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1956년부터 어머니날을 지켜왔는데 1973년부터는 부모의 사랑을 기리는 어버이날이 되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도 어머니의 사랑을 더 생각한다. 어머니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과 너무 같고 그 사랑을 기리는 것은 돌아온 탕자의 마음에 비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동생 오영재는 이북에서 개관시인으로 있다가 지난 2011년 갑상선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6·25 때 중학교 3학년으로 의용군을 지원하여 월북한 후 2000년 제1차 남북이산가족 재회 때 이북 가족 제1호로 남하하여 우리가족과 만난 후 군사 분계선으로 막힌, 이념이 다른 나라로 떠난 뒤 다시는 상봉하지 못하고 타계했다. 그가 1964년에 쓴 시는 작가학교를 다니면서 쓴 것인데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내가 잠든 줄만 알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몰래 늦도록 이야기 하셨지요/ 학교가 그처럼 가고 싶었던 이 아들을 두고/ 학비를 댈 수 없는 구차한 집 살림에 긴 한숨을 쉬며/ - 저 애는 집일이나 착실히 시키자고.....
아버지는 7 남매를 거느리는 초등학교 교장이었고 집도 없이 교장관사를 전전하고 계셨는데 자기라도 입대해서 당원이 되면 혹 세상이 바뀐 그때 그들이 주는 배급이라도 받지 않을까하고 어머니를 생각하여 동생은 자원을 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다음과 같은 시도 있다.
젖먹이 누이동생을 업고/ 이 아들을 찾아온 칠 십리 길..... 야영훈련소의 은행나무 밑/ 의용군 복장을 한 아들을 보며 웃으며/ 몸 성히 싸우고 돌아오라 이르고 돌아서 간 칠십리 길.../ 석양이 뉘엿뉘엿 저물던/ 그 먼지 낀 신작로 길로 멀리 사라져 가던/ 아아, 마지막으로 보던 어머니 모습이여/ 그 밤 어두운 길을 무사히 가셨습니까....
나도 아버지도 파난 가고 없던 집에서 둘째 아들이 의용군에 입대해 훈련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갓난아이를 업고 어머니는 칠 십리길(28km)을 아들을 설득하여 데려오려고 갔던 것이다.
그는 이북에서 군대생활을 하다가 제대하게 되었다. 부모를 찾아 고향 집으로 돌아가는 친구를 따라 무작정 열차를 탔는데 사고무친(四顧無親)인 그는 갈 곳이 없었다. 친구의 권유를 뿌리치고 홀로 비 내리는 평양역에 내렸다. 그리고 찾아간 곳이 기계 건설 공장이었다. 거기서 <전선문고>에 실은 자기의 시 때문에 이름이 났고 작가동맹에서 그를 발탁하여 그를 작가학원에 입학시켰다. 장학금과 의복을 받을 때, 또 출판물에 자기 시가 실릴 때 어머니 생각으로 눈시울이 뜨거웠다. 학급에서 망경대로 야유회를 갔는데 몇 잔의 술로 자제력을 잃고 푸른 잔디밭을 뒹굴며 울었다.
개관시인이 되어 주택을 갖게 되고 LA의 김영희 시인이 1990년 8월 범민족대회 북미주대표로 자기를 찾았을 때 가족이 그리워 울며 호소했던 것이 한겨레신문에 기고가 되어 그의 소식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제3국을 통해 시를 보내왔다.
늙지 마시라./ 더 늙지 마시라, 어머니여/ 세월아, 가지 말라/ 통일되어/ 우리 만나는 그날까지라도/ 이날까지 늙으신 것만도/ 이 가슴이 아픈데/ 세월아, 섰거라/ 통일되어/ 우리 만나는 그날까지라도/ 너 기어이 가야만 한다면/ 어머니 앞으로 흐르는 세월을/ 나에게 다오/ 내 어머니 몫까지/ 한 해에 두 살씩 먹으리/ 검은빛 한 오리 없이/ 내 백발 서둘러 온대도/ 어린 날의 그 때처럼 / 어머니 품에 얼굴을 묻을 수 있다면/ 그 다음엔/ 그 다음엔/ 내 죽어도 유한이 없으리니…
그러나 그렇게 그리워하던 어머니는 1995년 이산가족 재회 5년 전에 소천했다. 다음은 그가 또 보내온 시이다.
그날을 기다리다가, 기다리다가/ 더는 못 기다리셨습니까 어머니/ 그리워 눈물도 많이 흘리시어서/ 그리워 밤마다 뜬눈으로 새우시어서/ 꿈마다 대전에서 평양까지 오가시느라 몸이 지쳐서.../ 그래서 더 일찍 가셨습니까…
아, 사람들이 바라온 대로/ 죽어서 가는 다른 세상이 있고/ 어머니가 그 세상에서 다시 살게 되신다면/ 내 어머니 간 길을 찾아가리다/ 아이 적처럼 어머니 품에 기어이 안기고 싶어/ 눈물이 아니라 그 웃음을 보고 싶어.... / 그 세상엔 분계선이 없을 것 아닙니까/ 콩크리트 장벽도 없을 것 아닙니까…
우리는 어머니의 팔순잔치 때 가족사진과 아버지의 사진을 보냈더니 이산가족 만남 때, 사진 합성으로 팔순잔치 때 찍은 가족사진 대열에 자기의 사진을 넣고 또 가신 아버지의 사진을 넣어 돌판에 새겨 가져왔다. 그러면서 나에게 말했다. “이제 부모님이 다 가셨으니 형님이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입니다,” 나는 거기서 부모에 대한, 가족에 대한 순수한 사랑, 모든 것을 초월하는 사랑을 읽었다. 그러나 나는 이때 이 말이 내 심장을 찌르는 아픔을 느꼈다. 나는 신원조회 때 이북에 동생이 살아 있다는 것을 숨기려고 그를 실종 신고해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한 번 더 그를 만나 사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신 어머니가 “내 나이까지 두 살씩 먹지 말고 네 나이만큼 먹고 오래 건강해라.”고 하셨는데 모든 것을 초월하는 사랑 속에 어머니도, 그도 떠나고 말이 없다. 한편 남은 이상가족은 이념과 체제의 담을 지금도 극복할 수가 없다.
2018.05.05 한국장로신문 장로단상에 게재된 글임

첫댓글 찡합니다...
가슴 뭉클합니다...
가족이 함께 보여서 산다면 얼마나 행복 할까요
오장로님 께서도 자손들 위해서 더욱 강건 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