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본 메세지] ---------------------
제 목 2-3 殘雪
그 새벽 전망대에서 우리는 칸첸중가뿐 아니라 마칼루, 로체, 에베레스트 등도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14개의 8천미터급 봉우리 중에서 제 1위(에베레스트:8848 미터), 제 3위(칸첸중가:8598미터), 제 4위(로체:8516미터), 제 5위(마칼루:8463미터)의 봉우리 넷을 한꺼번에 바라볼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만일 안개나 구름이 끼었더라면 우리는 칸첸중가조차 볼 수 없었을 것이었다. 일본 청년들은 다음 휴가 때 반드시 파키스탄으로 가서 세계 2위 봉인 K2(8611미터)를 마저 보겠다고 했다.
8시쯤 우리는 팔루트를 향해 떠났다. 길은 산등성에 나있어 완만했다. 심한 비탈은 거의 없었다. 응달진 곳에서는 잔설(殘雪)을 밟고 걸었으며 때로는 구라스 나무 숲 사이를 걸었다. 우리 나라 철쭉이나 진달래와 흡사한 구라스 나무에 맺히기 시작한 꽃망울에는 하얀 눈꽃이 붙어 있기도 했다.
하늘은 그날 따라 유난히 파래서 머리에 물을 이고 걷는 듯했다. 그렇게 걸으면 걸을수록 뚜렷하게 육박해 오는 칸첸중가를 향해 길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늘 참 되게 파랗지요?"
"치약으로 머리 감고 가을 하늘 본 적 있어?"
"아니요."
"군(軍)에 있을 때, 계방산 산등성에 매복조(埋伏組)로 파견됐었거든. 그때 비누가 없어서 치약으로 머리를 감고 하늘을 봤는데 그 하늘이 이 하늘 같았어."
"머리 가죽이 홀랑 베껴진 것 같았겠군요?"
"해골에 금가는 소리가 들렸어."
"졌습니다."
조극섭과 내가 맨 뒤에 처져 걸으면서 그런 대화를 나눈 지 얼마 안 되어서 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바람도 심상치 않게 불기 시작했다. 비나 눈이 올 것 같았다. 산닥푸에서 팔루트까지는 21킬로미터인데 우리는 겨우 4킬로미터를 걸었을 때였다. 남은 구간 17킬로미터를 걷는 중에 아무래도 우리는 비를 만날 것 같았다. 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오후가 되자 안개 때문에 시야(視野)가 5미터도 안 됐다. 우리는 서로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보조를 맞추어 걸어야 했다. 북사면(北斜面)에는 눈이 발목까지 빠지는 곳도 있었다. 등산화가 젖어 발끝이 시렸다. 여자들의 운동화는 이미 푹 젖었다.
팔루트에 도착한 때는 오후 다섯 시였다. 눈 더미 가운데 서 있는 건물이 정부에서 운영하는 산장이었다. 양철 지붕을 씌운 단층 목조 건물의 넓은 홀에 식탁이 두어 개 놓여 있었는데 그중 촛불이 켜져 있는 식탁에 서양 트레킹 팀의 심부름꾼들이 저녁을 차리고 있었다.
매니저가 안내해 준 방에는 침대 여섯 개 외에 책상과 의자도 있었다. 의외로 침구가 깨끗했다. 두툼한 담요도 두 장씩 배당되었다. 그러나 음식이 형편없기는 산닥푸와 다를 바 없었다.
저녁을 주문해 놓고 우리는 뜨거운 차를 마셨다. 어두워지는 창으로 안개가 한기와 함께 스며들어 왔다. 그런데도 어디서 가축의 목에 매단 방울 소리가 뎅그렁뎅그렁 울렸고 작은 새가 푸드득 날아오르는 소리도 들렸다.
서양 팀들의 식탁에 밝은 칸테라가 켜졌다. 불빛에 비친 서양 팀들의 식탁은 아주 풍성했다. 짐꾼들이 풍부한 식량을 지고 왔으며 요리사가 따라다니며 요리를 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쪽 식탁에서 비치는 불빛에 의지하여, 그리고 거기서 풍기는 닭튀김 냄새를 반찬 삼아 맨밥에 감자 볶음과 녹두 국을 먹었다. 다들 잘 먹는데 혜순만은 고소증에 시달리는지 몇 술 뜨다 말았다.
밤중에 손전등을 들고 화장실에 가보니 엉망이었다. 꽁꽁 언 똥오줌이 변기에 차고 넘쳐 발 딛을 틈조차 없었다. 할 수 없이 안개를 헤치고 멀찍이 나가 눈밭에 앉았다. 전지를 아끼려고 손전등을 끄고 있는데 저쪽에서 다가오는 손전등 불빛이 뿌옇게 보였다. 나는 손전등을 다시 켜서 원을 그려 보였다. '여기는 이미 내가 차지했다. 다른 데로 가라.'는 뜻인 줄 알았는지 그쪽 손전등 불빛의 각도가 꺾였다. 안개, 어둠, 고요......산등성 너머에서 치솟는 바람 소리가 음산하더니 '뿌지직'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쪽 변객(便客)이 멀리 못 간 모양이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