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있지만 윤리적인 교훈집입니다. 야고보서의 저자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과 구약의 잠언, 외경의 집회서, 그리고 그리스의 교훈에 이르기까지 여러 자료를 모아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선한 삶의 열매를 맺도록 촉구하는 글을 썼습니다.
야고보서는 전통적으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지은 것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현대 신학자들은 야고보가 살았던 일세기 중엽이 아니라 일세기 말이나 이세기 초에 익명의 저자에 의해 기록된 책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가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는 모순된다며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혹평하면서 히브리서처럼 그의 신약성서 목록에서 제외하여 부록에 넣었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나 야고보는, 세계에 흩어져서 사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을 드립니다.
편지 형식으로 글을 시작하고 있고, 저자가 자신을 야고보라고 주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야고보서는 편지 형식을 띠고 있을 뿐 편지가 아니라 교훈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저자는 자신을 야고보라고 소개합니다. 신약성서에는 야고보라는 인물이 다섯 명이나 됩니다.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그 외에도 두 명의 야고보가 더 있습니다. 이 중에서 야고보서를 기록할만한 인물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지만 실제 저자는 그가 아닙니다. 바울위서의 저자들이 글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바울의 이름을 빌렸듯이, 야고보서의 저자도 자신이 수집한 글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야고보의 이름을 빌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세계에 흩어져서 사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을 드린다는 표현은 실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열두 지파가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구성원을 포괄했듯이,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이 글을 쓴다는 의미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 2~4절을 보겠습니다.
2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
3 여러분은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4 여러분은 인내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 기쁨으로 생각하랍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이란, 어떤 유혹을 받는 걸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련을 겪을 때’ 라는 의미입니다. 시련을 거듭해서 이겨낼수록 인내력이 생기고, 그 쌓여지는 인내력을 통해서 더욱 성숙하고 완전한 사람이 되어간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니 시련이 거듭된다고 낙심하지 말고 잘 이겨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5~8절을 보겠습니다.
5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아낌없이 주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러면 받을 것입니다.
6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믿고 구하십시오. 의심하는 사람은 마치, 바람에 밀려서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7 그런 사람은 주께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8 그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이요, 그의 모든 행동에는 안정이 없습니다.
의심하는 신앙을 갖지 말랍니다. 오늘날 설교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본문이지만 성서비평학자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하는 본문입니다. 의심하는 신앙을 죄악시하는 교회 전통이 맹목적인 신앙을 심어줄 위험이 있고, 성서비평학 또한 기존 교리에 대한 의심을 통해서 발전해왔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우리 기독교신앙을 정말로 위태롭게 만드는 것은 의심하지 않는 신앙이 아니라 의심할 줄 모르는 신앙, 즉 맹목적인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13~15절을 보겠습니다.
13 시험을 당할 때에, 아무도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당하고 있다" 하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또 스스로 아무도 시험하지도 않으십니다.
14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15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16 나의 사랑하는 신도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우리말성서에서 시험으로 번역된 말이, 영어성경에는 보통 세 가지로 구분되어 나옵니다. testing, training, temptation입니다. 우리말성서도 구분해서 번역하는 게 좋았을 것입니다. testing은 시험으로, training은 훈련으로, temptation은 유혹으로 번역하면 뜻이 명확해집니다. 공동번역은 그렇게 했습니다. 공동번역으로 1장 13절을 보겠습니다.
13 유혹을 당할 때에 아무도 하느님께서 나를 유혹하신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지만 악을 행하도록 사람을 유혹하실 분도 아니십니다.
이렇게 유혹으로 번역해야 뜻이 명확해지는데, 개역한글본은 물론이고 공동번역보다 늦게 번역된 개역개정본에서도 그렇게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아쉬운 부분입니다. 어쨌든 이 본문은 자기의 욕심으로 유혹을 받아놓고는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유혹에 빠지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서 그렇게 되는 것인데,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면 죄가 생성되고, 죄가 자라면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일확천금이나 벼락출세를 꿈꾸다가 주위에 큰 피해를 남기고 쇠고랑을 차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는다는 이 말씀은 현대인들이 더욱 새겨들어야 할 교훈입니다.
19~20절을 보겠습니다.
19 나의 사랑하는 신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 두십시오. 누구든지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노하기도 더디 하십시오.
20 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남의 말은 잘 받아들이고, 내가 하는 말은 신중하게 가려서 하고, 화가 나도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자제하라는 좋은 뜻의 말씀이겠습니다. 말하기나 노하기를 더디 하라는 말씀은 그대로 따라도 좋지만, 듣기를 빨리 하라는 말씀은 비판적으로 새겨들어야 합니다.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설교하는 목사나 길거리 전도자들의 외침도 의심하며 더디 들어야 하고, 보이스 피싱이나 문자 피싱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듣기를 빨리 하면 큰 일 나는 안타까운 세상이 되어버렸으니까요.
22절을 보겠습니다.
22 여러분은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 그저 듣기만 하여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야고보서의 특징이 드러나는 본문입니다. 오직 믿음만을 강조한 사도 바울의 글이 교회를 지배하던 시절에 실천도 중요하다고 외친 야보고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행함도 중요하다고 가르친 대가로, 야고보서는 마르틴 루터로부터 지푸라기 서신이라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야고보서 전체에 행함을 강조하는 구절이 여러 번 나오지만 어느 구절에도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한 부분은 없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거나, 행함이 없는 위선적인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행함으로 증명되는 믿음이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서, 삶과 분리된 신앙이 아닌 삶과 조화를 이루는 신앙을 강조한 것입니다. 하여 저는 야고보의 논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 모순되지 않고 오히려 루터의 처사가 지나쳤다고 생각하는데 교우님들 생각은 어떠신지요?
27절을 보겠습니다.
27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할 덕목 중 하나입니다. 경건을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으로 해석한 것은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당연하고 옳은 견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구약의 가르침을 경건함의 예시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경건함을 그저 추상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현실에서 맺어야 할 열매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성서에, 특히 서신서에 이런 책이 있다는 것이 천만 다행으로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