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합혜 짚신과 산 꿩
옛 선비들은 먼 길을 떠날 때 여러 켤레의 짚신을 짊어지고 길을 떠났다. 가야 할 행선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산길을 많이 걸어야 할 여정이면 짚신의 밑바닥을 느슨하게 삼은 오합혜 짚신을 반드시 마련했다. 튼튼하고 오래 신어도 헤지지 않는 십합혜 짚신이 훨씬 실속이 있었지만 굳이 오합혜를 고집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십합혜 짚신은 씨줄 열 개를 나란히 하여 짚으로 촘촘하게 날줄을 넣은 것이어서 단단하고 질겼다. 그러나 오합혜는 다섯 개의 씨줄에 날줄을 듬성듬성하게 엮은 것으로 보기에도 어설프고 수명 또한 짧았다. 그런데 왜 선비들은 실용성을 외면하고 오합혜 짚신을 신고 산길을 오르내렸을까. 그것은 개미나 애벌레 같은 작은 벌레들이 밟혀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씨줄과 날줄 사이가 느슨한 짚신을 신었던 것이다.
자연사랑은 흩어져 있는 쓰레기와 휴지 몇 장 줍는 것으로 완결 되지 않는다. 옛 선비들의 미물사랑 정신과 같이 정말 마음 깊은 곳에서 출발해야 한다. 아름다운 이 강토를 다 버려 놓고 난 다음에 뒤늦게 손을 쓰면 이미 때는 늦어 버린다. 출발해 버린 버스 뒤에서 손을 들고 서 있는 꼴이다.
태풍에 이어 장마로 인한 강원도의 폭우 피해는 단순한 천재가 아니다. 돈을 노린 난개발이 가세한 인재가 더 큰 재난을 불러 왔다고 한다. 뉴스를 보다가 미움과 원망이 커지고 부풀려 지면서 치유방법의 하나로 우리 옛 선비들의 자연사랑의 극치인 오합혜를 기억해 내고 이 장마 기간 내내 마음속으로 짚신을 삼고 있다.
천주교의 기도문 중에 ‘내 탓이로소이다’란 게 있다. ‘남을 탓하지 말라’는 말이다. 생각이 여기에 까지 미치자 ‘오합혜 짚신’에서 출발한 나의 ‘아침 명상’은 난개발을 자행한 ‘타인 원망’에서 급선회하여 ‘내 탓’으로 돌아와 더 이상 전진하지 않고 요지부동이다. 기어코 눈물의 참회를 받아 낼 참이다.
나는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망나니짓을 너무 많이 해 왔다. 이런 글을 쓸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옛 선비들이 오합혜 짚신을 신고 다녔던 산길을 무지막지한 사냥화를 신고 개미가 죽는지 지렁이가 밟혀 죽는지 모르고 내 재미에 취해 산을 오르내렸다.
사십 대 초반부터 십이 년 동안 겨울 사냥 시즌이 열리기만 하면 산과 들로 달려 나가 길짐승 날짐승 등 무수한 생명을 총으로 잡아 구워 먹고 볶아 먹고 온갖 난리를 치고 다녔다. 새벽에 나가 해가 설핏 기울 때까지 엽장을 두루 뒤지며 돌아다녔다. 나는 그것이 사나이로 태어나 한번 쯤 해 볼만한 짓이며 호기로운 풍류인 줄 알았다. 그러니까 공휴일과 주말 사냥을 통해 일년에 평균 60 내지 70 마리의 꿩을 잡았다고 치면 그동안 내가 죽인 것들은 일천 마리에 가깝다. 내 죄를 내가 다 안다. 변명할 여지가 없다.
총알을 정통으로 맞아 현장에서 즉사한 짐승들은 그래도 다행이다. 서투른 솜씨에 설맞은, 사냥 용어로 ‘하우치’된 꿩들은 있는 힘을 다해 숲 속으로 달아나 고통 속에서 홀로 죽어가야 한다. 이 잔인함을 어떻게 참회해야 할까. 사람들은 사냥을 듣기 좋은 말로 ‘헌팅 스포츠’라고 말한다. 그러나 총에 맞아 죽어야 하는 꿩의 입장에서 보면 이건 총살형이나 학살이지 다른 아무 것도 아니다.
사냥은 재판 절차를 거치지 않고 사형을 집행하는 인간이 저지르는 만행이다.
내 사냥 행적이 십이 년 만에 끝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미수의 나이로 2000년의 개막을 못 보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만류 때문이었다. 어느 저녁 어머니는 내 손을 잡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애비야, 꼭 들어 줘야 할 부탁이 있다. 내가 죽거들랑 생물을 살상하는 사냥은 제발 하지 말아라. 이것이 어미의 마지막 부탁이다.” 나는 얼떨결에 “예, 그렇게 하지요”라고 대답은 했지만 사냥을 그만 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왜냐하면 나의 “예”라는 대답은 항상 건성이라는 걸 어머니는 너무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나는 어머니의 부탁이나 애원을 제대로 들어 준 적이 없는 불효였다. 이를테면 “공부 열심히 해라, 절이나 교회에 열심히 다녀라, 거짓말 하지 마라” 등등.
그해 오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달 뒤 사냥철이 돌아왔다. ‘할 것인가 말 것인가’(to be or not to be) 햄릿 왕자의 고민을 내가 안고 끙끙거렸다. 결론을 내려야 했다. 생전 처음 어머니의 말씀을 잘 듣는 효자 아들이 되기로 결심했다. 두 자루의 사냥총을 총포사로 들고 가 “이것 몽땅 팔아 주십시오” 그것으로 끝을 내고 말았다.
서른 둘 아까운 나이에 스키를 타다 불귀의 객이 된 캐나다의 시인 랜디 스톨만이 얼마나 자연을 사랑했는지 그의 시 ‘바람이 남긴 것’을 한 번 읽어보자.
“높은 산 중턱의 벌판을 걸어보라/ 키 큰 소나무 밑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라/ 흐르는 강물을 무심코 바라보라/ 그리고 시간일랑은 말끔히 잊어버려라/ 하늘 높이 솟은 전나무 숲이 들려주는 소리를 들어보라/ 흐르는 개울물과 높은 산에 서 있는 나무들을 통해/ 뜨거운 여름의 햇살과 매서운 겨울의 추위를 느껴보라/ 아름다운 대지를 잠깐 지나치는 나그네인 양/ 계곡을 따라 걸으며 개울가에 가벼운 발자국만 남겨라”
그런데 고향 가까운 공원묘지에 쓸쓸히 누워 있는 어머니에게 “어머니, 총을 없앴어요. 더 이상 산 짐승들을 잡지 않기로 했어요”라고 아뢰야 할 텐데 평소 행실만 생각하고 아들의 결심을 믿지 못하고 계실 어머니에게 전할 방법이 없다.
이번 추석 성묘 길에는 어디서 오합혜 짚신을 주문하여 그걸 신고 산엘 올라 “어머니, 어머니!”하고 소리쳐 불러 봐야겠다.
한편 이 고희란 말과 함께 사람의 나이를 나타내는 유식한 이름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스무 살을 弱冠, 마흔을 不惑, 쉰 살을 知命, 예순을 耳順, 일흔 일곱을 喜壽(喜字의 草書가 七七), 여든 여덟을 米壽(米를 破字 하면 八八), 아흔 아홉을 白壽(百에서 한 획이 없음)라고 한다. 이중 不惑·知命·耳順은 論語에 나오는 孔子의 말씀 중 「나는 마흔 살에 의심하지 않았고 쉰 살에 天命을 알았고 예순 살에 귀가 순하다고 한 것을 따온 것이다.」
참고 : 공자는 일생을 회고하며 자신의 학문 수양의 발전 과정에 대해《논어》〈위정편(爲政篇)〉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열 다섯 살 때 학문에 뜻을 두었고 [吾十有五而志于學(오십유오이지우학)-志學]
서른 살 때 입신했다. [三十而立(삼십이입)-而立]
마흔 살 때는 미혹하지 않고 [四十不惑(사십불혹)-不惑]
쉰 살 때 하늘의 명을 알았다. [五十而知天命(오십이지천명)-知命]
예순 살 때는 귀에 따랐고 [六十而耳順(육십이이순)-耳順]
일흔 살이 되니 마음 내키는 대로해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았다.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칠십이종심소욕 불유구)-從心]
[주] 20세 : 약관(弱冠),《예기(禮記)》에서 온 말. 60세 : 환갑(還甲). 70세 : 고희(古稀), 두보의 시 '人生七十古來稀'에서 온 말. 77세 : 희수(喜壽), '喜'의 초서체(草書體)는 七七이라 읽을 수 있음. 88세 : 미수(米壽), '米'자를 분해하면 八十八이 됨.
나이마다 부르는 별칭
첫댓글 우리 사람들은 항상 실수를 하면서 살아간다. 그 실수를 두 번 다시 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다면 꼭 실천을 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또 다시 그런 실수를 하게 된다. 우리 친구들은 이 글을 일고 무엇을 느꼈나요? 내 생각과 느낌을 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