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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부설원기에 대한 논의 -차문 홈페이지의 글을 보고-
- 2014. 7. 15. 류주환
목차
1. 들어가는 말
2. 논의의 대상은 “설원기”
3. “설원기”의 저자
4. 평가절하
5. 연안이라는 지명
6. “대동운부군옥”
7. 4얼 문제
8. 4얼의 진짜 정체
9. 하륜
10. 서얼금고법
11. 설원기는 위서(僞書)를 넘어선 악서(惡書)
12. 두문동 72현 문제
13. 맺는 말
1. 들어가는 말
얼마 전 연차 공식 홈페이지(http://www.cha.or.kr/)를 들어가려 했더니 계약 연장을 하지 않아서 닫혔다는 메시지가 나오면서 들어가지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 다시 시도해 보았더니 이번에는 들어가졌다. 이렇게 한 이유는 “문화류씨 – 뿌리 깊은 버드나무” 카페(http://cafe.daum.net/moonwharyu)에 지난 5월 28일에서 6월 11일 사이에 몇 차례에 걸쳐 차천로의 혼인관계를 상세히 분석하는 글들이 올라왔는데 혹시 차문에서 반응이 있었는지 궁금해서였다. 연차 사이트에는 그에 관한 반응은 없었다. (참고로 필자 개인의 메일로 반응을 보내온 분들은 두 분 계셔서 답장으로 상황을 상세히 설명해 드렸다.)
(*위 카페에는 누구나 가입하고 글을 올릴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의견 개진을 적극 환영합니다. 여기에는 당연히 연안차씨 분들도 해당됩니다. 어떤 의견이 있으면 카페에 글을 올려 주십시오.)
연차 사이트에는 대신 3월 26일에서 5월 25일에 걸쳐 chky100이라는 닉네임이 쓴 8편의 “차원부설원기”(이하 “설원기”) 관련 글이 올라 있었다. chky100은 작년에 우연히 류차문제를 알게 되어 상세한 내막도 모른 채 무작정 류문과 필자를 비난해 왔던 적이 있다. 이번에는 공부를 하고 여러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보였다. 일단 이런 글이 차문 사이트에 여럿 올라 있다는 것만으로도 바람직한 일로 생각한다.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는 문제를 풀어야 할 책임이 있는 자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면 반성은커녕 문제해결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논의의 대상은 “설원기”
필자는 가능한 한 논의를 “설원기”에 집중하고자 한다. 문중간의 다툼이나 이견으로 비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설원기”는 문중사(史)를 떠나서 엄밀한 역사의 문제이다. 그럼에도 chky100처럼 전후의 맥락을 잘 알지 못하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하나가 있다. 그것은 문화류씨 문중에서 “설원기”에 대한 적극적인 문제제기를 시작한 이유를 알고는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차문에서 대대적으로 문화류씨 시조를 부인하였기 때문이다. 자기 할아버지를 부인 당하는 일을 그냥 넘어갈 자가 있다면 과연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성씨유래비, 대동보, 홈페이지, 단행본, 종보 등을 통해 전방위적으로 자행되었던 그 만인공노할 행위에 대해 지금은 사과하였다 하나, 여전히 동일한 모독의 표현들이 존재하며 사과도 한 것인지 안 한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는 수년간의 피와 땀으로 행한 엄밀한 역사 고찰을 통해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은 류문을 chky100 같은 이는 ‘사이비종교’라는 말을 써서 비하하거나 마치 억지를 부리며 부정을 위한 부정을 하고 있는 듯이 호도하고 있다. 일단 “설원기”가 기둥을 이루고 있는 류차동원설을 받아들여도 류문은 차문의 아버지 집안이다. 몇십 년 전에 본관을 막론하고 모든 류씨와 차씨들을 대상으로 ‘차류대종회’가 결성되면서 몇몇 사람들이 사실을 잘못 파악해서 차씨가 형님집안으로 오인하였고, 그것이 단체 이름에까지 반영이 되었다. 위서이자 악서인 “설원기”의 가장 중요한 대목조차 알지 못하고 저지른 행위라 생각된다. 지금은 당연한 역사적 귀결로 그 ‘차류대종회’가 해체되어 있다. 과연 “설원기”와 류차동원설이 역사적 진실일 가능성이 단 몇 퍼센트라도 있다면 류문이 그것을 부인할 이유가 조금도 없을 것이다. 이런 당연한 논리적 맥락을 무시하고 누군가가 엄밀한 역사적 고찰을 통해 종래의 가문사를 부정했다고 해서 무조건 그 고찰의 주체들을 비난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더구나 그 주체 속에는 여러 역사학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3. “설원기”의 저자
“차원부설원기”는 기본적으로 서문, 기(記), 그리고 응제시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설원기”에는 기(記)의 저자는 박팽년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필자는 저자가 박팽년일 수 없는 증거를 여럿 제시했다. 그런데 chky100는 자신의 글(#248)에서 박팽년이 記를 쓸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chky100이 과연 “설원기”를 제대로 읽어보고 필자의 논리를 최소한이라도 살펴보았는지 의심이 간다. 그는 ‘당시 형조참판으로 있던 박팽년은 ...’ 운운하며 설명을 이어간다. 과연 記의 말미에는 박팽년의 이름과 날짜도 명확히 주어져 있으며 직책도 ‘형조참판’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記의 저자가 박팽년일 수 없는 가장 직접적인 증거인 것이다. 왕에게 바친다는 그 글에 적힌 그 시점에 박팽년은 형조참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미 “설원기”에서 저자를 위조하면서 어떤 연유로 박팽년을 형조참판이라고 했는지에 대한 고찰도 상세하게 개진하였다. 그런 치명적인 증거를 간과하고 지엽적인 논의를 아무리 장황하게 제시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4. 평가절하
역사를 고찰한 주체들에 대한 비난은 대개 일정한 패턴을 이루고 있다. 바로 그들이 소수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chky100의 글(#249)을 보면 조선시대 18세기 초에 “몽예집”에서 남극관이 “설원기”를 더러운 위작으로 비판한 것을 평가절하 하고 있다. 현재 소설이나 영화에 대해 사람들이 호불호에 따라 평점을 줄 때 좋은 작품에도 낮은 점수를 주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남극관이 낮은 점수를 준 것일 뿐이며, 거의 모든 사람들이 높은 점수를 준 “설원기”에 그만이 낮은 점수를 준 것은 남극관의 정신에 문제가 있어서 그렇다고 말을 한다. 하지만 과연 “설원기”가 소설이나 영화 같은 것인가. 이것은 역사적 사실의 문제이다. 1+1을 9,999명의 사람들이 3이라 할 때 단 한 사람이 2라고 했고 그것이 정말 사실이라 밝혀졌다고 하자. 그런데도 그 사람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매도한다면 그것이 제대로 된 사회일까. 정의와 불의는 상대적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는 그런 문제도 아니다. 남의 이름을 거짓으로 저자로 끌어들여 없는 사실, 없는 행적을 만들어낸 날조에 대한 문제이다. 그래서 ‘어린아이라도 진실을 말하면 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설원기는 소설이라 해도 추악한 소설이다. 차원부라는 인물의 행적을 날조하기 위해 4얼을 날조하여 그들을 한없이 흉악한 인물들로 조작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추가로 논한다.)
그리고 남극관은 “설원기”에 대해 ‘추잡, 조악, 사실을 속이고 기망함’ 등의 표현을 썼다. chky는 “설원기”의 ‘번역본’을 보면 비루하거나 ‘교만’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것은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여기서 ‘교만’이라는 말은 다소 주관성이 들어가는 용어인데, 박은정의 논문에서도 남극관도 이런 적절치 않은 용어를 쓰지 않았다. ‘교망’(矯妄, 사실을 속이고 기망함)이 맞는 말이다.) 남극관이 비판한 것은 “설원기”의 위작의도와 거짓된 이야기를 만들어서 가문을 위대하게 만들고자 한 행위의 추악함을 말하는 것이다. “설원기”는 수준 높은 한문으로 쓰여 있다. 그것이 조선의 학자들도 “설원기”의 실체를 간파하지 못하게 만든 주 원인 중 하나이다. 그러나 과연 그렇다고 “설원기”가 비루하고 추악하지 않다고 해야만 하는 것인가?
덧붙일 점은, 어떤 사안을 비평할 때는 그 사안에만 집중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폭넓게 살펴보아야 할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비난하는 일은 삼가야 하며, 가능한 한 구체적이고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여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남극관(1689~1714)은 26세로 요절한 아까운 인물인데, 그의 독서력과 명철함은 짧지만 귀중한 “몽예집(夢囈集)”을 탄생시켰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조규환의 해제에 “문집에는 卷頭의 「自敍」에 이어 권1(乾)에는 「送春用唐人韻」 등 詩 79수와 「狂伯贊」 등 雜著 11편이 권2(坤)에는 잡저로 「謝施子」가 수록되어 있는데, 분량상 매우 소략하지만 과학사, 어․문학사, 서지학 등의 연구에 참고할만한 주요한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다.” 라고 평하고 있다. 남극관이 설원기를 비루한 위작이라고 평한 “제차원부설원기(題車原頫雪寃記)” 뒤의 네 번째 글이 “단거일기(端居日記)”인데 임진년(1712) 7월 1일부터 30일까지 한 달 간의 독서일기이다. 약 23편의 작품들이 언급되어 있어 그의 방대한 독서량과 독서의 깊이를 짐작하게 한다. 이런 것을 보고도 과연 남극관이 오로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남 잘되는 것을 시기하여’ “설원기”를 비판한 것으로 생각되는지 궁금하다.
5. 연안이라는 지명
“설원기”는 조선 중기의 지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냈음을 곳곳에서 노정(露呈)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위에 지적한 박팽년의 관직을 형조참판으로 꾸민 것인데, 연안이라는 지명의 언급도 좋은 예이다. 그러나 상세한 논의는 이미 다른 곳에서 했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반복하지는 않으려 한다. 다만, chky100이 “우리가 보통 글을 쓸 때 글을 쓸 시점으로 표현하는 것이 상식이다.”라고 말한 점에 대해서만 지적하고자 한다. 이 말 자체로는 타당하다. 하지만 그것은 “설원기”의 본문을 보지 않았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한 말이다. 바로 “설원기”에서 연안은 고려태조 왕건이 내린 관향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양(漢陽)김씨는 현재의 서울을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라는 말은 가능하다. 하지만 주체와 시대가 명기되어, 예를 들어 “세종대왕이 김모에게 서울을 관향으로 삼게 했다.”고 묘사한다면 전혀 시대착오적인 묘사가 된다. 바로 그런 점을 지적한 것이다. (*한양김씨는 실제가 아니라 가상하여 언급한 것임.)
나아가서 원래 효생인지 효전인지 이름도 혼동되는 인물은 “설원기”에서 비로소 정착된 인물이다. 대승공 류차달의 아들이었다고 하니 류효생 또는 류효전이었다가 차씨 성으로 바뀐 것으로 묘사되는데, 역사에 전혀 아무런 자취도 없던 그가 조선 중기에 만들어진 “설원기”에서 갑자기 대승공의 맏아들도 등장하고, 게다가 대승공의 공적으로 고려시대 금석문에도 밝혀져 온 것을 그의 공적으로 둔갑시키고, 또한 대승공과 비교할 수 없이 큰 상을 받은 인물로 그려진 것 자체가 날조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묘사의 한 구절로 등장하는 연안의 지명 문제는 아주 지엽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설원기”는 차원부의 계통을 만들어내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연안은 그 조작을 한 눈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시이기 때문에 지적한 것일 뿐이다.
6. “대동운부군옥”
“설원기”는 문헌에 최초로 등장한 것이 1583년으로 확인된다. 이 사실은 설원기의 진짜 저자와 위작 동기와 배경 같은 사항들뿐만 아니라 “설원기”의 전개 양상에 대해서도 논하는 데 중요하다. “설원기”는 특히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이하 “군옥”)에 자료 중 하나로 들어가서 “설원기”의 내용이 다루어진 항목이 수십 개에 이를 정도이다. “군옥”에는 여러 오류가 들어 있지만 필자는 바로 “설원기”가 들어갔다는 사실이 “군옥”의 최대 흠결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chky100은 자신의 글(#250)에서 “군옥”에 대한 해제를 옮기면서 그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 물론 “군옥”은 참으로 가치 있는 저술이며 권문해의 필생의 역작이며 그 아들 권별에까지 그 영향이 이어졌다. 그런데 chky100은 그런 가치를 오로지 “문화류문에서는 전쟁의 혼란을 틈타 설원기를 지어내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으니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 제시하고 있다. 혹시 그런 분이 있다면 전후 맥락을 알지 못하고 하는 발언일 따름이다. “군옥”은 “설원기”가 이미 임진왜란 전에 세상에 퍼졌으며, 현재의 “설원기” 판본들과 “군옥”에 인용된 구절을 비교해보면 “설원기”의 텍스트가 계속 변했음을 증명하고 있으며(이것은 또 “설원기”가 왕명(王命)으로 지어진 것으로 조작하고 있는데 그것이 사실일 수 없음을 증명함), 문절(文節)이라는 차원부의 시호가 이때 이미 나라에서 내린 것으로 조작되어 퍼져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국보 “일성록”과 정조대왕이 증명하듯, 차원부의 시호는 나라에서 내린 적이 없다.) 비록 “설원기”가 “군옥”의 큰 흠결이지만 그로 인하여 중요한 사실들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긍정적인 역할도 하고 있다. chky100는 “군옥”과 “설원기”에 대해 상세히 살핀 필자의 글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단순한 생각만으로 비난 아닌 비난을 위해 “군옥”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군옥”의 한자 群玉을 한결같이 群獄이라고 쓰고 있는데, “군옥”을 실제로 하나라도 살펴보고 논한 것인지 알 수 없다. 필자는 “군옥”의 차원부와 설원기 관련 구절 전부를 검토했음을 밝힌다.
7. 4얼 문제
“설원기”에서 가장 핵심을 이루는 배경은 바로 얼자(孽子=서자)와 적자(嫡子)이다. “설원기”의 논조는 이렇다. “고려의 절신이며 조선 건국의 공신인 위대한 인물 차원부는 적자이다. 그런데 차원부가 족보를 만들면서 정도전, 함부림, 조영규, 하륜이 자기 집안의 얼자라는 것을 밝혀서 그들이 차원부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가, 왕자의 난을 기화로 차원부와 그 일당 70여명을 죽여 버렸다. 이 얼마나 억울한 원한이랴. 그러니 차원부를 설원해야 하고 그 자손들도 높이 들어 써야 한다.” 이 네 사람이 소위 ‘4얼’이며, 그래서 제목도 “차원부설원기”인 것이다. 그런데 실상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설원기”는 하륜 관련에 대해서만 구체적이며 거의 모든 사항이 아주 모호하다. 예를 들어 차원부 관련 사건 묘사에는 심지어 그 흔한 갑자, 을축, ... 하는 간지년도도 태조 몇 년 하는 왕대년도 표시도 없다. 왕자의 난과 4얼 중 가장 흉악한 인물로 그려져 있는 하륜의 행위에 대해 묘사할 때조차 그렇다. (그 후의 사건들에 대해서는 몇 개 있음.) 이 모호함은 4얼의 묘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선 “설원기”는 그들이 어떤 관계로 차문의 서얼인지 명기하지 않았다. 단, 정도전에 대해서는 정몽주의 첩손주사위(서얼사위)이고 정몽주는 차원부의 종제(從弟)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차원부를 죽였다는 대목에서는 거의 대부분 하륜이 저지른 일로 묘사하고 있다. “설원기”의 序와 記뿐만 아니라 응제시 가운데 20여 수의 주석에서도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4얼일까.
4얼을 등장시키는 “설원기”의 모호한 표현들을 정리해 보면 대략 이런 식이다. “정도전과 조영규가 화(禍)의 기틀을 조성하였고, 후에 함부림과 하륜이 난(亂)을 빗어내었다.” 참고로, 이들의 사망년도는 정도전은 왕자의 난 때인 1398년, 조영규는 1395년, 함부림은 1410년, 하륜은 1416년이다. 하륜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의 역할은 전혀 구체적이지 못하다. 대략 고려 말에 임견미와 염흥방이 제거되면서 차씨 가문도 제거되었고(‘적족(赤族)’이라는 표현이 쓰임), 조선 초에는 차원부와 일당(70여명이라 함)도 제거되었다고 하며, 아마도 앞의 적족 사건에는 정도전, 조영규가 관여했고 (“설원기”의 다른 곳에서는 조준, 조반이 일으킨 것으로 묘사되어 있음) 뒤의 차원부 살해에는 함부림과 하륜, 특히 하륜이 관여한 것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들 ‘4얼’이 차원부 집안을 몰락시킨 동기는, “설원기”에 따르면 오로지 차원부가 자신들이 서얼 출신임을 족보에 기록했다는 것이다. “설원기”에서 차씨 집안과 차원부의 몰락에 대한 혼란스럽고 모호한 사건 묘사는 뒤로 갈수록 4얼과 차원부, 특히 하륜과 차원부 사이의 일로 단순화된다: “피(彼)는 조영규, 정도전, 함부림, 하륜 등이고, 차(此)는 차원부 등이다.” 전자는 서얼들이고 후자는 적자(嫡子)이다. 관련 묘사에 따르면, 정도전 ․ 조영규는 ‘모함’했으며(陰陷), 함부림은 사사로이 시기했고(私忌), 하륜은 탄압하였다. 또한, ‘가문의 서얼들이 꾸민 무함(誣陷)에 빠짐’, ‘서얼들이 적자(嫡子)를 능멸하는 불의’, ‘이들은 사사로이 왕인(王人, 차원부를 지칭)을 죽임’ 등의 표현도 사용된다. 이와 더불어 성삼문이 지었다고 조작된 응제시에는 차원부 죽음이 4얼(四孽生)에 의한 것임을 묘사하고 있고, 역시 정인지가 지었다고 조작된 응제시에도 ‘그때의 간신(奸臣)들’[時奸]이 저지른 일로 묘사하면서, 그 주석에 이들이 4얼임을 명기하고 있다. (한문은 단수, 복수가 모호하게 나오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는 확실히 복수의 4얼로 명기되는 경우만을 인용하였다.) 정리하자면, “설원기”에서 차원부의 죽음은 대개 하륜의 행위로 묘사되지만, 대강 4얼의 행위로 묘사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륜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구체성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고려말에 이성계와 최영 등에 의해 대표적인 간신이라 하여 임견미와 염흥방이 제거될 때 1000여명에 이르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 함께 처형되었다. 이때 차씨 가문이 포함되었는지는 역사에서 확인되지 않는데, 만일 그랬다 해도 간신의 일당으로 처형된 것일 터인데, 그 동기를 전적으로 개인의 원한으로만 돌리는 것은 역사를 올바로 보는 태도가 아니다.
이러한 “설원기”의 4얼에 대한 묘사는 다른 문헌에서 재생산되면서 더 확실해진다. 위에 논한 “대동운부군옥”에서는 ‘정도전, 하륜 등이 꾸민 함정에 빠져서 문중이 몰살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차식의 신도비”에서도 ‘4얼이 참소하여 차원부 등이 죽임을 당했다’고 되어 있으며, “연려실기술”에서는 ‘하륜이 모함하여 정도전, 함부림, 조영규와 더불어 추살(椎殺, 몽둥이로 때려죽임)했다’고 하며, 심지어 “문헌비고”에는 정도전만이 차원부를 죽인 자로 등장한다. 물론 하륜만이 언급되는 경우도 여럿이 있다.
이들은 ‘정도전, 조영규, 함부림, 하륜은 차씨 가문의 서얼로서 자신들의 출신을 밝힌 족보를 만든 차원부를 원망하여 죽였다.’는 차원부 죽음에 대한 일반적인 묘사를 가능하게 한다. 이를 비판해 보면 우선 족보 운운 자체가 우리나라의 족보사에 비추어보면 근거 없는 이야기이고, “설원기”에서도 정도전, 조영규, 함부림은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실정이며, 더구나 이들이 차씨 가문의 서얼이라는 객관적인 증거도 없으며, 더 심각하게는 근본적으로 그들이 서얼이라는 증거 자체가 없다. “설원기”에서도 서얼들이 차원부를 죽였다는 묘사가 있는데, 이때 하륜을 제외한 세 사람(정, 조, 함)이 차원부가 죽었다는 1398년이 아니라 고려말의 차문 적족(赤族)에서만 역할을 한 것으로 해석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설원기” 자체가 차원부의 죽음과 4얼을 연관시키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그들은 자신들이 얼자라고 밝혔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출신 집안(차문)을 모두 멸족시킨 이해할 수 없는 인물들이 되기 때문이다. 곧, 그들이 차원부의 죽음에 직접 혹은 간접으로라도 관여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럴 경우는 정도전은 왕자의 난 때 이미 죽었으니 그 후에 죽었다는 차원부의 죽음에 관여할 수 없고, 더욱이 정도전은 태조의 충신이었으며 “설원기”에서는 차원부도 태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기에 정도전이 차원부를 죽음에 관여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 된다. 조영규는 1395년에 죽었으니 더더욱 차원부의 죽음에 관여할 수 없다. 게다가 조영규에 대해서는 “조준과 조영규는 전에 부름을 받은 가운데 지난날을 뉘우치며 먼저 차원부의 죽음을 말하였다.”(필사본)고 명기되어 있어 이미 1395년에 죽은 조영규가 1398년에 죽었다는 차원부의 죽음의 억울함을 임금에게 아뢰는,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 장면이 나온다. (혹시나 해서 후대의 本을 살펴보니 조영규(趙英珪)는 조영무(趙英茂, ?~1414년)로 바뀌어져 있었다. 이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것을 받아들인다면 “설원기”가 왕명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왕명을 참칭해서 만들어 자기 입맛에 맞게 마구 변형시킨 위작이란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대개 “설원기”의 정체가 이런 것이다. 그리고 珪자는 茂자와 혼동될 여지도 없다.)
그래서 필자는 “설원기”를 이미 죽은 사람들(정도전, 조영규)이 산 사람(차원부)을 죽이는 ‘유령들의 놀이터’라고 표현하고 있다. “설원기” 자체에도 대세를 이루고 있는 하륜이 차원부를 죽였다는 묘사만 보면 이것은 비논리적인 궤변일 것이다. 하지만 설원기의 다른 묘사들과 그에 입각한 여러 문헌의 것을 포괄하여 전체적으로 보면 결코 궤변으로 볼 수 없다. 더구나 조영규에 대한 묘사를 보면 더욱 그러하다.
“설원기”의 수법 중 하나는 이미 언급했듯 차원부의 일을 어렵고 모호하게 표현하고 나서 태종 이후의 인물들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등장시켜서 마치 전자도 후자처럼 구체적인 일로 생각하게 만드는 착시현상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차원부라는 인물이 실제 무슨 일인가 큰일을 한 것처럼 설명했지만, 차원부 자체가 역사적 실체가 없는 인물이라는 더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그의 급제와 벼슬과 행적은 모두 “설원기”에서 비로소 나온 것이며, “설원기” 이전의 문헌에는 전무하다. 정몽주와 같은 위대한 고려의 충신이고, 조선 건국에 지대한 공을 세웠고 이성계(태조)와 이방원(태종)에게 친구요 아버지 같은 인물로 묘사되는 자가 어떻게 역사에 아무런 자취를 남기지 않다가 “설원기”에서만 폭발적으로 묘사될 수 있을까. “설원기”의 날조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며, 대개 “설원기”에서 처음 나온 묘사들은 모두 믿을 수 없는 역사조작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설원기” 외적으로는 ‘문절’이라는 차원부의 시호가 날조임은 국보 “일성록”에서 증명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상세하게 한 것은 chky100가 그의 글(#251)에서 필자가 “설원기”를 ‘유령들의 놀이터’라 묘사한 것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설원기”에서 4얼 문제가 “설원기”의 정체를 파악하는 핵심 중 하나임을 간파하고 이미 상세히 논했으며 단행본 “대호하루”(태극출판사, 2012)에도 정리해 놓았다.
8. 4얼의 진짜 정체
예전 족보에서는 서자인 경우 명기되는 일이 많았다. 신분이 절대적인 시대에 적서는 하늘과 땅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태여 적서를 구별해 놓지 않은 문헌에서는 추가적인 묘사가 있기 전에는 적서의 구별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어떤 문헌에서 사실을 왜곡해서 어떤 사람이 서얼출신이라고 꾸며 주장해 놓으면 그것을 반박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대저 사람을 모함하고 부정적인 딱지를 붙이기는 쉬워도 그것에서 벗어나게 만들기는 어려운 법이다. “설원기”의 이른바 ‘4얼’의 경우는 “설원기” 자체가 위작이므로 ‘4얼’이 실제 얼자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해 살펴보았다.
‘4얼’ 가운데 조영규(?~1395)는 신창(新昌)조씨라 하고 그 본관의 시조라고도 하는데, 고려말~조선초에 활약한 무신이며, 가계가 불분명하다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하 “한문민사전”)은 그가 연안차씨 차견질(車堅質, 차원부의 동생으로 나옴)의 첩의 딸을 아내로 삼았다고만 되어 있고, 여기서도 조영규 자신이 얼자라는 말은 없다. 다만 그가 ‘일반 평민출신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한민문사전”의 조영규 항목의 집필자는 한영우로서, 그는 정도전의 출신을 설명하면서 “설원기”의 이본인 “차문절공유사”, 그것도 그곳에 실린 후대의 부록, 또 그중에서도 해당 문중에서 제시한 계보를 마치 모두 사실인양 사료로 사용하여 전혀 사실이 아닌 설명을 전개하였다. 이는 크게 비판받아야 마땅한 일이라 여겨진다. 이런 실정인데 “설원기”는 그를 “차문의 얼자”로 묘사하고 있다. 표현만 보면 차문의 얼서(孼壻)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러나 18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차문절공유사”의 계보를 신뢰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 조영규는 이것 이외에 논할 자료가 없다.
함부림(咸傅霖, 1360~1410)은 고려말~조선초의 문신이며, 강릉(江陵)함씨이다. 그는 고려 때 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올랐고, 조선조에 들어 대제학과 형조판서까지 역임했다. 그런데 한영우의 자료(“차문절공유사”의 계보)에 따르면 함부림은 차원부의 동생 차견질의 첩의 손녀사위이다. 조영규는 차견질의 첩의 사위이고 함부림은 첩의 손녀사위(곧, 첩의 아들이 낳은 딸과 결혼)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영규에 대한 묘사보다 함부림에 대한 묘사에는 더욱 문제가 많다. 우선 함부림은 검교중추원학사(檢校中樞院學士) 함승경(咸承慶)의 아들이며, 문과에 급제한 인물이다. 서얼이 차별을 받았다면 왜 서녀(庶孫女)인 차씨 여자와 결혼을 했을까. 더구나 그의 부인은 정경부인(貞敬夫人) 한양조씨(漢陽趙氏)와 정경부인 연안이씨(延安李氏)로 나와 있다. 함부림은 그 졸기(卒記)가 실록에 태종 10년 12월 1일 기사로 주어져 있는데, 두 아들 함우공(咸禹功)과 함우치(咸禹治)가 명시되어 있다. 함우공은 태종 14년의 식년시에 급제했고, 문화류씨의 먼 외손이고 문화류씨 가정보에도 나온다. 그곳에 그의 벼슬은 승(丞)으로 나와 있고, 자녀로 사위만 하나 나오는데 부사(府使) 정신석(鄭臣碩)이다. 함우공의 장인은 박강생(朴剛生)인데, 그 딸이 세종의 후궁 귀인박씨(貴人朴氏)였다. 함우치 또한 졸기가 실록의 성종 10년 5월 29일자에 나오는데, 그는 문음(門蔭)으로 관직에 나갔고, 대사헌, 관찰사, 형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그는 아버지와 같은 동원군(東原君)에 봉해졌다. 과연 함부림이 차씨 서얼 여자와 결혼하여 차씨 집안의 얼서(孽壻)일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가?
하륜은 어떨까. 한영우의 가계도(“차문절공유사”의 계통)에는 하륜의 외할머니가 차씨의 서녀로 나온다. 하륜의 아버지는 하윤린(河允潾)이고 하윤린의 장인이 강승유(姜承裕)인데 강승유의 아내가 차씨 집안의 서녀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묘사는 하윤린의 신도비를 보면 날조임을 알 수 있다. 그 신도비는 변계량(卞季良, 1369~1430)이 지었으며 조선 태종 16년(1416)에 세워져서 지금도 내려오고 있다. 변계량은 “계유년(1333)에 고을의 장자(長者)인 증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 강승유(姜承裕) 공이 공(하윤린)에게 말하기를, ‘선대에서 나라에 공이 있는 자는 그 후손이 반드시 창성하게 된다.’ 하고, 자기의 딸을 공의 아내로 삼게 했다. 찬성공은 성품이 엄격했는데, 공이 아버지처럼 섬겼다. .... 정해년(1347) 봄에 부인 강씨(姜氏)가 길몽을 꾸고 난 뒤에 임신하여 겨울 12월에 아들을 낳았으니, 지금의 정승공(政丞公, 하륜)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실록에는 태종 16년 4월 17일에 이 신도비 관련 기사가 나오는데, 하륜이 변계량에게 위촉하여 신도비명을 짓게 하고, 박희중에게 글씨를 쓰게 했는데, 태종임금에게 그 사실을 아뢴다. 태종은 “내가 경의 세계(世系)를 자세하게 알고 있다.”고 화답하고, 변계량과 박희중에게 좋은 관직을 내려달라는 하륜의 청을 흔쾌히 들어주고 있다. 하륜이 서얼의 출신이라면 도저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또한 하륜의 어머니, 곧 하윤린의 부인 진주강씨는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에 봉해졌는데 (하륜의 부인 성산이씨도 같은 칭호를 받았음) 대개 하륜이 높은 벼슬을 했기 때문이지만, 천한 출신이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특히 하륜이 보좌하여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태종은 서얼금고법을 시행하여 첩의 자손은 벼슬에 제한을 두고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금하였는데 이 법이 제정된 것이 하륜의 생전이었다. 태종은 세자였던 방석을 제친 명분을 찾고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여 왕가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적서의 차별을 적극 도입했다. 그리고 이이화에 따르면 하륜은 이자춘(李子春,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의 첩의 자손은 현직에 등용하지 말라고 주장하였다 한다. (“한국의 파벌”, 어문각, 1983) 태조와 그 아들인 태종을 정통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상으로 미루어 보면 “설원기”에서 최고의 악역으로 꾸며져 등장하는 하륜은 비천한 출신이 아닐 가능성은 충분하다.
마지막으로 정도전은 조선의 기틀을 세운 인물이다. 정도전은 상당히 여러 곳에서 비천한 출신으로 묘사되고 있고 그런 논의가 이미 조선왕조실록과 “고려사”에 실려 있다. 더욱이 최근 수십 년 동안 마치 그것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인 양 널리 퍼졌다. 그렇게 된 데에는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정도전 연구를 한 역사학자 한영우의 역할이 컸다. 그는 실록과 “고려사”, 행장 등의 몇 가지 자료를 근거로 결론을 내렸다. 그 자료에는 단양지방의 전설과 “차문절공유사”(이하 “유사”)도 포함된다. 특히 그의 역작 “정도전 사상의 연구”(1983)에서 류차달에서 차송우로 이어지고 차원부와 주변 일가로 이어지는 계보를 그리고 정도전을 포함한 ‘4얼’을 모두 그 계보에 연결시켜 놓았다. 그러나 이것은 불행하게도 “유사”의 내용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인 잘못된 결과이다. 어떤 집안의 계보이건 역사적 사료로 쓰기 위해서는 그 신빙성에 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것은 계보뿐만 아니라 여하한 문헌이나 사료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족보의 발달사를 보면 족보의 기록이 전반적으로 꾸며지고 부풀려져 온 것을 볼 수 있어 그 기록의 객관성이 반드시 담보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설원기”에서 가장 확실히 조작이라고 파악되는 것이 바로 그 안에 들어 있는 계보의 혼인관계 조작이며, 10여대의 혼인관계가 거의 모두 조작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따라서 한영우의 계보는 근본부터 무너진다. 더구나 “유사”의 내용이 실록이나 “고려사” 등에 논의된 내용과 합치되기 어려운데 한영우의 계보는 억지로 그들을 연결시켰다. 역시 위서인 “유사”의 내용을 실록이나 “고려사”만큼 신뢰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차문절공유사”는 “차원부설원기”의 이본 중 하나이고, 문절이라는 근거 없는 시호를 제목으로 버젓이 쓰고 있어 그것만으로도 제대로 된 역사사료로 볼 여지는 없다. 왕명으로 만들어져 왕에게 바쳐졌다고 스스로 주장하고 있는 문헌에 이본이 여러 종류로 난무하는 것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단양지방의 전설이라는 것도 언제 생겼는지도 모르고 신빙성은 더구나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록과 “고려사”와 정도전의 글 등을 상호대조하여 판단해야 한다. 여기서 따로 논의하지 않아도 이미 그런 논의가 다른 사람에 의해 상세히 이루어져 있음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듯하다. 그 중 하나가 “정도전 출생의 진실과 허구”(정병철, 퍼플, 2013)인데 기존의 여러 연구들을 종합한 것이며, 그 전에 “삼봉 정도전의 건국철학”(김용옥, 통나무, 도올문집 4, 2004)에도 간략하지만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어져 있다. 김용옥은 실록의 관련 기사를 자세하게 분석한 후에 정도전이 쓴 아버지 정운경의 행장의 구절을 대비시킨 다음,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정도전을 이름도 모르는 승려가 사노(私奴)의 부인과 간통하여 난 딸의 외손자로 휘모는 것은 아무래도 석연치 않다. 리얼리티에 근접된 역사 기술로 간주되기 어렵다.”(위 책, p.18) 이런 분석과 논의에서 “유사”의 계보가 끼어들 틈은 없다.
추가적으로, “설원기” 이외에는 함부림, 조영규, 하륜이 서얼출신이라는 증거는 없다는 중요한 사실도 지적되어야 한다. 정도전의 경우는 태종에게 제거되고 난 후 그의 가치가 부인되는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그가 서얼출신인 것으로 그려진 묘사도 존재했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또한 대개 서얼 관련 논란의 경우에도 본인 자신이 서얼 출신이 아니고 부인이 그럴 경우 이(利)를 탐하였다는 비난을 듣기도 했지만(곧, 재물 때문에 부잣집 혹은 사대부의 서녀들과 혼인했다는 뜻), 부인의 출신 때문에 남자가 사회적으로 영향을 받지는 않아야 한다는 의견이 컸음도 주목할 가치가 있다.
9. 하륜
이상의 내용에 비추어 보면 “설원기”의 ‘4얼’은 근본적으로 ‘얼자’로 등장시킨 것부터가 조작이다. 따라서 얼자와 적자(嫡子)의 대비를 통해 후자를 높이려 했던 “설원기”는 정상을 비천한 비정상으로 바꾸는 비열한 수단을 통해 목적달성을 꾀한 것이어서 추악하기 이를 데 없다. 오직 내가 잘 되기 위해 주위 사람들을 속이는 것도 모자라서 비참한 나락으로 빠뜨리는 모함을 한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여기서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이면 정도전, 함부림, 조영규, 하륜이 선택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우선 정도전은 태종 이후로 조선의 왕조의 보존에 오히려 조선 건국에 찬동하지 않은 정몽주의 절의가 정도전의 신권(臣權)과 개혁 사상보다 유리하다고 느껴 오랫동안 역적으로 남아 있다가 겨우 고종 때 복권되었다. 따라서 조선 중기에 “설원기”의 위작자가 그를 끌어들여 흉악한 인물로 묘사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함부림과 조영규는 짐작하기 어렵다. 후손이 영달하지 못해 미약했거나 후손이 끊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두 사람에 대해서는 추가 고찰이 요구된다.
하륜의 경우는 일견 미스터리이다. 하륜 자신이 큰 세력을 떨쳤으며 그의 진양(진주)하씨 집안도 작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원기”의 위작자는 하륜을 최대의 악역으로 등장시키면서 아주 흉악한 인물로 묘사했는데, 그의 후손이나 집안이 그것을 보고 사실이 아님을 지적하며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하씨 집안에서는 그런 일이 있었다. 대표적인 분이 조선 후기 유학자인 하진현(1776~1846)인데, 그는 “차록변무(車錄辨誣)”와 몇 편의 관련 글을 지었다. “차록변무”에서는 ‘하륜이 차씨 집안의 서얼이고 그 사실을 밝힌 차원부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차원부와 그 일족을 몰살시켰다.’고 한 “설원기”의 묘사가 사실이 아님을 조목조목 변증하는 등 “설원기”의 문제점들을 논리적으로 파헤치고 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러한 문제제기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설원기”의 序가 하위지의 작품이 아니라는 영조 때의 저명한 문신 홍계희(1703~1771)의 강력한 지적도 있었는데, 이 또한 널리 퍼지지 못했다. 그가 죽은 후인 1777년(정조 1년)에 홍계희 집안은 정조시해미수 사건으로 인해 대대적으로 처형되었고 홍계희도 역적으로 올랐으며, 또한 홍계희 자신도 권력을 좇았다 하여 사림(士林)의 배척을 받았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이런 사실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정사(正史)에서 하륜 관련한 서자 논란은 하륜 자신이 아니라 손자 대에서 나왔다. 실록 태종 16년(1416) 11월 6일의 하륜 졸기(卒記)에는 그의 자식으로 하구(河久)와 세 명의 서자 하장(河長), 하연(河延), 하영(河永)이 있다고 나와 있다. 하구는 아버지 하륜이 사망한 후 1년쯤 있다가 병으로 죽었는데, 하구의 외아들이 하복생(河福生)이었다. 그런데 하복생은 하구가 본처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해 감찰 김음(金音)의 딸과 다시 혼인하여 낳은 자식이었다. 게다가 김음은 지방 수령으로 있을 때 장물죄의 비리를 범한 ‘장리(贓吏)’였다. 세종은 재위 14년(1432)에 그가 공신(하륜)의 손자이지만, 첩자(妾子)라 하여 과거에 볼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하복생은 벼슬을 제수 받고 선공 부정(繕工副正)(세종 20년), 군자 판사(軍資判事)(세종 30년) 등을 역임하였다. 그때마다 그가 첩의 소생이라 하여 사헌부에서 반대하였으나 세종은 듣지 않았다. 아버지 태종을 도와 보위에 오르게 한 공신을 결코 소홀히 대할 수 없어서였다. 그리고 이런 식의 논란은 하복생의 손녀의 사위인 권경희(權景禧)에게서도 일어났다. 그가 성종 10년(1479)에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이었는데, 대간(臺諫)에서 하복생이 첩자(妾子)라 하여 권경희를 그 자리에 둘 수 없다고 주장하였고, 성종은 그에 따랐다. 그러나 그 다음해 성종은 권경희를 공조좌랑에 임명했고, 사헌부에서 같은 논리로 임명에 반대했다. 성종은 신하들에게 이 건에 대해 논의하라고 명하여 구체적인 의견들이 개진되었다. 그 결과 성종은 ‘벼슬 제한은 서얼 자손 자신들에 적용하는 것이지 그들의 사위들에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므로 벼슬 임명에 문제가 없다. 하지만 하구가 전처와 후처를 두어 흠결이 있으니 대간·정조·홍문관·춘추관 외에는 임용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에 따랐다. 하복생에 관한 논란은 성종 13년(1482)에 마무리된다. 하복생의 외손 김인령(金引齡)이 ‘아내를 두고 또 아내를 취(娶)한 것이 즉시 발각되지 않았다가 본인이 죽은 뒤에 자손(子孫)이 적자(嫡子)를 다투는 자는 먼저 난 자를 적자로 삼는다.’는 조선의 법률을 들어 하복생을 적자(嫡子)로 간주해 달라고 요청한 것을 성종이 받아들인 것이다.
하륜의 문집인 “호정집”(호정은 하륜의 호) 부록에는 간략한 하륜의 세계(世系)가 붙어 있는데, 하륜의 손자로 하복생 한 명과 증손자로 하후(河厚) 한 명만이 올라 있고, 그 이하는 비어 있다. 그리고 하륜의 항목에 “증손 현감 하후(河厚) 이후에 자손이 전하지 않는다. 영종(英宗, 영조) 갑오년(1774)에 방계 13대손 하한통(河漢通)을 특별히 [문충공(하륜)의] 제사를 받들도록 허락했고, 정종(正宗, 정조) 기미년(1799)에 [임금이] 직접 사제문을 지어 제사를 내렸다.”고 밝혀져 있다. 실질적으로 하륜의 대가 끊겼다는 말로 해석된다. 결국 “설원기”가 하륜을 대담하게 왜곡하여 등장시킨 이유는 그 위작자가 하륜의 후손에게서 불거졌던 서자 논란과 직계 후손이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10. 서얼금고법
고(故)이수건 교수는 자신의 논문에서 “설원기”에서 4얼을 등장시킨 것은 오히려 16세기 중엽의 조작임을 보여준다고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chky100은 그의 글(#252)에서 이것이 엉터리라고 주장한다. 서얼금고법이 1415년에 시행되었고, 려말선초에도 서얼차별이 심하였다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이수건 교수의 논문을 언급하면서도 그것을 읽어보지도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으며, 만일 읽었다면 제대로 읽지 않은 것이다. 논문에서는 일방적인 주장을 지양하고 근거와 논리를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결론을 도출해 낸다. 이수건 교수 논문의 관련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른바 車門의 外裔四孼 문제는, 여말선초의 권문세족 가운데는 내외조상의 세계에 서얼로 간주되는 인물이 많았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16세기중엽 이후의 시대적 관념으로 여말선초를 보았기 때문에 그러한 내용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태종 13년(1413) 妻妾分拺과 서얼차대법이 재정되기 전까지의 고려후기 내지 선초에는 서얼의 혐의를 받는 자가 많았다. 황희의 모계(10)를 비롯한 명공․ 거족에도 賤系가 섞여 있었다(11).”
(10) 황희의 출신성분은 『세종실록』 권40, 10년 6월 병오 및 『단종실록』 권2, 즉위년 7월 을미조 참조.
(11) 李義旼, 辛旽, 鄭道傳 등의 모계가 천계란 이유를 들어 곧 일반 천계 출신과 동일 선상에서 논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물론 賤者隨母法에 의하면 의당 그 소생들은 賤隸가 되기 마련이나 父쪽의 신분적 배경과 권력으로 얼마든지 면천되었을 뿐만 아니라 부계의 위세와 본인의 능력으로 출세하는 자가 많았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무신정권이래 조선초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며, 권귀가문에서 많은 처첩을 거느린 결과 婢妾所生으로 고관요직에 오른 자가 많았다.
출처: 이수건, 이수환, “조선시대 신분사 관련 자료조작”, 대구사학 86집 (2007. 2.)
여기서 정도전의 경우는 모계가 천계(賤系)라는 주장을 일단 그대로 받아들이고도 문제가 없음을 언급하고 있다. 황희의 경우는 태조 때부터 세종 때까지 중신으로 활약했으며 특히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한 인물이다. 그는 판강릉부사(判江陵府事) 황군서(黃君瑞)의 얼자(孽子)였다고 하며, 위의 주석 10번에 언급된 세종 10년(1428) 6월 25일 기사에 사관(이호문, 李好問)이 그의 비리를 상세하고 신랄하게 논하고 있다. 그 비리에는 뇌물, 매관매직, 간통, 음험함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단종 즉위년(1452) 7월 4일 기사에는 세종실록을 편찬함에 있어 앞의 기사의 진위와 처리에 대해 신하들 사이에 논의한 것이 나온다. 정인지, 황보인, 김종서 등 여러 대신들이 황희가 얼자임은 사실이라 인정하면서도 나머지 일은 아무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일이라고 지적하면서 오히려 황희를 칭송하고 이호문의 성품이 망령되고 조급하여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삭제해야 한다거나 삭제해도 무방하다는 의견과 함께 한번 삭제하기 시작하면 악용될 소지가 있고 ‘하나라도 불가함이 있으면 삭제하지 않아야 한다’는 엄중한 의견도 개진되고 있다. 이 기사에는 결론은 명기되어 있지 않지만 앞서 살펴본 바대로 현재의 실록에는 황희에 대한 사관의 논의를 그대로 싣고 있다.
“설원기”에 중요한 모티브로 이용되는 얼자와 적자의 대비는 극명하다. 그리고 그것이 일어난 시기는 모두 왕자의 난(1398년)과 그 이전의 려말선초이다. 여기서 ‘려말선초’는 일반적으로 그 범위를 모호하게 지칭하는 말이지만 최소한 여기서 ‘선초’는 서얼금고법이 등장한 태종 15년(1415년)이나 16년(1416년) 혹은 경국대전(경국대전)이 완성된 성종 이후를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얼자에 대한 저항은 고려 때에도 조선 때에도 있었다. 예를 들어 최충헌(1149~1219)은 차약송(?~1219)의 두 아들 모두 기생첩이 난 자식이라 싫어하여 벼슬을 7품 이하로 제한하고 맏아들은 학적을 삭제하게 했다고 “고려사”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세종 때에도 얼자인 황희가 최상의 지위에 있었던 것을 포함한 여러 예를 보면 려말선초에는 적서의 구분은 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명확하지 않은 측면도 보이고 있다. 백보 양보하더라도 최소한 누가(A) 누구(B)를 얼자라고 족보 같은 곳에 적어 놓았다 하여 B가 A를 죽이고 나아가서 A의 집안을 멸족시킬 정도의 분위기는 아니었다. 게다가 B와 A가 같은 집안이었다면 대체 B는 자신의 집안마저 멸족시켰다는 말인가.
11. 설원기는 위서(僞書)를 넘어선 악서(惡書)
설원기는 단순한 위서(僞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날조된 사실을 널리 유포하고 잘못된 관념을 전파하여 역사와 사회에 나쁜 영향을 끼진 악서(惡書)이다. 이수건 교수의 논문에는 다음과 같은 관련 구절이 등장한다.
“이 『차원부설원기』는 편찬 내지 간행․반포된 뒤에 조선후기 각 문중들이 그 기재 내용을 당시의 역사사실로 확신하고 조상유래와 족보편찬에 중요한 사실로 전재, 인용한데서 한국의 성관 의식과 족보 편찬에 있어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조선후기 조상들의 전기․狀碣文 작성과 족보편찬에 있어 온갖 조작과 협잡이 동원된 것도 그 연원을 추적해 보면 『차원부설원기』와 관련있는 것들이 많다.”
그런데 chky100은 이것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고 지적하며 “설원기”에 대해 부정을 위한 부정을 하고 있다고 강변한다. 역시 논문을 읽었다고 하면서 말을 이어가고 있지만 직접 논문을 읽어보지 않았거나 엄밀하게 살펴보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위 인용의 마지막은 실제 “그 연원을 추적해 보면 『차원부설원기』와 관련있는 것들이 많다(8).”라고 하여 주석이 달려 있다. 그 주석은 다음과 같다.
“(8) 여기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이수건, 「조선시대 身分史 관련 자료의 비판」『고문서연구』14(고문서학회, 1998), pp. 15-25 참조.”
논문에서는 지면의 제약과 설득력 있는 논리 전개를 위해 이전에 이미 상세히 논의된 사항이 있으면 그것을 다시 직접 거론하지 않고 이전 연구결과를 참조시키는 일이 흔히 일어난다. 여기 인용된 논문에서는 “설원기”가 嶺南士林(영남사림)에 의해 널리 소개되고 읽혀졌다고 기술하며, 그것이 어떤 문헌에서 다루어졌는지를 과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살피고 있다. 실제 이 1998년의 논문은 2007년의 논문에 상당부분 전재(轉載)되고 있어 그 모체라 할 만하다. 2007년의 논문은 이수건 교수의 사후에 제자에 의해 정리된 것임을 고려하면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설원기”는 차원부라는 실재 여부도 명확하지 않은 인물의 역사적 행적을 극도로 날조해서 그를 정몽주와 같은 반열의 고려 절신(節臣)에 조선 건국의 최대 공신(功臣)으로 조작하였고, 그 안에 수십 명의 인물들을 등장시켰다. 이런 것들이 퍼져나가면서 각종 문헌에 사실인양 들어갔으며 해당 인물들 관련 각종 문집에 그 인물의 일화 내지는 저작으로 소개가 되었고, 그것이 다시 “설원기”의 유사집록 혹은 부록으로 묶이는 확대재생산을 거듭해 왔다. “설원기”에서 비롯된 꾸며진 가문사(史)에는 19세기 전반에 위조된 강남보(江南譜)까지 더해져서 전설의 인물인 황제(黃帝)에까지 이어지는 계보가 조작되어 나왔고, 이것에 입각한 묘사는 각종 족보 및 문중 관련 문헌은 물론 “증보문헌비고”와 같은 공간물(公刊物)에도 들어갔다. 현재는 근자에 수년 간의 역사 정립 노력에 의해 진실이 퍼져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인터넷과 각종 문헌에 만연되어 있고, 심지어 백과사전류에도 사실인 양 들어 있다. 과연 이 모든 것의 시초는 “차원부설원기”가 아니고 무엇이랴.
“설원기”는 해당 가문의 역사를 세운 문헌이다. 그곳에서 비로소 시조의 자출(自出)과 행적이 묘사되었으며 차원부까지 이어지는 여러 대의 조상들의 위대함이 세워졌으며 차원부는 최고의 인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chky100는 필자와 문화류문이 아무런 근거 없이 악의로만 “설원기”를 부정하고 있다고 강변하며, 위의 인용이 증거가 없이 제시되었다고 하여 좋은 예로 간주하고 있다. 하지만 근거는 엄밀하게 제시되어 있고, chky100는 제시되어 있는 그것을 파악하지 못했거나 보았어도 애써 무시하고 있는 것일 따름이다. “설원기” 자체를 제외하고 “설원기”에 진실이 있다고 증명하는 것이 있다면 제시해 보기 바란다. 필자는 이 제시를 10여년을 기다려왔다. “설원기”에 묘사된 사건들이나 그곳에서 비롯된 가문의 계보(원파록)가 사실이라면 필자나 류문이나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하나라도 있을 수 있겠는가. 류문에서 원파록을 폐기한 것은 오히려 가문의 역사를 수천 년에서 1000여년으로 축소하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욱이 수백 년 동안 조상들도 믿어온 일을 후손으로서 지금 폐한다는 어려움도 있었다. 결국 다년간 살피고 또 살펴도 원파록은 역사적 사실이 아님을 깨닫고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길이었다. 이것이 과연 가문을 드러내기 위한 수작이란 말인가. 오히려 정도전을 중심으로 “설원기”를 고찰한 김난옥 박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설원기는 사실과 상당한 거리가 있는 위작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 결국 배타적 가문의식의 확대를 넘어서 심각한 왜곡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것을 쉽게 표현하자면 가문 부풀리기가 너무 심해져서 가문사의 위조에까지 이르렀다는 말이다. 자기 집안을 중시하고 때로는 미화하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면 아무런 가치가 없고 오히려 사회악이 된다 할 것이다.
chky100은 그의 글(#255)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문화류문에서는 차원부설원기의 흔적을 지우거나 위서로 몰지 않으면 그들의 뿌리가 차문에서 나온 사실을 지울 수 없으니 처절할 정도로 애를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안을 잘못 보아도 이렇게 잘못 보기도 어려울 것이다. 과연 해당 가문을 세우는 기초가 되고 있는 그 “설원기”를 읽어 보았는지도 궁금한 발언이다. “설원기”의 본문인 記는 들어가는 말을 한 다음 본격적인 이야기의 시작을 이렇게 하고 있다. “사간원 좌정언 차원부는 문성인 류차달의 첫째 아들 대광지백 효전의 후손이다.”(司諫院左正言車原頫文城人柳車達第一子大匡之伯孝全之後也). 여기를 보면 누가 누구의 아들인가? “설원기”의 조작된 계보 설명을 따르더라도 100년 이상을 류씨로 지냈다. 바로 아버지(대승공)도 류씨였다. 그런데 아들이 공을 세워 그 상으로 임금이 차씨를 쓰라고 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문화류씨는 계속 자손만대까지 이어졌다. 이때 과연 차씨가 류씨의 뿌리인가 아니면 류씨가 차씨의 뿌리인가. 좁은 소견에 그 이야기에서 류씨가 되기 전에 조상들이 차씨였다고 주장하는 것 때문에 문류가 연차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한다면 어린아이 수준의 판단력이다. 원숭이에서 인간이 나온 것이 아니고 원숭이와 인간의 공통 조상에서 갈라져 나온 것일 따름이다. 차씨-문화류씨-연안차씨인 것이지 연안차씨-문화류씨-연안차씨가 아닌 것이다. 이런 묘사에 따르면 문류가 이전에 곧 그 뿌리가 ‘차씨’였다는 말은 맞는다. 그러나 문류가 이전에 곧 그 뿌리가 ‘연안차씨’였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오해가 없도록, 이곳의 류씨와 차씨의 관계 묘사들은 모두 역사적 사실이 아님을 다시 지적한다.) “설원기”는 정확히 그렇게 묘사하고 있다. 곧 류효전이 공을 세워 성과 관향을 받아 연안차씨가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물러난 차문의 집행부에서는 몇 인물이 류문의 뿌리에서 차문이 나왔음을 깨닫고 어떻게든 그 아버지 대승공 류차달을 차씨로 만들려고 몇 년 동안 혈안이었다. 18세기 이후에나 만들어졌을 대승공의 초명(初名)이라는 海까지 동원해서 대승공 류차달을 성이 車에 이름이 海인 ‘車海’로 둔갑시키려 애썼던 것이다. 그렇게 집안을 부풀리려는 또 하나의 노력이 오히려 “설원기”의 정체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는 역풍을 맞았고 그 결과 가문사의 뿌리는 송두리째 그 바람에 뽑히고 있는 것이다. 그 덕분에 필자도 “설원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렇게 역사 살리기에 일조하고 있으니 과연 천우신조가 아니겠는가.
12. 두문동 72현 문제
chky100은 그의 글(#251)에 덧붙인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두문동 72현 사건도 차원부 한 사람을 부정하기 위해 조작된 사건이라고 하니 나머지 71현의 후손들의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은 필자의 주장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한 심한 왜곡의 말이다. 물론 두문동 72현은 그 명단 안에 행적이 조작된 차원부가 들어 있는 것만으로도 큰 흠결을 갖는다. 그리고 두문동 72현의 명단에는 현재 100명도 넘는 인물들이 들어가 있다. 그중에는 차원부처럼 행적이 문제되는 인물들도 몇 사람 들어 있지만 대부분은 개개인의 전반적인 행적 자체는 대개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두문동 72현은 그 자체로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데, 문제의 핵심은 바로 그 명칭 자체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문동 72현과 “설원기”는 둘 다 충절의 숭상이 중요한 배경이 되고 있다. 조선은 태조를 지나자마자 정도전의 정신보다 정몽주의 충절이 숭상되기 시작했다. 정도전은 조선 건국에 적극 헌신한 인물이고 정몽주는 조선 건국에 반대하다 살해당한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몽주의 충절은 성리학적인 국가통치 철학의 상징이었고, 그것은 두문동 72현의 관념으로 확대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두문동 72현이란 무엇일까. 바로 “조선 건국 초기에 새 왕조 섬기기를 거부하여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은 고려의 72 유신(遺臣)”이다. 여기에 이들이 나오기를 바라서 불을 질렀는데 나오지 않고 타죽었다는 말이나 이들을 조선 조정에서 회유하였으나 듣지 않자 장살(杖殺)을 감행했다는 말이 전설처럼 붙는다. 하지만 실제로 두문동 자체와 관련되어 이름을 전하는 이는 몇 명에 불과하다. 이들을 높이 평가하는 작업이 영조~정조 년간에 크게 펼쳐졌다. 조선을 배척한 이들인데도 다만 충절의 요소만을 강조한 것이다. 예를 들어 그 72현 중에는 선죽교에서 죽은 정몽주와 선산에 낙향하여 세종이 즉위하던 해인 1419년에 죽은 길재도 포함된다. 이들이 두문동이 있는 당시 수도인 개성 지역에서 살면서 벼슬을 했다는 것 말고는 두문동과 관련이 없다. 특히 두문동 고사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고려의 절신들을 두문동의 고사와 관련이 있건 없건 골라서 묶어 놓은 것이 두문동 72현의 실체이다. 여러 집안에서 고려말에 살았던 조상들의 행적이 희미하면 ‘두문동에 들어갔다.’라고 하여 고려 절신으로 둔갑 내지는 미화시키거나 나중에 다른 곳에서 죽은 것이 확실하면 ‘두문동에 들어갔다가 후에 어디로 갔다.’는 식으로 포장하는 일이 발생했다. 조선에서 ‘고려’를 포함한 전왕조와 연관되는 명칭을 쓸 수 없고 두문동 고사의 상징을 활용해 그것을 명칭으로 적극 사용했을 것이다. 또한 두문동의 명칭은 백성들에게 ‘너희들도 지금 왕조(조선)에 충성하라.’는 단순한 메시지를 넘어서 ‘너희들도 조선이 망해도 불타 죽을 정도로 충성하라.’라는 극적인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전달한 것이었다. 물론 ‘나’의 큰 외연(外延)인 나라와 민족이 없으면 나의 가치도 사라지기 때문에 충절은 절대적으로 귀한 가치이다. 필자가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은 충절 자체가 아니라 명칭의 함의와 그 내용이 다르다는 점이며, 특히 그 내용에 다수의 거짓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두문동 고사는 그것대로 존중하고 고려 절신은 또 그것대로 존중하는 것이 마땅하며 두문동 72현이라는 명칭이 꾸며진 행적들을 끌어안아서 포장해주는 포장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은 ‘고려 절신’과 같은 좋은 명칭을 쓰는 것을 막을 이유가 없다. 그 ‘두문동 72현’ 가운데는 행적이 조작되었다고 주장되는 인물이 몇 명 들어 있다. 차원부 하나만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두문동 72현’이라는 적절치 않은 명칭을 폐기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필자는 이미 차원부가 두문동 72현 중 하나로 둔갑한 사실을 고찰하여 (“대호하루” 4-4장.) “설원기”의 모호한 행적 묘사에 살이 덧붙여지고 또 덧붙여진 과정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이것만으로도 두문동 72현이란 것은 다시 살펴야 할 가치가 있다 하겠다.
13. 맺는 말
chky100이 필자에 대해 간혹 근거 없는 비난을 하기도 하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필자의 글과 주장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비평하는 것은 적극 환영한다. 누구나 어떤 표현을 할 때 항상 앞뒤를 모두 설명하여 뉘앙스까지 모두 문제가 없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다보면 거두절미하고 제시한 표현이 문제가 있어 보이거나 때로는 감정적으로 반감을 살 수도 있다. 필자도 조심하긴 하지만 제한된 능력의 사람인지라 실수를 드러낼 때도 필경 있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해와 아량을 바라마지 않는다.
필자는 결코 차씨 개개인에 대해 무슨 말을 하지 않는다. 가능한 한 집안을 포함한 개인적인 차원을 떠나서 전적으로 역사적 진실인가 거짓인가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런 면에서 차문에 의한 류문의 시조 찬탈 시도 혹은 시조 모독은 후손으로서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기에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무엇이 역사적인 진실인가에 입각해서 오직 논리와 근거로만 임했음을 자부한다.
몇 가지 문제가 제기된 덕분에 오래간만에 “설원기”에 대해 여러 가지를 다시 정리를 할 기회를 가졌다. 차문의 한 사람에 의해 제기된 사항들에 대해 답변하는 형식이기 때문에 내용도 다소 치우치고, 전후 상황을 아는 분들에게는 대부분 레코드를 틀어놓듯이 이미 한 이야기를 또 반복하는 수준일 것이다. 하지만 4얼에 대한 고찰 같은 부분은 새로운 내용을 추가한 것이다. 또 그 과정에서 정도전 선생에 대해 더 깊게 이해를 할 수 있었고, 함부림 선생의 경우 해당 집안과 연락이 닿는 수확도 있었다. 아직도 조영규 선생의 집안은 찾을 수 없는데, 후손이 있다면 필자에게 연락해 주길 바란다. 그리고 만일 chky100이 이 글을 본다면 필자의 단행본 “대호하루”를 보내 줄 수 있는 주소를 알려주었으면 한다. 전에도 보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설사 읽고 싶지 않더라도 최소한 전후 맥락이나 필자의 주장을 알지도 못하고 필자를 비난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주제에 관해서 각각 다른 사이트에서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을 향해서만 발언하는 듯한 현재의 분위기는 요즘의 인터넷 발달에 비추어 보면 상당히 아쉬운 일이다. 특히 명백히 상대방을 향해서 때로는 개인적인 비난까지 포함하는 글을 쓰면서 그 상대방이 그 글에 직접 반응하고 토론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 하겠다. 서로 대화할 수 있는 사이트에서 발언하는 것이 떳떳한 일일 것이다. 이를 위해 이 글 첫 부분에 언급한 “문화류씨 – 뿌리 깊은 버드나무” 카페(http://cafe.daum.net/moonwharyu)에서 토론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이곳은 누구나 가입할 수 있고 비방과 선전 글이 아닌 어떤 글이고 게재할 수 있게 열려 있다. 이것이 꺼려진다면 어떤 다른 사이트를 제안해 주어도 좋고, 필요하면 새로 사이트를 개설할 수도 있다. 부디 솔직하고 활발한 논의가 전개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2014년 7월 15일
彩霞 류주환
첫댓글 참이 아님을 참으로 바로 잡으려는 뜻 감사합니다. 차문은 왜 저럴까? 의문은 더욱 깊어집니다.
그들이 믿고 있는 설원기에 차원부는 류차달의 후손이라는 내용을 부정하고 남의 시조 류차달을 "차달"로 변조하지 말고 제발 남의 성씨를 자신의 성씨와 형제라는 주장을 하지 말았으면합니다. 형제라고하려고 보니 자꾸 남의 시조를 자기내 후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종사에 관심이 있는 chky100 이라는 분이 있기에 채하님의 정리된 글을 접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정보화시대인 요즘 성씨별 대종회에도 홈폐이지 정도 하나씩 운영하고 어떤 대종회에서는 인터넷 족보까지 오픈하기도 합니다 ᆢ 개인정보에 관한 것인데 저는 인터넷 족보는 반대합니다ᆢ 그런데 연안차씨 종친회 홈페이지는 제가 보기에는 다른 종중홈페이지와는 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파별 계보도 없고 오직 설원기를 비롯한 연안차씨 미화하고 찬양한 것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말도 안돼는 고려시대 연안차씨 계보와 조작된 혼인관계를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이 그대로 보여지고 이에 대해 차씨 종원들도 일언반구도 없고 이정도되었으면 연안차씨내에서 자성을 하고 잘못이었다고 하는 현자가 있었야 하는 것인데ᆢ
안타까울 뿐입니다
집단 최면이란 말이 밎는지---- 전후좌우 정렬이되었는지------?????? ----- 소견입니다.--- 신라시대에는 차씨 기록이 보이지 않습니다. 글쎄요-------
무더위 속에서도 진실을 밝히기 위한 식지 않는 교수님의 열정과 탐구에 찬사를 보냅니다.
더우기 정도전 선생에 관한 명쾌한 분석 또한 감동이었습니다.
감사드리며 무더위에 건승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