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더 오랜 역사를 지닌 구두,
그래서 새로울 것이 없어 보였던 구두에 내 마음대로 컬러를 입힐 수 있다면?
상상하는 대로 현실이 되는 커스텀 오더 서비스 체험기.
자타가 인정하는 슈어홀릭으로 계절마다 구입한 신발 개수가 두 자릿수를 넘지만, 지갑을 열게 만드는 건 늘 비슷비슷한 디자인이었다. 온갖 컬러의 앵클 스트랩 펌프스(물론 킬힐!)와 플랫폼 운동화는 셀 수 없이 반복적으로 구입한 반면, 클래식한 플랫은 단 한 켤레도 없었다. 평소 옷차림과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약간 노숙해 보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으니까. 하지만 작년 이맘때쯤 미국과 중국에서 시작된 페라가모 바라(Vara) 커스텀 오더 서비스가 한국에는 배송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얼마나 아쉬워했던지! 바라는 분명 클래식한 플랫이지만 소재와 컬러, 리본을 바꿔줌으로써 나만의 바라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 혹한 것이다. 특히 빳빳한 그로그랭 리본 장식, 페라가모 로고가 새겨진 반짝이는 메탈 버클의 유혹은 그만큼 강렬했다.
참고 기다리면 언젠가 이뤄진다고 했나? 드디어 한국에서도 커스텀 오더 서비스를 만나볼 수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름 하여 바라 탄생 35주년을 기념하는 ‘라이코나 페라가모(L’Icona Ferragamo)’ 프로젝트! 지난 78년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딸 피암마가 디자인한 이후 페라가모의 상징이 된 바라, 2007년 발레리나 플랫 형태로 재해석된 바리나가 그 대상이었다. 나는 벼르고 벼르던 일을 저지르기로 했다. 페라가모 청담 플래그십 스토어나 웹사이트(ferragamo.com)의 라이코나 전용 메뉴를 통해 주문하기로 마음먹은 것(주문은 온라인을 통해서만 이뤄진다). 먼저 알록달록하게 꾸민 웹사이트에 들어가 디자인을 골랐다. 키튼힐인 바라와 플랫인 바리나 중에선 망설임 없이 바라를 선택! 바리나는 지나치게 여성스러운 느낌인 데다 약간의 굽을 포기할 자신이 없었으므로. 다음은 소재를 고를 차례. 기존의 페이턴트 가죽뿐 아니라, 이번 시즌 추가된 트위드 소재가 눈에 띄었다. 보송보송하고 따뜻한 트위드 소재 바라라니! 생각만 해도 사랑스러울 것 같지만, 아무래도 바라는 반질반질한 페이턴트가 제격이라 페이턴트 가죽으로 결정했다.
다음은 가장 중요한 컬러 선택.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 하는 과정이다. 매 시즌 추가되는 컬러가 있는 반면, 감쪽같이 사라지는 컬러와 계속 유지되는 컬러도 있다고 하니, 이왕이면 이번 시즌이 아니면 구입하지 못하는 것 중에서 선택하고 싶었다. 한국 론칭을 맞아 새로 추가된 네 가지 컬러는 퍼플 · 로즈 · 그레이 · 블루진. 보라 혹은 분홍 구두를 신은 내 모습은 상상만 해도 발가락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어서, 그레이와 블루진을 후보에 올린 채 리본과 굽의 컬러를 고르기로 했다(리본과 굽은 반드시 한 세트, 즉 같은 컬러로 선택해야 한다). 웹사이트에선 다양한 컬러 조합으로 완성된 각각의 바라가 어떤 모습일지 시뮬레이션을 통해 보여주기에 굳이 머리를 굴려가며 상상력을 동원할 필요까진 없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각각의 신발 컬러에 선택할 수 있는 리본과 굽의 컬러가 다섯 가지로 제한된다는 사실. 페라가모 디자인 팀에서 “어떠한 경우에도 이러이러한 컬러 조합의 바라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라고 규정하는 조합은 애초에 선택이 불가능했다. 가령 그레이의 경우엔 검정 · 빨강 · 보라 · 흰색 · 실버, 블루진일 때는 빨강 · 분홍 · 주홍 · 흰색 · 실버 리본과 굽 중에 결정해야 한다. 그레이 바탕에 주홍 리본이 달린 바라는 존재할 수 없다는 뜻! 그런데도 선택 가능한 조합은 순열 조합으로 따졌을 때 백 가지 이상이다. 심사숙고 끝에 나는 결국 블루진과 메탈릭한 실버의 조합으로 결정했다. 메탈 구두와 가방이 런웨이를 점령한 최신 트렌드와 잘 맞는 데다 거울처럼 빛나는 굽이 신선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남은 단계는 비교적 수월했다. 리본 가운데 들어갈 버클 컬러? 골드와 실버 중 당연히 실버! 밑창에 붙어 있는 메탈 플레이트의 이니셜? 세 자리 알파벳만 가능하니 내 성을 따서 YIM! 마지막으로 사이즈를 고르고 가장 좁은 것(narrow)부터 가장 넓은 것(extrawide)까지 발볼의 4단계 중 하나를 고르면 끝! 그다음은 마우스만 클릭하면 모든 건 완료다. 남은 건 나만의 바라가 도착하기를 10주 동안 참을 인 자를 마음에 새기며 기다리는 일뿐. 어떤 옷차림에 어울릴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말이다. 얼마 전 파리에서 구입한 플리츠 원피스를 입고 생로랑 봄 컬렉션처럼 은색 양말과 바라를 매치하면? ‘블루진’이라는 신발 컬러 이름처럼 새파란 데님 스키니 진에 바라를 신으면? 참, 이 경우엔 당연히 맨발이다.
사실 꽤 오래전부터 나이키나 아디다스 같은 스포츠 브랜드들은 운동화를 컬러 블록으로 신을 수 있도록 하는 커스텀 서비스를 제공해왔다. 하지만 하이패션에서 이런 서비스를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 일이다. 미국의 니만 마커스 백화점에서는 ‘Make Your Own Manolo Blahnik’ 프로그램을 론칭, 마놀로 블라닉 펌프스를 다섯 가지 굽 높이와 스무 가지 색상 중에 선택해 원하는 대로 주문할 수 있게 했고, 홍콩에는 직접 그림을 그려 보여주면 똑같이 만들어주는 ‘치코 슈즈(Chiko Shoes)’라는 웹사이트가 인기다. 그런데 이제 클래식의 대명사 페라가모 바라와 바리나를 내 맘대로 디자인할 수 있다니. 그야말로 슈어홀릭의 상상이 현실이 되는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