거기 다닌 사람들 다 일찍 죽었잖아?” “왜 지?” “뻔하지. 그땐 요새처럼 마스크가 있나, 방진복이 있나? 집진시설이 있었나? 그 먼지 구뎅이 속에 일하느라 폐가 시커메 죽었지.” 그들이 다녔다는 삼화제철소는 1943년 일본인에 의해 건설된 남한 최초의 제철소 였다. 해방 이후에는 정부 소유의 공장이었지만 운송난과 원료, 연료 부족으로 가동과 중단을 반복해야만 했다. 급기야 1958년 민간인에게 불하되어 겨우 10여 년 가동되다, 1969년에는 영원히 폐기되고 말았다. 일거리 자체가 없던 시절이라 가동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다녔다. 그러나 근무 환경 자체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고철단상’에서 표현된 ‘해는 아직 동녘바다에 멈칫거리고 있었지만 우리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안전모를 쓰고, 안전화를 신고 작업장에 자리를 잡았다.’ 에 나오는 마스크나 안전화는 상상 자체가 되지 않을 때였다. 또, ‘전 장군 이야기’에 ‘작업장에 검은 분진이 풀풀 날려도 마스크를 쓴다거나 장갑을 끼지 않았다. 늘 배고프던 시절이라 힘쓰는 일이 아닌 것만으로 그따위 먼지쯤은 아무것도 아니라 듯 여겼다.’ 는 전동석의 힘을 강조하는 글이었지 작업환경 따위는 아니었다. 나 못지않게 항구약국 약사도 전동석의 행적을 알고 싶어 했다. 사방팔방으로 수소문해 전 장사의 인척 중 한 분밖에 안 계신다는 누님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어디 가서 사는 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항구약국 약사가 급히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조금 전 전 장사의 누님이 약 사러 왔다 갔어요.” “그래요? 어디 산데요? 뭐 좀 알아봤습니까?” “궁금증이 다 풀어졌어요. 그런데 난데없이 오동찬 이름을 거론했어요.” “전국유도대회 우승한 그 오동찬 씨요? 그럼 두 장사가 친구 사입니까?” “전 장사가 네 살 더 많지요.” “친구 사이도 아닌데, 오동찬을 왜 거론했대요?” “전 장사 누님 말이 오동찬 때문에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했어요.” “왜요?” “뻔하지요. 후배인 오 장사에게는 후배들도 많이 따르고, 수단이 좋아 돈도 잘 버는데, 전 장사는 제철소 하청회사나 다니며 그 좋은 힘을 겨우 먼지 구뎅이에서 함마질이나 한다고 주위에서 놀렸다는 거예요. 일종의 자격지심이라 봐야겠죠.” 약사는 엄청난 비밀을 털어놓는 사람처럼 말문을 닫다니, 약 진열장 밑에 있는 냉장고에서 박카스 두 병을 갖고 와 권했다. 차고 신 맛에 눈을 찔끔거리며 겨우 반을 마셨지만, 그는 갈증 난 사람처럼 눈 깜빡할 사이에 마시고 뚜껑을 닫았다. “전 장사가 어떻게 죽은 줄 알아요?” “가만, 그 이야기 전에 제철소가 문 닫은 후 어떻게 살았데요?” “나도 궁금해 누님에게 물었더니, 고개 절레절레 흔들며 눈물부터 흘립디다.” 눈물의 사연은 배고픔이었다. 제철소가 1969년 폐업으로 영원히 문을 닫자 권 장사는 갑자기 할 일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좋은 힘을 쓸 데가 없었다. 겨우 앞뜰로 나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300평 남짓 밭에 농사짓고, 소출한 농산물을 리어카에 싣고 시장에 내는 일이 고작이었다. 검은 얼굴이 점점 더 검어지고, 걸음걸이는 점점 더 비척거렸다. 스프링 걸음걸이도, 쇠다마도 손에서 떠나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전 장사를 전설의 인물로 서서히 치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동찬은 시멘트공장 회장이 대한유도협회 회장을 겸해 있어 그 인연으로 공장의 하청업자가 되었다. 기름진 얼굴이 점점 더 허여멀겋게 되어 인물 좋고 풍채 좋은 사장으로 통했다. 전 장사는 날이 갈수록 집을 나서지 않았다. 사람들이 뒷전에서 오동찬과 비교해 비웃는 힐난을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집안에서 하는 일은 막걸리를 마시는 일밖에 없었다. 그래도 제철소에 같이 다니던 동료들이 가끔씩 찾아올 뿐이었다. 그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시름시름 앓더니 하나 둘 죽었다. 그때마다 술 마실 일이 생겨 좋다는 듯 더 술을 마셨다. 유일하게 나가 일하던 앞뜰 밭이 항구개발에 매수되자 전 장사는 돈 걱정 없이 술을 더 마셨다. 그 돈이 바닥이 나자 맥없는 배를 식칼로 그었다. “누님이 연락받고 가보니 피가 방안에 그득하더래요. 그런데도 워낙 큰 덩치고 힘이 좋아 그런지 병원에서 응급조치 후에 살아나더래요. 참, 글 쓰는 양반이니 혹시 일제강점기 때 벌써 우리 마을에 항구를 개발하려 했다는 말 들어보셨소?” “아니요. 그 때도 옆 동네인 정라진이나 묵호가 항구였잖아요.” “그 항구가 작아 제철소 전용 항구를 만들려고 했대요. 또, 전천강을 준설해 원료 싫은 배가 제철소까지 갈 수 있게 설계까지 했다는 거예요.”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하는 겁니까?” “만에 하나 제철소 전용 항구가 생겼다면 전 장사가 좀 더 살지 않았을까요?” “병원에서 살아났다면서요?” “송정마을 전체에 들리는 소리가 불났을 때 소방대에서 울리는 싸이렌, 역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기차 기적소리였지요. 그러다 1979년 항구가 완공 되고부터 방파제를 지나 부두에 접안할 때 내는 선박의 고동 소리가 제일 컸지요. 그런데 병원에서 퇴원하던 그날 밤, 전 장사가 선박의 고동소리처럼 알 수 없는 괴성을 세 번 지르고 난 후 조용하더라는 거예요. 누님이 하도 이상해 가보니 이미 대들보에 목을 매어 축 늘어져 있더라는 거예요. 옛 송정의 전설이 그렇게 사라진 거죠.” 갑자기 시간이 정지된 듯싶었다. 약사도 나도 한 동안 말없이 텅 빈 거리를 내다보았다. 덩치 큰 러시아 선원이 조선족 여인을 따라 약국으로 들어왔다. 청바지를 입은 러시아선원의 커다란 엉덩이와 짧은 셔츠 밑으로 옆구리 살이 삐집어 나온 조선족 여인이 코앞에 보였다. 조선족 여인은 검지로 머리를 툭툭 치며 “두통약 게보린!”을 달라했다. 그들이 짙은 향을 남기고 약국을 나가자 다시 침묵이 흘렀다. “전 장사 누님 덩치는 얼마나 큽디까?” “홍 문사만 하지요.” 우리는 우문우답을 했다는 듯 피식 웃었다. 약국을 나와 송정명동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은 텅 비어 있고, 선술집에서 나온 불빛만이 비쳐져 어두웠다. 그 어둠 속에서 우람한 체구의 전 장사가 스프링 걸음으로 다가오는 환상에 젖어 옆으로 비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전 장사는 먼저 죽은 동료를 만난 듯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우직하고 슬픈 눈을 쳐다보며 떡두꺼비 같은 손을 잡자 내 몸이 허재비가 된 듯 그의 품에 안겨 버렸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