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틱꽝득(베트남어: Thích Quảng Ðức/ 釋廣德, 1897년 ~ 1963년 6월 11일)은 베트남의 승려이다. 남베트남을 통치한 응오딘지엠(Ngô Đình Diệm)과 지주들은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가톨릭을 옹호하고 불교를 탄압하였다. 남베트남 정부의 불교 탄압정책에 항의하는 뜻으로 1963년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앞에서 분신 자살하였다. 틱꽝득의 분신자살광경은 베트남 국내와 뉴욕타임즈를 비롯한 각국의 언론에 보도되었는데, 화염 속에서도 전혀 표정의 일그러짐 없이 정좌자세로 조용히 죽음에 이르는 의젓한 모습은 많은 충격을 주었다.
한편 남베트남 대통령 응오딘지엠의 동생인 응오진누(Ngô Ðình Nhu)의 부인이자 가톨릭 신자인 마담 누(Madame Nhu, 응오딘지엠은 독신이었기 때문에 마담 누가 남 베트남의 실질적 영부인 구실을 했음)는 미국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틱꽝득의 죽음을 "땡중의 바베큐 쇼"라고 깔아뭉개는 망언을 하여 베트남 국민과 존 F. 케네디 당시 미국 대통령의 분노를 샀다. 이런 몰상식한 발언으로 마담 누는 "드레곤 레이디"라는 악명을 얻었다.
사건 뒤 틱꽝득 승려의 유해는 수습되어 화장되었다. 화장 중에도 틱꽝득의 심장은 손상되지 않은 채 멀쩡하게 남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슈트라우스 Richard (Georg) Strauss
1864년 6월 11일 태어남 / 1949년 9월 8일 죽음
슈트라우스, Max Liebermann이 그린 초상화(1918) |
슈트라우스는 20세기초 독일의 대표적인 작곡가이자 지휘자이다.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음악수업을 받았고, 뮌헨대학교에서 철학과 미학을 공부했다. 21세 때부터 마이닝겐·뮌헨·바이마르·베를린 등지의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능력을 인정받는 한편, 25세 때에는 교향시 <돈 주앙 Don Juan>으로 작곡가로서도 호평을 얻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로베르트 슈만, 뒤이어 리하르트 바그너와 요하네스 브람스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썼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1896, 니체의 작품에서 따옴)를 비롯한 교향시들은 현대 오케스트라의 표현적 가능성을 크게 확장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오스트리아의 시인 후고 폰 호프만스탈과 함께 작업한 <살로메 Salome>(1905)·<엘렉트라 Elektra>(1909) 등의 오페라들은 발표 당시 유럽의 가장 전위적인 작품들로 인식되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로 손꼽힌다. 나치와의 애매한 관계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심한 고초를 겪으며 망명 생활을 하다가,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났다. |
관련 인터넷 링크
[영어 사이트]
The Classical Music Pages는 슈트라우스의 생애 및 작품을 소개한다. Classical Net은 슈트라우스의 작품 세계를 소개한다. Classical MIDI에서도 슈트라우스의 작품들을 소개한다. 또 다른 슈트라우스 페이지에서도 슈트라우스의 전기, 작품목록, 해설, 음반소개, 링크 정보 등 다양한 자료를 제공한다.
변법자강운동 개혁안 채택
1898. 6. 11
장지동, 석판화 | 1898년 6월 11일 중국에서 일이난 변법자강운동의 일환으로 캉유웨이[康有爲]의 급진개혁안이 채택되었다. 당시 청나라는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로 정치·사회 제도의 서구식 개혁이 제기되었다. 캉유웨이와 장지동[張之洞]은 각각 급진 개혁과 보수 개혁의 입장에서 서구식 산업화를 추진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광서제는 캉유웨이가 제안한 개혁안 가운데 외국의 유익한 문물을 배우자는 안건을 우선적으로 채택했다. 이후 캉유웨이와 그의 제자 량치차오[梁啓超] 등이 고문으로 추대되어 사회 각 부문의 전면적 혁신이 이루어졌다. 이에 위협을 느낀 보수 특권층은 서태후를 중심으로 정변을 일으켜 개혁운동은 100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 |
관련 인터넷 링크
[한글 사이트]
한림대학교 표교열 교수는 근대 중국의 개혁과 혁명에서 변법자강운동을 소개한다.
[영어 사이트]
워싱턴주립대학교의 World Civilizations는 청조의 변법자강운동에 관한 자료를 보여준다.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학교 도서관은 캉유웨이의 시가 적힌 육필 원고 등의 이미지 자료를 제공한다.
갑오농민전쟁 중 전주화약 체결
1894. 6. 11
전봉준의 생가(전북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사적 제293호 | 1894년 6월 11일 갑오농민전쟁 중 농민군과 정부간에 휴전화약이 성립되었다. 그해 4월 전라도 무장면에서 시작된 농민봉기는 5월 31일 전주성 점령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양호초토사 홍계훈 지휘하의 정부군과 농민군 간의 공방전 속에 희생자가 늘어나자 정부는 청에 원병을 부탁했고, 이를 구실 삼아 일본군까지 상륙했다. 청·일의 개입으로 국제분쟁의 국면에 처하자 당황한 정부는 농민군을 회유했다. 농민군의 지휘자인 전봉준은 폐정개혁안을 제시하고 이를 받아들이면 해산하겠다고 했다. 결국 농민군의 제의가 받아들여져 전주화약이 성립됨으로써 제1차 농민전쟁은 종결되었다. 이후 농민군은 각지에 집강소를 설치해 폐정개혁을 시행했다. |
관련 인터넷 링크
[한글 사이트]
역사학연구소는 역사기행을 통해서 갑오농민전쟁과 전주화약의 역사 공간을 탐방한 기록 자료 제4회 역사기행 사전답사 기행문을 소개한다. 목포대학교 사학과 박찬승 교수의 박찬승의 한국근현대사연구실에서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 연구 자료 가운데 논문 <1894년 호남 남부지방의 농민전쟁>을 통해 전주화약과 집강소 설치 등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읽어 볼 수 있다. 천도교 홈페이지는 반봉건·반외세 운동인 갑오농민전쟁과 전주화약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한 갑오동학혁명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