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 오성산 의병장 최경운 나무
화순 만연산에서 흘러온 만연천과 삼천이 만든 삼천리(화순읍 상삼2길 31)의 의병청지(址)는 호남 의병군을 이끈 역사의 터이고 금산, 진주 전투 등의 승전 토대가 된 곳이다. 여기 의병청지는 해주 최씨인 최경운, 최경장, 최경회 삼 형제가 주역이다.
해주 최씨의 시조는 최온이다. 아들 최충(984~1068)은 고려 중서문하성의 수상직인 문하시중이었고 ‘9제학당’을 설립하여 공자에 견줄 만하다는 ‘해동공자’이다. 영암에 살던 15세손 최윤범이 화순에 승지공파 종가를 열었고, 손자인 최경운(?~1596), 최경장(1529~1601), 최경회(1532~1593) 삼 형제는 임진왜란의 의병장이자, 명장이다.
1592년 왜란에 삼 형제는 화순 삼천리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병사·전마·군량을 모았다. 최경운의 아들 최홍재(1560~1614)가 의병을 이끌고 고경명의 금산전투에 출병했다. 그러나 고경명이 전사한 뒤여서, 그의 부장 문흥원과 함께 화순 의병청으로 복귀했다.
이 뒤를 이어 의병장으로 추대된 최경회는 전북 장수로 출전해 왜군을 격퇴하고, 무주 우지치전투에서 도요토미히데요시의 부하 후꾸시마 마사나리를 활로 죽인 뒤 ‘언월도’를 전리품으로 얻었다. 이 언월도는 도요토미히데요시의 오동나무꽃 문장이 새겨진 보물급 칼이다. 또 이때 왜장의 품에서 공민왕이 그린 ‘청산백운도’와 ‘고려청자’까지 되찾았다.
그렇게 왜를 공포에 떨게 하던 최경회는 1593년 6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김천일, 황진, 고종후 등과 함께 9일 밤낮을 싸우다 순절하였다. 이때 최경회를 따라 종군하던 주논개는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남강으로 유인하여 투신 순절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에 선조는 최경장을 ‘계의병대장(繼義兵大將)’으로 임명하였다. 대장직을 이어받은 최경운은 5백여 의병을 이끌고 화순 오성산성에 진을 쳤다. 오성산성은 화순읍과 동면 경계 오성산(290.4m)의 태뫼식 산성이다. 능선이나 절벽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았고 성안 건물터에는 샘물이 있어 장기전을 벌일 수 있는 천혜의 요지였다. 또 이곳 정상 가까이의 굴은 동쪽의 서성제까지 뚫려 있었다.
그러니까 1597년 1월 15일, 1만4천5백여 왜군이 해협을 건너왔으니 정유재란이다. 이어 몰려온 왜군이 3월에는 부산, 기장, 울산을 점거하고 웅천, 김해, 진주, 사천 방면으로 진출하여 7월에는 전라도 해안에서 구례 남원으로 북상하였다. 이때 왜는 임진년보다 더 잔혹한 살육과 약탈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코를 베고 마을은 불을 질러 서 있는 것이 없게 하였다.
왜군이 화순을 짓밟은 것은 10월 중순쯤이다. 보성에서 오는 왜군은 능성현의 외곽성인 예성산성에서 김대인 장군이 막았으나, 승주에서 온 왜군은 동복현을 짓밟고 고개 넘어 화순현으로 밀려왔다.
이때 73세의 최경운은 고을 각처에 격문을 띄우고 식솔, 노비는 물론 향민 5백여 명과 함께 오성산성에 진지를 구축 왜군과 맞섰다. 마침내 10월 14일 왜군 3천여 명이 물밀 듯 몰려와 사흘여의 처절한 혈투 끝에 향민 2백여 명이 산화하였다. 최경운도 항복하면 살려주겠다는 왜장을 꾸짖다가 둘째 아들 홍수와 함께 순절하였다. 이 정유재란으로 화순현은 폐현, 능성현에 소속했다가 1611년(광해 3) 복현되었으니, 전쟁의 참화는 무어로도 비교할 수가 없다.
이곳 오성산성 정상에 이르면 화순읍이 보이고, 의병대장 최경운의 유허비를 세 그루 소나무가 지키고 있다. 정조 때 화순 현감 박명순이 그려 조정에 바친 오성산최경운전망유허도와 함께 그날을 잊지 않게 하니, 그저 고개 숙여 오늘의 우리가 있게 함을 고마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