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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장은 찢어져 있는가? |
한세희 |
[성서본문 - 마태복음 27:50~52, 마태복음 25:26~30]
얼마 전 새로 나오신 어느 교우님에게 왜 새길교회를 선택하셨냐고 물었더니 “평신도교회이기 때문”이라고 한 마디로 명쾌하게 답하시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저도 그분과 같은 생각으로 새길교회를 선택했습니다.
예수님이 2천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시작하신 일이 바로 평신도운동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평신도교회, 그리고 평신도운동이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저는 사람들이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해져서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습니다.
구글(한글)에서 “평신도교회”와 “평신도운동”이라는 주제로 검색을 해 보니까, 각각 133,000개와 47,300개, 합쳐서 무려 18만3백 개의 자료가 떴습니다.
비교해 보기 위해, 기독교계 내부에서 관심사항으로 떠오른 다른 주제들, 예를 들면 교회일치운동, 십일조, 교회세습, 예배선택권, 독립교회 등으로 검색을 해 보았지만 어느 것들도 이런 정도의 결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게 나왔습니다. (800개~26,000개 범위였습니다.)
“평신도교회와 평신도운동”은 이 시대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대단한 관심사이고 핵심주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길교회는 “평신도교회” 검색결과 중 12위에 올라 있었습니다.
새길교회를 제외한, 최상위 20개 정도씩을 훑어 보았더니 대체로 두 가지 유형의 교회들로 압축되었습니다.
하나는 교회의 우산 아래 가정교회나 셀교회 같은 조직을 활성화시켜 평신도들을 목회자에 준하는 역할로 격상시키고 있다는 교회들이었습니다.
“평신도들을 훈련시켜 전문목회자들의 조력자로 길러서 목회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키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또 다른 종류의 교회들은, “지금은 평신도교회가 아니지만 한 때 평신도교회로 시작하였거나 역사적으로 평신도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는 교회들이었습니다.
불과 몇 십 년 전까지 평신도교회였다고 구체적인 숫자를 제시하는 교회도 있었지만, 몇 백 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가서, 18세기에 감리교 창립자인 존 웨슬리가 벌였던 평신도운동이나 13세기 가톨릭의 성 프란치스코 평신도운동을 역사적 뿌리로 내세우는 교회들도 있었습니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의식한 듯, “목회자가 없이는 교회 자체가 성립될 수 없으므로”라는 표현도 눈에 띄었고, “예수님도 사제였지 평신도가 아니었다”는 표현도 보입니다.
양쪽 모두의 글에서 “전문목회자”라는 표현을 자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현실 인식에는 “목회자는 전문가이고 평신도는 비전문가”라는 기본적 가설이 확고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개중에는 세간에 잘 알려진 대형교회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강력한 권력집중 하에서 온갖 비리와 세습 문제로 구설수에 오르곤 하는 교회들과 그 관련조직들입니다. 제가 여기서 얻은 그들의 공통적 메시지는 이렇습니다.
“평신도교회라는 것은 단지 이상향일 뿐, 실제로 실행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한 때 이상에 불탔던 교회들이 현실에 적응하며 전통적인 교회로 이전해 가는 하나의 과도기현상이거나 전통적인 교회를 좀 더 진보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노력하는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자료의 상위 목록에서는 빠졌지만, 거의 문자적으로 “평신도 순혈주의” 전통을 지키는 다른 교회들이 있습니다.
18세기 이후 유럽에서 초대교회의 회복과 평신도주의를 천명하며 창설된 몇몇 교단들인데, 한국에도 일부 전파되어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 중 한 교회의 신도로부터 그곳의 상황에 대해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원래의 원칙이 많이 훼손된 것 같았습니다.
단지 전통적인 개신교 교회의 직제와 용어만 쓰지 않을 뿐, 실제로는 새로운 이름을 붙인 전문적 종교지도자들을 세우고, 자체 내의 양성기관을 세워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이분법적 구분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평신도교회를 표방하는 교회와 그렇지 않은 교회 간의 차이가 갈수록 불분명해지고 있는 세태에 비추어, 평신도교회와 평신도운동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생애와 말씀에 비추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를 되새겨 보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의미 있는 경험이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그들이 섬겨야 할 백성들에게 특권적인 권력을 휘두르며 공의와 사랑에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불의를 폭로하셨고, 그들의 미움을 받아 온갖 수모와 고난을 받으신 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며 숨을 거두신 직후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그분께서 평생 이루고자 하셨던 일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 휘장은 성전 안의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은 장벽입니다.
성소는 일반인의 출입이 가능한 곳이고, 지성소는 아주 특별한 종교지도자만이, 그것도 1년에 한 번만 들어갈 수 있는, 가장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거기서는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여 그분의 뜻을 들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의 말은 성역이 되어 버렸습니다.
진리 자체에 부여되어야 할 권위가 그 매개체인 사람에게 넘어가면서 진리의 왜곡이 일어났습니다.
그뿐 아니라, 휘장은 또 다른 휘장을 낳으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다양한 미신적 장벽들로 번져 나갔습니다.
성전이라는 특별한 장소에 가야만 속죄를 받을 수 있다는 믿음, 시간의 7분의 1과 소유의 10분의 1은 하느님의 것이라는 믿음,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특별한 전문가에 의존해야 한다는 믿음 등은 모두 다 잘못된 믿음이었습니다.
어느 한 부분에 집중된 거룩함은, 그 부분적인 충족만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느끼게 해서, 나머지 부분의 “거룩하지 않음”에 면죄부를 주게 되고, 영적 무책임과 타락을 정당화시켜 결국은 영적 죽음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 그리고 부활은 한 마디로 이 절대적 권위의 휘장을 찢어 버림으로써, 죽어 있는 인류의 영적 생명을 되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오늘의 마태복음 본문에는 휘장이 찢어진 직후 무덤이 열리고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휘장과 생명 간의 연관성을 생생하게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절대적인 권위를 부리며 사람들을 기만해 오던 휘장이 예수님의 희생을 통하여 찢어져 버렸습니다.
하느님의 영역과 사람의 영역, 거룩한 영역과 세속적 영역이 이제는 하나가 되어 완벽한 소통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휘장은 사라지지 않았고, 역사를 통틀어 반복적으로 되살아나며 강력한 힘을 발휘하곤 했습니다.
휘장은 악착같은 복원력을 갖고 있는 가시덩굴과도 같습니다.
적당한 온도와 습도를 만나면 금세 자라나 칸막이를 칩니다.
처음에는 편의상의 임시 칸막이지만 조금 지나면 정식 건물이 되고, 마침내 아무 것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는 철벽이 되어 버립니다.
예수님이 힘들여 허물어 놓으신 안식일 역시 주일성수라는 이름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청지기 정신의 자리에는 십일조 중심의 기복신앙이 당당하게 되돌아 와 있습니다.
우리 몸이 곧 거룩한 성전이라는 진리의 자리에는, 교회당을 노아의 방주처럼 여기는 성전숭배주의에 가려져 버렸습니다.
학문의 휘장, 신분의 휘장도 이러한 방식으로 되돌아왔습니다.
하느님을 더 잘 알고 그분과 더 깊이 교제하기를 원하여 모인 교우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럽게도, 하느님을 더 잘 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권위를 갖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는 뭇 학문 중에서도 오직 하느님을 탐구하는 학문만이 더욱 거룩하게 여겨지면서,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신학이라는 이름의 휘장이 복원됩니다.
그리고, 힘이 한 군데 모이면서 그 구심점에서의 거리에 따라 계층구조가 형성되고 그 암묵적인 위치에 따라 발언권에 차등이 생깁니다.
똑 같은 내용을 어떤 사람이 말하면 미덕이고 다른 사람이 말하면 악덕이 되는 현상이 생깁니다.
발언권을 가진 소수 앞에 다수는 침묵하게 되고, 자신의 암묵적인 위치에 따라 허용되는 행동범위를 벗어날 경우 암암리에 처벌이 따릅니다.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자유로운 나눔은 사라지고, 일방적인 세뇌와 굴종, 그리고 두려움이 지배하게 됩니다.
휘장은 무성하게 자라나 벌집처럼 칸막이를 만들고 그 차갑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영적 생명력은 고사하고 부패와 죄악이 기승을 부립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 허물었던 그 휘장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강력한 힘을 갖고 복원되어 버리는 것일까요?
마치 시지프스의 저주처럼, 찢어도 찢어도 다시금 붙어 버리는 악착 같은 휘장의 복원력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저는 우리 모두 익히 알고 있는 달란트의 비유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다른 종들이 그것을 투자하여 활발히 불리고 있을 때,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그것을 땅에 묻은 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냅니다.
주인이 돌아와 그에게 이렇게 저주합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서,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가진 사람에게는 더 주어서 넘치게 하고, 갖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있는 것마저 빼앗을 것이다.
이 쓸모 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 (마태25:26~30)
우리를 하느님의 모습을 닮도록 빚으신 하느님은 당신과 우리가 서로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누구에게나 하느님과 직접 대화할 수 있는 교신채널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최소한 한 달란트 이상의 영적 기능을 받은 종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단 내 쪽에서 그것을 사용하기 시작하면 주인이 반드시 그 결과에도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신뢰를 갖지 못하고, 또한 나보다 더 달란트를 많이 받은 것 같은 종 앞에서 기가 죽어 버려 그만 이 달란트를 땅에 묻어 버립니다.
그리고는 “나는 달란트가 없어” 하며 자신의 교신채널을 닫아 버립니다.
그런 후 하느님 대신 다른 종의 채널에 주파수를 맞춥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무거운 영혼을 전문가 집단에게 넘겨 주고 한 발 물러서서 구경꾼이 됩니다.
비전문가로 자처하게 되면서, 잠들어 있던 우리의 영적 기능은 더욱 퇴화하게 됩니다.
소위 전문가로 인정받은 사람들 역시 직업적 의무감과 도전받지 않는 권위 속에서 형식적인 종교 기술자로 전락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사람이 많아질수록 전문가와 비전문가 사이에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어 점점 골이 깊어집니다.
스스로를 비전문가로 격하시킨 사람들은 용하다는 전문가, 명성 있는 전문가에게 몰려 들고, 한 명 혹은 소수의 우상 앞에 자신의 운명을 맡긴 무수한 군중들 중 한 명이 되고 맙니다.
이와 같이, 영적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구분은 쌍방의 영혼이 함께 죽음으로 치닫는 공멸의 지름길입니다.
휘장의 왕성한 복원력은 바로 이와 같이 우리의 영적 게으름 속에서, 그리고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는 악함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우리 자신들이 바로 그 에너지의 공급원인 것입니다.
우리가 먹여 기른 그 휘장은 하느님이신 빛을 차단하여 우리를 악이 창궐하는 어둠 속으로 내쫓아 버립니다.
그리고는 우리로 하여금 그 어둠 속에서 불의에 떨며 저주의 이를 갈게 만들고 맙니다.
교회사를 보면 이러한 일이 극에 달할 때마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휘장에 저항하는 평신도운동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중세 가톨릭 체제 하에서도 수도원 중심으로 다양한 평신도운동이 일어나고 있었고, 막강한 가톨릭의 교황과 사제들의 권력에 맞서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가 만인사제설을 주창한 것 역시 평신도의 위상을 되돌리려는, 휘장을 찢는 행위였습니다.
또한, 18세기 영국의 국교회 안에서 평신도 중심의 신도회 조직으로 시작된 존 웨슬리의 초기 감리교회는 대표적인 평신도운동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사제 중심의 전통을 굳게 지키고 있던 국교회에서 평신도, 특히 여성 평신도에게까지 설교권을 주고 조직의 지도자로 임명하여 전면에 내세운 것은 획기적인 모험이었습니다.
개신교의 다양한 평신도운동은 교회 안에서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쳤고 사람들의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지난 20여 년간 세계 여러 나라의 문화적 가치를 측정하고 분석한 World Values Survey의 자료에 의하면, 가톨릭 문화권의 나라들에 비해 개신교 문화권의 나라들에서 자기표현이 휠씬 더 활발했고, 행복지수와 신뢰지수가 현격하게 높았습니다.
가톨릭 문화권은 프랑스, 벨기에, 이태리와 같은 선진국조차 소득수준의 향상과 상관없이 낮은 사회적 신뢰도를 유지하고 있는 데 반해, 개신교 문화권에서는 소득수준이 올라갈수록 사회적 신뢰도가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개신교 문화권과 가톨릭 문화권 사이의 이러한 문화적 차이와 삶의 질의 차이는 종교개혁 이후 과거 500년 간 일어난 평신도운동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휘장을 찢기 위한 시도가 더 많이 이루어진 개신교 문화권에서는 사람들 간의 소통과 나눔이 더 활발해지고, 그에 따라 서로간의 신뢰가 깊어지고 보다 투명한 사회를 이루게 되어 행복을 증진시키는 현상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같은 선상에서, 오늘의 우리 평신도운동 역시 우리 후손들의 문화와 삶의 질의 향방과 결코 무관치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룬 공동체입니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 휘장이 있거나 복원된다면, 그 모임의 제도, 의식, 관행 등은 자연스럽게 휘장을 강화시키고 복원하는 쪽으로 움직일 것입니다.
그리고 공동체 내에서의 관행, 의식, 제도적 장치들은 또다시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의 마음 속에서 휘장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여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일단 관성이 생긴 후에는 점점 가속도가 붙게 될 것입니다.
교회 내에서 그 정당성을 입증한 휘장은 이제 자신만만하게 우리의 가정과 학교와 직장에서, 그리고 사회정의를 위해 앞장서 싸우는 사회운동단체에서조차 힘을 얻으며 차별적 세계관을 확대해 갈 것입니다.
이렇듯 교회의 휘장 문제는 단지 교회 내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가정과 사회와 국가,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전체를 어떻게 영위해야 하는가?” 라는 보다 광범위한 문제입니다.
휘장은 우리 사회의 세계관을 결정짓는 근본적인 요소입니다.
우리가 깨어 경계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악하고 게으른 본성 때문에, 각자의 달란트를 땅에 묻은 채 두 손을 놓고 휘장의 복원을 환영하려는 성향을 우리 모두가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느 정도 교회의 규모가 커지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효율을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공동체로서의 기능을 감당하기 위한 최소한의 보조적 기능과 장치가 필요한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문가와 비전문가를 가르는 휘장으로 작용하거나 그렇게 인식되기 시작할 때, 우리는 50년, 100년 혹은 200년 후의 우리 후손들에게 우리가 원치 않았던 모습의 교회와 또한 그런 교회가 영향을 끼쳐 형성할, 원치 않는 사회를 물려주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떨칠 수 없습니다.
인터넷 검색에서 본 바와 같이, 평신도교회를 선택한 새길의 앞길에는 아무런 성공의 보장도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우리 선배들의 실패의 잔해만이 음산하게 나뒹굴고 있을 뿐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한국의 모든 교인들보다 더 험난하고 가파른, 가장 비좁은 길을 선택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택한 새 길은 잠시도 한눈을 팔 수 없는 험난한 벼랑길이고, 각자가 자기 영혼의 전문가가 되어 전적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는 가시밭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휘장은 찢어져 있는가?” 라는 물음을 우리에게 던지고 계십니다.
2천년 전 지도자와 백성, 로마와 식민지, 유대인과 이방인, 부자와 가난한 자, 주인과 종,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 남성과 여성 등의 사이에 가로놓였던 휘장들에 대해 물으셨던 것과 똑같이, 미국과 그 적대세력, 선진국과 후진국, 북한과 남한,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기득권층과 소외계층 사이에 놓인 오늘날의 휘장들에 대해서도 묻고 계십니다.
눈에 보이는 큰 휘장뿐 아니라, 잘 보이지 않는 작은 휘장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묻고 계십니다.
우리가 표방한 것과 실제 행동 사이의 미세한 휘장들, 우리가 자매, 형제들과의 사이에, 그리고 우리의 마음 속에 쳐 놓은 휘장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묻고 계십니다.
“휘장은 찢어져 있는가?”
* 이 말씀증거는 지난 2006년 1월 29일 새길교회 주일예배에서 행해졌습니다.
필자 한세희님은 벨기에에서 15년을 살며 다양한 문화의 차이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현재 미국 컨설팅회사인ITAP International 아-태 사장으로 일하면서, 문화의 장벽을 허물고 조직의 역량을 향상시키는 일을 돕고 있다.
평신도들의 신앙자립과 평신도교회의 성장에 기여할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