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젠은 푸저우(福州)와 젠저우(建州)의 앞글자를 따와 만들어진 지명인데, 간칭으로는 ‘민’이라고 합니다. 문(門) 가운데 충이 있는 게 독특합니다. 여기서 충은 벌레가 아니라 뱀으로서 뱀을 토템으로 하는 토착민들을 지칭하는 글자였습니다. 벌레로 파자(破字)를 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고대 중원에서 장강(長江) 이남 사람을 남쪽의 버러지란 뜻의 ‘남만(南蠻)’으로 지칭한 것이 연상되는데, 비칭의 뉘앙스가 느껴집니다.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충은 뱀이 아니라 용(龍)이었다는 억지스러운 주장도 있습니다. 어쨌든 한번 만들어진 문자 언어는 쉽사리 바뀌지는 않습니다.
성 같은 집
푸젠성은 베이징에서 더 멉니다. 상하이에서 해안선을 따라 직선으로 해도 470㎞는 떨어져 있습니다. 산이 높고 많은 탓에 백성들의 살림집 역시 상당히 달라집니다. 집의 몸체가 커져 3층 구조에 연면적이 990여㎡(약 300평)씩 되고, 내부는 많은 방으로 나뉘어 있는 대택(大宅)이 대표적입니다. 심지어 한 마을이 성채와 같은 거대한 집 한 채를 짓고 수십 가구 내지 백여 가구씩 모여 사는, 원형의 신비한 토루(土樓)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번에는 푸젠성의 대택부터 여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기후도 영향이 있습니다. 가을에도 비오는 날이 많아서 농사 활동을 최대한 집안으로 끌어들이고, 습기가 많고 더위가 심해 천장을 높인 것 역시 집의 몸체가 커진 요인이 됐습니다.
건축 공간의 분화는 필요에 따라 두 가지 방향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단일 건물의 내부 공간을 구획해 나가는 실(室)의 분화이고, 다른 하나는 별도의 건물을 지어 병립시키거나 연결해 나가는 채(棟)의 분화입니다. 우리의 전통 살림집에서 안채·사랑채·창고 등으로 나뉜 것은 채의 분화이고, 안채가 안방과 부엌과 마루와 건넌방으로 나뉜 것은 실의 분화인 셈이지요. 실 분화가 심한 푸젠성 대택을 처음 마주하게 되면 방과 복도가 중첩되어 어리둥절하고, 왜 이렇게 지었을까 의문이 듭니다. 그러나 차분히 들여다보면 이런 집 역시 그곳에 살던 조상들의 경험과 지혜가 누적된 것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큰 지붕 중심으로 작은 지붕들
실제로 이 마을에 들어서면 집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선뜻 이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우선 불꽃같기도 하고 왕관 같기도 한 독특한 모양의 외벽에 창문이 하나도 없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높은 기와지붕이 좌우로 교차하는 것에서 몸체가 크다는 것을 쉽게 느낍니다. 집 가운데 들어서면 훤칠한 기둥이 높은 천장을 지탱하고 있고 그 중앙에 조상의 신위가 모셔져 있는 것도 인상적입니다. 내부는 3층 구조를 갖고 있어 대지가 20×30m 정도인데도 살림집 연면적은 1322㎡(약400평) 정도나 됩니다. 중국 건축학자들이 ‘대택’이라는 단순한 용어로 규정한 게 이해가 갑니다.
조감도를 보면 대택의 구조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중간에는 크고 널찍하며 높은 기와지붕이 자리 잡고 그 주변에 나지막한 기와지붕이 바싹 달라붙어 직사각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형태입니다. 지붕이 독립적이라 몇 채가 모여 있는 것 같지만, 지붕 아래의 몸체는 하나인 것이 바로 대택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지붕이 아래위로 겹쳐지는 형태가 된 것이지요.
중간의 큰 지붕 앞뒤로는 하늘을 향해 열린 천정(天井)이 있습니다. 채광과 통풍을 위해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대택의 구조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가운데의 청당(廳堂) 공간과 좌우의 차간(次間) 벽이 있습니다. 청당은 태사벽(太師壁)을 중심으로 전당과 후당으로 나뉩니다. 전당은 조상의 신위를 모시는 곳으로 집안의 경조사를 포함한 의례가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2층까지 7m 정도 높이의 탁 트인 공간을 갖고 있습니다. 신위와 제물을 올리는 공탁(供卓)과 기탁(機卓), 그 앞에 정사각형의 팔선탁(八仙卓)이 있습니다. 유교적 도덕률이 가득 찬 느낌입니다. 좌우 기둥에 붙어있는 대련(對聯·문이나 기둥에 써붙이는 대구)에도 보국·효순·화목 등 유교적 덕목을 강조하는 내용들이 가득합니다.
실내에서 농사일
청당 좌우의 공간은 중축선 다음 칸이란 뜻으로 차간(次間)이라 하는데, 차간 역시 청당과 마찬가지로 전후로 나눠 모두 네 개의 침실이 됩니다. 조상을 모시고 가족들이 잠자는 공간이 중앙에 모여 있는 구조입니다. 후당의 뒤쪽 후천정에는 조벽(照壁)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 앞에 분재나 식재를 하여 조용한 후원의 느낌이 납니다. 조벽 뒤로는 자연스레 회랑이 형성되는데 도회랑(倒回廊)이라고 하고 한쪽으로는 뒤로 나가는 문이 있습니다.
좌우의 지붕 아래는 안쪽으로는 초간(梢間), 바깥쪽으로는 하간(廈間)이라 하는데, 모두 전·중·후 세 개로 나뉩니다. 초간에는 차간의 방을 통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방도 있습니다. 하간은 대문을 들어와 전천정을 지나면서 청당 앞에서 좌우로 들어가서 다시 하간 복도를 지나면 식당과 주방으로 이어지는데, 이 동선이 가장 자유롭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공간입니다. 하간의 가운데 칸은 서청(書廳) 또는 하객청(廈客廳)이라고 하는데 마실을 오가는 이웃 아주머니라면 주로 하객청에서 안주인과 한담이나 간식을 함께하곤 합니다. 이에 비해 의례를 갖추는 손님은 하객청이 아니라 청당의 전당에서 맞이하게 되지요.
2층은 하간과 주방에서 층계로 이어집니다. 전당과 천정에는 2층이 없고, 나머지 2층 공간은 식량창고와 작업공간이 됩니다. 이 지역은 가을철에도 비 오는 날이 많아 곡식을 말리고 터는 농사일을 전부 실내로 들여온 것입니다. 탈곡기는 물론이고 돌절구, 맷돌 등도 2층에 설치돼 있고, 술 담그는 기구나 모시 짜는 기계 등도 2층에 설치되지요.
3층은 가운데 지붕 바로 아래 공간인데, 그리 크지 않습니다. 대개 목재를 비롯한 잡다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공간입니다.
전체적으로 중축선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의 구조인데, 분가하는 경우 주택은 그대로 두고 좌우로 나눠 쓰기만 하면 되는 구조입니다.
대택에서는 외벽도 흥미롭습니다. 두툼하게 흙을 다지거나 자갈을 섞어서 기와지붕보다 높게 세워 바닷바람을 막아주고 화재를 차단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지붕 위로 솟은 모양이 불꽃처럼 보이기도 하고 왕관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봉화창(封火墻)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는 부녀자의 젖가슴을 닮았다 하여 관음두(觀音兜) 또는 흉두(胸兜)라고도 합니다. 중국의 저명한 건축학자가 “여성 억압의 유습이 강했던 휘파건축과 비교해서, 이 대택의 관음두라는 말에는 여성의 노동 참여가 적절하게 반영됐기 때문에 다른 지역의 여성보다 높았던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전쟁과 약탈의 역사
사람 사는 곳에서는 사람과 물자가 유통이 되어야만 합니다. 경제적 유통을 강제로 막거나 유통의 불균형이 심해지면 물자가 부족한 측에서 강제적 유통을 도발하게 되는데, 전쟁과 약탈이 바로 그것이지요. 왜구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가 됩니다. 원(元)나라와 고려가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정벌에 실패한 후 해상교역이 막혔을 때 왜구가 심해졌고, 명(明)나라 영락제가 해금정책을 시행하자 다시 해적 떼가 격화되었습니다. 이것을 각각 전기 왜구, 후기 왜구라고 하는데, 전기 왜구는 실제 일본인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진왜(眞倭)’라 하고, 후기 왜구는 영락제에 저항하는 다수의 중국 남방인들과 소수의 왜인 해적들이 결합한 무장집단이라 ‘가왜(假倭)’라고 합니다.
푸젠성은 송·원대 때 이미 해상 실크로드의 주요한 무대였는데 영락제가 해상교역을 봉쇄하자 푸젠의 많은 수공업자·조선업자·상인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왜구 해적집단과 연계하여 반란과 약탈의 길로 나선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후기 왜구는 일본인보다 중국인이 더 많았고 그 발생 원인도 중국에 있는 것이니 왜구라는 말이 적확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중국의 정책 실패와 그에 대한 반란과 약탈을 바깥으로 돌린 기만적 용어가 됐습니다.
대택을 돌아보고 나오면서 소통과 억압 그리고 왜구라는 단어의 행간에 숨어있는 역사를 잠시 생각했습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잘못된 용어로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 것은 없을까, 이웃과 문화적 교류와 경제적 유통은 잘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것들 말입니다.
1960년생. 성균관대 사회학과 졸업. 방송위원회 비서실장, m.net 편성국장, 팍스넷 부사장, 팍스인슈 대표 역임. 현 중국 인문 다큐멘터리 전문제작사 와이더스케이프 대표. 다큐멘터리 ‘인문기행 중국’ ‘삼국지 기행’ ‘북방 대기행’ ‘동티벳 다큐’ 기획, 제작. 주간조선에 ‘중국 음식기행’ 연재. 중국 여행기인 ‘왕초일기’ 블로그에 연재. 2006년 이후 총 70여회 중국 여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