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조 여름호(20호)>
서울깍쟁이-우리들의 초상/ 김제현
세월에 닦여서인가
사람에 부대껴선가
너도 많이 영악해졌구나
서울로 가더니
안 입고 안 쓰고 모아
집 사고 차도 샀다지
남의 것 탐치 않고
제 것은 앗기지 않는
정직한 소유의
에고이스트(egoist), 넌 서울깍쟁이
누군가 편의점 안에서
캔맥주를 따는 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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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된 항아리/ 백이운
비어 있는 항아리도 우련 아름답지만
꽃이 담긴 항아리는 뭉클하게 아름답다
어미가 새끼를 보듬은 풍경, 그대로가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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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성적/ 윤금초
낙제 학생 아버지가 선생님 찾아갔다.
“우리 아이 성적은 마, 어느 정도인가요? 부끄러운 얘깁니다만 저
는 학교 다닐 때 역사 성적 별로였습니다. 허구헌 날 꼴찌 근처 벗어
나지 못했거든요.”
잇바디 드러낸 선생님 “반복되는 게, 역사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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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등 풍경/ 이한성
집들이 왜 다닥다닥 붙어 있는지 아는가.
서로 떨어져 있으면 불안하기 때문이다
층층이 타던 연탄도 떼어 놓으면 꺼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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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午睡)/ 박종대
잡숫고 주무시고 잡숫고 주무시고
손주애가 저랬는데
먹고 자고 먹고 자고
그럼서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컸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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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 버튼/ 박화남
새 옷에 붙어있는 태그가 까칠해서
가위로 자르다가 구멍을 내버렸다
뒷덜미 서늘한 오늘
너를 잘못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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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낙엽/ 오영호
피 나눈 형제라는 것을 알았을까
벚나무 낙엽 위에 벚꽃이 떨어졌다
그 순간 와락 부둥켜안고 동반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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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조 가을호(21호)>
빗방울을 세다/ 김민정
젖어서 고즈넉한
풀꽃들이 흔들린다
하릴없이 분주하던
우리들 발자국을
지우고
지워내느라
바람도 젖고 있다
당당과 담담 사이
자라나는 슬픔 하나
꽃과 잎이 피는 동안
나무도 격했으리
빗줄기
늦봄의 허리
나이테를 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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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 떼/ 이정환
은빛
배때기를
뒤집어 보여주며
찰랑이는 물가에 여태 서 있는 너
뒤집어
더 보여줄 것
무엇이
그리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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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낱말11- 혼짬/ 문무학
혼밥에 혼술이면 혼살이라 할 만하고
말살이도 구색이라 꼭 끼울 말 있는데
혼자서 있는 시간을 혼짬이라 하고 싶다.
혼때나 혼시간, 혼짬에 혼겨를까지
혼시도 한번쯤은 생각해 볼만 하지만
혼자와 궁합 맞는 건 아무래도 혼짬이다.
혼자 있는 시간이 나쁘진 않다 해도
그 시간은 짬 같아야 살아갈 수 있을 듯한
아, 그런 바람도 살짝 묻혀두자 혼짬에,
혼자 있는 그 시간은 혼이 오는 시간이다
혼자라서 쓸쓸하다 혼자라서 서글프다
그 말은 아껴두어라 해야 할 때 따로 있다.
버리진 않았어도 잠시 놓친 혼을 찾아
어깨를 토닥이고 가슴으로 품어봐라
혼짬의 오롯한 맛을 알고도 남을지니
혼 없는 그 시간이 어찌 네 시간이랴
버린 시간이고 빼앗긴 시간이다
진정코 설워할 시간은 혼짬 아닌 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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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 민병도
천 년째 노숙중인
바람의 주막이네
늙은 댓돌에 놓인
가지런한 달의 신발,
어설픈 내 합장으로는
문지방도 넘지 못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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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 날/ 박남식
꼭 한 번은 새처럼 허공을 날고 싶었지
어느 한 날 꿈처럼 그렇게 날아가리라
산처럼 우뚝 서 있기 그것마저 어려운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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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모/ 조영일
한 사람 사랑하는 일 얼마나 어려운가는
그 사람 소중할수록 세월이 흘러갈수록
뼈 속에 사무치도록 깨우침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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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고백/ 한분순
저 몰래 들뜨는 것
왜 그런지 갸웃하며
바람이 물어봐도
은밀히 붉을 뿐
피어난 말의 무게는
땅에게 준 칭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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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조 겨울호(22호)>
이사(移徙)/ 김민서
묶은 짐이 가는 곳 예순의 시작이다.
오후 다섯 시 햇살은 석양을 데리고
일찍이 당도한 별빛, 두 눈이 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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쏜살/ 김영재
오늘도 하루를
자벌레로 살았다
한 달은 가을볕 아래
허리 펴면 또 한 달
농담이
진담인 나이
인생은 쏜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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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두리 바위/ 신필영
이름도 자지러지게
머리를 얹었구나
꽃가마 흔들리며
허방지방 오른 고개
절벽이
사랑만 같아
숨찬 고비 풀려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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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밤/ 박복영
아궁이에 된장찌개 끓다 쫄아 식어진 밤
장독대 눈송이는 흰 쌀밥 고봉 같네
처마 끝 노루꽁지만 한 고드름을 세운 집
아랫목은 절절 끓다 수그러져 애잔한데
개 짖는 소리 깊어 읽던 서책 덮어두고
마루 위 신발을 털어 골목길을 나서네
불빛들 가슴 저며 시선을 먼 곳 둬도
기다리는 마음에 적요는 가뭇없어
골목에 발자국 세워두고 돌아와 뒤척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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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주를 빚으며/ 이화우
밀주처럼, 누룩취가 올라오는 가을비처럼
폐쇄된 광을 열고, 맑아서 신(神)인 것처럼
춤추듯 청향 위에서 떨어지는 기억이다
축문을 읽어가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우물거린 탁음 속에 가둬버린 슬픔이
판자벽 옹이에 기어드는 해거름 길 같았다
한 뼘의 손마디가 확대되는 것처럼
소설(小雪)을 앞에 두고 간지를 꼽아보는
시큼한 냉국 사이로 소름 돋는 눈발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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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전원범
마주 잡을 손 하나
어디 없는가
그 손이 설령
멍에가 된다 해도
하나로
마음을 합해
동행할 사람
한 사람의 더운 손
또 하나의 뜨거운 손
두 개의 손바닥
열 개의 손가락
손금을
죄다 풀어서
만나야 할 정결한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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