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 사려니숲길,제주올레 20코스 도보 여행기
- 언제:2016.10.21~24(3박4일)
- 여행 동선:사려니숲길->
제주올레20코스 김녕서포구->성세기해변->월정해변->
행원포구(광해군 기착지)->평대리->해녀박물관
이른 아침,
잔뜩 흐린 김포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비내리는 제주국제공항의 젖은 활주로에 심하게 요동치며
착륙했습니다.
제주에 도착해서 머문 3박4일 동안 이틀 내리 비가 내렸는데
첫쨋날은 하염없이 내리는 비에 속수무책이었고
둘쨋날은 우중에 사려니숲에 잠시 들어갔으며
세쨋날에 비로소 비가 그쳐 나는 기다렸다는 듯 혼자가 되어
사단법인 제주올레에서'가을에 걷기좋은 올레길'로
선정한 곳 중 한 곳인 제주 올레 20코스를 걸었습니다.
그 길에는 바람이 불었고,바람이 불었고,바람이 불었습니다.
하늘은 온종일 잿빛이었고
해변으로 흰포말을 일으키며 연신 밀려오는 파도치는 바다를 따라 난,
올레길에는 억새풀과 풍력발전기의 바람개비들이
세찬 바람에 서글프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소금기를 머금은 습하고 거친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바다를 지나고,마을을 지나고,돌담을 지나
묵묵히 길을 갔습니다.
제주에 도착하고 이틀째 되던 날,
비내리는 사려니숲에 갔습니다.
사려니숲은
제주시 봉개동 절물오름 남쪽 비자림로에서
물찻오름을 지나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 사려니오름까지
이어지는 길이는 약 15㎞,평균 고도는 500∼600m입니다.
며칠내 바람이 싸늘히 불고
오늘은 안개 속에 찬비가 뿌렸다.
가을비 소리에 온 마음 끌림은
잊고 싶은 약속을 못다한 탓이리.
- 황동규,<시월>중
토양의 성분에 따라 색을 달리하여 핀다는 산수국이
계절의 변화에도 아랑곳 없이 비에 젖은 모습으로
길을 가는 이들을 반깁니다.
산수국은 조금만 건조해져도 바로 말라버리는 꽃이라는데
적합한 환경에서는 다른 어느 꽃보다도
오랜 시간 피어있는 꽃이라고 합니다.
비와 안개로 가득한 사려니숲길의 삼나무 숲은 청량감을 더했습니다.
울창한 숲은 사람을 치유하는 피톤치드를 한껏 내뿜어
비록 비내리는 날씨였지만 숲을 걷는 이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해주었습니다.
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
- 황지우,<길>에서
사려니숲길의'사려니'는 신성한 곳,
또는 신령스러운 곳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고요함 속에 울창한 녹음만이 가득해 신성함마저 느껴지는 이곳,
사려니숲길은 저 붉은 황톳길이 있어 더욱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아름다웠던 것의 살아있는 추억이다.
-파스칼 키냐르,<신비한 결속>에서
비가 내리는 날씨라서 숲을 걷는 사람들이
도중에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서
갈수록 인적은 드물었고 비내리는 호젓한 숲길은
고즈넉했습니다.
인적이 드문 비내리는 사려니숲길의 황톳길
가을이 무색하게 울창한 숲의 푸른 내음은 성스럽기까지 했으며
안개와 빗물이 스며들어 맑은 물기가 적셔진
키 큰 삼나무 숲에는 청량함이 묻어났습니다.
속절없이 내리는 비로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사려니숲길을 잠시 걷는데 만족해야 했습니다.
물찻오름까지 가보려고 했으나 비가 점점 몸을 적셔와
처음 숲에 들어온 지점으로 다시 되돌아 왔습니다.
부분을 보고 전체를 안다고 할 수 없듯
이제 겨우 사려니숲길 초입에 들어갔을 뿐인데
사려니숲길을 가보았다고 할 수 없을것 같습니다.
다음에 제주에 오면 제일 먼저 나는 이 숲길을 걷고 있을 것입니다.
제주올레 20코스 개념도입니다.
쉬엄 쉬엄 걸어도 5시간 정도면 충분한 코스였습니다.
제주 올레 20코스 흐름도
제주 올레 20코스가 시작되는 김녕 서포구 마을은
금속공예마을로 지정되어 조각 작품들이 눈에 많이 띄었습니다.
제주올레 20코스가 시작되는 김녕 벽화마을에 있는
카페 '노란대문'입니다.
들리는 풍문으로는 카페 주인장이 미술 전공자로
카페 내부에는 그림도 많고 벽화도 많다 들었는데
들어가보지는 못했습니다.
한눈에 봐도 짊어진 삶의 무게가 버거워보입니다.
저 등에 짊어진 무거운 짐을 '꽃'이라 표현한
작가의 의도에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식들을 위해 평생을 숙명처럼 희생하시는
우리네 부모님들의 등골을 빼는 저 고단함을
마냥'꽃'으로만 미화시키는것에 대해서는
불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거든
바닷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이 하나되어
가득히 차오르는 수평선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얻는 평안이 거기 있다
- 오세영,<바닷가에서>중
흐리고 스산한 날씨에 바람은 거칠었고
성난 파도는 성세기해변으로 연신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제주는 그야말로 바람의 섬이었습니다.
바람이 제주 특유의 자연과 풍경을 만들었습니다.
제주올레의 20코스 김녕~하도 올레길은
제주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 바람을 만나는 길이었습니다.
모진 바람이 부는 초록이 바랜 풀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온통 시린 바람속으로 걸어갔습니다.
'성세기'해변은
왜적을 막기 위한 작은 성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졌습니다.
바다에 와서야
바다가 나를 보고 있음을 알았다.
하늘을 향해 열린 그
거대한 눈에 내 눈을 맞췄다.
눈을 보면 그
속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바다는 읽을 수 없는
푸른 책이었다.
쉼 없이 일렁이는
바다의 가슴에 엎드려
숨을 맞췄다.
바다를 떠나고 나서야
눈이
바다를 향해 열린 창임을 알았다.
- 채호기,<바다2>
세월이 가도
늙지 않는
바람의 나이
입이 없어도
할 말을 하고
눈이 없어도
방향을 잃지 않는다
모난 것에도
긁히지 않고
부드러운 것에도
머물지 않는다
나는 언제쯤
길을 묻지 않고
지상의 구부러진 길을
달려갈 수 있을까.
- 양금희,<바람은 길을 묻지 않는다>
한여름 무성했던 초록이 바랜
마른 풀잎 위를 모진 바닷바람은 무심히 스쳐갑니다.
너로 인해, 너를 알게 됨으로
내 가슴에 슬픔이 고이지 않는 날이 없었지만
네가 있어 오늘 하루도 넉넉하였음을
- 이정하,<길의 노래> 중
바람을 따라 억새와 파도도 춤을 춥니다.
제주 올레 코스 중 마라도 코스와 이곳 20코스만이
오르막이 없는 코스이지만 오르막 대신
바람이 앞을 가로막는 코스가 바로 이곳 20코스입니다.
한쪽 길은 바람을 맞서는 길이고
반댓길은 바람이 등을 떠미는 길이었습니다.
거친 소슬바람이 불어오는 제주의 가을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인적이 드물어 조금은 쓸쓸해보였습니다.
바람의 본향 제주에서도 이곳 김녕지역은
바람세기로 이름난 곳입니다.
바람은 살아 있는 화석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사라진 뒤에도 스스로 살아남아서 떠돈다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 속에서 운다
그러나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바람의 세계 속에서 울다 간다
- 김경주,<바람의 연대기는 누가 다 기록하나>중
흔날리며 풍화하는 억새풀들과
철석이는 파도소리만이 진종일 길동무가 되어주었습니다.
계절은 항상 우리를 시간의 경계위에 세워놓고
속절없이 빠르게 흐릅니다.
눈부시게 흘러가는 가을속으로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계절은 벌써 저만치 또다른 눈부심으로 향해 가는것 같습니다.
바람의 방향에 순응하며 온몸을 맡기고 흔들리는 억새풀들과
거센 바람을 숙명처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풍차!
제주의 바람은 자연과 사물들과 사람을
강하고 담대하게 하는 힘이 가지고 있습니다.
빛이 나를 바라보고 그 빛에 의해 내 눈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채색된다.
채색되는 것은 만들어진 관계나 오랫동안 철학자들이 망설이며
숙고하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인상(impression)이며 미리 나를 위해 저만치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표면의 아른거림이다.
이것은 평면적인 관계에서 우리를 벗어나는 것,
즉 나에 의해 결코 통제될 수 없는 매우 다양하고 애매모호한
영역의 깊이를 나타낸다.
바로 이것이 나를 사로잡고,매순간 나를 유혹하고,
내가 그림이라 불렀던 풍경을
풍경 이외의 다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 자크 라깡,<욕망이론>중
바닷가 거친 바람에 등떠밀려 가는 길가에는
가을색이 완연했습니다.
길벗이 되어주는 억새풀과 들풀들이 정겨웠습니다.
"진정한 행복이란 이런 것인가.
야망이 없으면서도 세상의 야망은 다 품은 듯이
말처럼 뼈가 휘도록 일하는 것.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되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
성탄절 잔치에 들러 진탕 먹고 마신 다음,
잠든 사람들에게서 홀로 떨어져 별은 머리에 이고 뭍을 왼쪽,
바다를 오른쪽에 끼고 해변을 걷는 것,"
- ‘그리스인 조르바(열린책들, 177쪽)’ 중에서.
서러움이 내게 말 걸었지요
나는 아무 대답도 안 했어요
- 이성복,<바다>중
바다에 가는 길이 아니었는데도 우리들 발걸음은 결국
바다에 닿지 않던가
- 장석남,<바다는 매번 젊어서>중
제주올레 20코스는 바다와 마을이 이어지는 길이었습니다.
소금기 묻은 거칠고 습한 바람이 조금 잦아드는
바닷가 마을 돌담길로 올레길은 방향을 틉니다.
월정리 해변가 마을의 집들은 하나같이
거친 바닷바람을 피해 돌담속으로
한껏 몸을 낮추고 있었습니다.
해변을 따라온 올레길은 돌담이 정겨운
마을로 이어졌습니다.
소금기 묻은 습한 바람에
카메라 렌즈가 뿌옇습니다.
온종일 바다는 요란했지만 월정리 마을은 고즈넉하기만 했습니다.
흐린 날씨에 거친 바람이 불었지만
제주도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탓인지 개의치 않는 모습입니다.
한포기 한포기마다 정성스런 손길이 역력해 보였습니다.
제주의 돌담은 바람을 막는 담이 아닌
바람의 통로입니다.
엉성해 보이는 저 돌담이 거친 바람과 태풍에도
끄덕없이 견디는 이유이기도합니다.
바람과 공존하는 저 돌담은 사람을 지키고 농작물을 살찌웁니다.
오랫만에 제주 올레길을 걸었는데
몇년전에 비해 제주 올레길에 유난히 게스트 하우스가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 당시에는 1만원이면 하룻밤 묵어갈수 있었는데
이번에 직접 묵어보니 1박 숙박비용이 2만원으로 올랐고
식사까지 하려면 추가로 1만5천원을 더 내야해서
조금은 부담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제주올레 20코스에 있는 게스트하우스 '여울목'
행원 포구에 다다르면 조선 제15대 임금이었던 광해군이
제주로 유배 올때 배에서 내린 기착지입니다.
정치적 이유로 폐위된 광해군은
제주에 유배온 이들 중 가장 신분이 높았습니다.
제주에서 약 4년여를 유배 생활을 하다 제주에서 숨을거두었는데
광해군의 흔적이 바로 이곳 행원포구에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행원포구에는 거대한 바람개비들이 바다와 땅 곳곳에 서 있습니다.
저 뒤로 보이는 바로 풍력단지가 그곳입니다.
행원은 바람많은 제주에서도 바람을 가장 먼저 맞는 곳으로
바람이 거센 곳으로 유명합니다.
거친 비바람은 성(城)머리에 불고
어둡고 스산한 공기는 누각에 가득한데
푸른 파도속에 때는 이미 어스름
푸른 산 쓸쓸한 기운은 가을을 감도누나
조선 15대 임금 광해군이 제주 유배 생활중에 지은 시 입니다.
제주 올레 20코스의 이곳 행원포구는
광해군이 제주땅에 한많은 첫발을 내딛은 곳입니다.
개는 바람에 짖지 않지만 바람은 개를 먹이지 않는다
- 신용목,<바람은 개를 기르지 않는다>중
몽골에서는 기르던 개가 죽으면 꼬리를 자르고 묻어준단다
다음 생에서는 사람으로 태어나라고,
사람으로 태어난 나는 궁금하다
내 꼬리를 잘라 준 주인은 어떤 기도와 함께 나를 묻었을까
가만히 꼬리뼈를 만져본다
- 이운진,<슬픈 환생>
오후가 되자 바람은 더욱 거칠게 불었습니다.
짙푸른 물굽이를 등지고
흰 물거품 입에 물고
서러움이,서러움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엎어지고 무너지면서도 내게 손 흔들었습니다
- 이성복,<바다>중
세찬 바람이 부는데도 저 돌담은 끄덕도 없습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쌓아놓은것 같은 돌담이
강풍에도 쓰러지지 않습니다.
그 비밀은 저 돌담 사이의 틈새로 바람이 지나기 때문입니다.
평대리는 당근이 유명한 마을이었습니다.
당근밭의 검은 현무암과 초록의 당근밭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평대리
바람의 길,제주올레 20코스는
이곳 해녀박물관에서 마무리됩니다.
제주올레 20코스를 걸어보니
과연 제주가 왜 바람의 섬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시리고 습한 바람과 눈부신 바다가 있는 제주는
계절을 탓하지 않고 여전히 인상깊었습니다.
올레길을 걸었던 기억은 언제나 계절에 상관없이 찬란히 빛납니다.
흐린 가을 날,홀로 걸었던 이번 제주올레 20코스는
오래 기억에 남을것 같습니다.
- 끝.
- 글,사진:윤선한
우리는 순간에 찍히는 사진과 같은 생을 벗어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생의 각 순간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과 바꿔질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때로는 오직 그 순간에만 온 마음을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앙드레 지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