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구정 동쪽엔 능허정이 있었네
엄경수의 〈연강정사기(沿江亭榭記)〉에 따르면,
압구정 동쪽에 능파정이 있다 했으니, 오늘날 강남 청담동 일대인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서 능파정(凌波亭)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능파정은 압구정 동쪽에 있는데, 학곡 홍상국의 정자이다. 상국의 이름은 서봉이다.
정자는 폐허가 되어 수리하지 않은 지가 오래되니 곧 무너지려 한다.
폐허가 되어 무너져 내리도록 돌보는 이가 없던 능파정. 1716년의 사정은 이랬다.
낡은 기왓장에다 기울어져 가는 서까래가 겨우 떠받친 능파정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능파(凌波)란 본래의 의미를 새겨보면 ‘높은 곳에서 파도를 굽어본다.’는 뜻이다. 그러하니 주인 닮은 정자 또한 하늘 높이 치솟아 세상을 내려다보았을 것이다.
겸재의 압구정도 (무너진 능허정 터가 좌측 중간 언덕 부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
능허정(능파정) 주인장 홍서봉(洪瑞鳳, 1572~1645).
홍서봉의 호가 학곡(鶴谷)인 것은 오늘날 학동 사거리 인근의 학현(鶴峴)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인조반정 주역이었던 그는 김직재 무옥(誣獄)에 연루된 장인 황혁(黃爀)을 변호하다 파직 당했고, 두문불출하다가 공신으로 재기했다.
외숙 류몽인이 역모 혐의를 벗지 못한 채 처형되었을 때 그의 공신 훈격도 강등되고 현직에서 물러나야 하는 수모를 겪었지만, 불과 며칠 후에 보란 듯이 재기했다. 인조 재위기간 내내 승승장구하여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까지 올랐다. 내우외환의 급격한 시류에도 74세의 수를 누렸으니, 이 정도 생이라면 누릴 건 다 누린 셈이다.
이토록 권세를 한 손에 쥔 홍서봉이 압구정 동쪽 동호 어귀에 두었던 별서가 바로 능파정이었다. 엄경수와 동시대에 살았던 김시보(金時保, 1658∼1734)가 지은 〈배안에서 감회가 들어 아이에게 보이다〉라는 시에도 능파정이라 한 것이 보인다. 여기에서 언급한 능파정이 곧 능허정이었다. 홍서봉의 정자를 두고 능허정이라 기록한 곳이 더 많기 때문이다.
능허(凌虛)의 참뜻
능허정(凌虛亭)의 능허(凌虛)는 하늘을 내려다 볼 정도로 높다는 의미이니, 시원스레 뻗은 정자가 하늘 높이 솟았음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정신세계가 세속을 초월한다는 의미를 내포한 것이기도 하다.
중국 위나라 시인 조식(曺植, 192~232년)의 〈칠계(七啓)〉에서
화려한 전각이 구름에 닿아 있고 / 華閣緣雲
나는 듯 섬돌이 허공에 오르네 / 飛陛凌虛
아래로 흐르는 별을 내려다보고 / 俯眺流星
우러러 팔방을 바라보네 / 仰觀八隅
라고 한 바가 있듯이, 허공에 오를 것 같은 섬돌이란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아울러 송나라 태수 진희량이 능허대를 세운 후 그 기문을 소동파에게 맡겼을 때의 작품 〈능허대기〉야말로 《고문진보》 등에도 소개되어 널리 암송되는 글이기도 하다. 홍서봉이 갖고자 했던 정자 또한 여기에서 연유했을 것인데, 소동파 〈적벽부〉에 나오는 “능만경지만연(凌萬頃之茫然)”에서 만경을 건너다의 ‘능’과 “빙허어풍(馮虛御風)”의 ‘바람을 타고 하늘에 오른다’에서 ‘허’를 취하여 「능허정」이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
이처럼 아득한 시절부터 능허란 용례가 다양했지만, 뜻은 모두 넓디넓은 물결을 넘고, 높디높은 허공에 바람을 탄 듯 하늘에 올라 신선이 된 기분을 만끽하려는 꿈을 담은 것이라 할 것이다. 한강 능허정에 올랐다가 그 감흥을 실감나게 표현한 이진망(1672∼1737)의 시 〈능허정유제(淩虗亭留題)〉에서,
한강변의 백 척 높은 누각 / 百尺危樓漢水邊
붉은 층계가 아득히 푸른 하늘로 들어가네 / 丹梯縹緲入靑天
라고 한 것을 음미해보면, 그 의미는 더욱 뚜렷해진다.
류희분 별서 능허정이 홍씨가문으로 넘어가다.
능허정 원래 주인은 류희분(柳希奮, 1564~1623)이었다.
이덕수(李德壽, 1673∼1744)의 〈강거소루기(江居小樓記)〉에 의하면, “가까이 있는 것은 작고한 류희분 정자인데, 지금은 홍상국(洪相國) 소유가 되었다.”고 한 것에서 그런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명문가 문화 류씨가에서 태어난 류희분은 광해군 처남 신분으로 세를 불려, 이이첨 권력과 쌍벽을 이뤘다. 정권에 걸림돌이 되는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제거하여 1등 공신에다 문창부원군(文昌府院君)에 봉해졌고,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는데도 앞장섰다.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그가 인조반정(1723년)군에 의해 참형 당했으니, 그런 생애를 고려한다면 능허정은 그 권세가 절정에 이른 17세기 초반에 지어졌을 것이다.
개국 이래 권력 다툼에서 제거된 구세력들 재산은 신세력으로 부상한 공신들에게 넘기던 것이 오랜 관행이었으니, 유희분의 별서였던 능허정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반정을 주동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이 된 익녕군(益寧君) 홍서봉에게로 넘어갔다.
학곡 홍서봉의 본관은 남양, 조부는 관찰사를 지낸 홍춘경(洪春卿)이고 부친은 도승지를 지낸 홍천민(洪天民)이다. 자신을 포함한 3대가 모두 사가독서에 선발되어 3대 호당 기림을 받았다. 학곡은 유몽인(柳夢寅)의 부친 유당(柳樘) 외손자이자, 황희 정승 후손 황정욱(黃廷彧)의 손녀사위였다. 물고 물리던 역모가 끊이질 않던 때에 처가와 외가까지 환란을 겪었지만, 매번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여 영의정에까지 올랐던 인물이고 보면, 당대 제일가는 세도가로 우뚝 섰던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
홍서봉의 편지글
남양 홍씨가에서 운영한 한강 별서
압구정 옆에 별서를 둘 수 있다는 의미는 그것이 곧 권력의 바로미터가 아니겠는가?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홍서봉 부자의 저택이 한마을에 걸쳐서 자리 잡고 있어 극도로 사치스럽고 화려하여 두른 담장은 참람하게도 궁을 본떴으니, 혼조(昏朝 ; 광해군) 때의 유희분이나 박승종 집이라도 이보다 더하지는 않았다.”
라고 하듯이, 그의 부귀가 극에 달하여 어느 세력가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의 사치를 누리고 살았다. 그러하니 그가 경영했던 한강 별서 또한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을 것이다.
정자 이름이 능허정이었다는 것만 봐도 빼어난 조망이었던 것은 틀림없을 것 같다. 학곡 홍서봉과 동시대에 살았던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 1593∼1646)이 남긴 〈능허정을 떠나며〉라는 시에서,
추녀의 기둥은 허공을 누르고 있어 / 軒楹壓空明
굽어보고 올려봄에 강과 산이 아득했네 / 俯仰湖山迥
흐리던 아침 날씨가 변하더니 / 昏朝變氣候
강물에 달 비치자 더욱 맑고 투명했지 / 水月增澄冷
라고 읊었듯이, 능허정에서 바라보는 환상적인 달밤 정취가 물씬 풍긴다.
홍서봉의 묘역 (양주 남면 상수리)
이 보다 한 세대 흐른 후의 이인엽(李寅燁, 1656∼1710)도 높디높은 정자에 올라 강과 주변 산들을 조망하는 흥취를 맛깔나게 표현했으니, 그것이 1678년 무렵이었다.
한강나루 동쪽 높은 정자 있는데 / 漢津東畔有高亭
정자 너머 여러 산들이 빼곡하게 푸르다네 / 亭外羣巒簇簇靑
온 종일 유유자적 굽은 난간에 기대노라니 / 盡日悠然憑曲檻
물소리 솔바람 소리에 술이 막 깨어나네 / 水聲松籟酒初醒
학곡 노인 언제 이 정자 창건하였나 / 鶴老何年創此亭
물빛과 산빛이 함께 푸른빛을 뿌리네 / 水光山色共撩靑
무한한 맑은 강의 흥취를 가져다가 / 却將無限滄江興
한가한 사람에게 주어 취했다 깨게 하리라 / 留與閑人醉復醒
-《晦窩詩稿》 〈능허정 시에 차운하다(次凌虛亭韵)〉
이인엽이 한가한 은자로 살아간 홍서봉을 칭송해마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능허정도 세월을 이기지 못한 채 기왓장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으니, 이진망(李眞望, 1672∼1737)은 그 상황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능허정은 곧 작고한 재상 홍 학곡(홍서봉 호)의 소유인데 무척 황폐해졌다. 근래 이곳에 우거할 것으로 삼았기에 소제를 한 후 아침저녁 이곳에서 거처하였다. 이제 도성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또한 가물거릴 것 같아 율시 한 편을 짓는다.
한강 변의 백 척 난간에 선 아찔한 누각 /百尺危樓漢水邊
아스라한 단제가 푸른 하늘로 들어가네 / 丹梯縹緲入靑天*
산수 좋은 압구정 풍광이 지척에 있는데 / 名區近接鷗亭勝
지난 행적은 오히려 학곡의 어짐을 전하누나 / 往迹猶傳鶴老賢。
오월의 서늘한 바람이 난간 너머서 일고 / 五月凉凮生檻外。
한줄기 안개비가 드리운 발 앞을 둘러싸네 /一江煙雨繞簾前。
소요한 지 반년 만에 지금 떠나려 하니 /逍遙半載今將去。
이별 후에도 꿈속에 늘 어른거리게 하누나 / 別後應敎夢想懸。
*단제(丹梯 ; 신선계로 오르는 사다리)
- 《陶雲遺集》 〈능허정에 시를 남기다(淩虗亭留題)〉
이 글과 시를 통해, 이진망의 굴곡진 생애에 안식처 역할을 했던 곳이 바로 능허정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겠다. 이진망은 영의정 이경석의 증손으로 태어나 숙종 때 장원 급제한 인재였으며, 어린 영조를 가르친 스승이었다. 영조가 즉위한 이후 이인좌의 난과 을해옥사가 거듭되는 동안 소론들의 정치적 입지가 크게 위축되는 시기를 맞았는데, 그의 선대부터 소론의 정치적 입장과 가까웠기에 그 시련을 피할 길이 없었다.
다행히도 온건한 입장에 선 완소로 활동한 이진망이었기에 대사성과 판서 등을 역임할 수 있었지만, 어려운 시절을 능허정에 기대어 보듬어 갔을 것이다. 술을 좋아했던 그는 대인관계를 위해 마시는 것을 경계하여 홀로 마시길 즐겨 했으니, 비가 내리면 한 잔, 매화 피면 한 잔, 눈이 내릴 때 한 잔, 이렇게 혼술을 즐기다가 한 말씩 비우기를 예사로 한 애주가로 알려져 있다. 이경석이 그러했듯, 참으로 낭만과 기상을 함께 엿볼 수 있는 전형적인 선비 상이라 할 것이다.
[출처] 강남지역 한강의 옛 정자 - 청담동 홍서봉의 능허정①|작성자 주암박홍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