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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과 박해에 대한 사회 철학적 접근 」
저자 : 홍경완 교수님(부산가톨릭대, 사회철학)
1. 들어가는 말
그리스도교 안에서 박해는 매우 깊은 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 이는 “순교자들의 피는 신앙의 씨앗”이라는 2세기 카르타고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아도 충분하다. 오랜 역사를 지닌 신앙공동체 가운데 박해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은 종교가 거의 없다는 역사적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는 충분히 증명이 되고도 남는다. 모든 신앙공동체가 박해와 깊은 관련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유독 그리스도교만큼 심하게 박해를 받은 종교는 그리 쉽게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그만큼 그리스도교와 박해는 그 연관성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하거니와 그 관련성 또한 타 종교를 압도하고 있다. 이러한 관련성은 자연스레 박해에 대한 많은 연구를 가능하게 했으며, 교회사적 관점이나 성서적 관점, 혹은 신학적 관점에서 박해를 심도 있게 연구하게 만든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 글은 박해를 색다른 관점에서 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제까지의 연구들은 대부분 시대적 상황, 곧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혹은 사회적 상황 아래에서 박해의 근인(近因)과 원인(遠因)을 찾아보려는 시도이거나, 신학적인 관점에서 박해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찾아보거나, 그도 아니면 신앙적 관점, 박해를 당하는 이들의 관점에서 바라보아, 이들이 보여준 영웅적인 신앙 행위에 초점이 맞춰져 왔다. 이러한 접근들은 그 나름대로 훌륭한 결과를 가지고 왔고, 박해에 대한 다양하고 심도 있는 관점을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이 글은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박해를 들여다 보고자 한다. 시대적 상황이나 신학적 관점, 신앙행위의 관점을 모두 벗어버리고 박해와 억압의 장(場)인 인간사회를 중심에 놓고 박해를 바라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societas, Gesellschaft) 자체가 어떤 방식으로든 박해와 불가분의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을 통해 보다 심층적이고 근원적인 사회철학적 관점에서 박해를 살펴보고자 함이다. 이렇게 되면 박해의 외연(外延) 역시 종교적 신념 혹은 신앙에 대한 박해라는 협소한 차원을 넘어 정치적 신념, 사상적 신념, 더 나아가 인간이 지닌 지성적(intellektuell) 활동 자체를 포괄하는 차원에까지 확대해 볼 것이다. 이러한 지성적 활동, 혹은 그 신념에 대한 억압의 관점에서 박해를 바라보게 될 경우 한국 천주교회의 박해 역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제공해주리라 믿는다. 이 관점은 이제까지의 연구와는 완전히 다른 시각, 곧 조선이라는 사회구성체 안에서 천주교라는 색다른 종교적 신념이 왜 처음에는 수용될 수 없었던가에 대한 역사-사회학적(historisch-soziologisch) 해석을 가능하게 해 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2. 사회 안정성
종교적 신념을 포함한 지적 자유 일체에 대한 억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억압의 개념을 좀 더 큰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장 넓은 맥락이라면 인간이면 누구나 속해있어야 하는 사회를 들 수 있겠다. 여기에서부터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출발점은 인간이라면 모두 공동생활(Zusammenleben)을 해야 한다는 데에 있다. 함께 모여 살아야만 종족의 유지와 존속이 가능한 것은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생활은 반드시 필요한 몇 가지가 갖추어져만 가능하다. 이런 의미로 이 필요한 것들을 ‘사회적 필요(soziale Bedurfnisse)’ 혹은 ‘사회적 명령(soziale Imperative)’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크게 본다면 이러한 사회적 명령은 사회의 세 분야에서 절대적으로 요청된다.
첫 번째 영역은 통치와 관련된 분야이다. 모두가 지배자가 될 수도 없을뿐더러, 그래서는 사회가 유지될 수도 없다.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나누는 것은 절대적 필요이다. 그런데 어떤 개인 혹은 계층이 지배를 하며, 그 지배자 혹은 지배집단은 어떤 과정과 절차를 거쳐 선별되는지에 대한 문제, 그들의 권위(Autoritat)는 어떤 절차와 과정을 거쳐 부여되는지에 대한 문제가 여기서 대두된다. 군주정치, 과두정치(寡頭政治), 민주정치 등의 지배 혹은 통치체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겨난 대답들이다.
사회적 명령의 두 번째 영역은 노동분담과 관련된 영역에서 생겨난다. 한 사회가 유지 존속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상이한 노동이 요구된다. 식생활의 생산과 관련된 일들로 시작해서 생필품 제조, 방위, 외교, 행정, 서비스와 공공복리에 이르기까지 그 분야는 사회가 발달될수록 점점 더 세분화된다. 문제는 그 가운데 어떤 일들은 그가 지닌 사회적 가치기준에 따라 모두가 꺼려하는 일들도 있다는 데에 있다.1) 그렇기 때문에 누가 어떤 노동을 어떤 과정을 거쳐 갖게 되며 어떻게 수행하느냐는 문제는 사회구성원들에게 매우 민감한 사안일수밖에 없다. 각 사회마다 노동을 분담하는 원칙과 기준이 있지만, 이것들 또한 여러가지 요인들, 예컨대 지리적,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요인들에 의해 형성된 산물에 불과한 상대적인 기준과 원칙일 따름이고, 그 사회에 속한 구성원 모두가 그 원칙과 기준에 동의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분담의 원칙과 기준에 대한 해답은 사회의 안정성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이를 노동분담의 사회적 명령이라고 이름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명령의 세 번째 영역은 이렇게 생산된 재화와 서비스의 분배와 관련된 영역이다. 분배에는 일정한 원칙이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이 원칙은 통상적으로 노동분담의 지배적인 형태와 생산방식, 이 둘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크게 보아 균등의 원칙과 불균등의 원칙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구성원 각자 혹은 각 가정은 필요한 만큼의 재화와 서비스를 분배 받아야 한다는 것이 대전제인 균등의 원칙이라면, 분배는 구성원이 행하는 다양한 사회적 과제의 가치와 사회적 기능에 따라 달리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 불균등의 원칙이다.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두 원칙이 야기하는 갈등을 해결하고 조화시키는 것이 세 번째 사회적 명령인 분배문제의 관건이다. 예컨대 난이도가 높은 사회적 과제에 바쳐지는 특별한 노력이나 숙련도, 혹은 교육이나 다른 특별한 능력과 같은 질적인 어떤 것들은 그 투자에 따르는 마땅한 분배와 혜택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한편으로는 균등의 원칙을 지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균등의 원칙 역시 준수하는, 다시 말해서 이 두 원칙을 조화롭게 화해시키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공정(Fairness)한 분배이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 이 길은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모두에게 만족할만한 분배를 실현해야 한다는 이 사회적 요청은 실상 태생적으로 이미 갈등을 담지하고 있다. 인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탐구해온 철학에서 정의(正義)가 늘 중심주제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나, 그 정의 가운데서 무엇보다 분배정의(iustitia distributiva)가 맨 윗자리를 차지하는 데에는 그 나름의 충분한 이유가 있다.2)
여기서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호만스(George C. Homans)의 이론은 그 대략적인 윤곽을 잡는데 도움을 준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늘 자기가 어떤 과제를 위해 투자한 것과 그 과제를 해결함으로 얻어지는 혜택 사이의 관계가 적합한지를 묻는다. 투자한 것과 얻는 것 사이에 생겨나는 차이가 바로 ‘이득’(profit)이다. 이 이득이 ‘대략적으로나마’ 균등하게 분배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 분배가 정의롭게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모든 인간은 나름의 공정한 분배에 대한 고유한 생각이 있고, 이 생각에 따라 분배정의의 관념도 자라난다.3)
여하튼 모든 인간사회는 적어도 이 세 가지 사회적 명령에 어떤 방식으로든 해답을 제시하고 있으며, 한 사회가 지닌 안정성(soziale Sicherheit)은 이러한 기본적인 사회적 명령들이 어떻게 자리하고 있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일례로 통치체제에서 발생하는 권위의 합법성(Legitimitat)4)과 정당성(Rechtfertigung)의 문제는 한 사회의 정치적 안정과 직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70년대와 80년대 우리나라에서 빈번하게 발생했던 민주화 투쟁의 주된 원인은 권력자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지배 권위가 사회구성원들로부터 정당성을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들이라 볼 수 있다. 쉽게 발견할 수 있듯이 사회적 권위를 이용한 부정부패 역시 사회 안정성을 저해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노동의 분할 역시 안정성의 관점에서 비추어 볼 때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한 사회는 각 사회계층에게 할당된 노동을 충실히 이행할 경우에만 제대로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기체와 같다. 사회의 변화에 발맞춰 생산력이 향상되고, 새로운 생산수단이 생겨나며, 이에 따라 사회를 지배하던 기존의 노동 가치 역시 변화하게 된다. 새로운 생산수단의 도입과 생산양식의 변화로 인해 그 동안 행해왔던 노동이 정당한 가치와 평가를 받지 못한다고 느껴질 때 뭔가 잘못되었다는 불의(不義)의 감정이 생겨나게 되고, 이는 현재의 노동분담 체제에 대한 불만으로 진행되게 된다. 실업률의 증가, 노동시장 유연화를 위한 제반 조처들은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사회 안정성을 위협하는 요소가 되기에 충분하다. 90년대 후반 우리나라의 구제금융(IMF) 사태는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실례가 되기에 충분하다.
재화와 서비스의 분배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정의감(正義感)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불의감(不義感)5)을 촉발시키는 가장 원천적인 요인이 재화와 서비스의 분배에서 기인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일례로 전지구적인 문제로 인식되는 기아(飢餓, Hunger)를 비롯한 물질의 극단적 결핍 현상은 단순한 분배의 문제를 넘어 ‘정의-불의’의 관계 아래에서 파악되는 것이 정당하다. 가장 우선시되는 기본권인 생존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사회 안정성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하다.
3. 사회 안정성과 지적(知的) 자유
그렇다면 이렇게 물을 수 있겠다: 왜 사회 안정성이 요구되는가? 약간 황당하기까지 한 이 물음은 ‘도대체 사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보다 더 궁극적인, 곧 사회의 존립자체에 대한 물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인간 사회의 존립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생물학적 전제조건이다. 이 말은 다시 모든 사회는 그 사회에 속한 구성원들의 삶을 안정적이고 평화롭게 유지시켜주어야 한다는 책임을 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회적 안정성은 이러한 평화와 안정을 위한 최소한의 바탕이 된다. 이는 그 반대의 경우를 상정해 보면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사회적 혼란은 안정성과 대척점에 위치하고 있다. 평화와안정이 없는 혼란한 사회가 야기하는 가장 커다란 문제는 그 사회에 속한 구성원들을 고통과 고난의 삶으로 이끈다는 점에 있다.6) 전쟁과 내란을 비롯한 극심한 혼란은 차치하고서라도, 치안의 부재나 경제적 불안과 같은 요인들이 사회구성원들을 고난의 삶으로 끌고 간다는 사실은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자명하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모든 인간 사회가 지닌 윤리적 지상과제는 그 사회에 속한 구성원들의 고난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데에 있다. 앞서 언급한 사회적 명령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고 사회 안정성과 관련되는 요인이 앞서 언급한 세 영역의 사회적 명령에 국한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물론 이 세 가지의 사회적 명령이 사회 안정성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들만으로 제한해서는 안된다. 사회 안정성과 관련하여 빼 놓아서는 안되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지금부터 언급하고자 하는 사상과 지적 자유의 영역이다. 지성적 자유에 대한 억압 혹은 박해는 바로 이러한 사회 안정성의 확보라는 명목에서 그 정당성을 획득한다. 이 말은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
지적 자유(intellektuelle Freiheit)나 종교적 신념(religiose Uberzeugung)에 대한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가 그렇지 않은 사회보다 더 안정적이며, 그 구성원들의 고난을 줄여나가는 데 도움이 된다는 주장은 단순히 생각해 보아도 상당히 일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상의 자유는 인간성의 가장 근본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러한 기본권을 보장해주는 사회가 그렇지 않은 사회보다 더 나은 사회라는 주장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은 자유다(Gedenken sind frei)’라는 독일어 격언도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종교적 신념이나 신조(信條, credo) 역시 넓게 본다면 이러한 지적 자유의 영역 안에 포함되며, 종교적 신념에 대한 자유 역시 기본권에 속한다. 종교적 신념에 의해 생겨나는 세계관과 가치관은 계시종교의 경우 신적 계시에 의한 것으로 고백되지만, 각 종교가 지닌 고유한 신학적 관점을 배제하고 볼 경우 이 모든 것들은 무엇보다 인간의 고유한 지성적 활동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적, 종교적 자유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고 보호해 주는 것이 보다 이성적이며 인간적인 사회질서를 만드는 것이라는 점과, 이러한 사회 질서야말로 그 구성체 안에서 발생하게 되는 고난을 최소한으로 줄여나가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다. 지적 자유의 보장은 이러한 사회질서를 이룩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으로 작용한다.7) 그렇다고 이렇게만 볼 일도 아니다. 무조건적인 지적 자유의 보장은 오히려 그 반대로 인간사회를 더 큰 위험과 혼란으로 끌고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근본주의적인 신앙행위가 끼치는 사회적 영향력은 1992년 휴거 소동이나 팔레스타인 자살폭탄 테러가 보여주고 있듯이 한 사회 전체를 소용돌이로 몰아갈 수 있다. 내전을 비롯한 많은 국지전의 표면에는 종교적인 테마가 그 심층에 자리잡은 경제적인 이유들을 훌륭히 덮어주고 있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지적 자유의 무한한 확대가 인간 고난을 감소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견해는 지극히 의심스러운 생각일 뿐만 아니라, 증명조차 되지 않은 위험한 주장에 불과하다. 지적 자유의 보장을 바탕으로 하는 과학의 발전이란 것이 단추 하나로 인류 전체를 파멸로 이끌어 갈 수도 있는 지경에 이른 지금의 상황만 생각해 보아도 이는 쉽게 이해가 되며, 몇 년 전 우리 사회를 광풍(狂風)으로 몰고 갔던 배아줄기세포 사태 역시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과학의 무한한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지적 자유의 보장이 결코 인간에게 장밋빛 미래를 보장해 주는 것은 분명 아니다. 과학적 진리에 대한 사회적 결과를 미리 알기란 사실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아주 적절한 지식을 갖춘다고 하더라도 그 지식은 기껏해야 짧은 미래에 대한 전망에 한정될 뿐이다. 더구나 그런 결과에 대처하는 데에는 그 이상의 지식이 또 다시 요구된다. 가능한 한 많은 탐구를 허용해야 하는 이유가 다시 여기에서도 찾을 수 있다.8)
지적 자유와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사항은 자유에 대한 외침이 실상은 인간의 본질적 자유에 역행하는 이해를 은폐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는 자유에 대한 부르짖음이 이데올로기적인 도구로 얼마든지 사용될 수도 있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어느 사회건 자유에 대한 외침은 늘 있어왔다. 그렇지만 그 외침이 인간의 복지와 참된 자유와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이해를 가리는 수사(修辭)로 사용되어 왔던 경우가 적지 않다.9) 이는 비단 자유란 개념뿐이 아니다. 정의(正義, Gerechtigkeit), 평등(平等, Gleichheit), 호혜(互惠, Reziprozitat) 등과 같은 사회철학의 중요 개념들 모두가 수난을 당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개념들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용도로 사용되며, 어떤 배경을 지니고 있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에 궁극적인 딜레마가 존재한다. 한편으로는 종교적 신념의 자유를 포함한 지적 자유 일체를 최대한으로 허용하는 것이 보다 인간다운 사회를 건설하는데 보탬이 된다는 명백한 확신이 자리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적 자유를 최대한으로 허용하는 것이 오히려 사회혼란의 위험성을 가중시킬 수도 있다는 딜레마가 그것이다. 물론 어떤 인간사회도 모든 종류의 인간 행동을 다 용납할 수는 없으며, 그렇게 해서도 안된다. 그걸 다 허용할 경우 사회 존립 자체가 의문에 부쳐지고 만다. 여기서 문제의 본질이 뚜렷이 드러난다. 그것은 지적 자유의 허용과 제한의 경계를 어디에 설정하느냐는 것이다. ‘기존의 지배적인 신앙행위와는 완전히 이질적인 새로운 신앙을 수용할 수 있느냐?’라는 종교적 신념에 대한 사회적 수용 혹은 거부, 혹은 순수 학문적 측면에서 ‘진리추구란 명목 아래 무한한 지적 자유를 허용해야 하느냐?’의 문제는 신앙을 배제한 순수 사회철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지적 자유의 허용과 제한이라는 사회적 경계설정(Grenzziehung)의 문제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계설정은 사회 안정성이란 맥락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한 사회의 안정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지적 자유는 가급적 많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별다른 이견(異見)이 없다. 문제는 사회 안정성이란 다분히 추상적인 개념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느냐에 관한 것이다. 예컨대 우리나라의 천주교 박해와 관련하여 조선후기 지배계층이 바라보는 사회 안정성이란 개념의 한계는 어디까지였는지, 혹은 그들이 천주교 신앙을 당시의 유교적 사회질서의 틀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을 만큼의 위협으로 간주하였는지, 그도 아니면 이러한 것들은 단순한 명분상의 이유였을 뿐, 실제로는 당리당략(黨利黨略)에 의한 전술적 차원이었는지에 대한 사회학적 관점이 그것이다.
더불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사회 안정성이란 개념이 시간과 공간, 문화적 지배를 받는 역사적 개념이라는 점이다.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유교문화가 지배했던 조선후기에 비춰졌던 사회 안정성이 다양한 의견 개진이 가능한 민주주의 사회의 안정성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냉전시대가 요구하는 안정성 역시 냉전의 위협이 사라진 시대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또한 다문화 사회에서 바라보는 종교적 신조는 그리스도교 혹은 유교가 국시인 사회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회학적, 역사적 폭넓음이 역사상 빈번하게 발생했던 종교적 신념에 대한 박해를 색다른 관점으로 보도록 이끌어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앞에서 언급한 역사-사회학적 해석이란 바로 이러한 관점 아래서 종교 박해를 바라봄을 의미한다.
4. 지적 자유의 한계와 인간 고난
지적 자유를 무한히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요청은 윤리적 차원과도 긴밀한 연관을 맺는다. 무기개발이나 세포복제 기술을 비롯한 과학적 진리 추구가 한 순간에 인류 전체를 파멸로 이끌어버릴 위험성을 담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지적 자유와 윤리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훌륭한 증명이다. 종교적 신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보다 이성적이고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어나가기 위해서 가장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인간의 기본권인 지적 자유와 종교적 신념에 대한 보장이라는 것 또한 포기할수 없는 요청이다. 그렇다고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관점이 마냥 평행선을 달리고 있어서도 안된다. 이것이 모든 사회가 안고 있는 딜레마이다.
이러한 딜레마, 곧 지적 자유의 허용과 제한이라는 딜레마를 극복하는 방법은 사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각 사회가 처한 시대적, 문화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지적 발전의 정도 또한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구체적인 정책이나 방법론은 획일적이어서는 안되며, 다수의 의견이 무조건 옳다고 주장해서도 안된다.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 역시 구체적인 제안이 아니라,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마땅한 사회윤리적 원칙의 제시에 불과하다. 그 윤리적 원칙이란 사실 단순하다. 지적 자유의 경계설정의 척도를 인간 고난으로 삼는 것이다. 자세히 설명하면 지적 자유의 경계설정이 그 사회에 속한 구성원들이 겪는 고난을 줄여나가는데 얼마만큼 도움이 되는지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물론 고난의 증대 혹은 감소에 대한 사회적 정의를 도출해내는 것이 쉽지는 않다. 인간 고난을 양적(量的)으로 가늠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주된 이유이지만, 그보다도 고난의 증대 혹은 감소가 현재의 일이기보다는 증명이 불가능한 가까운 혹은 먼 미래에 대한 전망에 속하기 때문이다. 가까운 미래에 대한 전망마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님을 안다면, 장기적인 안목을 지닌다는 것이 가지는 어려움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어려움들을 무시해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최소한 이 근본원칙 위에서 지적 자유의 한계 설정의 논의를 전개시켜나가야 한다는 점이 외면당해서도 안된다. 이러한 근본 원칙이 다른 여타의 현실적 요청들에 의해 부차적 혹은 후차적인 것으로 밀려나게 될 경우 인류 역사에서 빈번하게 일어났던 무자비한 폭력과 그에 따른 비인간화를 또다시 경험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지적 자유의 한계설정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개념으로 ‘이성적(rational) 사회’라는 용어를 들 수 있다. 여기에서 사용되는 ‘이성적’이란 용어는 복잡한 철학적 개념이 아니다. 한 사회 구성체 안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개념, 곧 사회를 한정하는 관형어로 사용되는 ‘이성적’이란 용어는 그 반대말로 사용되는 개념인 ‘약탈적(predatory)’이란 말을 통해 더 명확하게 이해될 수 있다. 단순화시키자면 모든 약탈적인 행위, 곧 탐욕스럽고, 자신의 이익만을 목적으로 남을 희생시키는 일체의 행위는 모두 비이성적인 행위이다. 이러한 행위가 비이성적인 이유는 전체적인 관점으로 보아 사회 자체에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행위 역시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서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이성적 사회 건설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이성적’이란 개념은 거창한 존재론적, 인식론적 개념이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윤리적 개념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곧 그 사회 구성원들의 고난을 줄여주고 안정적으로 이끌어가는 사회가 이성적 사회인 것이다. 약탈적 사회에서는 이러한 고난의 감소를 기대할 수 없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사회적 명령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권위의 영역에서 말하는 약탈적 권위란 강제(Zwang)와 속임수(Betrug)가 혼재되어 나타나는 형태로, 이 경우 권위의 사용은 사회적 목적이 아닌, 개인과 소수 지배집단의 이익에 제한된다. 약탈적 권위에 있어서도 권위의 사용에 있어서는 분명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지만, 구성원 개개인 혹은 전체의 목적을 위한 측면에서 본다면 전혀 다른 결과가 된다. 재화와 서비스의 분배 영역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분배는 분배정의를 기초로 하여 균등의 원칙과 불균등의 원칙을 조화시키면서 이루어진다. 약탈적 분배는 이미 그 말이 암시하고 있듯이 능력과 자질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분배를 말한다. 이런 점에서 이성적 사회는 달리 ‘인간적인 사회’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이성적 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한다면 지적 자유의 경계 설정이 어떠해야 하는지 대략적인 원칙을 잡을 수 있다. 우선 지적 자유 혹은 종교적 신념에 대한 무제한의 허용은 이성적 사회의 건설을 방해한다.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지적 자유에 대한 무제한의 허용은 일반적으로 사회적 불안과 혼란을 동반하기 마련이고, 이는 이성적 사회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사회 안정성의 파괴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억압과 통제가 유일한 방편이어서도 안된다. 기본적인 정치적, 지적 차이를 표현할 자유란 그 자체로 유용한 사회적 가치이며, 이러한 가치는 이성적 사회라면 반드시 지켜져야 할 사회적 재산일뿐더러, 그 자체로 이성적 사회의 건설에 이바지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미국의 사회학자 베링턴 무어(Barrington Moore Jr.)는 아주 흥미로운 제안을 하고 있다. 무어에 따르면 인간의 불행을 가중시킬 공산이 큰 정치적 운동이나 종교적 사상을 금지하기 위해서는 ‘교육적인 독재(educational dictatorship)’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특별히 이런 운동이 대중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있는 경우엔 더욱 그렇다.10) 강제력을 동원해서라도 이러한 위험한 운동을 저지시키는 것이 사회 전체로 보아 유익하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말하는 위험이란 사회구성원들의 삶이 그 정치적 운동이나 종교적 사상으로 인해 더 악화될 수 있음, 곧 구성원들의 고난을 가중시킬 수 있는 위험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병에 대한 치료행위가 병보다 더 나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병만큼 나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반대로 대중적 인기를 얻지 못한 경우에는 그냥 놔두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이라고 무어는 주장한다. 이를 말살시키려는 노력이 오히려 더 알려지게 하고, 인기를 얻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 말해주고 있듯이 반이성적이고 잔인한 목적을 가진 운동을 포함하는 모든 반대 운동들은 순교 덕분에 성공하는 법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을 충족시키는 조건은 사회구성원들 서로 지적, 정치적 운동이나 종교적 신념 등을 주제로 놓고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논쟁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하는 것뿐이다. 다시 말하면 되도록 강력하고 굳건한 이성적인 기초를 마련하는 것만이 지적 자유로 인한 인간 고난을 줄여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일 따름이다. 이런 의미에서 위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성적 사회를 이해해야 한다. 물론 이 역시 반론이 가능하다. 그렇게 토론하고 논쟁하는 사이에 상황이 더 악화될 여지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최선책은 없다. 그렇다면 차선책이라도 잡아야 한다. 역사가 말해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두 가지 이외의 다른 제3의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더라도 다시 또 다른 질문이 나온다. 그것은 모든 종류의 지적 자유에 대해 토론하고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사회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극복되어야 할 장애물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하는 물음이 그것이다. 이 물음은 바꾸어 말한다면 자유롭고 풍요로운 토론과 의견 개진을 가능하도록 하는 사회적 환경 조성에 방해가 되는 요인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우선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의 자유를 들 수 있겠다. 남북이 대치해 있는 우리나라의 정치적 상황은 이를 설명하는 적절한 예가 될 수 있다. 이런 상황 아래에서 과격한 좌익 사상을 아무런 제재(制裁)없이 용인하기는 쉽지 않다. 두번째로는 파괴적인 목적을 지닌 사상과 행동에 대한 엄격한 법적 제재는 오히려 필요한 것이라 보아진다. 마지막으로 자유로운 토론과 의견개진이 불필요한 소음이나 인신공격에 지나지 않기 위해서는 참여자들의 일반적 지적 능력 및 기술적 능력 또한 필요할 것이다. 흔히 말하는 성숙한 토론문화가 여기에 해당된다.11) 이런 토론문화가 정치적으로는 정당정치, 곧 합법적 여야(與野)의 역할로 발전되게 된다. 정당정치란 이렇게 본다면 그 사회의 토론문화가 얼마만큼 성숙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늠자이기도 하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현재까지 알려진 정치제도 가운데 이러한 이성적 사회를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는 제도는 민주주의가 유일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5. 억압과 똘레랑스
지적 자유 또는 종교적 신념에 대한 자유 혹은 억압의 문제는 결국 똘레랑스의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중세를 핏빛으로 물들였던 이단심문(inquisitio)12)과 마녀사냥(Hexenverfolgung)은 결국 똘레랑스의 부재(不在)가 낳은 참혹한 역사적 경험임을 모두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굳이 똘레랑스(tolerance)라는 외래어를 고집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말 번역어인 관용(寬容)이 원래 이 말이 담고 있는 풍부함을 반영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관용에는 자신과 다른 사상과 신조를 용인(容認)한다는 의미가 강조되어 있으며, 적절한 선에서의 타협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다시 말해서 ‘참아냄’ 혹은 ‘받아들임’이라는 의미가 주를 이루고 있다.13) 이러한 소극적인 의미는 똘레랑스가 지니고 있는 풍부하고 적극적인 의미, 곧 타인의 행위나 신념에 대한 존중의 의미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관용과 똘레랑스가 지닌 차이점들은 인간의 완전함에 대한 부정, 양심의 자유를 옹호하고 극단을 거부하는 태도, 폭력을 거부하는 이성적인 토론과 설득, 차이에 대한 존중, 다양성에 대한 인정, 자유의 실현이라는 똘레랑스가 지닌 깊은 의미들을 들여다보면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14) 우리의 동양문화권에도 똘레랑스와 유사한 화이부동(和而不同) 혹은 중용(中庸) 등의 훌륭한 개념들이 많이 있지만, 이러한 개념들을 발전시키고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렸다는 것이 큰 아쉬움이라 하겠다.15)
똘레랑스란 그 출발부터 종교와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는 개념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사상에서도 똘레랑스의 흔적을 찾을 수는 있지만, 직접적인 출발은 종교개혁과 그로 인한 신구교의 분열, 그리고 거기서 촉발된 종교전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밤에 신교인 위그노파와 구교인 가톨릭의 갈등에서 자행된 ‘바르톨로메오의 학살’16)은 신구교 간의 대립에 기름을 끼얹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사건은 대립을 넘어 전쟁으로 치달았고 마침내 국가의 존립자체를 위협하는 수준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종교간의 갈등과 전쟁의 폐해를 절감한 유럽 각국은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협정(Augsburger Reichs-und Religionsfrieden)과 베스트팔렌 평화협정(Westfalischer Friede)으로 상대방의 신앙을 용인하는 조약을 협정하며 종교전쟁을 마무리하게 된다. 똘레랑스는 이처럼 엄청난 피의 제전을 치르고 난 다음에야 생겨나게 된 인류의 유산인 것이다.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똘레랑스 역시 ‘피의 연못에서 개화’17)한 소중한 꽃임은 인류의 역사가 잘 말해주고 있다.
이 글은 똘레랑스를 주제로 삼고 있는 글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똘레랑스 개념의 역사적 발전과정과 기본 원리, 똘레랑스의 한계에 대한 연구는 다음으로 미루고, 여기서는 이 글의 중심 주제인 지적 자유 및 종교적 신념에 대한 사회적 억압의 관점 아래에서만, 더 정확히는 인간의 사회적 고난이라는 사회윤리적인 관점 아래에서만 똘레랑스의 필요성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말하고자 하는 논지는 단순하다. 똘레랑스가 없이는 인간을 고난으로 몰고 가는 사회적 억압과 박해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는 초기 한국 천주교회 박해의 역사가 외치는 교훈이기도 하거니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사건이기도 하다.
6. 나가는 말
사족이지만 이 글은 교회사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역사적인 글도, 박해의 신학적 의미와 역할을 신앙의 관점에서 되새겨보고자 하는 신학적인 글도 아니다. 그저 박해를 포함한 지성적 억압 일반을 순수한 사회철학적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보고자 하는 시도에 불과하다. 더불어 이러한 시도가 종교박해에 대한 기존의 시각을 조금이라도 확대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 이 글을 쓰게 된 주된 동기이다.
지적 자유와 종교적 신념에 대한 사회적 억압은 사회가 존재하는 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지적 자유에 관한 고찰과 똘레랑스에 대한 논의에서도 확인한 것처럼 무한한 지적 자유의 확대는 단지 그럴듯한 이상향에 불과할 뿐이다. 현실의 사회를 말하고자 한다면 한계와 제한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러한 지적 자유 및 종교적 신념의 한계설정에 있다. 그리고 그 한계설정은 그 사회에 자리잡은 똘레랑스의 내용에 따라 확연히 차이가 난다. 되도록 많은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 인간 고난의 관점에서 절대적인 요청이라고 한다면 해답은 이미 주어져 있다.
이러한 시도가 가져다 줄 수 있는 이점 하나는, 교회 안에 머물러 보지 못하고 있던 ‘사회 속의 교회’를 다시 볼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이다. 더불어 아직까지는 한국교회 안에서 그다지 큰 의미를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똘레랑스의 중요성과 깊은 의미를 되새겨보게 해 준다는 점도 이러한 새로운 관점이 가져다 주는 교훈이기도 하다. 개방성과 포용은 교회의 본질적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가톨릭(catholic)이라는 단어에서부터 이미 이러한 개방성과 포용성을 나타내고 있지 않은가?
토론요지
이진수(부산가톨릭대, 성서신학)
“억압과 박해에 대한 사회철학적 접근”이라는 제목이 이야기해 주듯이 기제 발표자는 억압과 박해의 문제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 개개인의 인간이 독립된 개체로서 속해야만 할 구체적인 공동체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을 관계 속의 인격(persona relationis)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전제는 당연히 개인이 누리는 자유, 여기서는 특별히 지적 자유와 그것이 행사되고 향유되어야 할 실존적인 장(場)으로서의 그것이 속한 구체적인 사회 공동체 - 그것을 지탱해주는 전통 및 제도와 함께 총체적으로 이해되는 공동체! - 사이의 피할 수 없는 간격과 갈등 문제에로 이끕니다. 각 개개인이 자신들의 자유를 이상적으로 행사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들이 속한 사회가 ‘어느 정도로는’ 안정성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이 ‘어느 정도로의’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자유가 ‘어느 정도로는’ 제한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사회적 안정성과 개인의 자유 행사 사이의 관계 문제로서 여기서의 관건은 지적 자유의 ‘허용과 제한의 경계 설정’입니다.
기제 발표자 역시 이 오랜 실존의 난제 앞에 그것이 딜레마라는 표현을 계속 거듭해서 사용하고 있으며, 그것은 허용과 제한이라는 서로 대립되는 핵심 개념에서 이미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딜레마를 어느 정도라도 긍정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 경계 설정이 가능한 한 이상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데, 그것에 있어서의 실천적 기준은 해당 사회의 구성원들의 고난을 줄여나가는 데에 구체적으로 얼마만큼 기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발표자에 의하면, 이러한 지적 자유의 경계 설정이 가능한 사회는 ‘약탈적’과는 반대 개념으로 이해된 ‘이성적’인 사회인데, 이와 관련해서 Barrington Moore Jr.가 제시하는 ‘교육적인 독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해당 사회는 잘못된 정치-사회-종교적인 이데올로기들의 영향으로부터 ‘미연에’ 수호되어서 진정으로 자유롭게 논쟁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장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발표자는 여기서도 반론이 가능함을 자인하며 최선책이 없기 때문에 차선책이라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문제의 다른 차원으로 눈을 돌립니다. 구체적인 한 사회가 그러한 대화의 장이 되는 데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서 ‘외부적 요인’도 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사회가 우선적으로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면 이 모든 것은 탁상공론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논제의 막바지에 이르면서 발표자는 이 모든 것이 그래도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라도’ 이루어질 수 있는 사회로서 올바르지 않은 모양새로 자유를 침해하고 위협하는 외부적 그리고 내부적 위험들로부터 자유로운 사회 형태를 제시하는데, 그것은 정당정치가 공정하게 이루어지는 민주주의 사회입니다. 서양 사회에서 이룩한 이 민주주의는 역사적인 아픔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배운 ‘똘레랑스’에 그 기초를 두고 있으며, 똘레랑스 역시 그 출발부터 종교와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고 발표자는 지적합니다. 민주주의를 이루어 낸 서구 사회 역시 종교적 신념 문제를 출발점으로 발발한 갈등들로 인해서 서로의 자유를 억압하고 그것에 폭력을 가해왔다는 것입니다. 결국 서구의 역사도 죽지 않기 위해서 실질적 타협의 길을 택했으며, 그것이 충분히 이성적인 것이었고 똘레랑스로 표현되었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통해 배운 (지적 자유 및 종교적 신념에 대한) 이 실질적인 한계 설정은 그 사회에 자리잡은 똘레랑스의 내용에 따라 확연히 차이가 난다라고 발표자는 주장하며, 특별히 한국 사회와 교회 안에서의 똘레랑스가 어떤 내용이었는지에 대해 물으며, 바로 이 관점에서 한국 역사 내에서 있었던 종교적 박해 문제를 보는 것에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개방성과 포용성을 그 본질적 요소로 지니고 있는 가톨릭 교회야말로 그 ‘catholic’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이 그것이 속한 구체적 사회 내에서 ‘똘레랑스의 내용’에 대해서 일차적인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짧게 쓰여진 글이기에 논리 전개의 각 부분들에 있어서 그다지 구체적이고 깊게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말하고자 하는 논지를 사회철학적인 관점에서 잘 전개해나가고 있는 이 글에서 몇 가지 제기할 수 있는 질문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지적 자유에 대한 사회철학적인 접근에 있어서 과연 종교적 관점은 처음부터 그리고 일관성 있게 배제될 수가 있는 것인가?
발표자 역시 똘레랑스에 대해 이야기하며 종교적인 문제에로 되돌아왔습니다! 서양 사회가 어차피 종교와 따로 떼어낼 수 없을 정도로 하나였고 이는 현대에 와서도 - 물론 사상가들 마다 조금씩 다르게 이야기하며 여기에 있어서도 페러다임의 변화에 대해서는 반드시 이야기 되어야 하지만 - 그대로 인정되어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구체적 예로서 저명한 사회 이론가인 N. Luhmann은 구체적 사회 내에서의 종교의 역할을 격하시키고는 있지만 종교를 구체적으로 한 사회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 포기할 수없는 요소로서 인정하고 있습니다. 신학자인 H. Kueng 역시도 ‘각 종교 전통 내에서의 자신의 종교에 대한 성찰과 연구 없이는 종교 간의 대화가 있을 수 없고, 종교 간의 대화 없이는 종교 간의 평화가 있을 수 없으며, 종교 간의 대화 없이는 세계 평화도 있을 수 없다’고 말했는데, 이는 한 사회 내의 각 사회구성원들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대로 유효한 말입니다.
2) Barrington Moore Jr.가제시하는 ‘교육적인 독재’에 있어서의 그 ‘교육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과연 누가 책임을 지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것 역시 - 그것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지적 자유의 행사에 오히려 악영향을 끼치는 하나의 잘못된 이데올로기가 되지 말란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서양 역사가 바로 이것에 대한 하나의 산증인입니다! 오히려 이것보다 더 근본적인 대안이 과연 없는 것인가? 결국 실천의 문제에로 귀결되겠지만 유다-그리스도교적인 전통에서도 충분히 (지적 자유의 올바른 행사에 관계되는) 교육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위한 재료들을 얻을 수 있지 않습니까?
3) 똘레랑스의 내용 문제에 있어서도 이성에 대한 믿음에 너무 일방적으로 신뢰를 두는 것은 무리가 가는 것이 아닌가?
이는 결국 ‘참된 이성적인 것은 과연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문제에로 다시 귀결됩니다. 발표자 역시 한 구체적 사회 안에서의 종교 단체가 그것도 가톨릭교회가 ‘더 이성적’일 것을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요구(Postulat)하고 있지 않습니까? 마치 I. Kant가 그러했던 것처럼.
답변요지
1.종교적 관점의 배제와 관련된 문제.
옳은 지적입니다. 지적 자유와 관련되어 종교적인 관점은 배제될 수도 없고, 배제되어서도 안됩니다. 토론자가 언급하고 있는 두 학자, N. Lumann과 H. Kung 역시 종교가 지닌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루만의 시스템 이론에서는 종교를 사회의 중요한 하위 시스템으로 인정하며, 정치, 경제, 문화 등의 다른 하위 시스템들과의 상호 작용을 그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종교를 하나의 사회적 하위 시스템으로 보고 있다는 것은 종교가 사회 전체에 미치는 고유한 역할을 - 고소영이란 말에서도 이미 드러나 있다 - 그려내고 있음에 다름 아닙니다. 발표자가 여기에서 주력한 것은 종교의 관점을 종교 내의 관점에만 국한시켜 보려는 시각을 배제하고, 보다 넓은 시각, 그러니까 하위 시스템을 넘어서는 보다 큰 시스템으로서의 사회 속에서 지적 박해라는 현상을 바라보고자 함에 있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지적 자유와 억압이라는 테마는 종교 안에 국한시켜 볼 때, 종교적 신념 혹은 신조에 국한되어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 지닌 모든 지적인 신념들 -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인 신념 일체를 포함한 - 혹은 사상에 대한 자유와 억압이라는 보다 넓은 테두리 안에서 종교박해를 바라볼 수 없게 만들어 버릴 수 있습니다.
2. 교육적인 독재의 문제에 관하여
철학에서도 이 문제는 아주 오래된 난제에 속합니다. Platon의 국가론에서도 이미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똑똑하고 지혜롭고 백성들을 보살피는 현군이 있다면, 민주주의보다 훨씬 더 백성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늘 위험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뽑아놓은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단순한 희망에 불과합니다. 그에 대한 제도적 장치가 바로 민주주의를 탄생시킨 배경입니다. 무어가 말하는 교육적 독재는 다른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발표문에도 나와 있듯이 교육적인 독재는 위급한 경우에 조심스럽게 행해야 합니다. 어떤 사상이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고, 한 순간에 사회 전체를 혼란의 도가니로 빠지게 할 위험성이 클 경우에 한해서, 그러니까 시간적 여유가 없을 경우에 조심스럽게 써야 할 도구일 따름입니다. 그러면서 무어도 지적하고 있듯이 “에 대한 치료행위가 병보다 더 나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병만큼 나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는 점입니다.
3. 이성에 대한 지나친 신뢰에 관하여
인류의 역사는 이성에 대한 지나친 신뢰가 가져다 준 쓰라린 경험을 알고 있습니다. 계몽주의 사조로 인해 이성이 신격화되면서 생겨난 경험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성만 있으면 가장 인간적인 세상을 만들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장밋빛 환상이었음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과학적 진리에 대한 지나친 신뢰가 가져온 폐해, 종교성의 상실, 니체가 고백하듯이 ‘신화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이 가지는 건조함 등, 몇 가지 예만으로 이는 충분합니다. 계몽주의에 의한 이성의 신격화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우리 같은 신앙인들에게 특별히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도 그 출발은 이성이어야 합니다. 이성적인 판단만이 똘레랑스를 가능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본 발표문에서는 똘레랑스에 대해서 간략한 언급만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억압과 똘레랑스 사이의 관계에 관해서만 원론적인 언급으로 그치고 있습니다. 똘레랑스 개념이 가지고 있는 그 풍부함을 보호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섣부른 언급으로 곡해할 여지를 없애기 위함입니다.
출처 : 부산 교회사 연구소
첫댓글 좋은 내용의 글 감사합니다. 요아킴 형제님...신학원에서 좋은 시간 되시길바랍니다.
^^* 늘 지켜봐 주시고 감사합니다. 단합회 한번 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