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씀도 물론 마음으로 하셨고 나는 아무 거침없이 알아들었다. 부처님의 분부를 받고 구경하러 가는데 어느 사이에 두 보살님은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나는 천천히 걸으면서 극락세계를 걷기 시작하였다. 내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끝없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방금 아미타 부처님을 뵈었던 집을 빼놓고는 건물이 하나 없는 한없이 밝고 넓은 푸른 벌판이 있을 뿐인데, 거기에는 아주 큰 나무들이 띄엄띄엄 서있고, 크고 작은 연못과 동산들도 있으며, 세상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아름답고 큰 꽃들이 많이 있었다. 커다란 개들도 마치 이 쪽 세상의 집에서 기르는 자유로운 개들처럼 사람들과 평화롭게 섞여 살고 있었다.
또 거기에 사람들은 모두가 한가롭고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가만히 앉아 선정에 들어 있는 사람, 혼자 사색에 잠겨 거니는 사람, 여기 저기 띄엄띄엄 두서너 명씩 산책을 하거나 차를 마시는 사람, 누군가 설법을 하고 여러 명이 부담 없이 듣는 장면들이 지나간다. 아무튼 어느 한 곳도 어느 한 사람도 서로서로 방해하거나 신경을 쓰일 일이 없이 다만 풍요롭고 고요하고 한가로울 뿐이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은 모두가 다 앞에서 본 두 분 보살님들처럼 키가 컸다. 더 놀라운 것은 나도 역시 어느 사이에 그 사람들만큼 키가 커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 사람들과 똑같이 천천히 걸으며 구경을 해도 누구하나 말을 거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 빛깔은 모두 연한 색이다. 흰색 . 연분홍 . 연노랑 . 연하늘색 . 연붉은색 등등 ....
나도 그들처럼 여기 저기 구경하며 실컷 놀다가 문득 생각이 떠오른다.
’참 좋다! 춥지도 덥지도, 모자라지도 남지도 아니하고, 슬픔도 괴로움도 도무지 없는 이 세상에 이미 내가 와 있는데, 저 일도 많고 탈도 많고 고통도 많은 물 건너 세상에 뭐 하러 또 가겠는가! 이제 여기에서 살고 저곳엔 그만 가야지!
당시 어린 마음에서 저 세상은 너무 힘든 세상이었다. 그래서 ‘천지에 괴로움이 없고 걸림이 없는 이곳에서 안 가면 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다가도 ’어른 스님들이 절에 돌아오셔서 나의 몸을 보시면 무서워 기절해서 죽었다고 마음 아파하실 것이 아닌가?‘라고 조금은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는데, 두 분 보살님이 나타나시어 말씀하셨다.
“이제 갈 때가 되었다!”
그리고 나를 아미타 부처님께 데려가셨다. 나는 처음처럼 부처님 앞에 서서 세 번 절을 하고 꿇어앉았다. 부처님께서 약간 눈짓을 하시니 옆에 서있던 시동이 무슨 곡식이 반 가마 정도 담겨있는 묵직한 자루를 한 개 들고 나와서 옆에 놓았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물 건너 쪽 세상을 가리키면서 말씀하셨다.
“저기에다 이 씨앗을 다 뿌리고 오너라.”
가리키는 건너편을 바라보니,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고 바위들만 있는 악산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대신 뿌리고 오라고 부탁하고 그대로 남아 있고 싶어 궁리를 했지만 마땅히 부탁을 할 사람이 없어 ‘부처님의 당부이니 내가 한 번 더 나갔다 오는 것이 좋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이미 아시고 고개를 끄덕이시고 빙그레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잘 뿌리고 오너라.‘
잘 뿌리고 오겠다고 삼배를 올렸다. 절을 하고 일어서니 보살님 한 분이 자루를 드시고, 우리 일행이 올 때 건넜던 강가에 서게 되었다. 이번에도 역시 보살님 한 분이 손짓을 하니 극락에서 놀던 새들이 올 때처럼 다리를 놓아 주어 새의 등을 밟고 물을 건넜다. 그 하얀 흙이 깔린 길을 들어서니 아직도 그 나무에서 풀포기까지 그 족자들이 그대로 있었다.
고개를 다 넘어 절에 도착 한 뒤, 처음 보살님들을 만났을 때와 같이 그분들은 마당에 계시고 나는 마루에 올라서자 내 키는 다시 본래처럼 작아져 있었다.
⓸ 수많은 사람에게 한 자루의 불씨를 뿌리다.
그분들은 큰 팔을 길게 뻗혀 곡식이 든 자루를 큰방 뒤 구석에 자연스럽게 내려놓으신 뒤 잘 뿌리라는 듯이 한번 빙긋이 웃으시며 돌아서 가셨다. 두 분 보살님들은 돌아가실 때는 갈 때와 달리 마치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처럼 동쪽 하늘을 향해 움직임이 없이 미끄러지듯 날아가셨다. 나는 합장을 하고 동쪽으로 한 없이 날아가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면서 생각했다.
’저분들은 본래 저렇게 날아다니시는데, 인간인 나를 데리고 다니기 위해 길을 만들고 다리를 놓고 걸어서 가셨다가 걸어서 여기 제자리까지 데려다 주신 뒤, 날아서 가시다니! 참으로 거룩하고 감사 합니다!‘
돌아서 들어와 우선 그 자루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하여 열어보니 아주 굵고 깨끗하여 벌레 하나 먹지 않은 붉은 팥이 가득히 들어 있었다.
’아! 참으로 좋은 씨앗이로구나! 어디에다 뿌려도 한 알도 허실이 없이 싹이 잘 나오겠구나!‘
이렇게 자루에 든 씨앗을 확인한 후에 긴 꿈에서 깨어나 보니 잠을 잔 시간은 한 시간도 채 못 되었다.
그 뒤 대학을 다니고 구족계를 받으며 열심히 공부하고, 우리 절 불사하느라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포교하고 다녔다. 어느 날 논산훈련소에 법당을 지으신 자광 스님이 군종참모로 있을 때 군에서 강의를 좀 해달라는 부탁이 있어 많은 군부대를 다니면서 강연을 하였다. 그런 인연으로 전두환 정권 때 삼청교육대 가서 강연을 하고, 비무장지대에 있는 10년 이상 정치범들만 수용하는 곳에 가서도 강연을 하였다. 그 뒤 20여 년 넘게 교도소, 군부대, 경찰, 전.의경, 일반 중.고등학교, 대학교, 불교 교양대학, 일반 부녀자단체, 노인대학 등등, 인연이 주어지는 대로 지칠 줄도 모르고 뛰어 다니며 자신이 아는 만큼 부처님 말씀을 전했다. 한 번 가면 수 백 명, 수 천 명의 청중들이 모여들었는데 나는 많이 올수록 신이 나서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20~30년을 그렇게 다니다 어느 날 갑자기 강연에서 할 말이 없어졌다. 어디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고, 그전에는 10시간이라도 하며 재미가 있었는데 그런 생활이 재미가 없어지고 강단에 설 마음이 싹 사라져 버렸다.
“참 이상하다. 왜 이렇게 할 말이 다 떨어졌지?”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그때서야 그 팥 자루가 생각났다. 옛날 팥 1000개와 쌀 천 숟갈 가지고 떡을 해먹으면 천석궁이 된다고 해서 팥을 세는 것을 봤다. 보통 한 홉에 팥이 1000개, 한 되면 10,000개, 한 말이면 10만개, 80Kg 한 가마니면 80만개쯤 될 것이다. 계산해 보니 강의 듣는 사람이 바로 아미타불께서 주신 팥 한 자루 숫자만큼 다 찼던 것이다.
’아! 이제 드디어 아미타 부처님이 명하신 팥 한 자루를 다 뿌렸구나. 이제 나는 언제든지 이 몸을 벗으면 세 번째 극락을 가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지난날에도 그랬지만 이런 계산이 끝난 뒤로 하루하루가 즐겁고 편안하고 걱정이 없다. 극락갈 선근과 복덕을 다 지었는데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기도를 하게 되면 처음에는 부처님을 향하여 기도를 시작 하지만 한참을 하다가 보면 부처님도 절도 지구마저 다 없어지고 텅빈 허공에서 그때의 그분들과 같이 있음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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