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산은 단풍으로 유명하지만,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이야기가 있는 자재암으로도 유명하다. 아들 설총의 이두 이야기는 더 유명하지만... 자재암이 생긴 이유를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휴일날, 자재암이 생긴 원효대사와 보살이야기를 읽어보자.
천천히..
거센 비바람 속에서 얼핏 여자의 음성을 들었던 원효 스님은 『아직도 여인에 대한 동경이 나를 유혹 하는구나.
자세를 고쳐 점차 선정에 든 원효스님은 휘몰아치는 바람과 거센 빗소리를 분명히 듣는가 하면 자신의 존재마저 아득함을 느꼈다. 「마음, 마음은 무엇일까?」
「바지직」하고 등잔불이 기름을 튕기며 탔다. 비바람이 토굴 안으로 왈칵 밀려들었다. 밀려오는 폭풍우 소리에 섞여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이렇게 어두운 밤에 찾아와서….』 여인을 보고도 스님은 선뜻 들어오란 말이 나오질 않았다.
『스님, 하룻밤만 지내고 가게 해주세요.』 『스님, 불 좀 켜 주세요. 너무 컴컴해요.』
눈에 들어왔다. 와들와들 떨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제 몸 좀 비벼 주세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스님은 눈을 감았다.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목석과 다를 바 있으랴.』
스님은 부지중에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여인을 안아 침상에 눕히고는 언 몸을 주물러 녹여 주기 시작했다.
풍만한 여체를 대하자 스님은 묘한 느낌이 일기 시작했다. 이미 해골물을 달게 마시고 「일체유심조」의 도리를
더럽고 구역질이 나지않았던가. 내 어찌 더이상 속으랴.」
마음속에 색심이 일지 않으면 자신의 공부는 온전하다고 생각했다.
한 생명에게 힘을 부어주고 있었다. 남을 돕는 것은 기쁜 일. 더욱이 남과 나를 가리지 않고 도움을 주는 자와 받는 자의 구별이 없을 때
여인과 자기의 분별을 떠나 여인의 몸이 서서히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여인과 자신의 경계를 느낀 스님은 순간 밖으로 뛰쳐 나왔다.
스님은 훨훨 옷을 벗고 옥류천 맑은 물에 몸을 담그었다. 무한한 희열을 느끼는데 여인이 다가왔다.
『스님, 저도 목욕 좀 해야겠어요.』
여인은 옷을 벗어 던지고는 물 속으로 들어와
아침 햇살을 받은 영인의 몸매는 눈이 부셨다. 스님은 생명체 이상으로
「색안으로 보는 원효의 마음」이란
거센 폭포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거듭거듭 뇌이면서 폭포소리가 들렸고 캄캄했던 눈앞의 사물이 제 빛을 찾고 제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의식되는 눈앞의 모든 것을 명료하게 보았다. 모든 것이 그것으로 인하여 생기는 그 마음까지도 버려야 하는 그 도리-」
그의 발가벗은 몸을 여인 앞에 일체의 모습이 생동하고 있었다. 원효 스님은 그곳에 암자를 세웠다. 자기의 몸과 마음을 뜻대로 한 곳이라 하여 절 이름을 "자재암" 이라 했다.
옥류폭포가
있고 그 앞에는 스님들이 자재의 도리를 공부하는
원효불기설화[ 元曉不羈說話 ]
고승 원효의 일생을 꾸민 설화이다. 《삼국유사》는 원효의 설화 7편을 소개하였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만삭이 된 원효의 어머니가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고 해산했다는 사라수(娑羅樹) 이야기.
② 절을 주관하는 이가 종 한 사람에게 하룻저녁에 밤 두 개씩만 주었는데 불만을 품은 종이 관가에 송사했다. 관가에서 그 밤을 살펴보니 밤 하나가 바리 하나에 가득 차므로 오히려 한 개씩 주라는 판결을 내리고 그 골짜기를 율곡이라 했다.
③ 원효의 어머니가 유성(流星)이 품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원효를 잉태했으며 해산할 때는 오색 구름이 땅을 덮었다. 천성이 총명하여 원효는 스승없이 깨쳤다.
④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주랴? 하늘 받칠 기둥감을 내 찍으련다(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원효가 이렇게 외치는 노래를 듣고 태종무열왕이 궁리를 보냈더니 문천교를 지나던 원효는 물로 떨어져 요석궁(瑤石宮)에서 옷을 말리게 된다.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요석공주는 잉태하여 설총(薛聰)을 낳았다.
⑤ 설총을 낳은 뒤 원효는 파계승으로 큰 표주박을 얻어 무애(無?)라 이름하고 방방곡곡을 노래하고 춤추며 몽매한 백성들을 교화하였다.
⑥ 원효는 소를 타고 가면서 《금강삼매경소(金剛三昧經疏)》를 소의 두 뿔 위에 놓고 썼다. 이 각승(角乘)은 본각(本覺)과 시각(始覺) 두 가지 깨달음을 나타낸다.
⑦ 원효가 입적했을 때 설총이 유해를 부수어 진용(眞容)을 빚어서 분황사(芬皇寺)에 안치했다. 설총이 절을 하자 원효상이 돌아보았는데 그후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었다.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신라시대의 고승. 성은 설(薛)씨. 원효는 법명, 아명은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 압량(押梁 : 지금의 慶山郡) 불지촌(佛地村) 출신. 잉피공(仍皮公)의 손자이며 내마(奈麻) 담날(談捺)의 아들이다. 648년(진덕왕 2) 황룡사에서 스님이 되어, 각종 불전을 섭렵하며 수도에 정진하였다.
이후, 655년에서 660년 사이에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았는데, 이 실계(失戒)의 사실이 오히려 원효로 하여금 더욱 위대한 사상가로 전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실계 후, 스스로를 소성거사(小性居士)라 하면서 광대들이 무롱(舞弄)하는 큰 박을 본 따 무애(無碍)박을 만들어 천촌만락을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였다. 그 노래의 줄거리는 <화엄경>의 이치를 담은 것으로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나니라."라는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노랫가락인데, 그 노래를 <무애가(無碍歌)>라 불렀다. |
출처: 시간과공간 원문보기 글쓴이: 재휘애비溢空총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