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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뚝솟은 봉수산 푸른 기슭에-금마초등학교 제5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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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지식인 스크랩 칭기즈칸 : (11) 13익(翼) 전투
미루나무 추천 0 조회 259 12.04.28 00:5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테무진 to the 칸

 

(11) 13익(翼) 전투

 

 

intro

 

지난 기사를 먼저 읽는 좋은 습관을 기르도록 하자. 본 시리즈는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지 않으면 몹시 좋지 않다.

 

지난주에 연재를 한 번 빼먹었다. 집안에 우환이 생긴 탓인데, 모쪼록 독자여러분들은 본인과 가족들 건강 잘 챙기시기 바란다. 가족의 행복은 부동산과 계좌가 아니라 건강이 책임진다.

 

 

1

 

 

 

 

(전편에 이어)자무카의 진짜 속마음이 구체적으로 어땠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테무진과 경쟁하던 시기, 그에 대한 자무카의 모든 발언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시 초원의 정치형태는 현대의 우리 사회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현대의 정치는 헌법을 전제로 복잡한 규범과 실정법을 고려하며 행해진다. 하지만 초원에서 눈뜨고 사방을 둘러보면 풀밖에 없다. 저기 한 무리의 남자들이 말을 타고 달려오는데... 오메 저거 도적들 아녀?

 

초원의 법이란 초원사람들의 말과 행동으로 유지되는, 그야말로 '관습법'이다. 말하자면 '룰(Rule)'이지 '법'은 아니라는 거다. 훗날의 테무진이 성문법에 해당하는 '얏사(야삭, 혹은 자삭)'를 반포(頒布)하지만 그건 나중 얘기다.이런 사회에서는 정치라는 것도 원시적이고 단순하다. 그렇다고 정치가 쉽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뛰어난 순발력과 대담함, 재치가 있어야 한다.

 

초원엔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메시지는 당연히 말로 전해진다. 따라서 사자-메신저-는 서신을 들고가는 사람이 아니라 보스가 한 말을 기억하는 사람이다. 즉 테무진의 사자는 자무카한테 가서 뭘 쓱 내민 게 아니라,

 

"테무진 형님이 보내셨슴다. 테무진 형님이 전하는 말씀을 이제부터 그대로 읊어 보겠습니다... 흠흠"

 

하고는,

 

"형제여, 내가 이번에 우리 몽골의 왕족들인 알탄, 코차르, 타이초와 여러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칸이 되었네. 내가 받은 칭호는 '칭기스칸'일세..."

 

했다는 거다.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글에 갇히지 않는 이런 문화에서는, 누가 누구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급속도로 퍼지게 된다. 메시지를 받는 사람이 있는 게르의 풍경만 상상해봐도, 일단 게르 안과 게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메시지를 실시간으로 전해듣게 된다. 그리고 초원은 소문이 빠르다. '누가 누구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가 정치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런 현상은 이미 지난 편들에 충분히 설명을 해 놓았다.

 

자무카는 곧바로 답신을 보냈다. 그러나 테무진에게 보낸 전언이 아니었다.그는 테무진을 지지하는 척도 하지 않았지만, 딱히 반대를 표명하지도 않았다. 대신 자무카는 알탄과 코차르에게 사자를 보냈다. 이는 의미심장하다. 테무진을 자신과 맞상대할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알탄, 코차르, 사차 네 이놈들. 사랑하는 형제 테무진과 나를 이간질한게 바로 너희들이었구나. 그래, 사랑하는 안다가 날 떠나서 이상하다 싶었다. 네놈들이 테무진을 꼬드긴 게로구나. 이제 네놈들 뜻대로 (만만한) 테무진을 칸으로 추대했으니, 부귀영화를 퍽이나 누리겠구나?"

즉 테무진은 실력에 의해 칸이 된 게 아니라, 알탄과 코차르에게 '넘어간' 게 된다. 테무진 조직의 가치를 폄하하는 덴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 자무카는 거기에 더해 테무진을 응원하는 제스쳐를 취하면서 의연함과 우정을 과시했다.

 

"왜 테무진 형제가 나와 함께 있을 때 그를 칸으로 추대하지 않았느냐? 왜 내가 나의 형제를 지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느냐?(순전히 수사다. 자무카가 테무진을 보스로 모시지 않았을 거라는 걸,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 뭐, 이왕 이렇게 된 걸 어쩌겠느냐. 어쨌든 알탄과 코차르, 네놈들은 테무진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내 형제가 훌륭한 지도자가 되도록, 딴 맘 먹지 말고 한마음 한뜻으로 열심히 충성해라!"

 

이렇게 자무카는 '정치전'에서 테무진에게 반격을 한 방 먹인다. 한편 몽골족의 마지막 칸인 암바가이 칸의 후손들이자 테무진의 원수인 타이치우드족은 자무카 무리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 즉 사실상 테무진은 쿠릴타이의 '정족수'를 채우지 못했다. 이 사실만으로도 두 조직은 치열한 혈투를 예고하고 있었다.

 

한편 커레이트의 수장 토그릴 칸의 입장은? 토그릴은 의제(의동생)인 자무카, 그리고 안다의 아들인 테무진 두 젊은이의 싸움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2

 

'소제국주의'라는 말이 있다. 제국주의를 모방한 2류 제국주의라고 보면 된다. 제국주의는 주변의 세력들에게 일정한 압력을 행사한다. 중국을 예로 들어보자. 중화권을 관할하는 강력한 왕조가 들어서고 나면 주변국들에게 조공을 요구한다. 답례로 하사품을 주기 때문에 물질적으로는 쌤쌤이지만(사실 하사품이 조공보다 더 값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전쟁보다는 돈이 평화를 사는 데 더 싼 법이니까.), 조공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임을 확인하는 외교행위였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조정에 '입조'하는 것은 요즘으로 치면 UN에 가입하는 것과 비슷했다. 국제사회에서 정상적인 국가로 인정받으려면 어찌됐던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절차를 거쳐야 했다. 형식적으로나마 '황제가 임명한 제후'가 되어야 국제적인 인증을 받은 왕이라 할 수 있었다. 고구려의 경우 당나라와 치열한 전쟁을 하는 와중에도 당나라에 조공을 전달했다. 당나라도 하사품으로 답례했다.

 

베트남은 황제국과 왕국 사이를 정신없이 오갔다. 중국에 정벌당하면 잠시 왕국이 되었다가, 빈틈이 보이면 황제국을 선포하는 식이다. 베트남은 중국이 하던 양식을 그대로 모방해 주변 세력들 -시암(현재의 태국), 크메르(현재의 캄보디아), 라오스, 현재 중국 운남성의 소수민족들-에게 제국주의적 압력을 행사했고, 이들로부터 황제국으로 인정받았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큰 세계가 있다면, 베트남은 자국을 중심으로 하는 작은 변방 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이런 걸 소제국주의라 한다.  

 

 

 

조선통신사 행렬도. 조선은 일본에 대해 중국이 (명목상)제후국에 기대하는 것과 비슷한 예법을 요구했다. 조선의 입장에서 통신사 파견은 일본이 조선의 하국(下國)임을 재확인하는 정치적인 행위였다. 통신사 파견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소제국주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갑'이었던 통신사들은 제대로 대접받지 않으면 가만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통신사가 지나간 곳마다 지역경제가 초토화되었다. 명나라 사신이 경복궁 살림을 거덜낸 일과 비슷하다.

 

소제국주의가 있다면 소(小)이이제이도 있는 게 당연하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오랑캐, 다시 말하면 주로 북방 유목민들을 서로 싸우게 함으로써 변방을 관리했다.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원래 '관리 대상'이었지만, 북중국의 주인이 된 후에는 관리의 주체가 됐다. 금나라는 타타르족을 지원해서 다른 부족들을 괴롭히는 정책을 썼다. 그러나 타타르의 세력이 커져 슬슬 금나라에 개기기 시작하자 토그릴에게도 우호적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이 시기 금나라의 판도. 'Jurchen(Jin)'이라고 표기된 곳이 금(金, Jin)나라다. '주르첸'은 여진족의 '여진'을 부르는 중앙아시아-중동식 발음이다. 고향인 만주를 완전히 장악한 채 송나라를 압박하고 있었다.

※주의! : 적당한 지도를 찾지 못해 위키피디아 '칭기스칸' 항목에 첨부된 위 이미지를 썼는데, 정확하지 못한 지도다. 몽골 지역을 보면 하단에 '잘라이르'씨족이 있다. 지난 기사에 설명했든 잘라이르 씨족은 여러 몽골씨족에 흩어져 머슴살이를 하던 노예씨족이었다. 독자세력권이란 있을 수 없다. 그 오른쪽의 타이치우드도 생뚱맞다. 타이치우드는 몽골에 속한 씨족, 그것도 몽골을 양분한 테무진과 자무카 두 사람 중 자무카에게 귀순한 상태였다. 당연히 타이치우드가 활동한 지도상의 위치도 오류다.

 

토그릴은 급속도로 성장하는 몽골족의 두 젊은이에게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어느 한쪽을 전폭적으로 지원할 생각이 없었다. 두 사람이 싸우면 싸울수록 좋고, 세력이 팽팽할 수록 좋다. 하지만 초원의 군소부족들은 토그릴만큼 느긋한 처지가 아니었다.

 

당시 초원의 정세는, 서쪽의 나이만족, 동쪽의 타타르족, 중앙의 커레이트족으로 삼분되어 있었다. 북쪽의 메르키트족은 테무진과 자무카에게 된통 당한 후 서쪽으로 도망가 세력을 회복하고 있었고. 이렇게 보면 무척이나 단순하다. 테무진과 자무카로 분열된 몽골족의 거점은 커레이트와 메르키트(의 원래 목영지) 사이였다.

 

하지만 이 주요 부족들 사이에는 수많은 군소 부족들이 점점이 퍼져 있었다. 이들은 몽골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결집하고 있었다. 누구는 테무진을 중심으로, 누구는 자무카를 중심으로... 두 젊은이는 블랙홀이었다. 혈통을 중심으로 결집하는 초원의 전통을 깨고 초원의 사람과 가축들을 흡수하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심심찮게 폭력이 발생했다. 두 집단은 서로의 가축과 부녀자와 가축을 상습적으로 약탈했고, 그 와중에서 당연히 사망자가 발생했다.

 

 

3

 

그날도 자무카의 친동생 '다이차르'는 뭐 훔쳐갈 게 없나 하고 먹이를 찾아 헤매는 킬리만자로의 하이에나처럼 테무진 진영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이런 '벌건 대낮' 도둑질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상하지만, 초원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정주문명에서는 '우리편'의 경계가 확실하다. 정주문명은 인구밀도가 높으며, 성벽이나 울타리 등으로 거주지에 선을 긋는다. 논밭은 이랑과 수로 등으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누구의 땅인지 분명히 구분된다.  

 

반면 초원은 사람과 사람 사이가 엄청나게 떨어져있다. 지난 편에 '쿠리엔'에 대해 설명해 놓았지만, 이 쿠리엔이란 것은 굉장히 넓다. 쿠리엔의 중심인 '오르도'만 봐도, 게르와 게르가 뚝뚝 떨어져 있다. 예를 들어 테무진이 어머니 헐룬에게 아들 조치를 맡겨놓는다고 하자. 그냥 걸어가서 맡기고 오는 게 아니다. 말로 몇 시간을 달려 맡겨놓고 돌아와 일을 보는 식이다.

 

 

 

 

이러다보니 경찰 출동 시간을 재놓고 은행을 터는 헐리웃 영화의 강도단처럼, 상대 군사들이 소식을 듣고 무기를 챙겨 달려올 시간 내에서만 약탈을 해치우면 그만이다.

 

그날 테무진 진영에서 탐스런 말떼를 발견한 다이차르. 다이차르는 말떼를 강탈해 자무카 진영으로 내뺐다. 그 꼴을 눈뜨고 본 '주치 다르말라'... 그는 바로 도둑맞은 말떼의 주인이었다. 참, '주치 다르말라'를 테무진의 친동생인 '주치 카사르(통칭 카사르)', 테무진의 아들 '주치'와 헷갈리지 말자. 주치는 당시 초원에서 흔한 이름이었다. 철수나 마이클 정도의 느낌이다.

 

눈이 뒤집어진 주치 다르말라는 서둘러 주변의 동료들을 불러모았다.

 

"말떼를 되찾아야지. 어서 무기를 챙겨들고 쫓아가자!"

 

"이봐, 주치 다르말라... 말도둑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다이차르라며. 자무카 동생이잖아. 혹시 싸움이라도 나서 놈이 잘못되는 날엔, 이거 정말 일이 커지는 거 아녀? 물론 우리가 잘못되는 건 더 싫고..."

 

"가축 뺏다가 싸우는 짓, 저쪽이랑 우리편이랑 한 두 번 해봤냐?"

 

"아무리 그래도 자무카 친동생은 쫌..."

 

"야! 그럼 내 말들 어떡해. 저 생떼같은 말들 어떡하냐고!"

 

"저 근데... 그게... 네 말이지 우리 말은 아니잖여..."

 

"아 이색희들 정말...! 그래 안전제일이라 이거지? 그럼 나혼자 간다!"

 

테무진이 말 8마리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건 모험을 한 이야기 읽어들 보셨을 거다. 초원에서 말은 그만큼 중요하다. 주치 다르말라는 혼자서 다이차르를 추격해갔다. 그렇게 한나절을 추격하자 밤이 왔다.

 

다이차르는 자신이 추격당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주치 다르말라는 밤의 어둠을 이용해 꾀를 냈다. 그는 말 등허리에 찰싹 달라붙어 다이차르의 등뒤로 서서히 접근했다. 마침내 사정거리에 다다르자 주치 다르말라는 다이차르의 "등허리가 부러져라" 화살을 퍼부었다. 기습공격을 받은 다이차르는 그대로 사망했다.

 

자무카는 동생의 사망소식을 듣게 되고...

 

 

4

 

만약 테무진이 공식적으로 사과의사를 밝히고, 주치 다르말라에게 책임을 물거나 그의 신병을 자무카에게 인도했다면 전쟁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테무진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자기 가축을 지키는 것도 죄인가? 어차피 자무카와의 대결은 피할 수 없었다.

 

자무카 입장에서도, 동생의 죽음은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국지전'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이 커져버렸다. 어차피 테무진과의 대결은 피할 수 없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싸움'

 

... 이 단순무식한 명제가 테무진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일단 이야기를 계속 진행해보자.

 

자무카는 즉시 전쟁준비에 돌입했다. 자무카가 속한 자다란 씨족을 중심으로 하는 13개의 쿠리엔이 모여들었다. 총 전사 수는 무려 3만명. 인구밀도가 낮은 초원에서는 엄청난 대부대다. 물론 100% 기병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자무카가 직접적으로 다스리는 전사의 수가 3만이었던 것은 아니다. 초원의 군소부족들은 꼭 테무진과 자무카 어느 한 쪽의 백성은 아니어도, 둘 중에 하나를 지지하지 않을 수 없는 형국이었다. 여당이냐, 야당이냐. 마치 대선 투표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 즉 자무카 직속 전사에 자무카를 지지하는 부족/씨족들의 전사를 합해 3만의 군대가 결집한 것이다. 말하자면 '친 자무카 - 반 테무진 연합군'이었다.

 

 

 

그 와중에 조그만 집단이었던 '이키레스'족은 테무진 편을 들기로 작정했다. 자무카는 신속히 군대를 결집해 테무진 진영이 야영하고 있는 초원 북동쪽의 호숫가로 이동중이었다. 조금만 더 멍하니 앉아있다간 정말로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자무카 군대가 이동하는 길목에 있던 이키레스족은 전사 두 명을 파견해 테무진에게 상황을 알렸다. 소식을 들은 테무진도 신속히 군대를 결집했다. 전사의 수는 역시 3만명. 자무카를 지지하지 않는 군소세력은 거의 100% 테무진을 지지했다고 보면 된다. '친 테무진 - 반 자무카 연합군'이었다. 이렇게 빨리 군사를 결집한 걸 보면 역시 테무진도 전쟁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나이만-타타르-커레이트는 전쟁에서 빠져 있었기 때문에, 도합 6만이라는 숫자는 3개 대부족을 뺀 초원 총전력의 대부분이라 봐도 무방하다. 아마 전쟁을 가장 관심있게 본 이는 토그릴이었을 것이다. '끼는' 게 아니라 '보는' 게 상책이다. 핑계도 좋다. 자무카는 의동생이고 테무진은 의아들이었으니.

 

테무진은 자무카가 13쿠리엔으로 군대를 구성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도 13개의 쿠리엔을 구성한다. 13 대 13의 전투. 이 전투를 동아시아 역사에서는 '13익 전투'라 하고, 서구에서는 전투가 벌어진 지명을 사용하는 전통에 따라 '달란 발주트 전투'라고 부른다(달란 발주트라고 불린 곳의 위치는 아직도 미스테리다.).

 

그런데 13익의 익(翼)은 '날개 익'자다. 다시 말해 중국식 표현이다. 원래 '익'이란, 중앙의 본대를 좌우에서 받쳐주는 부대, 즉 일종의 기동타격대-주로 기마부대. 물론 보병일 때도 있다.-에 붙는 명칭이다. 그래서 보통 본대 양쪽에 배치되고, 이름도 좌익(左翼)과 우익(右翼)이라고 한다.

 

이는 보병이 주력군이 되는 정주문명의 전투개념이다. 과거의 전투에서는 '누가 먼저 상대를 포위하느냐'가 전쟁의 승패를 갈랐다. 본대끼리 부딪히고 있는 동안 좌익과 우익이 상대를 감싸는 것이다. 페르시아군을 궤멸시킨 알렉산더 대왕의 '망치와 모루' 전법도 포위전법이다. 모루 위에 놓고 망치로 두들긴다는 건데, 여기서 모루는 본대고 망치는 기마병이다. 기동력을 앞세워 적의 후위로 이동해 앞뒤로 감싸는 것이다.

 

사실 13익 전투라는 말의 어감이 자연스러워서 본편의 제목으로 썼다. 하지만 이 중국식 이름은 사실과 맞지 않다. '13쿠리엔 전투'라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 전편 '테무진 라이징'에서 쿠리엔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글타. 당시 초원 유목민들은 야영만 쿠리엔으로-고리 모양으로- 한게 아니라, 전투 대형도 쿠리엔으로 짰다.

 

 

 

 

어차피 상황과 이익에 따라 이합집산하며 적과 아군이 시도때도 없이 바뀌는 초원이다. A쿠리엔과 B쿠리엔이 손을 잡고 전투를 벌인다. 그러면 부대도 A쿠리엔과 B쿠리엔으로 나뉘는 식이다. A쿠리엔 한가운데엔 A부족의 수장이 있다. 주변을 엘리트 전사들이 둘러싸고 있다. 바깥으로 갈수록 평민이다. 뒤에는 목동계급의 남자들이 가축을 몰고 쫓아오며 여차하면 전투에 낄 준비를 한다. 저~기 보니... 음, B부족 쿠리엔은 잘 따라오고 있군. 저자식들 또 저번처럼 불리해지면 홀랑 도망가버리는 거 아녀?

 

즉 한편이지만 실제로는 각자 싸운다고 보면 된다. 군대 전체로 보면 효율성이 엄청나게 떨어지는 구조다. 2000년 전 게르만족들이 이렇게 싸우다가 카이사르에게 번번히 나가떨어졌다. 통일된 '편제'는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역사엔 부족연합군이 통일왕국의 군대에 깨진 사례가 그득하다.

 

그럼 유목 부족들도 전쟁을 할때 일시적으로나마 로마군의 십진법 체계처럼 통일된 편제를 갖추면 되지 않는가? 설마 유목민들은 야만인이라서, 그게 전쟁에 효율적이라는 걸 몰랐을까? 그럴리가. 모르지 않았다. 여진족의 금나라도, 거란족의 요나라도 십진법으로 군대를 편성했다. 동아시아의 북방 유목민들에겐 십진법 체계로 군대를 편성하는 전통이 있었다. 물론, 그게 가능할 때만...

 

십진법 편제는 머릿속으론 쉬워도, 현실적으론 어려운 과제였다. 통일된 편제는 통일된 시스템 속에서 모든 전사들이 균일한 훈련을 받아야 운용 가능하다. 쉽게 말해 우리 학교 일진들과 산너머 학교 일진들이 힘을 합쳐 다른 동네로 원정을 가는 것과, 얘네들을 훈련소에 집어넣어 대한민국 보병으로 만드는 건 다른 차원의 얘기다.

 

또, 어차피 일시적으로 한 편이 된 사이다. 중요한 건 '연합군'의 승리가 아니라 '우리 쿠리엔'의 안위다. 피튀기는 전쟁터... 우리 부족의 칸이 위험에 빠졌는데, 다른 부족의 장교가 적을 향해 돌진하라고 외치면 누가 그 말을 듣겠는가? 결국 십진법 체계는 강력한 정치력을 지닌 칸의 휘하에서만 정상적으로 구현 가능했다.

 

13쿠리엔과 13쿠리엔이 부딪히다 보니, 승패는 하늘에 달렸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어차피 회전, 즉 서로의 총전력이 붙어 단번에 운명을 가르는 싸움이다. 각 쿠리엔 간의 통신상태가 좋지 않다보니 쿠리엔별로 각자 싸우게 된다. 전장(戰場)이 넓다 보니(100% 기병들이니 더 넓다.). 웬만큼 감각이 좋지 않은 지휘관은 전투가 끝날 때까지 승패를 알 수 없다. 미리 설정된 디폴트 상태로 붙는 셈이다.

 

전투가 시작되고 적게는 몇시간, 길게는 며칠이 흐른 후(유목민들은 계속 말을 달리면서, 그것도 말을 바꿔 타면서 전투를 하기 때문에 전투시간이 며칠이 되는 경우도 흔했다. 물론 이 경우 전장은 시시각각, 길게는 수백 킬로미터까지 바뀐다. 전장이 바뀔때면 병사들은 달리는 말 위에서 잠을 잤다.) 승패가 정해질 것이었다. 하늘은 누구의 편이었을까?

 

유능한 사람의 편이었다.

 

 

5

 

테무진 진영의 13쿠리엔의 구성을 살펴보자. 먼저 가장 중요한 중앙의 본대인 제 1쿠리엔. 40대 초중반이 된 여장부 헐룬이 1쿠리엔의 지휘관이었다. 그녀의 쿠리엔은 친정인 올쿠누트족의 전사들과 자신의 자식들, 자식들에게 딸린 전사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헐룬이 중앙 본대를 지휘했다는 것은 그녀가 전투의 총사령관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그렇지 않다면 아들인 테무진과 함께 공동으로 연합군을 지휘했을 것이다.

 

 

 

 

제 2쿠리엔은 대장 테무진과 그의 동지들로 구성되었다. 젤메, 보르추, 수부테이 등 그의 '절친'들은 모두 2쿠리엔에 모였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테무진의 '느린 성장'을 볼 수 있다. 테무진은 느리지만 꾸준히 성장하는 인물이었지만, 다시 말하면 역시 느린 사람이었다. 젤메와 보르추를 조직의 공동 2인자로 앉힌 일은 혁신적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각각 다른 쿠리엔을 지휘하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테무진은 유능한 참모들을 그냥 자신이 지휘하는 쿠리엔에 몰아넣어버렸다. 그는 자신이 개혁한 오르도의 구성을 전투에까지 적용할 생각은 아직 하지 못했다.

 

그외 각 쿠리엔을 주로 테무진을 칸으로 추대했던 몽골의 왕족/귀족 전사들이 지휘했다. 제 7익, 혹은 9익은 테무진의 막내삼촌인 다리타이가 맡았다. 8익은 니르운인 테무진의 사촌들이 이끌었다. 전통적인 구성법이다.

 

몽골 초원의 '달란 발주트'라는 곳에서 부딪힌 26개의 쿠리엔. 테무진은 동일한 전력이 한번에 부딪히면 두 안다의 경쟁이 어떻게든 결론이 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쿠리엔 단위로 싸우는 원시적인 전투야말로 시스템의 우월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에 의해 승패가 갈린다. 자무카는 전투의 천재였다. 게다가 카리스마도 넘쳤다. 비록 과격할지라도, 동료와 부하들을 적진을 향해 몰아세울 줄 아는 남자가 유리한 전투였다.

 

 

 

 

말로 선포된 칸은 허울에 불과하다. 당시 초원에서 '칸'정도 되는 호칭은 실력으로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경쟁자가 더 좋은 실력을 보여주면 그걸로 끝이다. 자무카는 애초에 테무진을 가만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실력으로, 즉 군사적 재능으로 눌러 누가 몽골의 칸이 될 자격이 있는지 보여줄 생각이었다.그러면 초원 북동쪽에서 불고 있던 테무진 열풍운 거품이 된다. 거품이 장렬히 터지고 남은 자리는 자신의 것이다. 칸은 그때 가서 되도 충분하다. 아니, 충분한 게 아니라 완벽하다.

 

테무진은 자신이 왜 따를 만한 가치가 있는 지도자인지, '시간과 노력'으로 증명하는 경향이 있었다. 테무진에겐 사람을 눈앞에서 휘어잡는 압도감이나 즉각적 카리스마가 없었다. 대신 자신의 가치를 꾸준한 성실함으로 증명했다. 아름다운 일이다. 그런데 이 아름다움은 막상 전투에선 별 쓸모가 없다. 전투의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한다.

어차피 싸울 운명이기 때문에 끌어모을 수 있는 전력 전부를 하나의 대전투에 쏟아넣는다... 그래선 안 되었다. 테무진은 자무카에게 궤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 

 

 

 

6

아쉽게도 전투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우리는 알 도리가 없다. 다만 전투결과 칭기스칸은 '제레네'라는 이름의 협곡 안까지 후퇴해 들어갔다. 드넓은 개활지에서 싸우다 협곡이 있는 지형까지 퇴각하려면 꽤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어쩌면 며칠간 퇴각했을 수도 있다. 

 

결국 헐룬과 테무진 모자는 현장지휘력에서 자무카에게 완전히 짓밟혔다. 심지어 몽골의 니르운 씨족인 '치노스'족은 부족 전체가 포로로 잡혔다. 기마병끼리의 초원 전투도 정주문명의 보병전과 전체적인 얼개는 다를 바 없다. 먼저 포위하는 쪽이 이긴다. 

헐룬은 인생의 단맛 쓴맛을 모두 본 여걸이었지만, 테무진은 누구보다 성실한 군주였지만... 인생이란 게 그렇다. 진심으로 노력했지만 재능에 질 때가 있다. 13쿠리엔 전투의 패배는 테무진의 인생에서 아버지의 죽음, 포로생활, 아내 보르테 피랍에 이은 4번째의 시련이었다. 자무카는 테무진이 8년 간 성실하게 쌓아올린 커리어를 단 하루에 박살내버렸다. 능력제로 사람을 등용하고 평등한 분배로 구성원들에게 신뢰를 얻은들,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는 칸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

고대-중세의 회전(會戰)은 도박성이 강했다. 이기면 좋다. 하지만 지면? 테무진은 불확실성에 자신과 집단의 운명을 걸어선 안 된다는 교훈을 배웠다. 물론 전투에 졌을 당시엔 교훈 따위를 곱씹을 여유가 없었다. 제레네 협곡에 기어들어간 테무진. 초원의 협곡은 지리적으로 정상적인 '쿠리엔'이 들어가기 어렵다. 즉 테무진 무리는 퇴각 중에 대부분의 쿠리엔은 물론 백성과 가축들까지 자무카 무리에게 철저히 약탈당했다는 얘기다. 

당시의 초원에선 인력과 가축의 숫자가 곧 국력이었다. 부족집단을 뜻하는 '울루스'라는 중세 몽골어는 중국과 중동에서 '나라'로 번역되지만, 원래는 '백성들'이라는 뜻이다. 국토와 국경선 개념이 없기 때문에 머릿수가 곧 국가의 크기다. 

패배한 13쿠리엔 중 헐룬의 1쿠리엔과 테무진의 2쿠리엔 외에는, 제 8쿠리엔만 남았다. 나머지 쿠리엔은 퇴각중에 뿔뿔이 흩어져버렸을 뿐만 아니라, 당분간 테무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테무진의 막내삼촌 다리타이는 테무진 가족을 버렸다가 다시 찾아와 받아달라고 할 땐 언제고, 이번에도 조카와 형수를 내팽개치고 도망갔다. 

 

 

조카와 형수의 마음을 두 번이나 텅 비게 만든...

나란색기 못난 색기...

하지만 나도 살아야 될거 아녀...

 

그나마 협곡 안으로 후퇴한 것은 나쁘지 않은 결정이었다. 협곡은 지리적 특성상 군마(軍馬)의 머릿수로 우위를 차지하기 어렵다. 일부러 코너에 스스로를 몰아세우고 배수진을 친 테무진 무리는 사력을 다해 저항할 것이었다. 자무카 연합군 입장에선 이미 전투도 이긴데다가, 물자도 빼앗을 만큼 빼앗았는데 누가 그 안에 들어가고 싶겠는가? 또 만약 테무진이 협곡의 높은 곳을 미리 선점해 매복을 하고 있다면 그야말로 들어가면 죽는 '죽음의 골짜기'였다. 승패가 뒤바뀔 가능성도 있었다. 

결국 자무카는 철수 명령을 내린다. 

"협곡 안으로까지 몰아넣었으니 이만하면 됐다. 다시 초원으로 기어나오려면 애 좀 써야겠지... 돌아가자!"

자무카는 곱게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초원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대항하면 어떻게 되는지 확실히 보여주고자 했다. 자무카는 양 삶는 솥 70개에 불을 피웠다. 거기에 치노스족의 왕자 70명을 집어넣어 삶아 죽였다!

조그만 씨족에 웬 왕자가 70명씩이나 있는가 싶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 역사서에 '왕자'라 표현된 것은 치노스족 조상의 피를 이어받은 순혈귀족이라는 뜻이다. 무려 70명 - 씨족의 전사 남성 전부를 죽인 것이다.

또한 삶아 죽이는 것은 죽음의 과정 자체도 끔직하지만,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하다. 살만이 아니라 피도 삶겨 익어버린다. 초원사람들은 피에 영혼이 있다고 믿었으니, 이는 제사를 지내주고 부족을 수호해줄 영혼까지 죽이는 이중의 살인이었다. 치노스족을 이승과 저승 모두에서 지워버린 셈이다.

몽골어로 늑대를 치노라고 한다. 몽골족은 자신들의 조상이 늑대라고 믿었다. 치노스족은 말 그대로 '늑대 씨족'이라는 뜻. 몽골족 중에서 가장 유서깊은 귀족혈통이었다. 비록 정치력과 영향력은 약했지만, 부족의 뿌리를 상징하는 귀한 집단이었다.

 

 

 

 

따라서 자무카의 70인 처형은 단순히 그의 잔인한 성격을 반영한다기보다는 정치적인 행위였다. 자무카는 유서깊은 혈통을 우대하는 전통을 없애고, 부족의 구성원리를 자신을 중심으로 재편하려고 했다. 자신과 자다란 씨족에 반항한다면 '흰 뼈'건 '검은 뼈'건 응징한다. 이런 행위는 어떤 문화권이나 부족들을 통합한 통일군주들에게 매우 흔하게 나타난다. 이런 과단성이 부족연합제체를 벗어난 전제왕권체제를 만들곤 한다. 

사실 생각해보면 치노스족 처형이 하늘이 노할 사건도 아니었다. 물론 자무카가 선량한 사람이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만, 이런 정도의 잔인함은 흔한 시대였던 것이다. 결국 치가 떨리는 악행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영리한 행동이었다고 할 만하다. 테무진만 없었다면 말이다. 

자무카 혼자만 떠오르는 별이었다면, 70인 처형은 그에 대한 두려움과 존경심(두 감정은 넓은 교집합 부분을 갖고 있다.)만 불러일으키고 끝났을 터였다. 그러나 비교대상이 있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테무진은 동료든 패배한 적이든, 사람을 그런 식으로 다뤄본 적이 없다. 치노스족 처형은 자무카와 대비되는 테무진의 선량하고 공정한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테무진은 초원에서 동정표를 얻기 시작했다. 곧바로 반응이 나타났다. 승리한 자무카 진영이 동요한 것이다. '쿠일다르'가 다스리는 '망구트'족과 '주르체데이'가 이끄는 우루유트족이 자무카 진영을 빠져나와 테무진에게 귀순했다. 예수게이의 옛 부하 '뭉릭'도 자무카를 떠나 테무진에게 왔다.

 

뭉릭... 그 옛날 예수게이가 죽을 때, 아내 헐룬과 자식들을 거두어달라는 유언을 남긴 인물이 아닌가. 하지만 그는 예수게이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지 않고 타이치우드족을 따라나섰다. 그 후 타이치우드족이 자무카에게 귀순하자, 자연히 자무카의 부하가 된 것이었다. 그는 이제서야 드디어 테무진에게 왔다. 비겁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승자를 버리고 패자를 선택한 걸 보면 이때만큼은 진정성이 있는 행동이었다.

 

뭉릭의 가족도 가장을 따라오는 건 당연한 일. 뭉릭에겐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중 넷째는 전사도 목동도 아니었다. 넷째의 직업은 무당이었다. 몽골인들은 개명을 잘 하지 않는다. 태어나면서 부모에게 받은 이름을 끝까지 쓴다. 하지만 무당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뭉릭의 넷째아들의 이름은 '텝 텡그리'였다. '영원한 푸른 하늘'의 말씀을 듣는 샤먼이라는 뜻. 모시는 신령의 사이즈가 무진장 크다. 매우 강력한 무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신기(神氣)가 아주 셌나 보다.

 

 

몽골의 샤먼

 

불교와 기독교, 이슬람교 등 외래종교를 유행처럼 받아들이던 초원의 다른 부족들과 달리, 몽골족은 아직도 고집스럽게 무속을 믿고 있었다. 이 무속의 형태를 요즘 학자들은 텡그리즘, 즉 무속은 무속이되 '영원한 푸른 하늘'의 의지를 최고로 치는 형태다. 텡그리의 메신저가 자신에게 왔다는 것. 이는 테무진에게 매우 고무적인 사건이었다.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테무진은 전쟁에선 졌지만, 정치에선 이긴 것이다. 

(이 사건은 테무진에게 깊은 교훈을 남겼다. 앞으로 테무진은 전투에서는 많이 지지만, 정치에서는 결코 지지 않는다. 그는 비록 당장은 손해를 보더라도 초원의 여론을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7

감동적인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망한 건 망한 거다. 초원 대중들 눈에 실력으로 증명하지 못했으니, 테무진의 최대 장점인 성실함과 꾸준함으로 어필할 수밖에. 사는 게 그렇다. 망하는 건 하루아침에 망해도, 다시 일어서는 건 보통 오래 걸리는 일이 아니다. 

 

 

 

달란 발주트 전투가 벌어진 연도엔 학자들마다 이견이 있다. 1185년에서 90년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아마 87년에서 89년 사이일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짧게 잡으면 5년, 길게 잡으면 10년까지 '역사적 공백기'가 발생한다. 물론 궤멸 직전에서 다시 커리어를 시작한 사람이, 역사에 기록될 만한 사건을 만들기란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혹이 사라지진 않는다. 의혹을 대략 정리해보자. 

의혹 첫번째 설. 테무진이 중국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 가설엔 세 가지 형태가 있다. 

1. 승자 자무카가 테무진을 중국으로 유배보냈다. 

2. 테무진이 초원에서 추방당해 중국으로 가서 생활했다. 

3. 테무진이 현재의 중국 지역에서 노예생활을 했다. 즉 자무카가 그를 팔아치웠다. 

아니 왜 간단하게 죽여버리지 않고? 그야 두 사람이 안다였기 때문이다. 안다를 죽인다는 건 평판에 치명적이다. 초원에서 '평판'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지난 기사에 충분히 설명을 해 놓았다. 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가만 놔둘 수도 없고. 그래서 자무카 입장에서는, 테무진을 아예 외국으로 보내서 초원에서 '치워버리는' 게 상책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위 3가지 설의 가능성은 사실 매우 적다. 먼저 유배설. 어딘가에 유배를 보낸다는 건, 그곳에서도 일정수준의 행정력, 그게 아니라면 '입김'을 행사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자무카는 초원의 일부만 장악했을 뿐이다. 

같은 이유로 2번 설도 가능성이 희박하다. 세력이 폭삭 쪼그라든 테무진에게 <눈에 띄면 가만 안 놔둔다>는 식으로 초원에서 쫓아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커레이트의 토그릴 칸의 입장을 보면 이제 13쿠리엔 전투의 승자가 되어 영향력이 막강해진 자무카를, 테무진을 지원해 견제하는 것이 소이이제이 전략에 들어맞는다. 그게 아니라도 초원을 넓다. 숨을 곳은 많고 적은 눈에 잘 띈다. 기를 못 펴고 눈칫밥 먹고 사는거지, 초원에 발을 붙일 수 없는 건 아니다. 

이제 3번. 그렇다면, 외국 상인에게 테무진을 노예로 팔아버리는 게 자무카에게는 가장 속편한 해결책일 수 있다. 헌데 그러려면 테무진이 포로가 되었어야 하는데, 그런 적이 없다.

 

테무진이 중국에서 10여년 간 노예생활을 했다는 중국의 옛 기록이 있다. 그러나 한족 지식인들은 유목민 지도자, 특히 가장 강력한 유목국가였던 몽골의 군주들을 깎아내리기 위해 사력을 다해온 전력이 있다. 노예생활을, 그것도 중국에서 했다고 기록하는 것은 테무진의 커리어를 깎아내리는 데 아주 좋은 방법이었으리라.

 

어쨌든 이 가설을 진실이라고 전제한다면, 노예생활의 배경은 남중국인 송나라보다는 북중국인 금나라와 티벳인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국가인 탕구트가 유력하다. 탕구트도 현재의 중국 영토에 있었으며, 한족문화의 영향이 큰 국가였으므로 당연히 중국에 해당된다고 봐야 한다. 국가의 설립과정을 보면 유목국가였지만, 나라가 돌아가는 방식은 정주문명국가에 가까웠다.

 

테무진은 초원을 통일하고 세계전쟁에 나서기 전까지 정주문명과 도시에 대한 이해도가 제로에 가까웠다. 그래서 세계전쟁 초반에 굉장히 애를 먹었다. 특히 성벽을 공격하는데 애로사항이 많았다. 아무리 낮은 계층이었을지라도, 정주문명의 삶을 수년 이상 겪어본 사람의 경험치가 아니었다.

 

여하튼 이 의혹은, 몽골-러시아-일본 합작영화인 <몽골>에서는 테무진이 탕구트에서 오랜 시간 억류되어 있는 것으로 표현된다. 영화에서는 보르테가 천신만고 끝에 남편을 구해온다. 물론 어디까지나 픽션이다.

 

 

 

무엇보다, 위 가설들이 사실의 가능성을 가지려면 주객이 전도되어야 한다. 역사에 분명히 기록된 사건들이 픽션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이상의 가설들은 최근 반세기 동안 <몽골비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사실상 폐기된 거나 마찬가지 상황이다. 즉 테무진이 초원에 멀쩡히 살아있지 않으면 주르체데이와 쿠일다르가 그에게 귀순할 수가 없다. 그리고 다음의 사건도 일어날 수가 없다.

 

 

outro

 

망구트족과 우루유트족은 머릿수가 적어서 정치적인 영향력은 없었지만, 용맹하기로 이름난 집단이었다. 그래서 전투의 선봉에 서곤 했다. 테무진은 이들의 위력을 13쿠리엔 전투에서 톡톡이 맛보았을 것이다. 특히 망쿠트의 수장 쿠일다르는 겁없는(그리고 생각도 다소 없는) 열혈남아였다.  

 

자신들에게 패배한 적에게 귀순하다니... 감동을 듬뿍 받은 테무진은

 

"이정도씩이나 되는 사람들이 나한테 와주었다"

 

며 잔치를 열었다. 망하고 나서 잔치라니 좀 이상하긴 하지만, 흥겹지 않으면 다시 시작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게 잔치를 하고 있는데 뜻하지 않은 사고가 터졌다. 테무진의 혁신과 전통 귀족들의 기득권이 충돌한 내부갈등이었다.

 

 

(다음 편 '레저렉팅 테무진'에서 계속)

 

 

 

http://www.ddanzi.com/news/5961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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