닛코 여행5 - 닛코 도쇼구에서 인내의 화신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생각하다!
2022년 11월 6일 도치기현 닛코 (栃木県 日光)에 도착해 버스를 타고 교외에 기리후리노
타키 (霧降ノ滝) 에 가서 폭포를 보고 다시 도부 닛코역에 내려 시내 버스를
갈아타고 7~8 분을 달려서는 신쿄 (神橋 신교) 라는 다리를 건너 “西參道
(서참도)” 에 내려서는 지하도로 해서 올라와 계단을 올라가니 넒은 참배도로 가 보입니다.
참배로 오른쪽에는 일광산 윤왕사 (日光山 輪王寺) 절인데 금칠을 해서 화려한데다가 마침 단풍이 고우며
참배로는 엄청난 구름같은 인파가 밀려나오며 또 인파가 들어가는데.... 1603년에 에도 도쿠가와
막부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 의 사당인 도쇼구 (東照宮 동조궁) 에 온 사람들로 참배로는 미어 터집니다.
1,300엔 입장권을 사서 높은 계단을 올라가니 신사에는 수많으 인파로 붐비는 가운데 전각들은
금칠을 한지라 번쩍거리는 모습을 보는데 여기 도쇼구 東照宮(동조궁) 는 일본을 통일하고....
1603년에 에도 막부를 세운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니....
1616년 이에야스가 죽자 닛코(日光) 에 웅장한 동조궁을 건조하고 유골을 안장하였습니다.
그러고는 봄과 가을에 열리는 축제에서 사용되는 마구나 의상류가 보관되어 있는 ‘산진코(三神庫)’ 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서서 쳐다보며 사진을 찍는 곳이 보이니 이른바 저 유명한 "세 마리 원숭이" 그림 인가요?
“가미진코(上神庫)” 지붕 밑에는 ‘상상의 코끼리’ 조각이 장식되어 있고 맞은편에 있는 “신큐샤(神厩舎)”
의 지붕 밑에 있는 ‘세 마리 원숭이 조각’ 은 「어릴 때는 나쁜 것은 보지 않는다 · 말하지 않는다 ·
듣지 않는다」 라는 가르침을 표현한 ‘미자루 · 이와자루 · 기카자루 ’ 라는 관용구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 는 이에야스의 정실 쓰키야마도노와 적자 노부야스 가 다케다 가문과 내통한 혐의가
있다고 자결 시키도록 명하는데, 도쿠가와 노부야스의 처는 오다 노부나가의 딸인 도쿠히메
였다는데 시어머니 쓰키야마도노와 사이가 나빴고 부부 사이도 좋지 않았으니 밀고를 한 것입니다.
도쿠가와 가문의 중신들은 굴욕적 이라며 반발했지만 이에야스는 숙고 끝에 받아들여 아내와
아들을 죽여서 노부나가와의 동맹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는 그가 참지못할 수모를 참고
또 참으며 때를 기다리는 인내심이 강한 것이니 속에는 구렁이가 들어앉아 있다고 할 것입니다.
1467년 아시카가 막부에서 쇼군 계승을 두고 내란이 벌어져 10년간 교토에서 싸우면서 도시가 불바다가
되었지만 승부가 갈리지 않으니 고쿠닌(國人) 들은 보상을 받지못해 지방으로 귀향해 자립하는데,
일본은 200여개의 나라 로 갈라져 이웃 나라를 집어삼키고자 밤낮으로 싸우니 센고쿠(戰國) 시대 입니다.
미카와 (아이치현 동부)의 소영주인 마쓰다이라(松平 송평) 가문의 7대 당주이자 이에야스의 조부 마쓰다이라
키요야스 는 10여차례 전투에 승리해 미카와국을 통일했으나 가신 아베에게 암살되고 오와리국(나고야)
의 오다씨와 스루가국 (駿河國 준하국) 이마카와씨 양쪽에서 시달리던 이에야스는 6살에 인질 로 잡혀 갑니다.
그후 스루가와 도토미 2국의 영주인 이마가와 요시모토 는 교토로 상경해 일본을 통치할 야망을 품고 1560년
6월 2만 5천 대군을 이끌고 오와리국 (尾張国, 나고야)으로 침공할 때 마쓰다이라 모토야스 松平元康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선봉장으로, 노부나가는 이마가와군 6천이 오케하자마(桶狹間) 계곡에 머문다는
정보에 6월 12일 1천으로 기습해 이마카와 요시모토가 전사 하니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미카와로 돌아 옵니다.
1578년 에치고(니가타) 의 우에스기 겐신이 죽자 후계자 상속으로 우에스기 가문에 내분이
발생하자 다케다 가쓰요리 는 호조 가문과 적대적인 우에스기 가게카쓰를 지지했기
때문에 군사동맹이 깨지자.... 이에야스는 1579년 재빨리 호조 가문과 동맹 을 체결합니다!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은후 도토미를 차지한후 성을 쌓으니 하마마쓰(浜松 빈송) 로, 신겐
에게는 패했으나 병사 하자 한숨 돌린후.... 아들 가쓰요리가 1만 5천 기마군단을 이끌고 미카와 동부를
침공하자 8천으로 노부나가 3만과 함께 나가시노 전투 에서 다케다군 기마대를 섬멸하는 대승을 거둡니다.
1581년 이에야스는 다카텐진성을 탈환 하여 가쓰요리를 압박하다가 이듬해 3월 가이국 노부나가의
총공격이 실시되니 이에야스도 다케다 공략을 맡아 슨푸성(시즈오카) 을 함락하고 고후로
진격해 가쓰요리가 자결하여 다케다 가문은 멸망하는지라 이후 스루가(시즈오카) 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후 오다 노부나가 가 교토로 상경할 때는 동맹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협력했으니.... 오다
노부나가가 비와호수 오미국의 아사이씨 그리고 에치젠(후쿠이)의 아사쿠라씨 그리고
교토 승려들과 싸울때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군대를 이끌고 참전해 동맹 관계 를 굳건히 합니다.
1570년 6월 28일 도쿠가와는 오다군과 2만 8000명 병사를 이끌고 비와호수 오다니성 小谷城(소곡성)
에 도착하자 성주 아사이는 아사쿠라와 연합해 18,000여명의 군대가 결집하니 오다는 양동작전
을 펴서 支城(지성)인 요코야마성 橫山城 을 포위 공격해 아사이· 아사쿠라 연합군을 끌어내니....
아사쿠라와 도쿠가와가 맞붙고 오다군과 아사이씨가 격돌하니 처절한 아네가와 전투 姉川戰鬪 입니다.
아사이군 선봉 이소노 가즈마사 가 오다군을 쳐부수는 대활약을 하는 가운데 혼다 타다카츠가 이끄는
도쿠가와군은 병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아사쿠라군의 공격을 버텨낸후 도쿠가와군의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돌격해 아사쿠라군을 패퇴 시키고 열세로 밀리던 오다군에 가세해 아사이군을 물리칩니다.
교토와 중부지방을 점령해 일본을 거진 통일한 오다 노부나가는 북쪽 에치젠(후쿠이)에는 시바타 가쓰이에를
보내고 서쪽 효고현에는 히데요시를 보냈으니 아케치 미쓰히데를 오카야마의 다카마쓰성을 공격하던
히데요시에게 원군으로 보냈으나 아케치가 모반해 교토 혼노지에 머물던 오다 노부나가를 기습해 죽입니다.
교토에 남겨둔 첩자로 부터 정보를 입수한 히데요시 는 급히 다카마쓰성을 쳐서 항복을 받은후 바로 병사들을
돌려서 급속 행군으로 교토로 돌아와 아케치 미쓰히데군을 격파 하고 오다 진영에서 주도권을 잡으니
권력 투쟁이 벌어져 에치젠의 시바타 가쓰이에를 공격해 죽이고는 중부 일본을 통일해 일본을 손에 넣습니다.
이후 도쿠가와 는 죽은 오다 노부나가의 둘째아들 노부카쓰와 연합해 1584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군
과 전쟁 을 벌여 고마키, 나가쿠테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노부카쓰가 히데요시의 위세에 눌려
강화하는 바람에 명분이 없는데다가..... 히데요시의 군세가 워낙 강하다 보니 타협 을 하기에 이릅니다.
이에야스는 장남이 죽었으니 후계자인 차남 오기마루가 히데요시의 양자(인질) 로 들어가는 조건
으로 히데요시와 강화 를 맺었는데도 이에야스가 쉽게 복종하지 않자 히데요시는 동생
아사히히메를 이에야스와 결혼 시켰지만 그래도 이에야스는 복속을 표시하러 상경하지 않습니다.
초조해진 히데요시는 자신의 어머니를 시집간 딸인 아사히히메 방문 을 구실로 내세워 사실상
인질로서 오카자키로 보냈으니.... 이에야스를 얻기위한 히데요시 식의 “삼고초려” 라
이에 몸값을 높인 이에야스는 상경하여 오사카 성에서 히데요시를 만나 신하의 예 를 표합니다.
이에야스는 하마마쓰에서 스루가국 슨푸로 거성을 옮기고 기존의 미카와국(아이치현 동부) 에다 도토미
·스루가 · 가이 · 시나노 5개국 150만석 에 달하는 영지 통치에 힘쓰니 도요토미 정권 2인자로
1589년에 토지 조사를 실시하고 연공 · 부역에 관한 7개조 법령을 반포하여 농정(農政)의 통일을 꾀합니다.
1590년 히데요시가 오다와라의 호조 가문을 멸망시키고 이에야스에게 영지를 동쪽으로 옮기라 지시를 하니,
이에야스에게 기존의 5개국을 반납하는 대신에 간토 8개국을 새로 주었으니 이에야스는 에도(도쿄) 에
본거지를 두고 새 영지 안정과 통치에 진력하니 250만석으로 일본 최대 영주 가 되는데 쌀 1석은 성인이
1년간 먹는 식량으로 1만석으로 200명 병사를 키울수 있으니 5만명의 병사를 가진 세력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도쿠가와를 굴복시킨 히데요시는 서진해 히로시마의 모리씨 를 굴복시키고 시코쿠의 조소카베
씨도 쳐부순후 규슈를 80% 이상 차지한 사쓰마(가고시마)의 시마즈씨 마저 제압하고는
시마즈씨가 점령했다가 내놓은 규슈 북부와 중부 및 동부에...... 심복인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구로다 나가마사 를 영주로 앉힌후 1,2,3군으로 임명해 임진왜란 을 일으킵니다.
히데요시는 북규슈 사가현의 가라쓰 서쪽에 가토 기요마사를 책임자로 임명해 1년만에 나고야성
(名護屋城) 을 쌓았는데..... 1~9군은 바다를 건넜으나 나머지 영주들의 군대는 나고야성
인근에 주둔시켰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 여기 머물렀지만 임진왜란 에 출전하지는 않았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출진시키지 않은 이유는 그가 임진왜란에서 큰 전공을
쌓아 위세를 딸치면 곤란한데다가 군대를 움직이면서 혹 모반할 것이 걱정 되니 옆에
붙잡아 두고 감시 한 것으로 보이는데 1598년 히데요시가 죽으니 수뇌부는 바로 철군을 지시합니다.
이제 수십년간의 전쟁을 통해 급히 구축된 히데요시 왕조의 왕이 죽었고 후계자는 후궁 요도기미
의 소생인 6살 어린아이 히데요리 라..... 문치파인 이시다 미쓰나리 와 고니시 유키나가는
히데요리를 받들게 되는데..... 5대로 중에 수석으로 후견인인 마에다 도시이에 가 다음 해에
죽으니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광양회" 라고 수십년간 숨겨왔던 가면을 벗고 야심을 드러냅니다.
미쓰나리는 도쿠가와 암살을 시도하나 발각되니 사이가 나빴던 무장파 시즈가타케 칠본창 (賤ヶ岳の七本槍)
인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가토 기요마사 등이 미쓰나리를 살해하고자 저택을 급습하자.... 이에야스의
중재로 목숨을 건지나 부교직을 반납하고 사와야마에서 칩거를 강요당하니 미쓰나리는 이에야스에게
대항 하고자 아이즈(후쿠시마현 서부) 의 영주 우에스기와 접촉해서 에도성의 도쿠가와를 포위 하려고 합니다.
교토에 머물던 이에야스는 도리이 모토타다를 후시미성에 남겨 두고 아이즈 정벌 에 나서니 기회(?)를
얻은 미쓰나리는 서국 영주들을 규합해 서군 을 모으자 기다렸다는 듯 도쿠가와는 동맹군을
이끌고 회군하니 1600년 교토 동쪽 세키가하라 벌판에서 동서 18만 대군이 일본의 주인 자리
를 놓고 대전투가 벌어지는데 전국 곳곳에서 발생한 전투를 포함하면 30만이 동서로 나뉘어 싸웁니다!
미쓰나리 는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에 히데요시 가 조선에서 온 황윤길등 사신 일행을 접견을
하지도 않고 동쪽 도쿄에 가까운 오다와라 정벌전 을 벌일 때 참전했는데 호조 가문의 거점중
하나였던 오시성 공략을 맡게 되어 함락되지 않자 수공(水攻) 을 통해 성을 물에 잠기게 한뒤
항복을 받아낼 작정이었으나 전투는 점차 장기화된지라 군략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합니다.
미쓰나리 는 히타치국 사타케 가문의 항복을 알선하는 등 다이묘와의 관계를 중재했고
동북지방 영주들이 항복한 뒤 토지 조사인 검지(檢地) 를 수행했으며 히데요시
의 통일 전쟁 을 위한 병참 확보에 발군의 능력을 보였으니.... 무장이기 보다는
관료로서 역량이 뛰어난지라 도요토미 정권의 관료 고부교(五奉行) 가 되었던 것입니다.
히데요시 사후 정권은 미쓰나리등 5부교 와 다섯명의 유력 다이묘로 구성된 5다이로(五大老) 의 합의
체제로 유지되었는데 이중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영주 중에 가장 넓은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에야스는 250만석 거대 영주인데다가 히데요시 생전 부터 유력 다이묘들과 돈독한 관계 를
맺고 있었으니... 히데요시도 이에야스의 존재를 의식해 히데요리를 이에야스의 손녀와
혼인 시켰으나 오히려 자신의 사후 이에야스의 입김을 더욱 크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이에야스는 세력을 넓히기 위해 도요토미 가문을 따르던 무장파들을 만나거나 편지를 써서 포섭
하기 시작했고..... 미쓰나리는 고다이로의 수장 마에다 도시이에 와 우에스기 가게카쓰
에게 접근하는 한편, 다른 다이묘들과 혼인관계를 맺으며 히데요시의 유언을 어겼다는
명목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힐문 했으나 오히려 쫃겨가고 이에야스는 정국을 장악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