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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제2공화국과 제2제국(3)
제2제국
제국은 질서와 안정을 의미하고 동시에 자유의 유보를 의미하였다. 1789년 이래로 프랑스의 역사는 질서와 자유의 조화를 찾아 헤맸으나 신통한 처방을 찾지 못한 셈이었다. 제2공화국은 자유의 과잉 속에서 질서를 잃었다가 이제 나폴레옹 3세의 권위주의 제국(l'Empire authoritaire)의 출현과 함께 질서의 체제 안에서 자유가 유보되었다. 그렇다면 질서 안의 자유, 자유 안의 질서는 프랑스에서 하나의 헛된 꿈에 지나지 않을까? 질서와 자유 어느 하나도 희생시키지 않고 둘을 동시에 실현할 수는 없을까? 현대 프랑스에서 이 문제를 가장 심각하게 생각한 시기가 바로 제2제국 시대였다. 그 이유는 1789년 이래의 온갖 시도가 다 좌절되고, 사람들은 그 문제를 관념적,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실제적, 현실적으로 숙고하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 위치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제2제국은 1860년대에 국민의 자유를 점차 확대해 가다가 1870년에 이르면 이른바 자유 제국으로 발전하게 된다. 드디어 질서와 자유의 조화가 실현된 듯하였다. 그러나 그 자유 제국은 몇 달 뒤에 망하고 제3공화국이 탄생하였다. 프랑스는 다시 자유의 과잉 속에 질서를 상실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제3공화국은 여러 번 위태로운 고비를 극복하면서 자유와 질서를 동시에 확보하는 데 드디어 성공한다. 이 성공의 지혜가 1789년 이래 열망과 좌절의 반복을 통한 역사적 경험에서 얻어진 것이었다면, 그런 지혜를 프랑스 국민에게 결정(結晶)시키는 시기가 제2제국 시대였는지도 모른다.
1852년 12월의 제국 헌법은 1년 전에 이미 골격이 다 완성되어 있었다. 공화국 대신에 제국, 대통령 대신에 황제라는 명사만을 바꾸어 넣으면 그만이었다. 또 그 헌법은 하원(Corps legislatif)을 보통선거에 의하여 선출하는 것 이외에는 1800년 나폴레옹의 통령 정부 헌법 그대로였다. 보통선거제는 1793년 헌법이 사상 초유로 제정한 바 있었으나 한 번도 실시해 본 일이 없다. 제2공화국이 처음으로 실시하게 된 제도인데, 그 후 어떤 체제의 정부도 보통선거제만은 거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의 하원은 보통선거에 의하여 구성되기는 했으나 기능은 국민주권의 원리를 무시한 것이었다. 우선 의원 수가 700여 명에서 260명으로 대폭 감소되고, 회기도 1년에 석 달 이내로 제한되고, 의회는 법률의 발의권이 없고 참의원(Conseil d'Etat)이 발의한 법안에 대한 표결권만이 있고, 의장의 선출권도 의사록의 공개권도 없었다. 의장은 황제가 임명하고 새 선거구도 황제에게 유리하게 책정하고 정부의 선거 간섭이 공공연하였다. 그러므로 하원 의원 자체가 거의 전부 제국 지지파였다.
상원(Senatus consultum)은 전직 고관들 중에서 황제가 임명하고, 임기는 종신이고, 중요한 임무는 개헌권이었다. 상원이 개헌을 공고하면 국민투표로 확정하기로 하였다. 나폴레옹은 헌법에 관한 것은 황제와 국민 사이의 문제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는 국민 대표 기관인 하원을 국민 의지의 대표로 보지 않았다. 국민 의지는 국민투표에만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그는 헌법에 관한 사항이 하원에서 논의된다면, 하원은 언젠가 반드시 제국을 전복하는 혁명을 일으킬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생각은 1789년 이래의 역사에서 얻은 정확한 판단이었다. 그래서 그는 개헌권을 상원과 국민투표에만 부여했던 것이다.
황제는 대신들을 비롯한 모든 관리의 임면권, 군 통수권, 선전과 강화의 외교권을 다 장악하였다. 거기에다가 자기는 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 공화국 헌법 준수의 서약을 파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입법부 의원, 대신들과 모든 관리에게 황제에 대한 충성 서약을 요구하였다. 양심적인 공화파 의원들은 서약을 거부하고 의원직을 사임하였다. 그들은 비록 소수였으나 그 영향력은 컸다. 그러나 그들이 사임함으로써 나폴레옹은 더욱더 제 맘대로 하원을 움직일 수 있었다.
1인 독재의 권위주의 제국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자유를 탄압하였다. 경찰을 강화하고 모든 클럽과 정치 활동을 탄압하고 국민방위대를 해산하고 언론을 극도로 통제하고 교육을 엄격히 규제하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활발한 정치 활동과 언론이 있을 수 없음은 당연하였다. 일간지가 1853년 말에는 14종으로 격감하였다. 이제는 정치를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문학이나 철학에 관한 출판물들이 늘었다.
정치와 언론은 크게 위축되었으나 다른 분야의 활동은 그렇지 않았다. 1860년까지의 제2제국은 1851년 말과 1852년 말의 국민 투표에 찬성한 사람들의 기대를 능가할 만큼 경제적 번영과 외교적 성공을 거두었다.
1853-1855년의 콜레라의 유행과 흉작, 1854년의 세계적 불황 등의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경제는 토건 사업에 자극된 상대적 번영을 1860년까지 계속하였다. 1855년엔 대박람회를 파리에서 열어 프랑스의 산업발전과 제2제국의 안정을 세계에 과시하였다. 이러한 안정과 번영은 7월왕정 말기 및 제2공화국 시대의 불황과 불안정에 대조가 되었다. 더구나 사람들은 보통선거와 국민투표를 통하여 자기들은 국민주권을 향유하고 있다는 착각에 도취해 있었다.
내치의 성공은 외교에도 나타났다. 영국과의 우호 관계가 다시 수립되었다. 황제는 삼촌 나폴레옹 1세의 가장 큰 실책이 반(反)영 정책이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삼촌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영국과의 우호 관계를 외교정책의 기본으로 세웠다. 이것은 제2제국 외교의 ‘리버럴’한 일면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나폴레옹 3세는 크림 전쟁에 영국과 함께 참전하여 전제주의의 나라 러시아를 항복시키고 1856년에 파리에서 열국평화회담을 열었다. 유럽 열강이 파리에서 회담을 갖기는 1822년 이래 처음 있는 일인데, 그때의 프랑스는 떳떳치 못한 위치에 있었으나 이번에는 당당한 전승국가의 하나였다. 1856년의 프랑스의 국제적 위신은 나폴레옹 1세의 제1제국 이래 절정에 달하였다. 국민이 보나파르키슴이라는 요괴에 홀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나폴레옹 3세의 권력은 두 차례의 쿠데타에 힘입은 것이었으므로 국민의 자유 박탈에 대한 보상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보상은 경제적 번영과 외교의 성공이었다. 쿠데타에 의한 권력이란 어디서나 합헌성과 정통성이 없기 때문에 언제 전복될 지 알 수 없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그 존립을 위해서는 항상 뭔가 잘 하고 있다는 갈채를 국민으로부터 계속 받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그런 갈채가 그치는 날이면 권력은 불안해진다. 그리고 국민은 그 권력을 지지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게 된다. 나폴레옹 3세는 경제적 번영과 외교의 성공에서 그런 갈채를 받고 있었다. 특히 외교적 성공이란 군사적 승리와 함께 일반 국민의 눈에 잘 띄는 현란한 것이다. 여기서 나폴레옹 3세는 크림 전쟁 후에도 계속 외교적 성공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크림 전쟁 다음으로 그가 추구한 외교적 목표는 이탈리아 통일 문제였다. 보나파르트 가문은 본래 이탈리아 영토였던 코르시카 출신이고, 황제는 젊었을 때 이탈리아의 카르보나리(Carbonari)당에 관계하여 1831년에는 로마냐의 폭동에도 가담한 일이 있었고, 또 그의 사상 가운데에는 민족주의란 좋은 것이라는 일종의 신비스러운 이상주의가 항상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러한 요인들이 작용하여 그는 결국 이탈리아의 통일을 위하여 뭔가 돕고 싶다는 생각을 굳혔다. 1853년에 결혼한 황후 외제니 몽티조(Eugenie de Montijo)가 만년에 황제의 생애를 회고하면서, 황제가 겪은 불행의 원인은 그가 항상 지나치게 될 내셔널리즘에 기울어져 내셔널리즘의 기치를 너무 분명히 한 데 있었다고 말한 일이 있다.
1858년 1월에 이탈리아의 민족주의자 오르시니(Felice Orsini)의 황제 암살 미수사건이 일어났다. 그 후 사형수 오르시니가 황제에게 이탈리아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헌신해 줄 것을 애절하게 호소하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나폴레옹 3세는 그 상소문을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공개하게 하였다. 그 상소문은 세상에 큰 충격을 주고 이탈리아 청년들의 민족주의에 불을 붙였다. 상소문을 공개하게한 황제의 조처는 틀림없이 이탈리아의 민족운동을 도우려는 사려 깊은 표현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 일이 있은지 몇 달 뒤인 1858년 7월 황제는 카보우르(Camillo Benso Cavour)와 플롱비에르의 비밀조약을 맺어, 사르데냐 왕국에 의한 북부 이탈리아의 통합과 교황을 원수로 하는 이탈리아 연방의 수립을 약속하고, 그 대가로 이탈리아의 사보이와 니스를 프랑스가 얻기로 하였다. 이탈리아의 민족주의 운동에 가장 큰 장애물은 오스트리아였다. 그러므로 프랑스와 사르데냐 왕국은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에 선전하였다.
전쟁이 일어나자 북부 이탈리아의 나라들만이 아니라 중부 이탈리아의 나라들까지도 사르데냐 왕국으로의 합병을 국민투표로 결정하였다. 이것은 나폴레옹 3세의 계획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사르데냐 왕국이 중부 이탈리아까지 합병할 경우 프랑스의 동남쪽에 너무나 강대한 왕국이 출현하게 된다. 그리고 교황을 정상으로 하는 이탈리아 연방안이 무산되고 교황은 사르데냐 왕국의 영향을 받게 된다. 이것은 교황과 세계 모든 나라의 가톨릭을 격분하게 할 것이다. 프랑스의 가톨릭은 이탈리아 전쟁에 크게 반발하였다. 더구나 프로이센군이 라인란트 지방으로 진주할 움직임이 보였다. 여기서 나폴레옹 3세는 사르데냐와의 플롱비에르 조약을 무시하고 단독으로 오스트리아와 빌라프란카 강화조약을 맺었다. 프랑스는 롬바르디아 지방을 오스트리아로부터 할양받아 그것을 사르데냐 왕국에 주기로 하였다. 빌라프란카의 휴전은 나폴레옹 3세의 명백한 배신 행위였다. 따라서 그것은 오히려 더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통일에 대한 열망을 부채질하였다.
그런데 나폴레옹3세는 이탈리아 전쟁에서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 그의 국내외의 인기만 하락했을 뿐이었다. 그는 매우 불안하여 어떤 방법으로든지 사보이와 니스를 얻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여기서 그는 중부 이탈리아의 토스카나와 모데나의 사르데냐 왕국으로의 합병을 승인하는 대가로 사보이와 니스를 얻기로 하였다. 거기서 1860년 봄 사르데냐 왕국은 북부 및 중부 이탈리아의 통일을 성취하였다. 이제 남은 일은 남부 이탈리아와 교회령의 합병이었는데 이것도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의 헌신적 노력의 결과 이듬해 완성을 보았다. 이제는 이탈리아 왕국에 아직 편입되지 않은 땅은 로마와 베네치아뿐이었다.
사르데냐 왕국 중심의 이탈리아 통일 왕국의 탄생은 나폴레옹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통일은 따지고 보면 그의 실책에 의해 촉진된 것이었다. 사보이와 니스의 획득은 나폴레옹 1세의 실각 이래 최초의 영토 획득으로서 프랑스 국민의 국민주의적 허영심을 일시 만족시킬지는 몰라도, 이탈리아의 통일이 프랑스의 이익에 얼마나 배치되는가를 그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독일도 이탈리아도 계속 분열시켜 그들의 힘의 약화를 유지하는 것이 프랑스의 외교정책의 오랜 전통이었다. 1829년에 폴리냐크는 그의 메모에 독일이 하나 또는 두 나라로 통일되는 날에는 그것이 프랑스의 강력한 적대 세력으로 변하여 프랑스의 상대적 힘이 심각하게 약화될 것이라고 기록한 바 있는데, 그의 견해는 독일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이탈리아에 관해서도 들어맞는 말이었다. 앞으로 이탈리아 통일은 유럽의 세력 균형에 큰 변화를 일으키고 프랑스의 상대적인 힘에 영향을 미치게 될 터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통일은 나폴레옹 3세와 교황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이는 프랑스의 가톨릭에게 황제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철회토록 하였다. 황제는 모처럼 쌓아올린 자신의 지지 세력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또 이탈리아 국민은 나폴레옹 3세에게 감사하기는커텽 오히려 교황을 지키기 위해 로마 시에 주둔하고 있는 프랑스군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로마 시를 통일 왕국의 당연한 수도로 여기고 있었는데, 그것이 아직 교황령으로 남아 있는 것은 프랑스의 방해 때문이라고 불평했던 것이다.
이제 나폴레옹 3세는 정책의 전환이 불가피하기ㅔ 되었다. 리버럴한 대외 정책은 결국 ‘리버럴’한 대내 정책을 불가피하게 했던 것이다. 그는 1853년에 “자유가 항구적인 건설의 기초를 닦는 데에 도움이 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때가 되어 건물이 든든해지면 자유의 관을 그 위에 씌우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 일이 있다. 7년 후 이제 그는 프랑스의 정치에 자유의 관을 씌울 수 있을 만큼 그 건물이 든든해졌다고 판단했는지 모르겠다.
그는 18660년에 영국과 통상협정을 맺고, 이듬해에는 벨기에, 이탈리아, 스위스와, 1862년에는 프로이센과 각각 상업 협정을 맺어 프랑스의 전통적인 보호 정책에서 자유무역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무역정책의 전환은 지주와 제조업자의 반대를 받았으나 영국과의 우호 증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외국 제품과의 경쟁에 이기기 위한 사업의 집중, 시설의 근대화, 경영의 합리화, 노동조건의 개선 등에 의하여 프랑스 산업의 건전한 발전과 수출의 증대를 초래하였다.
동시에 황제는 가톨릭의 지지 상실을 메우기 위하여 좌익과 타협하였다. 1859년에 정치범에 대한 특사와 언론통제의 완화를 시도하고, 1860년 11월에는 의회의 권한 확대 조처를 취하였다. 11월 24일 칙령의 내용은 이러했다.
상하 양원의 의사록은 전문 출판 공개할 수 있고, 매년 황제의 연두 교서에 대하여 의회가 토론과 답신을 할 수 있고, 정부는 의회를 대표하는 무임소 장관을 임명하고, 의회의 법안 수정권을 증대한다.
이듬해 1861년에는 의회의 국가재정 관할권을 넓혀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주의 개혁은 나폴래ㅔ옹의 지지 세력을 증대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그 반대 세력에게 더 많은 자유를 안겨줄 뿐이었다.
1857년 선거에서 공화파의 일부가 황제에 대한 충성 서약을 하나의 형식으로 간주하고 의회로 진출하기로 하여 다섯 명의 공화주의자가 의석을 차지하였다. 이들은 황제의 이탈리아 정책과 자유무역 정책을 환영했으나, 제정에 대한 반대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공화파는 증대 일로의 노동자의 지지를 얻어 그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한편 우익의 왕정파와 가톨릭의 교권주의도 제국을 위협하였다. 이들은 1863년 선거에서 공화파와 연합하여 자유 연합(Union liberal)이라는 야당 세력의 공동전선을 펼쳐 35석의 의석을 얻었다. 의석 수는 많지 않으나 자유 연합이 얻은 득표 수는 무려 200만에 이르렀다. 더구나 파리, 리옹, 마르세유 등의 대도시에서는 거의 전부 공화파에 투표하였다.
자유주의 개혁은 프랑스 제2제국의 적의 힘을 더 길러주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여당 안에서도 자유주의 개혁을 둘러싸고 의견이 충돌하여 분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더구나 황제는 노쇠해 가고 병환으로 정력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황제는 자기의 지지 세력을 노동자에게서 얻으려고 1863년에는 노동자의 ’60인 선언‘을 승인하고 노동자의 결사법을 제정하게 했다.
’60인 선언‘은 노동자의 이익을 위하여 노동자 자신들이 그 대표자를 의회에 보내야 한다는 선언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노동 입법은 그 자체로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것이었으나 나폴레옹의 정치적 목적에 얼마나 기여했는가는 매우 의심스럽다.
제2제정의 위세가 이렇게 약화되어 가면갈수록 나폴레옹 3세는 한결 더 초조하게 어떤 외교적 승리를 찾아야 햇다. 그는 이탈리아 통일의 대가로 사보이와 니스를 얻었듯이, 독일통일 문제에 개입함으로써 라인란트 지방이나 벨기에의 일부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렇게만 되면 국내문제에서 야당에 양보하지 않고도 견딜 수 있었다.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는 1863년 폴란드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러시아를 도와 그 운동을 탄압하여 러시아의 우호적인 중립을 확보한 후, 1864년에는 덴마르크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에 개입하여 1865년 가슈타인 협정을 맺고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 이기면 독일연방의 주도권을 쥐고 독일통일을 성취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프랑스가 개입하면 큰일이었다. 비스마르크는 1865년 10월 나폴레옹 3세와 비아리츠에서 회견하여 프랑스의 중립을 약속받았다. 이때 나폴레옹은 비스마르크에게 이탈리아와의 동맹도 무방하다고 언명하여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 바싹 다가섰다. 그런데 나폴레옹 3세는 비스마르크와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비아리츠 회담 몇 달 뒤 오스트리아와 조약을 맺고 비스마르크는 1866년 4월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고 이탈리아의 중립을 보장하였다. 나폴레옹의 이러한 이중 행동의 동기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속이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여, 그동안 독일과 오스트리아 양쪽 사이를 왕래하면서 프랑스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나 그의 판단은 완전히 빗나갔다. 프로이센과 이탈리아의 동맹군은 1866년 6월 오스트리아와 싸워 불과 7주 만에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 신속하고도 결정적인 승리에 놀라지 않은 사람은 없었지만 누구보다도 놀란 것은 나폴레옹 3세였다. 이때 그가 라인란트를 신속히 점령했더라면 라인란트를 얻을 수 있으련만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은 끝났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요청에 응하여 휴전을 중재하였다. 그는 오스트리아에게 베네치아를 얻어 그것을 이탈리아에 할양해주고 프로이센의 팽창을 마인 강 북안으로 한정시켰다. 프로이센은 북부 독일연방을 창설하여 그 맹주가 되었다. 프로이센의 다음 목표가 프랑스를 친 후 남부 독일을 합병하여 독일통일을 완성하는 일이라는 것은 이제 누구의 눈에도 명백하였다.
프랑스의 동쪽에는 이제 강대한 통일 제국이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폴리냐크의 메모대로, 그 변화는 프랑스의 상대적 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 틀림없었다. 이 변화의 결과 프랑스가 얻은 것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 승리하자 벨기에의 현상 유지를 주장하여, 나폴레옹이 비밀 제의한 벨기에 합병안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나폴레옹 3세는 독일 문제에서 비스마르크의 외교 수완에 거의 농락당하다시피 한 셈이었다. 나폴레옹 외교의 참패였다. 나폴레옹의 인기는 이제 떨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의 인기를 한층 더 악화시킨 것은 멕시코 원정의 실패였다.
새로 수립된 멕시코 공화국에 채무의 지불을 강요하기 위하여 1861년 말 프랑스는 영국 및 스페인과 공동으로 멕시코에 출병하였다. 얼마 후 1862년 4월 영국과 스페인은 철군햇으나, 나폴레옹 3세는 신대륙에 라틴 가톨릭 제국을 수립함으로써 식민적 이익을 추구하는 동시에 교황 및 프랑스 가톨릭교회와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엉뚱한 계획을 세웠다. 그는 멕사코 시를 점령하여 오스트리아 황제의 아우 막시밀리안(Ferdinand Maximilian) 대공을 라틴 제국 황제에 즉위시켰다. 그러나 남북전쟁의 종결과 함께 미국이 먼로주의(Monroe Doctrine)의 원칙에 따라 프랑스군의 철수를 강력히 요구하고, 또 멕시코 공화파의 저항이 매우 완강하고, 그리고 독일 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유럽의 국제 정세가 긴박해지자,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군을 철수시켰다. 멕시코에 파견된 3만 8,000명의 프랑스군은 6,000명을 잃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1867년 6월 막시밀리안도 멕시코에서 붙잡혀 처형되었다.
독일 문제에 잇달은 멕시코 원정의 실패로 프랑스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실망의 밑바닥에서 국민의 여론을 다소나마 유화하려고 나폴레옹 3세는 부득이 야당의 요구에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67년 초 그는 의회가 대신들을 불러 국정에 관한 질의를 할 수 있는 질의권(interpellation)을 의회에 부여하였다. 1860년 11월의 의회의 권한 확대이래 수차에 걸친 자유주의 개혁의 하나였다. 그리고 이듬해 1868년 5월에는 신문지법을 개정하여 언론에 더 많은 자유를 주었다. 이 새 신문지법으로 150개의 신문이 새로 발행되었는데 그중 120개가 반정부지였다. 1851년 12월의 쿠데타 반대의 폭동에 연루되어 방명 중이던 위고(Victor Marie Hugo)가 귀국하여 발간한 <르 라펠(Le Pappel, 나팔)>과 극좌 과격파의 들레클뤼즈(Louis Charles Delescluze)가 발행한 <르 레베이유(Le Reveil, 각성)>가 가장 맹렬한 반정부 신문이었다. 온건 공화파 계통의 <르 시에클(Le Siecle, 세기)>이 발행 부수 4만 4,000으로 최고의 부수를 자랑했는데, 로슈포르(Victor Henri Rochefort, 등)>의 창간호는 기대했던 1만 5,000부를 훨씬 넘은 12만 부가 팔렸다. 정부는 여러 모양으로 반정부지를 탄압하고 재판에 회부했으나 언론재판은 오히려 반정부 세력을 더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1868년에 보댕에서 있었던 젊은 변호사 강베타에 대한 재판이 가장 좋은 예로서, 이 재판을 통하여 강베타의 명성이 일약 전국적으로 퍼졌다.
한편 1867년의 의회 개혁과 함께 의회가 점차 독립적인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한 에를 들면,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프로이센의 결정적인 승리에 놀란 황제가 닐(Niel) 원수를 국방상에 임명하여 국민방위대의 훈련 기간을 한 해 넉 달로 늘리고 전시에 정규군으로 동원하려는 이른바 ‘닐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는데 우익은 예산의 과다 지출을 이유로 좌익은 군비 증강 자체를 기피하는 경향에서 원안의 넉 달을 15일로 대폭 수정하였다. 이 닐 법안의 대폭 수정이 앞으로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참패하게 되는 주요 원인의 하나가 되거니와 어쨌든 1860년 말엽의 프랑스 의회는 황제와 그 정부의 말을 잘 듣지 않게 되었다. 그만큼 정부의 권위가 추락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1869년 선거에서 더욱 명백해졌다.
1869년 선거에서는 종래의 선거와는 달리 여당 후보가 별로 위력이 없고 지방에 따라서는 오히려 당선에 지장이 되었다. 파리를 비롯한 많은 도시에서는 아예 여당 후보의 출마가 없었다. 파리에서는 27명의 야당 후보가 모두 여당 후보와의 경쟁 없이 당선되었다. 젤딘(Theodore Zeldin)의 분석에 의하면 1869년의 투표에서 여당 후보자의 득표가 약 435만, 명맥한 야당이 약 290만, 제정에 호의적인 야당이 약 75만이었다고 한다. 그 결과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는 야당이 292석 중 116석을 얻었고, 이 116석 중 명백한 야당이 88석이고, 그중 공화파가 30석이었다. 이러한 선거 결과는 나폴레옹에게 권력구조의 획기적인 개혁을 독촉하는 것이었다. 그는 1870년 1월, 1858년 이래 공화파로서 의석을 지켜오고 있던 올리비에(Emile Ollivier)에게 조각을 위촉하고 의회와 황제에 이중으로 책임을 지는 헌법의 개정을 의뢰하였다. 새 헌법이 5월 8일 국민투표에 부쳐졌다. 찬성이 735만이고 반대가 157만이었는데, 전년 선거에서의 야당 표 365만에 비하면 이 국민투표의 결과는 주목할 만한 변화였다. 즉 자유 제국에 기대를 걸어보려는 국민이 많이 늘었다고 볼 수 있었다. 국민이 어떤 자유를 얼마나 향유할 수 있느냐가 문제이지, 국가 체제가 공화정이냐 왕정이냐 혹은 제정이냐는 본질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가진 국민이 많아진 것이다. 국가 체제는 비록 제국이지만 그 제국이 자유를 주는 제국이라면 구태여 반대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는 생각을 가진 국민이 늘고 있었다.
그런데 올리비에 내각에는 좌우 두 파가 있었다. 우파는 자유 제국으로 만족하는 데 반하여 좌파는 의회적 제국(l'Empire parlementaire)를 고집하였다. 이 좌우 두 파의 협동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는지 퍽 의심스러웠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자유 제국의 이론에는 심각한 모순이 있는 것 같았다. 자유 제국의 새 헌법은 황제도 내각도 잭임을 진다고 선포하고 있지만, 내각이 황제에 대하여 책임을 지면서 어떻게 동시에 의회에도 책임을 질 수 있는지, 그리고 황제의 국민에 대한 책임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하는 문제가 심각하게 헌법 이론으로 제기되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에서는 모순이 아니었다. 1870년의 자유 제국은 의회 정치를 수립한 것이 아니었기 땜ㄴ이다. 제국의 자유 헌법은 19세기의 영국 헌법에 비교될 것이 아니라 17세기의 영국 헌법에 비교되어야 한다. 17세기 영국에서는 국왕은 군림하는 동시에 통치하였고, 대신들은 국왕에 대해서도 의회에 대해서도 신임을 얻어야 했다. 의회는 국왕에게 대신들의 진퇴를 강요할 수 없었고 국왕은 의회가 불신임한 대신을 그대로 유임시킬 수 없었다. 정부는 국왕의 정부이고 국왕은 언제든지 의회를 해산하여 국민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는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1870년의 제2제국의 자유 헌법은 “국왕은 군림하지만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리를 긍정한 헌법이 아니었다. 황제는 의회의 신임을 받은 의원들 가운데서 대신을 선임하게 되어 있지만 황제권의 고삐를 대신들에게 이양하지는 않았다. 각료 회의 의장직을 황제 자신이 집행함으로써, 나폴레옹은 황제권의 고삐를 내각에 이양하지 않고 종전과 마찬가지로 직접 통치를 계속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였다. 대신들은 황제의 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황제의 대신들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의회의 다수에 의해 채택된 것이면 무엇이든지 황제 자신의 정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하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대신들은 황제에 대해서도 의회에 대해서도 신임을 얻고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들은 종전에는 최고급 관료로서 개별적으로 황제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고 있었지만, 새 헌법 하에서는 의회의 다수파의 대표자들로서 의회에 대해서도 집단적으로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리고 황제의 책임은 의회도 내각도 초월한 것이었다. 황제는 국민이 선출하기 때문에 그 책임은 국민에 대해서만 지게 된다. 국민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는 표현은 매우 막연한 것이기는 했으나, 만일 나폴레옹이 국민에 대한 책임을 포기했더라면 그는 의회의 의자에 의한 황제가 되었을 것인데, 그렇게 되면 제위는 의회에 의하여 좌우되는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왕조의 교체와 혁명에 길을 열어주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런데 보나파르티슴은 혁명 없이 자유를 확대하려고 했으므로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새 헌법은 황조의 문제는 의회의 권한 밖으로, 즉 국민과 황제와의 사이의 문제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혁명 없이도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한 자유 제국은 1789년 이래의 현대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과제를, 즉 질서와 자유의 조화를 어떻게 실현하느냐 하는 과제에 하나의 건설적인 해결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유 제국의 수명은 너무나 짧았다. 자유 헌법이 국민투표로 확정된 지 불과 70일 만에 프로이센과 전쟁을 하게 되었고, 전쟁이 시작된 지 불과 45일 만에 제2제국은 무너졌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유 제국의 수명이 그렇게 짧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쟁이 없었더라도 제국은 조만간 무너졌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은 대개가 공화파 계통의 역사가들의 주장으로서 제2제국에 대한 적의가 그 밑에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이들 주장에 대한 당부는 어떻든 간에, 제2제정 말기의 프랑스의 제반 사정이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기에 충분할 만큼 어지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황제의 건강은 날로 더 쇠약해 가고, 그의 측근들 사이에는 의견이 분열이 더 커지고, 황제의 통솔이 느슨해지는 만큼 일반 관기(官氣)가 해이해지고, 권력층의 부정부패 현상이 일반에게까지 폭로되고 있었다. 파리 시가의 재건에 공로가 컸던 황제의 측근 오스만(Georges-Eugene Haussmann)이 독직 사건으로 센 도지사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던 일이나, 공화파의 언론인 누아르(Victor Noir)가 황제의 사촌 피에르 공작에게 저격당해 사망한 사건 등은 당시의 사회 풍조를 반영하는 대표적인 스캔들이다. 언론통제의 완화에 따라 반정부 세력이 강화되고, 혁명 단체들과 비밀 조직들이 정부의 눈을 파아여 여기저기 생기고, 노동운동도 상당히 활발해져서 1870년에는 파업 진압을 위하여 군대가 동원되어야 할 정도였다. 노동문제의 해결을 위해 군대가 동원된 일은 제2제국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런 사회 풍조 속에서 각계의 유능한 젊은이들이 반체제 진영으로 몰렸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였다. 이들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패배 소식 속에 제정의 소멸과 공화정의 수립을 알리는 정변에 찬성했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공화정의 건설에 앞장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