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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님과 함께한 도보순례
광주대교구 순교자현양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우리는 성당에서 모여가기로 하였다. 나와 세레나는 마리아 자매님을 모시고 성당에 도착하니 안젤라 자매가 먼저와 기다리고 있었다. 김형주 안드레아 안젤라 부부는 광주에서 출발하여 홍농성당에서는 모두 여섯이 도보 순례에 참석한다. 사목회는 오늘 꽃 무릇 축제가 열리고 있는 불갑사에서 성지건립기금 바자회를 하고 있는 영광성당에 일조하기 위해 도보순례에는 참석하지 못한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아 달리는데 지름길은 제처 두고 꼭 돈 내는 곳으로 안내를 한다. 길눈이 밝은 안젤라 자매가 빙 빙 돌려 안내를 한다며 내비안내양에 투덜거린다. 차창 밖에는 태풍이 세 번 스쳐 지나간 피해 복구가 안 된 모습도 보인다. 그래도 벼는 누릇누릇 가을 햇살에 익어 가며 다소곳이 고개 숙인 모습이 정겹다.
아홉시 경 노안 성당 야외 주차장은 사람과 차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차를 통제하여 옆길로 성당에 들어가니 어떤 분이 “홍농성당 프란치스코 왔네” 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주차를 하는데 “남의 성당이라고 성모상 앞에 주차해도 되나” 하는 소리가 뒤 따라 들린다.” 다른 곳에 주차를 하고 나오니 이영선 골롬바노 신부님이셨다. 정말 기억력도 좋으시고 눈도 빠르시다. 인사를 드리고 오늘 도보 순례에 참석하러 오신 분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김형주 안드레아 부부가 보이고, 고승석씨 부인은 오늘 안내 도우미를 하신단다. 이석민 가브리엘 부부가 저만치 보이고 몇몇 낮 익은 얼굴이 반갑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든다. 안내로부터 오늘 참석한 성당 교우 수에 따라 모두 일곱 개 조로 나누었는데, 우리 홍농성당은 5조였다. 오늘 순례에 참여할 사람들에게 유인물과 손수건 한 장씩 나누어 주며 유인물은 미사 때 쓸 수 있도록 개인이 잘 간수하란다. 산자락에 접어들자 아담하게 지어진 집 한 채가 조용히 서있다. 아마 은퇴하신 최창무 안드레아 주교님이 기거하시는 집인 모양이다.
오늘 행사주관은 광주평협에서 하는데 도우미들이 모두 우리 홍농성당과 비슷한 하늘색 유니폼을 입고 있다. 아홉시 십 분경 “주교님과 함께하는 가족도보 성지 순례”라는 프랑카드가 걸린 연단에서 김희중 히지노 대주교님의 기념사가 시작되었고 주교님은 예상을 훨씬 넘는 수가(722명) 순례에 동참하여 고맙다는 말과 함께 “도보순례는 초기교회 신자들이 예수님의 삶의 여정을 묵상하며 걸었던 것에서 시작되었다며 외국에서는 65km를 걷는 행사를 한다는 말씀과 함께 이 기회를 통해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거룩한 정신과 고통을 생각하고, 또한 나주 무학당에서 순교한 강영원(바오로), 유치성(안드레아), 유문보(안드레아) 등 순교자들의 정신을 기리고, 그 당시 우리 신자들이 박해를 피하여 험한 산길을 걸었을 때를 생각하여 그 길을 우리도 걸으며 그 정신을 묵상하고 우리 생활 속에서 백색순교정신을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신 뒤 오늘 도보순례에 참여하시는 신부님들을 모두 연단으로 올라오라 하시어 함께 강복을 주시고, 기념촬영을 하였다. 오늘 사진은 다음 평화신문에 게제 된다는 안내 멘트가 있었다.
금성산 도보순례를 마친 뒤에는 교구장 김희중 대주교 주례로 나주 순교자 성당에서 순교자 현양미사가 있을 예정이며, 특전 미사이므로 봉헌예물을 준비해야 한다고 미리 안내를 해준다. 그리고 도보순례 중 힘들어서 도저히 걸을 수 없는 분들은 중간 중간에 차량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출발지에서는 봉사자들이 물병을 한통씩 나누어 주고 있으니 챙겨 가라는 말을 끝으로 1조부터 출발하였다. 물 한통을 배낭에 넣고 출발하는데 순례 참가자가 많아 올라가는 속도가 아주 느리다. 게다가 길이 좁아 한 줄로 올라 가야되니 거의 서 있어, 나는 묵주 기도를 하며 가기로 했다. 오늘 코스를 보니 나이 드신 분들은 감당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계량재를 향해 오르는 길섶 개울에서는 도란거리며 흐르는 물소리가 정겹다. 한참을 오르는데 봉사자 중 한사람이 우리 유니폼을 보고 반가워하며 천정선 도미니꼬 신부님 안부를 묻는다. 노대동 성당 박관재 프란치스코라고 자기소개를 한다. 수인사를 하며 박성규 프란치스코라고 했더니 세례명이 같아 그런지 더욱 반가워한다.
길가에는 태풍 후유증으로 계절을 잊은 탓인지 산 목련이 줄을 이어 새 꽃봉오리를 달고 서있다. 오르는 길 대숲 굵은 대나무가 지난 태풍에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 있다. 그런데 이름 모르는 풀꽃은 언제 태풍이 왔었느냐는 듯 붉은 꽃을 피워 가을을 장식하고 있다. 계량재를 지나 이별재를 향해 능선을 따라 가는 길은 시야가 툭 터져 도보순례의 묘미를 더해준다. 맑게 갠 가을 하늘은 옥빛으로 물들고 드문드문 하얀 뭉게구름으로 수놓아 장관을 이룬다. 산자락은 조금씩 키 작은 북나무부터 귓불을 붉히고, 산 아래는 황금으로 물들어가는 논을 가르며 광주 무안 간 고속도로를 질주 하는 차들이 꼬리를 물고 있다. 잠시 후 조그마한 구름다리가 보여 일행은 발걸음을 멈추어 기념사진을 찍었다. 저만치 산 능선을 따라 울긋불긋 순례자의 띠가 단풍으로 물들어 흐르는 모습에 발을 멈추어 카메라 셔터를 눌러 본다. 봉우리를 향하는 길 양 옆으로 감나무가 앙증맞게 열매를 매달고 지나는 순례자의 눈길을 끈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느낄 즈음 마리아 자매님이 나이 탓인지 지치신 듯 털썩 앉으신다. 세레나가 먼저 가라며 나에게 손 서래를 친다.
이별재로 내려가는 길 한줄기 스치는 바람결에 흔들리는 억새들이 조금씩 손목을 빼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에는 연못이 있었다고 하며 가마타고 신행하던 신부가 이 고개를 넘지 못하고 이별한 일이 있은 후로 이별재로 전해지고 있단다. 이곳에서 나이 드신 분들이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을 먼저 보내고 마리아 자매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의외로 빨리 오셨다. 우리와 너무 떨어질까 봐 힘이 드신데도 무리 하신 것 같다. 마리아 자매님께 여기서 기다리시면 차를 태워 주실것이라며 우리도 잠시 마리아 자매님과 이별을 고하였다. 세레나와 함께 옥산을 향해 오르는 길에 이번에는 세레나 신발이 중상을 입었다. 입을 떡 벌리고 있어 걷기가 영 불편한 모양이다. 임시로 배낭에 있는 줄을 빼 묶으라고 했는데 조금만 가면 다시 풀린다. 하는 수 없이 옥산 정상에서 실장갑을 벗어 신발에 씌우고 줄로 묶었다. 걷는 모양이 한결 편해 보인다. 안드레아씨도 등산화를 얼마 신지도 않았는데 입을 쩍 벌려 걷기가 거북한듯하여 세레나가 면장갑 한쪽을 건네주며 뒤집어 신고 끈으로 묶으라고 처방해 준다.
걸음을 재촉해 무재로 서둘러 내려가니 열두시 반경 팔각정이 나오고 주변에는 오는 대로 도시락을 받아 삼삼오오 둘러 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 마리아 자매님은 먼저 오셔서 주교님과 함께 식사를 하셨단다. 우리도 도시락과 물 한통, 국을 받아 안젤라씨와 세레나와 함께 팔각정에 엉덩이를 들이 밀고 자리를 잡았다. 막 식사를 하려는데 김형주 안드레아 부부가 도착했지만 자리가 비좁아 아기장사바위 옆에 따로 자리를 잡아 식사를 할 수 박에 없었다. 주교님께서 맛있게 먹으라시며 환한 미소를 건네주신다. 이영선 골롬바노 신부님도 식사를 마치셨는지 자매님이 건네주는 포도를 잡수시고 계신다. 도시락은 김치 토마토 튀김 명태조림 등 골고루 넣었다. 식사를 마치고 분리수거장에서 음식찌꺼기를 버리고 신발이 불편한 일행은 차를 타고 오기로 해서 나는 먼저 울음재로 향했다.
산 능선을 따라 가는 길엔 태풍에 쓰러진 참나무를 잘라 통행에 방해되지 않도록 쌓아둔 더미가 간간이 눈에 띤다. 한참을 걷다보니 시멘트 포장도로가 보인다. 조금 더 걸어가니 터가 좀 넓고 앉아 쉴수 있는 곳이 울음재 였고, 주교님 도착하실 때까지 잠시 쉬고 있으라고 봉사단원이 안내 한다. 잠시 쉬는 동안 순례자들이 속속 도착하고 두시가 조금 지나서 주교님은 도착하셨다. 어느 형제분이 주교님 배낭을 받고 겉옷이 더워 보이신다고 말씀을 드린다. 한 겹 벗고 땀을 훔치고 계시는데, 수녀님 한 분이 음료수를 주교님께 권하신다. 잠시 휴식이 끝나고 모두 경현동을 향해 출발하였다. 내리는 길가 고추잠자리가 억새 위에 맴을 돈다. 산자락을 지나 마을길로 접어들자 진주 강 씨 묘가 추석맏이 준비가 끝나 말끔히 정돈된 채 석상과 비석들에 둘러 싸여 있다. 두시 반이 좀 지나 경현동에 도착하니 평협 봉사단들이 길 안내를 하고 있다. 몇 사람이 당산나무 그늘아래서 쉬고 있고, 저만치 물레방아가 덩그러니 서있다. 세시 경 나주 순교자 성당에 도착하니 자매님이 시원한 물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야외 미사가 있을 순교자 경당으로 올라가니 특별공연이 있는지 피아노 삼중주로 문외한이 듣기에도 격조 있는 노래 연습이 한창이다. 피아노 음에 묻혀 바이올린과 첼로 소리가 작다는 남자 성악가의 코칭이 계속되고 가을 햇볕이 내리 쬐는 잔디 위엔 아름다운 음률에 귀를 기울이는 순례자가 하나 둘 그늘을 찾아 앉기 시작하였다. 일행 중 차로 오면 먼저 도착 했으리라 생각했는데 홍농 교우들이 아무도 안 보인다. 하긴 선두그룹으로 도착했고, 네 시에 미사가 있으니 아직 시간은 넉넉했다. 네 시가 가까워 오자 홍농성당 교우들이 모두 도착했다. 차를 타려고 했는데 이영선 신부님이 얼마 안 되는 거리라 해서 걸어왔단다.
특송을 시작으로 피아노 삼중주가 아름다운 선율로 커피 향처럼 번지며 “하느님 당신은 ♬ ” 선율에 모두 귀를 기울이다 앵콜을 청하자 이곳에 오신 분들은 수준이 높다고 추임새를 넣는다. 격려의 박수 속에 오늘은 순교자 묵상 도보 순례가 있어 흥겨운 노래는 피하는데 허락을 받았다며, 베사메무쵸 등 어깨춤이 나올 경쾌한 노래 몇 곡을 연신 불러 흥취를 더하고, 아름다운 피아노와 바이올린 두 대, 첼로와 높은 성량의 화음이 가을 하늘에 울려 퍼진다. 미사는 앉은 채로 9월 20일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 순교자 축일 미사로 진행되었다. 김희중 히지노 주교님은 춘천에서 초청한 피아노 앙상블 lux를 빛을 의미 한다고 하시며 격려의 박수를 청하셨다. 주교님은 강론에 앞서 아침에 말씀하셨던 도보순례의 기원에 대해 다시 한 번 강조하시며 초대 교회 신자들이 예수님의 일생 동안의 공생활을 기념하여 65km를 묵상하며 걸었다 하시며 오늘 우리는 15km 정도를 싸목싸목 걸었는데도 피곤하지요 하신다. 젊은 저도 피곤한데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하시어 좌중에 폭소를 자아냈다. 또 우리가 오늘 걸은 길은 편안한 아스팔트 길이라면, 신앙의 선조들은 어둠 속에서 나무와 풀숲을 헤치며 짐을 메고 등에 아이를 업고 걸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느냐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곳에서 6.25를 맞아 부산으로 철수 하라는 통보를 받으셨던 신부님과 수녀님 두 분이 어린양을 버리고 갈 수 없어 이곳에서 신자들을 돌보시다가 종래는 북한군에게 총살당하셨단다. 지금은 순교하신 두 분을 복자품에 올리기 위해 로마 교황청에서 심사 중이라며 그분들이 복자품에 오르면 광주대교구의 영광이라는 말씀과 함께, 기도 중에 생각해 주시라는 주문도 잊지 않았다. 나주 순교자 성당은 1872년 나주 무학당(武學堂)에서 순교한 강영원(바오로), 유치성(안드레아), 유문보(안드레아) 세 사람과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이춘화(베드로)의 순교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1년 나주초등학교 내에 위치한 무학당 순교터에서 주춧돌로 추정되는 12개의 돌중 10개를 성당으로 옮겨와 그 위에 무학당을 상징하는 구조물을 세웠으며, 2004년 본당 내에 빈 무덤 형태의 기념경당을 건립하였다.”고 말씀하시며 경당 내부는 사방이 막혀 캄캄한 순교자들의 고난을 상징하고, 관 모양의 제대는 순교자들의 장엄한 죽음을, 경당 안쪽 천장이 없는 회랑은 순교자들의 부활과 영광을 상징한다고" 덧붙여 말씀하셨다.
다섯 시 오십 분 경 미사가 끝나고 차량운전자만 버스로 노안성당까지 태워 주신다 하여 잔디 밭 끝 쪽에 내려가는 길목에 기도하다 용암에 덮인 형상의 조각상이 퍽이나 인상적이다. 오늘 축복받은 날씨를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강복을 주신 주교님과 신부님 들 그리고 행사에 수고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봉사에 참여 하신 분들과 순례자 분 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나주순교자 성당 도보순례
박성규/프란치스코
한 걸음 두 걸음 가을을 딛고 간다네,
신앙 선조들이 걸었던 그 길을 묵상하며
그 깜깜한 어둠속 아닌 대명천지 구월 맑은 날에
아기 업고 등 짐 버거운 대신 시원한 물병하나 들고서
길도 없는 우거진 숲이 아닌 잘 정리 된 소로
조망이 툭 터진 산등성이 바람이 땀을 훔쳐 주는 길
호랑이 눈에 불을 켜고 으르렁 대던 무서운 박해의 역사
자신과 가족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선조들 얼마나 두려웠을까?
창호지 물을 적셔 눈, 코, 입 다 막아 질식해 죽인대도
바위로 머리를 부수고,
뼈가 으스러지는 태장에도 굴하지 않고
배교하는 것이 더 무서워
밤하늘 별 나침반으로 길을 잡고
믿음의 두께 만큼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르신 이여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순교자 들 이시여,
오늘 저희가 땀 뿌리며 걸은 순례가
얼마나 호강이고 축복인지 부끄러워집니다.
아! 저 경당을 축조한 10개의 돌무더기 무게보다 더 버거웠을
신앙선조들 당신들이 감내한 믿음에 찬탄을 금할 수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