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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상 4:9~10)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해서
그들이 자기의 신을 '하나님'이라고 했다고 알면
오산이다. 그때 당시는 그냥 무속이다.
성경을 번역하면서 그 신을 하나님이라고 번역했다.
보통 저 시대는 '하늘의 신' 이라고 했다.
대표적으로 창조주신을
이스라엘은 '여호와' 라고 부르고
기독교는 '하나님' 이라고 부르고
천주교는 '하느님' 이라고 부르고
이슬람은 '알라' 라고 부르고
각 부족마다 자기들의 신 이름이 있을 뿐이다.
https://namu.wiki/w/%EC%9C%A0%EB%8C%80%EA%B5%90
창조주 신 한분 놓고 많은 인간들이 이렇게
종교적으로 여러갈래로 갈라져서 헤매는 것은
인간들이 창조주신에 대하여 자기들만의 견해로
종교화 하고 율법화 하고 신학화 했기 때문이다.
창조주 신 한분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 쉽다.
쉬운길을 인간들은 멀리 멀리 돌아서 싸우면서
전쟁하면서 죽이면서 죽으면서 가고들 있다.
그래도 할 수 없다. 인간은 시청각교육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도 '천지신명(天地神明)'께 기도를 드렸다.
없는 사람들은 '정한수' 한 그릇이라도 떠 놓고.
하늘의 신을 '하나님'이라고 안 부르면
큰일날 것 같아도 그건 기독교의 생각이고
하늘의 신은 이름이 무한하다시피 많으시다.
그냥 I am who I am 이시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신 이시다.
성경을 읽을 때는 지금 기독교의 안경을 쓰고 읽으면
오해가 발생한다. 그 시대의 안경을 쓰고 읽어야 한다.
야베스의 기도는 유명하다. 기독교인이 좋아한다.
이 글귀를 가져다가 기도문으로 써먹기도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야베스가 저렇게 기도하니
램프의 요정이 '기도대로 팅~' 해줬다는 것이
아니다.
야베스가 그냥 저냥 살다가 저런 멋있는 기도를
드리고 창조주신의 "ok" 싸인을 받은 것이 아니다.
"너 참 기도 유창하고 멋있게 잘하는구나!"
하고 주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보통 보면 유창하게 기도를 잘하면
"기도를 참 잘하십니다"라고 칭찬하는데
그런 기도와 주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나의 남편도 "기도를 참 잘하십니다.
은혜스럽습니다. 좋습니다" 라는 소리
여러번 들어봤다.
하지만 그런 기도와 주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욥 35:6) "그대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그대의 악행이 가득한들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욥 35:7)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나의 남편도 예전에 이 기도문을 좋아해서
야베스의 복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 많이 했다.
자신의 출생과 처지를 생각하면 지금 자신은
나름대로 야베스의 복을 받았다고 말한다.
야베스의 기도와 야베스의 복이 어떤 것인지
'속성'을 잘 알아야 한다.
역대상 4장에 보면 유다의 아들이라고 소개하면서
베레스-헤스론-갈미-훌-소발 이라고 한다.
이것은 아들뿐 아니라 손자까지다.
성경을 찾으면서 작성한 도표지만 남의나라
저 시대의 족보를 작성하는건 쉽지 않다.
유다의 아들들은 베레스와 헤스론과 갈미와 훌과 소발이라
소발의 아들 르아야는 야핫을 낳고 야핫은 아후매와 라핫을
낳았으니 이는 소라 사람의 종족이며
에담 조상의 자손들은 이스르엘과 이스마와 잇바스와
그들의 매제 하술렐보니와 그돌의 아버지 브누엘과
후사의 아버지 에셀이니 이는 다 베들레헴의 아버지
에브라다의 맏아들 훌의 소생이며
드고아의 아버지 아스훌의 두 아내는 헬라와 나아라라
나아라는 그에게 아훗삼과 헤벨과 데므니와
하아하스다리를 낳아 주었으니 이는 나아라의 소생이요
헬라의 아들들은 세렛과 이소할과 에드난이며
고스는 아눕과 소베바와 하룸의 아들 아하헬 종족들을
낳았으며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저렇게 성경을 쓴 것인지 번역을 저렇게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말이 제대로 이어지질 않으니 우리는
알 길이 없다.
형제라는 것인지 자식이라는 것인지 손주라는 것인지.
저 도표가 맞는지 틀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남의 족보는 우리가 신경쓸 일이 아니다.
굳이 신경써야 한다면 야베스나 해당된다.
야베스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는 모른다. 하지만 성경에 쓰여있다는 것은
'속성'도 있다는 것이다.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는 보통 엄마들이 애기를
낳을 때 힘들게 낳는다. 그런데 굳이 '내가' 라는
말을 넣은 것은 돕는 자가 없이 혼자 힘들게 낳았다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런 것은 굳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굳이 신경써야 하는 것이라면 저렇게 내가 힘들게
수고롭게 나은 야베스 엄마가 해당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과거에는 밭일하다가 들에서
애를 낳은 엄마들도 많다. 고생고생 했다.
저 시대는 저 나라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고생을 할 때이다. 전쟁이라는 환난도 많았고.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는 것도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어떻게 귀중한 것인지 모른다.
굳이 신경써야 하는 것이라면 형제 중에
존귀한 자라는 야베스가 해당되는 것이다.
문제는 "나로 환난을 벗어나"와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다.
야베스의 기도를 보면 야베스는 굉장히 힘들게
살았던 것 같다. 자기의 삶을 '환난'과 '근심속'
이라고 표현 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아무런 고생이 없이 그냥 복이 내게 오고
근심도 없어지게 해달라고 하는데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은 '창조주께서 공짜가 없으시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내 것이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요.
누가 나한테 빌려주었느냐?
내 것을 가지고 내 맘대로 한다"
하시는 분이지만 편벽되이 행하시지 않고
공의로우시다고 했다. 공평하시다.
(요한계시록 19:7~8)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 이로다"
'행함'을 보시고 복을 주시고 징계를 주시지,
신 자체를 믿기만 한다고 복을 마구 마구 주시는
분이 아니다.
손을 싹싹 빌고 절도 하면서
제사를 천번 만번 드려도 소용 없다.
그런 되도않는 믿음과 제사와 기도에
휘둘리시는 신이 아니시다.
욥기에서 잘 설명해주시고 계시다.
보통 야베스의 기도를 말하기를 '기도의 大家'로서
기도를 멋있게 한 기도로 풀이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도 그런 기도를 드려야 하는 것처럼.
야베스는 환난을 심하게 당한 사람이고
근심 속에 산 사람이다.
아파 본 사람이 아픈 것을 알고 배고파본 사람이
배고픈 것을 안다. 환난을 당해본 사람이 환난이라는
것을 안다. 근심 속에 있어본 사람이 근심이 무엇인지
안다.
야베스는 '환난'이라는 것을 당해봤기 때문에
환난이 어떤 것인지 안다는 것이다.
근심 속에 살았기 때문에 근심이 무엇인지 안다.
인간은 시청각 교육이 필요한 자들로
무언가를 당해보지 않으면 잘 모른다.
인생에 있어서 '환난'이라는 것이 어떤 정도의 삶일까?
돈이 좀 없고 배좀 고프고 조금 아프고 그 정도일까?
아니면 전쟁통일까?
우리집 같은 경우도 보통 모자라게 살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산다고 해서
'환난'이라고 표현하진 않는다.
그 옛날에는 허구헌날 전쟁에 지금보다 살기 힘들었을텐데
야베스는 어느 정도로 환난 속에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욥'의 인생을 볼 때 '환난'이라고
표현해도 될것 같다.
가축들이 죽고 종들이 죽고, 자녀 10명이 태풍 속에서
집이 무너져 죽고, 욥의 몸이 피부병으로 죽을만큼
아팠을때 이 정도면 '환난' 이라고 해도 되겠다.
이런 환난을 겪고 죄값을 털고 개과천선한 욥이 다시는
눈물 흘리는 일 없이 뜨거운 기운으로 상함도 없이
두배의 축복을 받고 평안한 삶을 살다 죽는다.
욥과 세 어르신과 엘리후의 논쟁이 '니가 죄를 지었으니
하늘의 신께 이렇게 징계를 당한다'고 하는 것이다.
(예레미야 2:19)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냥 징계가 왔다고 하면 하늘의 신은 기분파이며
사탄에게 휘둘리는 신이며 전지전능하지 않고
공의롭지 않다. 정의도 없다.
https://cafe.daum.net/mizzkwon/Lvwv/42
창조주신께서는 인생들에게 환난을 겪을 거 겪고
근심 속에 살면서 죄값이 상계되고 복을 받을 만한
상황이 됐을 때 저런 기도를 시키시고 복을 주시는
것이지 그냥 기도한다고 마구 주시지 않으신다.
이제 때가 됐으니 그의 지역을 넓혀주시고
주의 도우심을 계속 받아 환난을 벗어나고
근심이 없게 되는 삶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똑 같은 것이 아니다. 아주 다양하다.
하지만 야베스와 비슷한 상황 속에서 비슷한 복을 받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야베스 같은 환난과 근심 속에 산 사람들이
창조주신의 징계의 시간 끝에 저런 기도를
시키시고 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창조주신은 '선의 값' '죄의 값'을 항상 계산하신다.
그리고도 복을 받을 만할 때에 그에게 합당한
내용으로 마음에 소원을 두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시고, 입으로 시인하게 하시고
복을 주시는 것이다.
그냥 저냥 종교생활하면서 저런 멋있는 기도를
한다고 해서 야베스의 기도대로 되지 않는다.
https://cafe.daum.net/mizzkwon/KdtU/209
그 유명한 14만4천명 안에 들어가야 한다고들
난리를 치는데 14만4천명 인침에 대한 '속성'을
알면 그런 소리 못한다.
야베스가 아닌 종교인이나 일반인들은 그냥 자기의
삶을 살면서 내 마음에 소원이 어떤 것인지 알아가면서
자기 형편에 맞는 기도를 드리면서 살면 되는 것이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그것도 자기에게 맞는 꿈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어떤 원대하게 이룬 다른 사람의 꿈이
내가 원한다고 해서 나에게도 적용되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의 꿈이 있고 나의 꿈이 있고 너의 꿈이 있다.
지역의 꿈도 있고 학교의 꿈도 있고 직장의 꿈도
있고 기관의 꿈도 있고 단체의 꿈도 있고
도시의 꿈도 있고 나라의 꿈도 있다.
비슷할 수도 있지만 다 다르다.
성경에 있는 내용들을 가져다고 큐티하고 베껴쓰고
붙들고 기도 드리고 하는 것이야 본인들 마음이겠지만
그 '속성'을 잘 알고 해야 한다.
음식점을 차리고 제일 좋아하는 귀절이
'처음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같은데
이 글귀만 액자에 넣고 걸어놓는다고 복이
창대하게 굴러오는 것이 아니다.
이 글귀의 속성은 '네가 청결하고 정직하면' 이다.
"네가 청결하고 정직하면 처음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게 되리라"
다니엘이 21일만에 기도응답을 받았다고
'다니엘의 21일 특별새벽기도'를 드린다든지
하는 것은 '속성'이 다르기 때문에 별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https://cafe.daum.net/mizzkwon/KdtU/200
성경에 있는 기적적인 내용들을 따라한다고
해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성경을 테스트
하면 안 된다. 그런 기적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속성'이 있다.
▲아브라함의 이삭 바침을 따라하면 자식새끼
다 죽인다.
▲뱀에게 물렸다고 놋뱀을 만들어 쳐다봐라
다 죽는다.
▲다니엘의 풀무불을 따라 하면 타 죽는다.
▲사도바울의 뱀에 물려도 죽지 않는 것을
따라 하면 죽는다.
▲뜨거운 불에 손을 넣고 타나 안타나 시험하면
타기밖에 더 없다.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는다고 마시면
다 죽는다.
▲귀신을 쫓아내면 오히려 이단 소리 듣는다.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는다고 낫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있으려나 베드로나 바울처럼.
이외에도 성경을 찾아보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목숨을 걸고 사투를 벌이는 상황에선
성경을 몰라도 성경 속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
성경을 관리하시는 창조주신의 뜻에 의하여.
https://cafe.daum.net/mizzkwon/KdtU/183
'북한 점장이'와 '구름기둥' 코너에 창조주신의 역사하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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