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수필집 [신발은 말한다]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 ============
[신발은 말한다]
김금아 수필 / 도서출판 전망 / 서정시학(2012.05.30) / 값 10,000원
================= =================
신발은 말한다
김금아
사기로 만든 커다란 구두 한 짝을 신장 위에 올려놓았다. 화원 앞을 지나다 신발 모양으로 만든 분에 꽃을 담고 놓인 것을 사들고 온 것이다. 꽃을 담고 있는 게 아무래도 신발이 하는 일이 아니라서 그런지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아 빼버리고 신장 위에 두었다.
그 놈은 말없이 입만 벌리고 있다. 그것을 보면 고호의 구두를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투박하기도 하고 무겁게 보이기도 한 것이 고호의 그림 속 구두와 많이 닮았다. 또 약간 찌그러진 게 퍽이나 먼 길 걸어 온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드나들면서 그놈에게 눈길을 줄 때면 고호의 구두 그림을 동시 떠올리곤 한다.
반 고호의 그림 속 구두를 보면 고호를 보는 듯하다. 고호는 참 수줍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화가 쥘 브로통을 만나러 100㎞ 넘는 길을 걸어 문 앞까지 가서도 노크 한번 못해 보고 그냥 돌아왔다고 한다. 그의 구두 그림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그가 신었던 신발이 아닐까 추측을 한다고 한다. 나 역시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그림 중에 활활 타오르는 불화산을 내 품는 듯한 「까마귀 나는 밀밥」을 보나, 「자화상」을 보면 그 구두가 그때 그가 신은 구두일거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고호의 구두를 보고 있노라면 어두운 골목을 뚜벅뚜벅 걷는 고호의 쓸쓸한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그 구두를 신고 먼 밤길을 걸어왔을 고호를 연상해 본다. 돌아오면서 그는 말 한마다, 아니 노크조차 못 해보고 온 일을 두고 그의 남은 귀마저 잘라버리고 싶지 않았을까? 그러나 아닐지도 모른다. 말하지 않고 되돌아 왔기에 그의 그림은 보다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구두는 그때의 심정을 대변이라도 하듯 참으로 하고픈 말을 한마디도 못한 채 끈을 풀어 헤치고 지친 듯이 입을 헤벌쭉 벌리고 있다. 구두는 하고픈 말들을 다 담고 침묵하고 있지만 또한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시인이 내게 그랬다. 나 같은 사람은 배고픔을 몰라 좋은 글을 못쓴다고. 글이나 그림은 정말 이것 아니면 굶어 죽는다는 절박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글쓰기나 예술은 해도 그만 아니해도 그만인 마음으로 그냥 좋아서 한다고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절박함이 바로 코앞에 놓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피카소도 그랬고 베토벤 같은 거장도 그랬다. 고호 또한 너무도 배고파서 그림을 그려 팔지 않으면 굶어 죽게 되었을 때 많은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사람은 배고픈 것만큼 참기 힘든 일이 없다고 한다. 그런 고통은 외로움을 동반하기도 한다. 고호의 낡은 구두그림을 보면 바로 배고픔에서 묻어나는 외로움 같은 게 깊게 느껴진다.
언젠가 도로 위에 신발 한 짝이 차바퀴에 깔리면서 납작하게 엎어져 바닥을 하늘을 향해 누워 있는 것을 본 일이 있다. 신발이 차바퀴가 지날 때마다 마치 사람이 튕기듯 이리저리 튕기는 것을 보니 마치 사람이 그곳에서 차바퀴에 튕겨나간 듯한 마음이 들어 마음이 얼마나 언짢았는지 모른다. 그것은 신발이기 전에 사람을 연상케 하기도 했다.
신발은 신는 이와 함께하는 동반자다. 어디든 주인이 가는 곳에 주인을 담고 다닌다. 그것은 신발이기 전에 그 사람의 정신과 몸, 모든 것을 담는 그릇이기도 하다. 신발은 사람의 행위뿐 아니라 좋은 생각 나쁜 생각도 고스란히 담고 다닌다. 그러다 주인이 쉴 때 비로소 그도 쉰다. 그러나 주인이 쉰다고 해서 온전히 쉬는 게 아니다. 주인의 일상의 무게를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다. 신발 주인이 죽고 이 세상에 없어도 신발은 주인을 담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주인이 살았을 때 보다 더 생생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호의 그림 속 신발처럼.
신발은 수도 없이 참아온 말을 지금 하고 있다. 참으로 열심히 살았다고.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것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퍼내도 마를 줄 모르는 샘물처럼 오늘도 많은 신발들은 입을 열고 말을 하고 있다. 사는 일이 아름다운 것은 이처럼 철저히 밟히며 살아 왔기 때문이라고.
고호의 그림 속 구두는 고호의 신발이기도 하지만 내 신발이기도 하고 내 아버지의 구두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한 처절하게 질긴 목숨이기도 한 것이다.
현관문을 드나들며 신장 위에 놓인 사시구두를 보면서 나는 오늘도 얼마나 열심히 걸었는가, 노크도 한번 못 해보고 지나친 곳은 없는가 하고 나의 뒤를 돌아보기도 한다.♣
빗자루와 책
김금아
재래시장을 지나다 갈대로 뽑아 만든 방 빗자루가 눈에 띄었다. 손잡이에 볼록볼록하게 색실로 묶어져 있다. 아가의 색동저고리처럼 알록달록한 것이 유독 눈길을 끈다. 빗자루 파는 할머니는 도시락을 먹다 말고 나를 잡고는 햇갈대로 만든 것이니 하나 사 가란다. 별로 많이 쓰일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가끔은 빗자루도 쓰일 때가 있다 싶어 한 자루 샀다.
빗자루 끝이 푸름한 빛을 띠고 있는 게 부드럽다. 아직도 풋풋한 갈 냄새가 빗자루 끝에서 흘러온다. 갈대를 한 아름 안은 듯한 기분이 든다. 또한 어딘지 모를 넓은 갯벌에서 바람에 너울거리고 있을 갈잎의 고향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요즘 글을 쓰면서 느껴지는 그 아릿한 아픔 같은 것이 전해온다.
듣자니 빗자루 하나 만드는데 여간 손이 가는 게 아니란다. 아직 필 듯 말 듯 할 때를 잘 선별해야 하며 잘못 시기를 놓치면 좋은 빗자루를 만들 수가 없다고 한다. 갈밭을 헤집고 속대를 하나하나씩 뽑아 올린다고 한다. 행여 부서질까봐 속대들을 소금물에 담그기를 반복하여 그늘에서 말린다. 시일을 두고 부서지지 않을 즈음에야 그것들을 일일이 손으로 엮어냄으로써 비로소 한 자루의 빗자루가 탄생한다고 한다.
정말 여간 손이 가는 게 아닌 듯싶다. 하긴 보기에도 꽤나 공이 들어있어 보인다. 부챗살 마냥 가지런히 펼쳐진 것도 그렇고 마디마디 색실로 단정하게 묶어둔 것도 그렇다. 이렇게 공을 들여 만든 빗자루지만 청소기에 떠밀려 찾는 이도 적단다. 그러다 보니 가격도 정성과 노력만큼 제값을 못 받는다고 한다.
어쩜 글 쓰는 일도 그와 같지 않는가 싶다. 글 한편을 쓰기 위해 갈밭을 헤집고 속대를 뽑아 올리듯 글 하나 하나에 온 신경을 다 쏟아 넣는다. 쓰고 또 쓴 후 거듭거듭 헤집어 골라내고 다듬는다. 그런 연후에 책을 내어도 책 또한 그러한 수고만큼 인정도 못 받을 뿐만 아니라 돈도 안 되는 게 글이라고 한다.
요즘이 그렇다. 가까운 주위를 둘러봐도 책장을 집에 두고 있는 집이 거의 없다. 한때는 웬만한 집에서는 교양서적이라며 읽지는 않을지언정 장식용으로라도 거실 중앙에 책장이 버젓이 자리하고 있었던 때도 있었다. 어떤 집엔 책보다는 책장이 더 화려하기도 했으니까. 그러던 책장도 무슨 유행처럼 잠시 왔다가는 사라져 버리고 그 자리엔 대형 티브이가 자리하고 있다. 그나마 교육용으로 남겨놓던 백과사전이나 자료집도 컴퓨터로 이용하느라 없앤다고 한다.
서점도 마찬가지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동네에서도 더러 눈에 띄었지만 요즘은 서점 대신 곳곳에 피시방이 들어 앉아있다.
어쩌다 도서관에 가 봐도 마찬가지다. 공원에 위치한 도서관에 가보면 경관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맑은 공기와 넓고 아늑한 시설, 뿐만 아니라 조용하기도 이를 데가 없다. 하지만 그곳에서 책을 보는 사람은 몇 안 된다. 그러나 바로 밖 공원 주변에는 운동하러, 또는 등산하러 나온 사람들이 수도 없이 오가며 붐빈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마음이 허해도 책을 찾는 이는 거의 많지 않은 듯하다. 이래저래 대접 못 받기는 책도 빗자루 신세와 다를 바가 없지 않나.
난 요즘 빗자루를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고 그 녀석으로 방이며 거실을 쓸어 낸다. 쓰다 보니 빗자루도 참 괜찮은 것이다. 왱왱거리는 청소기보다는 우선 조용해서 좋다. 다소 손은 많이 가지만 앞 뒤 창문 활짝 열어놓고 빗자루로 썩썩 쓸라치면 청소기로는 볼 수 없었던 머리카락이며 잡다한 먼지가 어디서 끼어 있다가 이렇게 많이 나오나 싶게 육안으로 모두 보인다. 그걸 싹 쓸어내고 나면 마음까지도 개운해진다.
어릴 때였다.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열면 깨끗이 빗질한 마당에 밤새 이슬이 내려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슬을 잔뜩 머금은 빗자국에서 싸한 박하향 같은 찬 공기가 일어나 아침을 깨우는 것이었다.
저녁이 되면 종일 널어두었던 곡식이며 농기구도 깨끗이 치우고 제자리에 옮긴다. 그런 후 마당을 정갈하게 빗질하여 마감을 한다. 그 빗질은 내일을 열기 위한 준비이기도 하는 것이다. 빗자루는 하루를 열고 그 하루를 마감하는 문 같은 구실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책도 또한 그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을까. 캄캄한 마음속에 빛이 되어 삶의 길잡이 역할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내면의 거울이 되어 자신을 돌아보게도 한다. 때로는 한없이 넓은 꿈을 꾸게 하는 것도 책이 아닌가.
무엇보다도 책은 지루할 때 친구가 되어 주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누굴 진득하게 기다린다든가 또는 줄을 서서 느긋이 차례를 기다리는 성격이 못되는데도 책을 들고 있으면 그런 시간도 쉽게 보내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도 책이 무지하게 고맙다.
요즘은 책이 컴퓨터에 떠밀려 더욱 제 대접을 못 받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컴퓨터로 모든 것을 읽고 쓰고 다 처리한다 해도 내가 꼭 필요로 하는 책을 컴퓨터가 모두 보여주지 못한다. 또한 책을 편집해서 영상화해서 본다 해도 내가 책 속에 들어가서 맛보는 영상의 세계만큼 무궁무진하지 않을 것이다.
돈이 되지 않아도 빗자루를 찾아줄 그 한 사람을 위해 날마다 길에 나앉아 전을 벌인다고 하는 할머니마냥, 글을 쓰는 사람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몇 안 되는 그 독자와의 교감을 기대하며 오늘도 고된 길을 묵묵히 가고 있는 게 아닐까.♣
도리
김금아
한 동네 사는 친구가 며칠 전에 시어머님 상을 당했다. 함께 들여다보러 가기로 한 친구가 흰 치마를 입었기에 웬 흰 치마냐고 하니 상주 보러 가려고 챙겨 입었단다. 이어서 그녀의 시숙모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의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며칠 후 숙모님이 곱게 흰 한복을 입고 왔더라고 했다. 자리를 깔라고 해서 자리를 깔았더니 예를 갖춰 자기한테 큰절을 했었다고 한다. 초상 때 못 왔기 때문에 죽은 사람을 대신해 상주한테 절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절은 못해도 옷이라도 예를 갖춰 입고 가야 하지 않겠냐고 한다.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전통 예법에 그런 아름다운 예절도 있구나. 분명 손위 어른이지만 죽은 사람을 대접하여 조카며느리에게 예를 갖추는 일이 듣기만 해도 훈훈하다. 별로 힘든 일도 아니지만 몰라서도 못하고 알아도 귀찮고 번거로워 잘 하지 않는다.
장례를 치른 친구가 혼자 있을 줄 알았는데 남편도 있었다. 오일장을 치렀다며 친구 남편은 장례식 때의 이야기를 한다. 상여가 동네 앞을 지나며 돈을 받아내는 장면이며 다리 하나 건너면 또 안가고 밀고 당기며 상여꾼들이 노잣돈 받아내는 일이며, 그런 일이 참 보기 좋았다고 한다. 앞으로는 상여 매고 가는 장면들을 볼 수 없을 텐데 비디오라도 찍어 둘 걸 참 아쉬웠단다.
그는 자신의 어머님이 돌아가셨지만 어머님이 꽃상여를 타고 여러 사람의 배웅을 받고 가셨다는 게 마음이 즐거웠던지 전혀 상주의 애통함이란 엿보이지 않았다. 마치 무슨 잔치를 치른 듯한 표정으로 꽃상여 이야기를 여러 번 한다. 그의 밝은 표정 뒤에는 자식의 도리를 다했다는 만족함이 엿보였다.
그의 노모는 병원에서 1개월 쯤 입원했었단다. 그동안 친구 남편도 병원을 드나들며 어머님에게 자식의 도리를 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기에 가뿐한 마음으로 누구에게나 내 어머니는 이렇게 가셨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사람들은 흔히 자는 잠에 가듯이 가는 게 제일 좋은 죽음이라 생각하고 그러길 바란다. 그러나 자식 된 입장에선 또 다르다. 한 열흘쯤 입원할 정도로 아파서 자식들에게 간병이라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부모도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하나의 도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또한 임종 때도 그냥 잠결에 가지 말고 자식들 앞에서 인사라도 나누며 마지막까지 자식이 보는 앞에서 눈을 감는다면 그보다 더 마음 편한 일이 없을 것이다. 한마디 말도 없이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죽어 버린다면 그보다 더 허망한 일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죽음이란 어디 인력으로 되는 건가?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생사문제다 보니 그런 부모님의 임종을 본다는 것도 자식으로선 가장 복된 일이 될 것이다.
몇 해 전에 돌아가신 어머님이 생각난다. 어머님은 막내며느린 나와 함께 살았다. 돌아가실 때쯤 큰댁에 가시지 않겠냐고 권해도 마다 하셨다. 결국 내가 어머님 임종을 보게 되었다. 평소처럼 아침식사 하시고 목욕하고 속옷과 겉옷 자리까지 새것으로 깔아서 어머니를 뉘었다. 곁에서 베갯잇 갈아 끼우고 있을 때 숨을 모으셨다. 그냥 잠 오는 사람처럼 순한 눈으로 문 쪽을 잠시 응시하다 가셨다. 그런 측면에선 나는 복이 있는 자식임에 틀림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절대 효부는 아니다. 내가 자식의 도리를 했다면 좋든 싫든 끝까지 함께 했다는 것 밖에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며느리였다. 그러나 어머님이 나를 효부로 만들어 주신 셈이다. 즉 어머님이 내게 마지막까지 부모의 도리를 다 해주신 거다. 그랬기에 지금도 그때 이야기 할 땐 기분이 좋을 것이리라.
도리란 어느 한쪽이 잘 이행한다해서 되는 게 아닌 것 같다. 줄을 당기듯 양쪽에서 서로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적당한 당김을 주고받는 줄다리기와 같은 것, 부모도 자식에게 자식의 도리를 할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고 자식도 부모에게 부모의 도리를 받을 수 있는 자리를 비워주어야 한다. 즉 부모의 도리가 자식의 도리가 되고 자식의 도리가 부모의 도리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 씀씀이가 바로 우리의 예절이며 또 사람의 도리이며 나아가 완숙한 인간관계가 이루어지게 되는 게 아닐까?♣
얼음새(복수초)
김금아
늦은 저녁 마트에 가는 길목에서다. 왠 여자가 토악질을 하며 흐느끼고 있다. 그 곁에 남자도 함께 쭈그리고 앉아 있다. 물건을 사고 나오는데도 여전히 그 자리에 반쯤 엉덩이가 드러나 보이도록 옷매무새를 흩어 놓고 서로 껴안고 있다. 남자는 여자의 등을 토닥거리고 여자는 남자의 품에 쿡 고개를 처박고 사람이 오가는 길목에서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다. 명절 대목이라 많은 사람이 지나며 멈칫 돌아본다. 그들은 사람의 눈길은 개의치 않는 듯 꼭 부둥켜안고 있다. 보기가 민망해진다. 저쪽 넓은 주차장이나 어디 구석진 곳으로 가서 저럴 일이지 하는 맘이 들게 한다.
돌아오면서도 여러 가지 상상들이 내 발걸음 옮길 때마다 따라붙는다. 왜 저러고 있을까? 여자는 작은 체구라 혹 아이인가 싶어보니 아이 얼굴은 아니다. 실성한 여자는 아닌 듯한데 하는 짓은 정상적인 행위가 아닌 것이다. 혹 그렇다면 불륜의 관계일까. 보아하니 남자는 젊고 핸섬하다. 여자를 껴안고 등을 토닥거리는 폼이 보통 정감 있는 사이는 아닌 듯싶다.
목성균님의 <어름새>란 수필이 떠올려진다. 어름새란 눈밭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꽃의 이름이라고 한다. 박 중사가 그의 실성한 아내를 데리고 다니면서 언덕 아래서 볕살을 쪼이면서 아내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고 한다. 이북이 고향인 그는 전쟁 때 실성한 여자를 사랑하여 고향도 버리고 사상도 버리고 그 여자를 동냥해서 먹이며 다녔다고 한다. 추운 겨울엔 밭두렁이나 담벼락 같은 볕살 좋은 곳에 앉아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아내를 끌어안고 토닥이는 모습이 어느 영화의 장면보다 아름다웠다고 했다. 엄동설한, 서로의 체온으로 겨울나기를 하는 그들을 목성균 선생은 어름새란 꽃으로 비유했다.
그들의 모습도 언뜻 그런 생각을 연상케도 한다. 그러나 어름새꽃과는 너무 먼 광경이다. 못 먹는 술을 마셨는지 옷매무새를 다 풀어 놓고 토악질하는 것이나 남편은 아닌 듯한 남자 품에서 무슨 설움이 많은지 사람들도 의식 않고 부둥켜안고 저리 애절히 안고 있는 것이 그리 아름답게는 안 보인다. 그러나 한편 생각으로는 뜨거운 사랑 속에 차디찬 현실을 안고 몸부림치는 어쩜 음 속의 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요즘같이 불륜도 불륜이 아닌 것처럼 당당해지는 이들을 볼 때면 몸부림치듯 하는 그 울음이 그나마 아름답게 상상되기도 한다. 눈물엔 어떤 경위든 거짓은 없는 것이다. 울음 속엔 알 수는 없지만 아픔이 동반되는 것이다. 내일 추석 명절인데 집에 가서 차례 준비도 해야 하며 아이들 먹일 음식 준비도 해야 하련만 그럴 수 없는 곡절이 필경 있을지도 모른다.
명절은 그와 비슷한 곡절이 있는 이들에겐 곤욕스러운 날일 수도 있다. 분주한 명절일수록 외로움을 절실히 맛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평상시에는 별일 아니게 무디게 지나던 일도 오늘 같은 명절엔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할 수 없는 아픔이 너무 크게 와 닿아 술을 마시고 울음으로 토악질이라도 하고 싶을 것이다. 아니면 서글픔을 잊고자 술을 먹고 술 힘으로라도 껑충 이 명절을 건너뛰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철학자는 불륜을 가장 아프면서도 달콤한 사랑이라고 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고통스러울지라도 그와 같이 달콤한 사랑을 맛보고 싶지 않을까. 다만 도덕이란 봉지로 그런 마음을 감추고 있을 뿐이다.
어떤 노 시인이 그랬다. 가을에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면 미치도록 시가 고프고 사랑이 고파진다고. 늙은 것은 서럽지 않으나 사랑을 할 수 없는 것이 더 서글프다고 했다. 시인들에겐 그 달콤한 고통의 소리가 속 깊은 곳에서 수시로 소리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일을 덤벙 뛰어들기는 더더욱 어렵고 힘든 일이 된다. 그것은 자기를 온전히 열어놓고 사랑이란 감정에 맡겨 거기에 흘러가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그게 얼마나 큰 고통이 수반되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그런 축면에서 보면 불륜으로 고통 받는 여자가 어쩌면 용기 있다고 할 법도 하다. 실성한 여자를 안고도 행복했던 박 중사 못지않게 오열하는 여자를 보듬어 안고 등을 토닥거리는 저들이 세상에 가장 고통스러우면서도 달콤한 사랑을 나누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름새란 가장 추운 눈밭에서만 피는 꽃이라서 아름답다고 한다. 불륜 또한 얼음꽃 같이 가장 고통스런 오열을 동반하는 것이기에 달콤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와 같은 사랑은 내가 하면 로맨스지만 남이 하면 불륜이 되는 것도 눈밭에 꽃이 피는 것 같은 이율배반이 따르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꽃은 아름다운 것이다. 동지섣달 얼음 밭에 피어도 꽃은 아름다운 것이다. 불륜 또한 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당사자들에겐 눈밭의 꽃처럼 애틋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성경에서는 창녀를 향해 돌을 던지는 사람을 두고 누구든지 죄 없는 자 있거든 나와 돌을 던지라고 했다. 마음으로 죄를 지어도 죄 된다고 했다. 우는 저 연인을 두고 누가 돌팔매질할 수 있겠는가.♣
평형
김금아
여행에서 찍은 사진을 현상해 와서 본다. 나는 사진마다 웃고 있다. 그러고 보면 여행 내내 즐겁고 행복했던 모양이다. 여행에서 맛보는 낯선 호기심으로 자연의 장관을 볼 때 나는 환성을 떨어뜨려놓고 있다. 무엇이든지 손에 잡으면 다 가질 수 있는, 근심 걱정 없는 아이 같은 활발함이 사진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사진이 그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남편의 사진을 보니 하나같이 그늘이 있고 쓸쓸해 보인다. 억지로 미소를 보여도 그 안에는 쓸쓸함이 너무나 크게 담겨져 있다. 웃고 있는 내가 무색할 만큼 아픔이 담겨 있다. 내가 평소에 느낀 것보다 몇 배나 크게 와 닿는다.
그는 사진 속에서도 많이 늙어 있었다. 그동안 하던 일이 실패하여 가산을 다 날려버렸을 때, 또 내가 돌아다니며 차사고를 내어 그를 정신없게 했던 일 등이 고스란히 자국으로 남아있다. 그의 얼굴 구석구석 나의 과거가 고스란히 담겨있어 마치 지나간 필름을 보는 것 같다.
역설적으로 지금 나는 그의 얼굴에서 내 모습을 보고 있고 내 얼굴에서 그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두 가지 정서, 즉 연민과 고통의 감정이 있다고 한다. 이 두 가지 감정을 환기시켜 순화된 체험에서 기쁨은 아픔에서 맛보고 아픔은 기쁨에서 맛본다고 한다. 나는 지금 그런 아픔을 웃고 있는 얼굴에서 맛보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웃을 때마다 나의 아픔 하나가 또 저 사진 속으로 고스란히 각인될 것이다. 웃음 또한 무지한 고통의 이면임을 알게 된 것이다.
사람마다 손바닥처럼 양면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나의 한쪽 면은 남편의 저 얼굴이 아닌가 싶다. 손바닥을 보고 있다하여 손의 전부가 아니라 뒷면도 손의 일부이듯 둘이 하나이면서 각기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손바닥과 손등처럼 떼어 놓으려 해도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이기에 일심동체란 말을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나는 아마 손등에 속할 것이다. 손바닥은 무엇인가 잡고 일을 하기도 하고 늘 폈다 오무렸다 하는 동안 손등은 그냥 손바닥이 하는 대로 따라 움직일 뿐이다. 그렇다고 손등이 손바닥을 보듬어주고 쓰다듬어 주지도 않는다. 그런 일은 손바닥이 한다. 그와 같이 손바닥이 손등을 어루만져주듯 그이는 늘 내게 주며 베푸는 쪽이다.
그런다고 그인들 어찌 내가 마냥 좋기만 할까. 남편은 나를 유리컵 같다고 했다. 들고 있자니 팔 아프고 놓자니 깨어질 것 같다고 나를 놓아버리고 싶은 때가 무수히 많았을 것이다.
평형은 혼자서는 절대 평형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기운 한쪽을 위해 높은 한쪽이 내려와야 한다. 그의 얼굴에 담겨진 쓸쓸한 그늘을 나의 이 밝은 얼굴로 되돌려 주어 평형을 이루어 주어야 할 텐데 나는 아직도 그 방법을 잘 모른다.
그러나 ‘평행’보다는 ‘평형’이 부부로 살아가는데 좋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평행은 둘이 나란히 걸어가지만 그 종착지에서는 결국 하나가 되지 못하고 각기 저 혼자 가는 길이 된다. 요즘은 남녀평등이라 해서 두 사람이 서로 평행을 가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모자라서 그런지 그 평행보다는 시소 타듯 기우는 쪽에서 또 높은 쪽을 향해 오르락내리락하며 평형을 향해 가는 삶이 더 좋다는 생각도 해본다.
오르거니 내리거니 하며 서로 모자라는 곳을 메워 나가면서, 어느 한 쪽은 피곤하고 고단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도 어쩌면 내 즐거워하는 모습에서 만족함을 얻는지도 모른다는 억지도 써본다. 파도가 바람에 굽이를 높이지만 언제나 하나가 되어 움직이듯 나 또한 그런 평형을 이루며 살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그러나 착각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남편에게
“나는 다시 태어나도 또 당신하고 살 거야.”
했더니, 그는
“나는 아니야. 이젠 쉬고 싶어.”
라고 했다. 그땐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그 말이 새삼 쏴하고 바람을 일으키며 내 가슴을 후비고 든다.
사람이 미울 땐 그와 좋았던 때를 생각하면서 미운 감정을 다스린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힘들고 고단해도 좋았던 때를 기억하고 그 때의 끈을 잡고 나를 놓지 않고 버티고 있었을 것이다.
유달영 님은 사람의 일생은 기쁨과 슬픔을 경유하여 짜가는 한 조각의 비단조각 같다고 했다. 그렇다. 그이의 고단함과 내 철들 줄 모르는 막무가내가 여전히 우리 둘 사이에 놓여 있지만, 그는 지금도 명주실보다 더 질기고 견고한 베를 짜고 있는지 모른다. 내 모자람이 어쩌면 그의 생에 무늬가 되어 더욱 예쁜 옷감 같은 삶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하는 억지 같은 위안을 스스로 해본다.♣
•▩•
=================
■ 책을 내면서
석양이 숲에 가려있던 나무 밑둥치마저 다 드러내어 보이듯
내 밑둥치를 드러내어 보인다.
바람에 치마가 휙 뒤집히는 기분이랄까?
이런 내 모습이 부끄럽지만 또 한편 홀가분한 느낌도 든다.
떨어지는 햇빛을 보듬는 해거름처럼
한 걸은 뒤로 물러서서 수필집을 세상에 놓아본다.
2012년 5월
•▩•
=============== == = == ===============
◆ 표사의 글 ◆
고흐의 그림 속 구두는 고흐의 신발이기도 하지만 내 신발이기도하고 내 아버지의 구두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한 처절하게 질긴 목숨이기도 한 것이다.
현관문을 드나들며 신장 위에 놓인 사기구두를 보면서 나는 오늘도 얼마나 열심히 걸었는가, 노크도 한번 못 해보고 지나친 곳은 없는가 하고 나의 뒤를 돌아보기도 한다.
― 「신발은 말한다」중에서
좋은 집이란 자연과 잘 어울려 그 자체가 자연이 될 때 좋은 집이며 좋은 예술품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내 마음 안에 내 고향집이 최고의 예술 작품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도 바로 그것이 자연이며 또 그 자연의 정서가 나를 키워냈기 때문이리라.
― 「집」중에서
나는 길커피 같은 여자가 되고 싶다. 추운 날 길을 가다 마시는 따끈한 한 잔의 커피처럼 누군가의 가슴을 따뜻이 데워줄 수 있는 커피 같은 여자, 앞치마를 두른 채 만나도 부담 없는 이웃 같은 그런 여자, 그러나 마음뿐이지 그렇게는 안 되고 있지만 그래도 커피 맛을 즐길 줄 아는, 정말 커피 같은 여자랄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자화자찬을 해본다.
― 「커피 같은 여자」중에서
•▩•
=================
▶김금아 시인•수필가∥
∙울산 울주에서 태어났다.
∙한국방송통신대학 국문과를 졸업하였고,
∙2001년《에세이 문학》과《경남신문》신춘문예에 당선,
∙2008년《시문학》우수상으로 등단하였다.
∙현재 현대시인협회, 부산문인협회, 크리스천 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나는 흰벽이다』(문학의 전당)가 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