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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턱, 아들은 팔 불구
증언자: 손명선(여, 처), 김철수(남, 아들)/ 김영민(남편) (당시 나이 32세)
직 업: 가정주부(현재 가정주부)
조사일시: 1988.11
1980년 5월 22일. 화정동 신학대학 부근.
시민군과 대치중이던 계엄군이 갑자기 인근 주민들을 향해 총을 쏘아댔다. 이 날 열려진 2층 창문을 통해 날아온 M16 총알에 5살 난 어린 아이와, 아이를 안고 있던 엄마가 함께 부상당한 김영민 씨 가족의 증언이다. 부인은 한쪽 턱이 떨어 져 나갔고 아들은 손목에 총상을 입었다. 김씨는 당시 직업군인이었던 가족을 간병하면서 목격한 통합병원내의 참상까지 증언하고 있다. 아들의 미래에 대해 증언자 부부가 많은 걱정을 하였으므로 이들 가족의 이름은 모두 가명으로 정리했다.
가정집을 향해 M16 갈겨...
조사자가 부상자의 집을 방문한 날은 10월 말이었지만 무척 더운 날씨였다. 부인이 내온 주스를 마시면서 자연스럽게 얘기가 시작됐다.
부인은 당시의 일을 상세히 말해주는 것이야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그로 인해 혹시 나이 어린 아들에게 어떤 해가 미칠까봐 못내 걱정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의구심을 남편 김영민씨가 먼저 말끔히 없애준 후 독백처럼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날'의 얘기를 시작하였다.
"'세월이 가면 잊혀진다'고 사람들은 그렇게들 쉽게 말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둘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선명하게 떠오르면서 당시의 일들이 가슴에 못이 되어 박히는 느낌을 받습니다. 물론 잊어버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지만 사랑하는 내 가족이 계엄군의 총에 찢기워졌다는 생각이 떠오를 적마다 치밀어 오르는 적개심을 주체하기도 힘이 드는데, 어찌 그날의 아픈 상처가 쉽사리 기억에서 없어지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다가도 5·18 때 먼저 가신 수많은 분들을 떠올려보면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내 처지가 한탄스럽다가도 유족들을 생각하면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만도 고맙고 다행한 일이라 여겨져요 . 5·18로 인해 새겨진 가슴의 상처를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되새기듯 말씀을 잠시 중단하고 멀리 창밖을 응시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당시 나는 직업군인으로 송정리 비행장에 근무하고 있었어요. 그날도 아침에 출근하면서 아내에게 사태가 심각하니 집 밖에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나갔어요."
1980년 당시 화정동 신학대학 건너편에는 아직 집들이 들어서지 않아 빈터가 많이 있었다. 사고를 당한 날은 22일이었다. 전날 광주시내에서 퇴각당한 계엄군이 외곽지역 으로 밀려나 신학대학을 기점으로 송정리 쪽에서는 계엄군이, 반대편에서는 시민군이 대치하고 있었다. 이날 손씨는 아들 철수를 데리고 나가 옆집 대문 앞에서 동네 아주머니들과 그 간 시내 각처에서 발생한 사건에 관해 들은 바를 얘기하고 있었다.
아들과 함께 총에 맞아
오후 4시경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총을 쏘면서 시내 쪽으로 진입했다.
"처음에는 앞쪽에 있는 시민군을 향해서만 총을 쏘더니 갑자기 우리들을 겨냥해서 총을 쏘는 거야. 우리가 모여서 얘기하던 바로 옆 집이 우리 집인데, 거리상으로는 10미터밖에 되지 않지만 그 상태에서는 도저히 집으로 갈 수가 없어서 아이를 데리고 그 집 2층으로 뛰어갔어. 7, 8명이 2층 방에 엎드려 있었지. 계속해서 총을 다다다... 쏘데. 총소리가 나니까 다섯 살짜리 아들이 겁에 질려 우는데 아무리 달래도 그치지 않아서 아이를 안고 일어섰어. 그 방 창문이 열려 있었는데, 열린 창문을 통해 사람이 보이니까 군인들이 집중사격을 해댄 거야. 내가 총에 맞고 쓰러지자 그 방에 엎드려 있던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다른 방으로 도망을 가는데, 그래도 아들은 나를 잡고 엄마! 엄마! 울부짖으며 도망가지 않았어. 핏줄이 뭔지.... 쓰러지는 순간 친정엄마와 아들 생각만 나고 남편 생각은 안나드만."
계면쩍은 표정으로 남편을 보며 웃었다.
M16 총알이 손명선씨의 왼쪽 턱을 맞추고 뒷목으로 관통해 엄마를 안고 있던 철수의 오른쪽 팔에 박혔다. 급박하고 위험한 상황이었으므로 남을 돌봐줄 여유가 없어 같은 방에 있던 동네 사람들은 다른 방으로 가버리고, 손명선 씨는 방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총 맞은 부위에서 계속 피가 쏟아져 방은 온통 붉은 피로 물들여졌으며 손씨는 실신해 버렸다. 계엄군들에게 쫓겨 나중에 그 집으로 들어 온 청년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턱의 상처를 우선 감싸놓았다. 나중에 공수들이 집집마다 수색하면서 그 집 대문을 발로 차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도 대문을 열어주지 않자, 담을 넘어 들어와 집안을 다 뒤지고 청년들이 보이면 개머리판으로 내려치고 발로 차서 거의 실신상태에 이르면 끌고 갔다. 계엄군이 총에 맞아 실신해 있는 손씨를 상무대로 질질 끌고 갔다. 계엄군이 휩쓸고 지나간 뒤 잠잠해 진 틈을 타서 옆방에 숨어 있던 어떤 아주머니가 나와 보니 애엄마는 없고 아이만 피를 흘리면서 울고 있었다. 옆집에 살던 아주머니가 아이를 업고 상무대로 뛰어 가보니 손명선씨는 복도에 버려져 있었다. 그 곳에 있던 군인을 붙잡고 "왜 이렇 게 방치해 두느냐, 빨리 통합병원으로 옮겨서 치료해 달라"고 하자, "피를 너무 많이 흘리고 상처도 너무 커서 치료해도 가망이 없다"고 했다. "이 아이도 팔에 총을 맞았는데, 저기 쓰러져 있는 아줌마의 아들이다"고 하자 군인이 생각해도 안돼 보였는지 "알았다"고 하면서 통합병원으로 아이와 함께 후송했다. 통합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고 아이와는 분리되어 있었다.
한쪽 턱이 날아가 버리고
"내가 깨어보니 어둑어둑하데. 군의관을 붙들고 글씨 쓸 것을 달라고 손으로 흉내를 냈어. 한쪽 턱이 날아가버렸으니 말을 할 수 있어야지. 군의관이 필기도구를 가져다주었어. 내 아들은 어디 있느냐고 썼더니 저쪽 방에 있으니 걱정 말라는 거야. 그래서 내 남편이 공군이라 비행장에 근무하고 있으니까 연락을 해달라고 했지. 깜짝 놀라더니 알았다고 하드라고. 하도 목이 마르고 갈증나서 물 좀 달라고 또 썼어. 그랬더니 군의관이 지금 물 먹으면 죽는다고 하면서 가제 손수건에다 물을 적셔서 입만 닦아주데. 그것만 해줘도 살 것 같드만."
"비행장에 있는데 전화가 왔어요. 누구냐고 하니까 통합병원에 근무하는 군의관 장아무개라고 하면서 큰일났다는 거예요. '당신 가족이 다쳤는데 지금 오지 않으면 다시는 못 볼 것 같다'고 하잖습니까? 누구를 붙들고 얘기할 수도 없고 마치 영화 한 편이 지나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때 심정은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다시 상무대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때가 오후 8시쯤 됐는데 당신 가족이 다쳐서 통합병원으로 옮겼다는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어요. 시국이 혼란스럽고 시내도 시끄러운 상태라 그날 밤은 갈 수가 없었어요. 통합병원으로 아주 힘들게 연락을 해서 군의관한테 이러이러한 사람을 찾아봐달라고 했어요. 군의관 말이 '여자가 두 명 있는데, 한 명은 총이 복부를 관통해 죽었고, 또 한 사람은 총이 목에서 턱으로 관통했는데 살아 있다. 헌데 다섯 살짜리 어린 아이를 데려다가 이 사람이 너희 엄마냐고 물어보니까 아니라고 한다'는 거예요. '그럼 복부를 관통해 죽은 사람이 엄마냐'고 하니까, '모른 다'고 했다는 거예요. 지금이야 시간도 지나고 이야기니까 그렇지 그날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요. 비상계엄령하라 밤에는 나갈 수도 없고 정말 밤이 그렇게 긴 줄은 몰랐어요. 밤을 꼬박 새우며 연병장을 도는데 비참한 쪽으로만 생각이 흘러가는 거예요. 평소에는 연병장 한 바퀴를 도는데 3분이나 5분 정도면 되거든요. 그런데 그날은 아무리 돌아도 1분도 안 걸려. 그렇게 밤을 새우고 아침이 되어 사복으로 갈아입고 지프차를 타고 가는데 아무리 빨리 달려도 기어가는 것 같아요. 운전병을 재촉해서 통합병원 정문으로 들어갔어요. 응급 실도 여러군데가 있었는데, 군의관을 만나 신분을 밝히고 우선 아들부터 찾으러 갔어요. 병실에 들어가 보니까 아이가 침대에 누워 있는데 완전히 피투성이여, 피투성이...."
허공을 바라보면서 계속 담배를 피워대던 김영민씨는 끝내 울먹이는 목소리로 잠시 후에 계속하자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묵주만 돌리고 있던 부인도 흐느끼면서 목욕탕으로 뛰어갔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조사자도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슬픔과 분노를 주체할 수 없어 눈물이 나왔지만, 이런 모습을 보이면 오히려 좋지 않을 것 같아 냉정을 찾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잠시 후 김씨가 손에 화장지를 들고 나왔다.
"미안합니다. 그때 생각을 하면 제가 이렇게 감정을 주체 못 해요. 기가 막힐 일이지! 자식이 그렇게 됐을 때 어느 부모가 억장이 무너지지 않겠어요. 사람으로 느낄 수 있는 최악의 상태였어요. 철수야! 하고 부르니까 '아빠'하면서 달려 와 꼬옥 엉겨붙는데 그 심정은 뭐라고 얘기할 수도 없어요. 병실을 둘러보니 이 건 뭐 아수라장이야. 혼이 나가버릴 것 같더군. 우리 아이는 온몸이 피에 젖어서 머리카락은 엉겨붙은 채 삐죽삐죽 서 있었어요. 아이가 밤새도록 우니까 군의관이 건빵을 한 봉 줬나봐요. 얼굴은 눈물자국과 피로 범벅이 돼 있고 건빵 봉지를 얼마나 거머쥐었는지 다 부스러져 있어요. 어른이 쥐어도 그렇게 되기는 힘들 거예요. 그것을 보니 눈물을 흘리고 할 정신도 아니예요. 아이를 안고 군의관과 함 께 한쪽 턱이 날아가버린 여자가 있다는 병실을 향해 가는데 참 기가 막힙디다.
기가 막혀 이건 뭐 내가 발이 땅에 닿아서 가는 건지, 아니면 공중에 발이 떠서 가는 것인지 도무지 구별을 못 하겠어요. 5월이라 날씨가 무척 더웠어요. 날씨 탓도 있겠지만 응급실을 향해 걸어가는데 등줄기를 타고 땀이 줄줄 흘러내립디다. 그곳에 도착해 보니 문을 열어놨는데 복도고 어디고 환자가 천지에 널려 있고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는데 웬만한 사람 찾으러 갔으면 그냥 나와버리겠어요. 즐비하게 누워 있는 사람들을 쭈욱 살펴보니 저 쪽에 옆으로 드러누워 있는데 옷을 보니까 애엄마 같아요.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들추어보니 애엄마가 맞드라 이거여. 그때 정신이 나간 것처럼 멍해지고 완전히 긴장이 풀리면서 '살긴 살았구나' 라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나참 기가 막혀서....
정신을 가다듬고 자세히 살펴보니까 얼굴이 말이 아니에요. 왼쪽 턱이 완전히 떨어져 나가버리고 턱이 없으니까 위아랫니도 그 쪽은 하나도 없어요. 왼쪽 턱이 없으니까 균형이 안 잡혀 자꾸 오른쪽으로 쏠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왼쪽 광대뼈를 뚫어서 오른쪽 턱하고 철사로 연결해 고정시켜 놨드라고요. 그 모습이 얼마나 끔찍한지 아이가 지 엄마 아니라고 한 것이 당연하다 싶었어요. 애엄마도 옷이야 뭐야 온통 피범벅인데 뒷목 부근에 구멍이 뚫려 있고 머리카락은 피와 흙이 덕지덕지 붙어 있어요. 아마 군 인들이 집에서 상무대로 옮겨갈 때 다리만 잡고 끌고 갔나봐요. 그러니까 머리카락에랑 옷에 흙하고 소나무잎 같은 것이 진탕 묻어 있지. 애기는 우선 찢어진 부위만 응급처치 해 놨는데, 그래도 두 사람 모두 살았으니 천만다행이다 싶습디다."
그 날부터 20여 일 동안 통합병원에서 김영민씨는 아내와 아이의 간병을 했다. 일반인들이 통합병원에 와서 자기 자식이나 남편의 생사여부만을 확인하게 해 달라고 애원해도 정문을 지키고 있던 공수들에게 단호히 거절 당했는데, 이 가족의 경우는 남편이 당시 직업군인이라는 특수한 신분 때문에 통합병원에서 퇴원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 가능했다. 다른 환자들과는 달리 남편이 곁에서 간병을 해주니까 정신적으로 안정되고 조금 더 편하기는 했겠지만 턱을 다쳐 말도 못 하고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등 남다른 고통이 있을 것 같아 손명선씨께 그때 상황에 대해 말해줄 것을 부탁했다.
"군의관한테 남편에게 연락해 달라고 쪽지를 써주고는 또 정신을 잃은 것 같아 요. 아무튼 총에 맞고 쓰러진 후부터는 기억이 가물가물해. 차를 타고 상무대로 갔는지 공수들이 끌고 갔는지도 모르겠고 나중에 옆집 아줌마한테 들어보니까 상무대에서 통합병원으로 후송될 때 링게르를 꽂고 갔다고 하데. 나는 그런 사실도 전혀 모르겠어. 중간중간 정신이 들 때마다 상처로부터 오는 통증 때문에 받은 고통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도 없어요. 턱뼈가 없으니까 입도 못 움직이지, 이를 철사로 묶어놓으니 음식을 하나도 먹을 수 없지. 참말로 고통스럽데. 그 상황에서 누가 죽을 끓여줄 수도 없으니까 통 먹지를 못했어. 배는 고프지, 통증 때문에 잠을 잘 수도 없지 참말로 죽겠드만. 통합병원에서 가끔 쌀죽이 나오면 가제 수건 같은 것을 얻어다 쌀죽을 거기다 넣고 짜서 빨대로 빨아 조금씩 먹었어. 그나마 죽도 어쩌다 한 번씩 나오니까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서 물만 빨아 먹었지요. 다른 사람들은 입은 성한께 씹어먹는디...."
군의관 부족으로 응급처치만 받아....
부인과 아들 두 사람 모두 응급처치만 했기 때문에 통합병원에서 재수술을 했다. 손씨는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해볼 수도 없어 얼굴 형태만 망가지지 않게 철판을 넣어 고정시키는 수술이었고, 아이는 손목의 찢어진 곳만 우선 꿰매고 엑스레이를 찍어놨는데 의사들이 사진을 볼 시간이 없었다. 환자들은 피투성이가 돼서 계속 밀려드는데 의사는 절대적으로 부족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그때 20여 일간 통합병원에서 병간호를 하고 있으면서 의사에 대해 달리 생각했어요. 평소에 병원에 진찰받으러 가보면 배나 한번 톡톡 두드려보고 약이 나 주면 그만인 사람들이 의사였는데, 통합병원에서 고통을 못 이겨 환자들이 여기저기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북새통 속에서도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는 모습은 정말 눈물겹도록 감동적이었어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된 환자들이 실려오면 거기에 붙어서 최선을 다하는데도 끝내 죽어버리니까 땅바닥에 주저앉아 낙심하는 모습을 보고 의사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어요."
여러 차례의 수술과 후유증
"병원에 있은 지 보름 정도 지났을 때, 아이가 '팔목이 아프다'고 하면서 계속 우는 거예요. 이상스럽게도 팔이 퉁퉁 부어오르는데도 의사들이 찍어놓은 엑스레이를 쳐다보고 있을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어요. 아이가 계속 울어대니까 '안 되 겠다' 싶어서 과장을 찾아가 '아이 손목을 한번 봐달라'고 부탁했어요. 과장이 와서 아이 손목을 이리저리 만져보더니 뭐가 들어 있다고 하면서 꾹 누르니까 고름이 툭 튀어요. 핀셋으로 뽑아내서 보니 M16 탄피 하나가 박혀 있었어요. 애는 아파 죽는다고 난리예요. 다섯 살 먹은 아이의 팔목에 탄피가 들어가 있어도 의사가 발견하지 못할 정도라면 그 당시 병원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믿어요. 과장이 아이한테 미안하다고 하면서 '엣따 이놈 고생 많이 했 구나. 너 장가갈 때 색시한테 보여줘라' 하면서 탄피를 줘서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어요."
5월 22일 통합병원으로 와서 6월 13일경에 전대병원으로 두 사람 다 옮겼다. 그곳에 입원해 있으면서 애기는 손목에 박힌 파편을 뺄 수 있는 데까지 제거하고 손씨도 인조뼈를 사서 고정시키는 수술을 2번에 걸쳐서 했다.
전남대병원에서는 통합병원에서 임시방편으로 얼굴 형태가 망가지는 것을 방지 하기 위해 상처부위에 넣어서 고정시켜 둔 철판을 빼내고 인조뼈를 사용해 턱을 만들어넣는 수술을 했다. 의사는 엉치뼈를 떼다가 이식수술을 할 수도 있고 인조 뼈를 수입해다 하는 방법도 있는데, 환자의 엉치뼈를 이식하려면 2번의 수술을 해야 하는데 몸이 쇠약해졌기 때문에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인조뼈를 사서 넣기로 결정하고 미국에다 신청했다. 미국으로 신청한 인조뼈가 도착하자 수술준비를 했다. 먼저 왼쪽 턱에 들어있는 철판을 제거하고 비뚤어진 턱과 얼굴 모양을 바로 잡는 일이 수개월 걸렸다. 그해에 아무튼 3번인가 4번인가 수술을 했다.
그해 11월 말 퇴원한 후에도 통원치료를 받으면서 점차 형태를 교정하는 작업을 했다.
철수도 전남대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팔목에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팔목뼈가 상해 있고, 팔을 자라게 하는 '영양공급막'이 팔목 양쪽에 하나씩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파괴돼 버렸다. 그때까지도 손목에 수없이 많은 파편이 박혀 있어서 제거 수술을 여러 차례에 걸쳐 하며 뺄 수 있는 것은 가능하면 다 뺐는데 신경과 연결 된 곳에 박힌 것은 빼내지 못했다.
턱뼈 이식수술을 하고 나서 손씨는 개인병원을 찾아가 왼쪽 위아래 틀니를 했다. 헌데 그것이 하나도 맞지 않아 음식을 전혀 씹을 수 없어 '지역개발협의회'의 지원으로 다시 했는데도 통증이 심해 전대병원으로 가서 또다시 의치를 했다 . 1980년도에 전대병원에서 턱 모양을 바로잡고 이식수술했을 때 턱의 위치는 똑 바로 돌아왔는데 인조뼈가 맞지 않아 1982년 7월 다시 조선대병원에 입원했다.
이식수술한 인조뼈를 다시 뜯어내고 차츰차츰 턱 모양을 바고잡고 재이식수술을 했다. 조선대병원에서 철수는 손목에 박혀 있던 또 한 개의 파편을 빼냈다. 전남대병원에서도 액스레이상에 박혀 있는 파편이 나타났지만 신경 깊숙이 들어 있어서 포기했었다. 자라나는 아이라 해가 바뀌면서 파편이 조금 움직여 신경과는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제거수술을 한 것이다.
"조선대병원 정형외과장이 찾는다고 해 갔더니 아이의 팔이 더 이상 자라지 않을 거라는 말을 합디다. 영원히 불치병으로 생각하라는 거죠. 이런 날벼락이 또 어디 있겠어요. 다섯 살짜리 팔이 자라지 않은 상태로 어른이 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생각했던 것보다 문제가 훨씬 심각했어요. 나는 애엄마나 애기가 여러 차례에 걸쳐 수술을 받았으니까 퇴원하면 점차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두 사람 다 갈수록 심해요. 애엄마는 왼쪽으로는 음식도 먹지 못하고 상처부위뿐만 아니라 어깨, 허리까지 아파서 거의 기동을 못 해요. 백화점에 하루 쇼핑이라도 갔다오고 나면 3일간은 꼼짝 못 하고 앓아 누울 정도로 허약해졌어요. 다친 후로는 소화기관에도 이상이 생겨 계속 내과에 다니면서 약을 복용하고 정신과에도 찾아가서 진찰을 받는 형편이니 이건 완전히 병신 다 됐어요. 아이의 팔이 더 이 상 자라지 않을 거라는 말을 듣고 그동안 정말 밤잠 못 자고 고민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 팔목만 들여다보면서 왼쪽 팔과 비교하는 일을 지금까지도 되풀이하고 있어요. 8년 전의 상태에서 완전히 성장을 멈춰버린 것은 아니고 팔목 바깥쪽에 있는 뼈는 정상적으로 자라는데 안쪽에 있는 뼈가 성장이 훨씬 더디다 보니 반듯하게 팔이 펴지는 게 아니라 바깥쪽의 뼈가 팔꿈치로 밀고 나가 팔꿈치 바깥쪽이 툭 튀어나왔어요. 그러니까 팔이 구부러졌어요. 총에 맞은 오른쪽 팔이 훨씬 가늘고 똑바로 펴지지도 않아요. 밤에 자다가도 고통에 못 이겨 밤새 몸부림 치는데 이런 날은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 때문에 우리 부부는 한잠도 못 자고 설치지요. 게다가 이런 날이 한두 번이 아니예요. 이런 고통들이 날이 갈수록 덜 해져야 정상일텐데 어찌 된 일인지 갈수록 심해지니 이건 뭐 남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세월이 약이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게 된다'고 얘기하지만 날이 갈수록 건강은 악화되고 심적 고통은 겹겹이 쌓여가니 하루하루 사는 것이 고통스럽게 여겨져요. 물론 5·18 당시 총에 맞은 상처, 즉 외상은 아물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상처 그 자체이고 그에 따른 후유증은 이루 다 말할 수도 없어요. 백번 양보해서 어른이 겪는 아픔은 이미 많은 세월을 살았으니까 운명이라 생각하고 이겨 나간다고 할 수 있지만 어린아이의 장래를 생각할 때 눈앞이 캄캄해요. 당시 정부시책이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했지만 우리 부부는 하나만 낳아 남들보다 훨씬 건강하게 잘 길러 뒷바라지도 남부럽잖게 해서 훌륭한 자식을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5·18 때 다쳐서 불구가 되셨거나 사망하신 분, 또 그 유가족 여러분들을 생각할 때 무척이나 가슴 아프고 안됐지만, 그래도 내 가족은 목숨이라도 구했다는 것을 다행이라 생각해요. 앞으로 어떻게 악화될지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살아있다는 자체만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사실 명절 때 성묘 가서 조상님께 보살펴줘서 고맙다고 몇 번씩 절을 하고는 해요."
지옥 같은 병원, 가족 이상의 동료의식
"5월 22일 부인과 아들이 다쳤다는 연락을 받고 23일 통합병원으로 가셨는데, 부상당하지 않은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병원 체류가 허락되었을 거예요. 하나같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환자들 속에서 성한 사람으로서 그들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되었을 것 같은데, 그 소감을 듣고 싶고, 또 병원내의 상황이나 환자들에 대해 기억나시는 대로 자세히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것은 나 개인적인 생각인데, 화정동에서 군인과 시민군이 대치해 있을 때 통합병원이 시민군 수중에 들어가 있으니까 그곳을 군인들이 써야 되기 때문에 여러차례의 공방전 끝에 통합병원 있는 데까지 진출해서 병원을 그들 관리하에 두고, 또 병원까지만 진출하면 광천동 공단사거리까지 시민군이 나타날 수 없는 상황이에요. 왜냐하면 거의 진흥원 부근까지 내리막길인 데다 직선으로 툭 터져 있으니 계엄군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쌍방간에 그곳에서 싸움이 치열했던 것 같아요.
22일 8시경에 아내와 아들이 다쳤다는 연락을 받았어도 그때는 비상계엄령하이기 때문에 밤에 나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23일 아침에 통합병원으로 갔는데, 내가 병원 앞에 도착했을 때도 시민군과 계엄군이 서로 총을 쏘고 있었어요. 내가 탄 차가 통합병원 입구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군인들이 새까맣게 있었어요.
그런데 화정국민학교 앞쪽의 지대가 높은 곳에서 총소리가 나자 계엄군들이 병원 앞 도랑으로 엎드리느라고 야단이에요. 차에 있으면서 그 광경을 봤지요. 이렇게 통합병원을 사이에 두고 양측이 공방전을 벌이다보니 신학대 앞에서 통합병원 바로 밑의 피정센타로 들어가는 길까지 거리상으로는 얼마 안 되지만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희생당했던 거예요. 내가 아는 사람 5, 6명 정도가 그곳에서 부상 당했어요.
5·18 광주민중항쟁 당시 병원에 20여 일간 있으면서 본 상황을 뭐라고 설명하면 가장 적합할까, 지옥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아마 그런 상태일 거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어요.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으로 갈기갈기 찢어진 몸둥이를 부여 잡고 살려달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사람,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없는 사람, 두 눈이 다 없어져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사람, 이런 환자들은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어요. 물론 내 가족도 2명이나 다쳐서 누워 있었지만 그 당시는 우선 살아 있는 것이 다행이고 고맙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요. 그곳에 있던 환자들 중에는 정말 딱한 사람이 많았어요. 가족들의 면회나 간병도 일절 금지됐기 때문에 눈이 없고 팔다리가 없는 환자들을 돌봐줄 사람이 따로 없으니까, 같은 환자 중에서도 조금 상태가 좋은 사람들이 중환자들의 대소변을 다 받아내고 그들의 손발이 되어서 도와주는 거예요. 그토록 눈물겨운 광경이 또 어디 있겠어요. 다들 고통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했지만 환자들끼리 한가족 이상의 애정과 동료의식을 느끼며 하나가 되었지요. 그래도 몸이 성한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내 가족 이외의 환자들의 뒤치다꺼리도 도맡아서 했죠. 내 가족도 두 사람이나 다쳐서 누워 있었지만 옆에 있는 환자들을 보면 정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어요. 진짜 눈 뜨고는 못 볼 상황이었어요. 더 웃기는 것은 다쳐서 고통받는 것도 분하고 억 울한데 거기다 죄인 취급받으면서 병원생활을 하기란 올바른 정신이 박힌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고문이었습니다. 어느 한 사람 붙들고 하소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누가 와서 위로의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느끼는 고립감은 그 때 그곳에 있었던 사람이면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모두들 힘든 상태에 있었지만 서로가 서로를 위로해야만 할 정도로 그때 상황이라는 것이 처참했어요. 우리 가족은 세 사람이서 함께 살다 두 사람이 다쳐서 병원에 있으니 내가 집에 있을 수도 없고 하여 병원에 같이 있었는데 잠을 잘 만한 빈 공간이 없었어요. 침대도 부족하여 환자도 땅바닥에 밀쳐져 있는데 성한 사람이 편히 누울 자리가 어디 있었겠어요? 설사 침대가 있었더라도 옆에서 아파서 죽는다고 하면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데 잠인들 오며 밥은 또 입으로 들어가겠어요? 병원에 있는 동안 속옷 한번도 갈아입지 못하고 그 더위를 보냈으니 지금 생각하면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아요. 통합병원에 입원했던 사람들을 만나봤으면 그때 상황에 대해 얘기 들었겠지만, '사람을 그렇게 잔인하게 때리고 총을 몇 번씩 되쏴서 초죽음을 만들어 놓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면 분명 그들은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라 미치광이든지 아니면 짐승이라는 확신이 서요. 이 총을 쏘면 저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뻔히 아는 군인들이 어떻게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쏘아댔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전쟁 때 적에게나 하는 짓이지. 적도 손을 들면 쏘지 않는 법인데 손을 들고 항복해도 총을 갈겨버리는 짓을 되풀이해서 그렇게 많은 시민을 죽어가게 했는지 정말 생각할수록 의문스러워요. 나는 직접 5·18 당시 시내에서 목격했다든지 참여한 적은 없지만 통합병원에 들끓는 환자들을 보고서 직접적인 상황을 겪은 것처럼 피부로 느낄 수 있었어요. 그 잔학성이나 비인간적인 작태를 눈으로 확인했으니까요. 사람으로서는 두번 다시 생각하기도 싫고 다시 보고 싶지 않는 기가 막힌 사건들이에요. 내가 그렇게 오래 살지는 않았어도 크나큰 역사적인 비극을 겪고 개인적으로도 가정이 파탄될 상태를 경험하면서 개인의 사리 사욕에 의한 무고한 양민의 희생이 이토록 컸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치가 떨립니다. 통합병원에 함께 입원했던 사람들 중 몇 사람의 경우만 얘기하죠. 거기에 있던 수백 명의 환자들이 당한 상처가 모두 뼈아픈 경우이지만 다 말할 수는 없으니까요."
승용차에 대고 난사, 운전사 사망
1980년 당시 목포상고 실과과장으로 계시던 분의 경우로, 그분의 아들이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에 다녔는데 18일 교육대학 앞 길에서 공수들이 휘두른 곤봉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 친구집 지하실에 숨어 있었대요. 5월 21일 초파일이라 아들을 데리러 광주로 갔대요. 시외버스가 다니지 않는다는 소문을 듣고 목포에 있는 조선내화 사장의 손자와 아는 사이라 그에게 부탁하여 자가용을 빌려타고 광주로 가서 아들을 데리러 오다가 보니 광주 인근 산봉우리에 군인들이 주둔해 있어 두려운 생각이 들어 효덕동 덕산부락으로 가서 하룻밤을 잤대요. 다음날 새벽 5시경 목포를 향해 가다 남평다리 못미처에 있는 야산에 숨어 있던 계엄군 30여 명이 '정지!'라고 하자 즉시 차를 멈췄는데, 그 차를 향해 5분 이상 집중사격을 하여 즉석에서 운전사는 사망하고 부인은 팔과 어깨에 관통상을 당하고 교감 선생님은 머리에 총알이 스치고 지나갔어요. 헌데 이상하게도 대학에 다니던 아들은 전혀 다치지 않고 말짱했대요. 무자비한 놈들이 시위와는 무관한 일가족을 차 속에 넣어두고 M16을 난사한 후 헬기에 태워 통합병원으로 후송했어요. 현장에서 사망한 사람은 어찌 됐는지 잘 모르겠고 부인, 아들 그리고 그 선생님은 내가 있던 병실로 들어왔어요. 그분은 날마다 자기로 인해 무고한 타인이 희생당한 것에 대한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괴로워했지요. 차라리 자기나 자기 가족이 희생 됐으면 이렇게 마음 아프지는 않을 거라면서 토해 내는 울부짖음은 듣는 사람으 로 하여금 단순한 동정심이 아니라 공수나 그 위에 존재하는 작자들에 대한 들끓는 분노를 주체하기 힘들게 하더구만요. 다치지 않았던 아들도 통합병원으로 실려 왔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대학생이라고 붙잡아갈 것 같아서 군인들한테 나와 그분이 사정했어요. 대학생이 아니라고 속이면서 이곳에 오게 된 경위를 몇번에 걸쳐 되풀이하여 설명했지만 결국 계엄군이 끌고 가자 그분은 꼭 실성한 사람처럼 돼버렸어요. 병원 책임자 장교한테 쫓아가서 과연 이럴 수가 있느냐면서 따지고 울부짖으니까 그 장교도 '참 사정이 딱하지만 총을 쏜 사람이 우리가 아니니 어떻게 하겠냐'면서 발뺌하자, 우리 가족이 다치게 된 경위에 대해 설명해 줬으니 그것이 사실이라는 확인서를 써달라고 버텼어요. 그 장교가 하는수 없이 확인서를 써주자 그것을 가지고 다녔지만 그 종이쪽지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우리들이야 그분의 억울한 심정을 백번 이해하고 우리들 모두 비슷한 상황에서 당한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위에 있는 작자들은 폭도라고 규정하는 상태인데 종이 쪽지가 무얼 증명할 것이며 무슨 효력을 발생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당시 그분은 확인서를 받아내 지니고 다녔어요. 훗날 자기를 폭도로 몰아붙이거나 후환이 있을 때 증명서로 쓴다구요. 그분은 보름간을 울면서 생활하더니 '나만 좋자고 이렇게 병원에 있을 수 없다'면서 희생자 가족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뒷수습을 해야 한다면서 퇴원해 버렸어요. 그런 후 통 소식을 모르고 지냈는데, 1988년 5월에 부상자들의 재검진이 있었어요. 나도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갔는데 그분도 거기에 오셔셔 만나게 되었어요. 어찌나 반갑든지....'어떻게 지내시느냐'고 물었더니 울먹이면서 그후 생활에 대해 얘기하는데 참 안됐습디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 곧바로 희생자 가족을 찾아가서 애도를 표하고 재산은 몽땅 처분해서 사망자 가족과 승용차 주인에게 보상금으로 줘버리고 자신은 빈털털이가 돼서 생활하는데 부상당한 상처 때문에 부인이나 당신이나 무척 고생이 많다고 합디다. 다행히 잡혀갔던 아들은 무사히 풀려나와 당시 다니던 의대를 졸업하고 기독교병원 외과 의사로 근무한대요. 경제적인 도움을 그 아들한테 많이 받고 살고 있답니다.
다른 경우는 여섯 살 난 여자 아이의 일인데, 정확히 어느 곳에서 총에 맞았는 지는 모르겠고 아무튼 길거리에 나와 있다가 계엄군이 쏜 총에 왼쪽 가슴이 관통 당했어요. 내 아들과 비슷한 또래의 어린 아이였기 때문에 관심이 많이 쏠렸지요 . 며칟날 통합병원으로 실려왔는지는 모르겠고, 맨 처음 왔을 때에는 의사들이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들 했는데 수술을 받고 난 후부터 회복속도가 굉장히 빨랐어요. 부모도 없이 어린 것 하나 덜렁 병원에 실려와서 거의 실신하다시피 누워 있는데 얼마나 불쌍하던지.... 아무리 시가전이라고 하지만 그 어린 것 에게까지 총으로 쏴야 되겠어요. 얼마나 분하고 원통하던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그때 일들을 다 이야기하려면 며칠밤을 새워도 못다 한 얘기들이 있을 거예요. 그렇게 시름시름 기운을 못 차리고 앓던 아이가 수술한 후 보름쯤 지 나니까 온 병실을 뛰어다닙디다. 정말 희한하더만. 어린 아이라 회복이 그렇게 빠른건지, 우리 아이도 사실상 팔목만 다쳤지만 후유증이 심하지 않습니까? 이런 것을 생각할 때 그 아이는 여자인데 여자 아이가 크면 가슴이 중요하잖아요. 크 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에요. 다친 상처라도 깨끗이 치유돼서 후유증이나 합병증 이 없어야 될 텐데 하는 생각도 해보곤 해요. 같은 병실에 가슴 다친 여자가 또 있었어요. 전대 심리학과에 다니던 학생인데, 그 아가씨도 관통상을 당했어요.
공수들이 어리거나 어른이거나 여자들의 가슴을 겨냥해서 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어요.
처음에는 계속적으로 밀려드는 환자들에 휩싸여 의사들이 정신이 없다 보니 여자 환자와 남자 환자를 분리시키지도 않고 함께 수용했어요. 그러다 보니 요지경 속이었지요. 간호해 주는 사람이 따로 없다 보니 허리나 척추, 다리를 다치거나 거동하기 불편한 사람들은 생활하기 더욱 힘들었어요. 화장실을 따로 가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쓰레기통을 가져다놓고 조금 덜 다친 사람이 부축해 주면 그 자리에서 옷 내리고 소변을 보는 게 예사였어요. 지금은 도저히 그렇게 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더한 일도 수치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가슴 밑바닥에 동료의식이 흐르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때 우리 아이 바로 옆에 있었던 아가씨는 총알이 척추 옆을 쭈욱 스치고 지나 갔는데 다행히 척추는 다치지 않았지만 전혀 거동을 못 하고 누워 있었어요. 그런데 당시 의무병인가 했던 군인이 왔다갔다하면서 극진히 간호를 했어요. 밤이 되면 일찍 병실 불을 꺼버리는데 그 의무병이 촛불을 들고 와서 수발을 해주면서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고는 해서 내가 장난말로 '에이, 젊은 사람들이 무슨 짓이야" 하며 놀리기도 했는데, 얼마 전에 들으니까 이 두 사람이 결혼해서 산다고 하더군요. 그 절박한 상태에서도 역시 젊은 사람들은 서로에게 애정을 느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30년간 입었던 군복을 벗고
"병원에 입원한 사람 중에는 시민군에 합류해서 광주시민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공수부대에 대항해 싸우다 부상당한 사람도 많았지만 집에서 구경하다 총 맞은 사람도 많았어요. 집사람 앞쪽에 누워 있던 할머니도 집 2층에서 총을 맞았고, 최복덕 할머니도 거실에 있다가 느닷없이 총 맞고, 애기엄마처럼 턱을 관통 당한 아저씨도 2층에서 구경하다 다쳐서 왔지요.
또 한 가지 기가 막힐 일은 당 시 우리 집 부근에서 연탄장사 하시던 아저씨가 당한 경우예요. 이름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는데 아마 지금도 연탄장사 할 거예요. 그 아저씨가 도로에 나와 구경하고 있는데, 바로 저 앞에서 조카가 걸어오다 반대편 도로에서 공수가 쏜 총에 복부를 맞아서 푹 고꾸라지면서 죽어버리니까 작은아버지 되는 입장에서 가만히 있겠어요. 쓰러져 있는 조카를 끌어안고 가는데 그 아저씨를 향해서 또 총을 쏴버린 거여. 그 사람도 병원에서 와서 치료를 받았어요. 사람마다 다친 경위를 얘기하는데 들을 때마다 피가 거꾸로 솟았어요. 이 경우도 가까이서 공수가 총을 쐈으니까 총에 맞아 쓰러지는 시민이 뻔히 보이는데 어떻게 된 놈들이 죽은 사람을 부축하러 간 사람한테 또 총을 쏠 수 있겠어요! 사람이 맞아 쓰러지면 더 이상은 쏘지 말아야지. 벌건 대낮에 사람들이 보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 사격을 하다니...."
김씨는 담배를 뻑뻑 빨아대면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계 속 질문한다는 자체가 민망스러웠지만 조심스럽게 철수에 관해서 물어보았다.
"철수는 왜 자기 팔이 아픈지에 관해서 알고 있나요?"라고 묻자 부인이 대답해 주었다.
"어떻게 해서 다치게 됐는지 지가 더 잘 알아요. 애 아빠랑 나랑 둘이서 가끔 그 당시 얘기를 하면서 '군인들이 집 앞에까지 와서 총을 쐈을까, 광주-송정리간 도로에서 쐈을까"라고 물어보면 나는 "모르겠다"고 하거든. 그러면 가만히 듣고 있다 철수가 집 앞에까지 군인이 와서 총을 쐈다고 말해요. 지는 봤데요. 그때 기억이 남아 있어서 그러는지 철수는 지금까지도 상무대 군인을 미워해요. 상무대 군인이 아니었다고 아무리 설명해 줘도 소용없어요. 크면서는 누가 그런 말하지 않는데도 전두환 씨를 굉장히 미워해요.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그런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 좋지 않을까봐 사람 미워하지 말라고 타일러도 미워하는 마음을 지울 수 없나봐요. 당시 지 아빠도 군인이었으니까 출근하려고 군복을 갈아입으면 옷을 던져버리면서 가지 말라고 붙잡으며 군인에 대한 증오심을 노골적으로 표현 했어요. 그럴 때마다 부모 된 입장으로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몰라요. 생각해 보면 아이의 짜증이 아니라도 당장 그놈의 옷을 벗어버리고 그만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먹고살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었어요. 꼭이 철수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애 아빠는 거의 30년을 몸담았던 직장을 그만뒀어요. 정년퇴직을 불과 3년 남겨두고 군복을 벗었어요."
가족들의 후유증이 더 이상 없었으면...
"철수의 성격과, 학교생활 중 친구관계는 원만한가요?"
"혈액형은 O형인데 O형답지 않게 내성적이고 아주 신경질적이에요.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점은 세상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본다는 것이에요. 어린 나이에 오죽이나 상처가 컸으면 그러겠나 싶다가도 부모 마음이라는 것이 자식이 원만하게 생활하는 것을 바라지 않겠어요? 친구관계는 원만한 편인데 애들이 제 팔을 보고 왜 그러냐고 물으면 그냥 어렸을때 다쳐서 그런다고 대답한대요. 사실대로 얘기 하지 않고 왜 숨겼느냐고 내가 물어보면 아직은 사실대로 말하고 싶지 않으니까 비밀로 했다면서 아주 당차게 얘기하곤 해요. 가끔 우리가 실수로 아이의 다친 팔목을 세게 잡으면 죽는다고 소리지르면서 울어요. 지금도 충격이 가면 많이 아파해요. 요즘도 자다가 끙끙 앓고 몸부림치면서 심하면 깨어나서 울고 신경질을 부리고 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미어지는 듯 저려와요. 아침에 일어나면 애아빠 가 운동하러 가면서 데리고 가 달리기도 하는데 학교운동장에서 철봉에 매달려 턱걸이를 시키면 한 개도 못한대요. 다친 팔에 힘이 없어서 팔운동 같은 것은 전혀 하지 못할 정도로 피해가 커요. 후유증으로는 정상적이지 못한 팔의 기능과 기관지가 나빠졌어요. 찬바람만 조금 불어도 병에 대한 저항력이 없어져서 그런지 감기에 걸려 겨울이 다 지나갈 때까지 고생해요. 내 턱의 상처는 치료를 받아 서 그때처럼 흉한 모습은 아니지만, 의치를 한 왼쪽으로는 과일조차 씹을 수 없고 굉장히 아파서 고통받고 있어요. 이도 잘 맞지 않지만 수술하는 것이 너무나 겁나고 무서워서 엄두도 못 내요. 다친 후로 처음에는 아프지 않던 어깨도 아프고 갈비뼈도 시리고 통증 때문에 장시간 앉아 있지도 못하고, 얼마 전에는 정신과에도 찾아갔어요. 내가 평소에 자주 울고 속에 있는 말을 남한테는 하지 못하고 담아놓고 사니까 우울증도 있어요. 그래서 정신과를 가봤어요. 잠을 자면 이상한 증세가 있는데, 머리가 멍하고 전신이 마비되는 것 같은 압박감을 느끼고 숨이 콱콱 막히는 것 같아 일어나려고 하는데 잠에서 깨지를 못해 고통스러워요.
더 자세한 것은 설명을 못하겠네. 아무튼 이런 증세 때문에 정신과에 갔더니 별 다른 말은 안 하더만. 기관지도 안좋고 하도 온몸에 통증이 심해 종합진찰을 받아도 별이상이 없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나는 이렇게 정상이 아니예요. 위도 아프고 소화도 안 돼서 보건소에 가서 약을 타다 날마다 먹고 있지요. 처음에는 안 먹던 약을 먹으니 토해 버리고 고통이 계속되었는데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예요.
목에도 빨간 반점이 생겼다 없어졌다 하는데 병원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만 하니 믿어지지 않아요. 평상시도 통증 때문에 고생하지만 날씨만 꾸무럭거리면 통증 때문에 보타져서 죽을 지경이에요. 부상자회에서 몇 년 전부터 가입하라고 연락이 왔지만 남편이 군인인데 아내가 5·18 때 다쳤다고 남들한테 말하는 것이 창피해서 나가지 않다가 연락이 오면 가끔 참석했는데 지금은 거의 매달 참석하는 편이에요. 부상자회가 처음에는 하나였는데 지금은 둘로 나눠져서 부끄럽지만 어차피 목적은 같으니까 언젠가는 다시 뭉쳐서 하나가 되어야지. 그렇게 될 거라고 믿고 있어요.
총에 맞은 후로 제일 크게 변한 것은 자신감이 상실된 것이라고 할 수 있어. 운동은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몸이 아프니까 걷지도 못하지, 활동하면 허리가 쑤시고 결리기 때문에 나다니지도 못하니까 완전히 모든 일에 자신이 없어지고 이런 모습(턱을 가르킴)으로 남들 앞에 나가면 다들 나를 보고 비웃는 것 같아 내 자신이 열등감이 생겨서 타인과 만나는 것이 싫어요. 한 번만 더 수술을 해서 비뚤어진 턱을 바로잡아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없이 하면서도 워낙 힘든 수술이라, 수술 후 2개월 이상을 입원해야 한다는 점도 걸리지만 우선 수술한다는 그 자체가 두려워서 막상 못 하고 있어요.
요즘도 날씨가 조금만 쌀쌀해지면 아예 문 밖에는 나가는 것이 무서워요. 찬바람이 불면 상처부위가 쑤시고 아픈 것은 두말 할 것도 없고 온몸이 시고 통증이 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구들장이나 지고 살지요. 1980년 5·18 때만 해도 절에 다녔는데 자주 가지 않으니까 웬지 신심도 약해졌어요. 그래서 80년 5월 이후 부터 천주교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좋은 점이 많아요. 감사하는 마음도 생겨나고.
부상자 중에는 5·18 광주민중항쟁 때 시민군들처럼 열심히 투쟁하다 다친 분들 도 있지만 나처럼 가만히 있다가 부상당한 사람도 많아요. 그때는 사회나 정치에 대해 전혀 모르고 살았는데 이제는 나도 투사가 다 됐어(웃음) 우리 가족이 겪고 있는 특수한 상황 자체가 나를 투사로 만들었을 거야." 부인이 얘기하는 동안 애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김영민 씨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더니 한마디 했다.
"평소에는 금방 말하고 나서도 생각나지 않는다더니 오늘은 또박또박 말도 잘하고 다칠 때의 이야기도 잊어먹지 않고 똑바로 기억하고 있네?" 하면서 다정한 눈길을 보내자, 부인이 마주 보며 소박하게 웃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아주 금슬좋은 부부라는 것을 처음 대면했을 때부터 확연히 느낄 수 있어 조사자도 웃어 보였다.
김영민 씨는 직장생활 하면서 8년간을 통증 때문에 고통받는 아내와 아들을 병원에 데려가 수술받고 치료하게 하고 빨래, 밥, 심지어는 시장 보는 일까지도 도맡아 하면서도 짜증섞인 말이라고는 한번도 한 적이 없단다. 얘기하는 동안에도 몇 번에 걸쳐 당신의 노동력이 없어진 후 아내와 아들이 몸부림치는 것을 보면서도 치료를 받게 할 능력이 없어서 방치해 둘 수밖에 없게 된다면 어찌할 것인지를 걱정했다. 그래서 가장 절실하게 원하는 것은 가족이 더 이상의 후유증이 없이 살게 되는 것이란다.
정신적 고통을 어떻게 보상할 수 있겠는가?
"5·18에 대한 진상규명과 치유는 어떻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또 개인 적인 요구사항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당시의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진실을 널리 알리고 역사적인 사실이 후세에 올바로 전해져야 한다고 굳게 믿기 때문에 오늘 조사에도 응했어 요. 당시의 상황-발포명령자, 사망자수 등등-이 명확하게 밝혀져야 하고, 그와 동시에 모든 것에 앞서 관련자의 처벌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보상은 각자 개개인의 특수한 경우를 참작해서 들어줘야 합당하다고 봐요.
보상 보상 하는데 엄밀히 따져 육체적, 정신적으로 받는 고통을 어떻게 치유하고 보상할 수 있겠어요. 대신 아파주겠어요. 그런 일 없었던 과거로 되돌려줄 수가 있겠어요. 더군다나 상처를 안겨준 당사자가 얼어붙은 광주시민의 마음을 어찌 녹일 수 있겠습니까! 정부는 지금이라도 광주시민을 지키기 위해 총칼을 들 수밖 에 없었던 시민군의 의로운 항쟁을 인정하고, 또 우리 가족처럼 억울하게 부상당 한 사람이나 사망자의 떳떳함을 인정하고 무료로 전원 치료받을 수 있는 지속적 인 대비책을 강구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해요. 절대 일시적인 동정이어서는 안 되 고 떳떳함에 대한 인정이어야 해요. 개인적인 요구조건이라고 한다면 어른이야 이미 각기 제자리 찾아서 나름대로 살아가니까 일단 접어두고, 아이의 장래를 생각할 때 많은 것을 들 수 있지만 첫째로 신체적인 장애 때문에 제약받는 일이 없어야 하고, 둘째로 부상자나 유족의 삶에 대한 규제나 강요가 없어야 하고 후한 도 없어야 해요. 셋째로는 대학입학이나 취직할 때 정상인과 같은 수준으로 대우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예편하게 된 동기와 현재 하는 일에 관해 물어보았다.
"압력이나 강요에 의한 것은 전혀 아니고, 20대 초반부터 거의 50살까지 군생활을 하다 보니 질리기도 해서 다른 일을 준비하기 위해서였고, 다른 이유는 출근 때마다 군복을 부여잡고 옷을 벗어 던져버리라고 울부짖는 아들이 안스러워서 퇴직해 버렸지요. 퇴직 후 작은댁에서 경영하는, 하남에 있는 수출품업체에 들어가서 몇 달 정도 일하다 적성이 맞지 않아 그만두고 지금은 할일을 물색중이에요."
얘기가 거의 끝나가는 것 같아 "철수의 손목에 박혀 있었다던 총알을 보여주실 수 없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부인이 깊숙이 숨겨둔 총알을 찾으러 간 동안 김영민 씨가 말했다.
"무슨 보물단지라고 붕대에 싸서 감춰두었는데 그런 걸 보면 속이 뒤집어지려고 해서 1980년 이후로 한 번인가 꺼내보고 그대로 뒀어요." 붕대를 보니 그때의 핏자국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붕대를 풀어보니 콩알만한 M16 총알이 나오고 새까맣게 변해 버린 탄피들이 여러 개 있었다. 손씨의 뒷목과 아들 철수의 팔에 박혀 있던 파편들인 것 같다. 실탄의 크기는 성냥개비만 하다면서 구조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조사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이미 어두워진 후였다. 아픈 상처를 되새기게 하는 것 같아 송구스러웠지만 이러한 내용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기대할 수 있는 많은 긍정적인 것들을 생각하며 조사에 협조해 주신 손명선씨와 그 남편께 감사한다.
행복했던 한 가정이 그들의 소박한 꿈을 하루 아침에 파괴당한 채 8년이 지난 오늘에까지 고통에 신음하는 것을 다섯 시간에 걸쳐 직접 보고 들으면서 1980년 5월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단순한 과거의 그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5·18 광주민중항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첫댓글 자료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