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東文化財 - 舊安東 市內 문화재
[출처] 안동넷/문화관광

안동은 도시 전체가 문화재다.(안동시청 제공)

고성이씨 종택(임청각)
신세동 7층전탑(新世洞 七層塼塔)
국보 제 16호. 통일신라시대. 안동시 신세동 8
법흥동 고성이씨 종택 앞에 서 있는 이 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벽돌탑)으로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경에 만들어졌다.
높이 16.4미터에 기단폭 7.75미터로 원래 기단부와 탑신부 및 탑두부로 되어 있으나
지금은 탑두부는 노반에 남아 있고 상륜부는 유실되었다.
기단부에는 네모꼴로 팔부중상과 사천왕상, 12지신을 양각한 판석을 세워 축조했고,
탑신부는 진회색의 무늬없는 벽돌을 어긋나게 쌓아 올렸다.
각층 지붕 윗면에 기와를 이었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데
이는 목탑이 전탑보다 앞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 된 전탑으로 8세기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되었다.
높이 17m,기단부 7.5m. '신세동'은 1962년 국보 지정 당시의 동네 이름이었다.
이 탑이 있는 지명이 '법흥(法興)'인 점으로 미루어 법흥사에 속했던 것으로 추측되나 탑 이외의 유물은 남아 있지 않다. 법흥사지(法興寺址)에는
고성이씨(固城李氏) 탑동파(塔洞派) 종택(宗宅)이 들어서 있으며 탑은 바로 문간 앞에 자리잡고 있다.
이 탑은 기단부와 탑신부 및 탑두부로 되어 있었으나 현재 탑두부는 노반에 남아 있고 상륜부는 유실되었다.
기단부에는 네모꼴로 팔부중상(八部衆像)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양각한 판석(板石)을 세워 축조했다.
안동 최고(最古)의 역사서인 『영가지』에는 본부의 비보사찰로 성화 23년(성종 18, 1487)에 개수하였고
당시까지 법흥사가 3간 정도 남아 있었다고 했으며,
이 탑 상륜부의 금동장식은 임청각을 창건한 이명의 아들 이고(李股, 淸風郡守 역임)가 철거해 그
것을 녹여 객사(客舍)에 사용하는 집기를 만드는데 사용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 후 1919년 개수한 바 있다.
이 탑과 불과 3m거리로 왜정시대에 중앙선 철로를 가설하게 됨에
기차 통행이 많아 그 진동으로 곳곳이 균열되어 한국 최고의 전탑 관리에 아쉬움이 있다.
동부동(東部洞) 5층 전탑(塼塔)
보물 제 56호. 통일신라시대. 안동시 운흥동 231
안동역 소화물 관리소 바로 아래에 있다. 탑이 있는 곳은 현재 유료 주자창으로 이용되고 있다.
담장과 수목들로 조경이 잘 이루어져 있으나 진입로 등 안내가 충분하지 못해 일반인들의 발길을 뜸한 곳이다.
탑 부근에 당간지주가 남아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이곳이 사찰지임을 알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이나 『영가지』등에서
'법림사재성남(法林寺在城南)'이라고 한 장소가 바로 이곳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이 탑은 후세의 보수로 인해 기단부는 원형을 잃었는데 지금은 높이 42cm의 긴 화강암대석 3단이 놓여 있다.
탑신에는 층마다 감실을 설치했다. 우리는 영가지를 통해서 이 탑 역시 법흥사탑과 같이 7층이었고
금동으로 만든 상륜부가 있었으나, 선조 31년(1598) 임진왜란 직후 명나라 군인들이 약탈해 갔음을 알수 있다.
6.25전란 때 일부 파괴된 것을 1962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안기동 석조여래좌상(安寄洞 石造如來坐像)
보물 제58호. 통일신라. 경북 안동시 안기동 152-13(國有)
현재 불상의 머리는 후대에 새롭게 붙여 놓은 것으로 발견 당시에는 몸통과 대좌만 있었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 역시 원래 불상과 같이 있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비록 원래의 모습이 많이 없어지고 보존 상태도 그리 좋지 못하나
세부의 조각 수법이 우수하고 안정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는 옷은 소매 하나까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였고,
짤막하게 이어진 옷주름 역시 활달한 모습이다.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손끝이 땅을 향하도록 하고 있는데,
이것은 악귀를 물리친다는 의미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다.
비록 불상의 신체만 남아 있지만 균형 잡힌 자세나 둥글게 처리된 어깨, 부드럽게 흘러내린 옷주름 등
힘있고 사실적인 모습을 통해 이 작품이 통일신라 후기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옥동 3층석탑(玉洞 三層石塔)
보물 제114호. 통일신라시대. 안동시 평화동 71-108
사찰의 터는 민가에 침식당해 절터를 짐작할 수 없다. 2중기단 위의 3층석탑으로 일반형에 속하는 탑이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각각 한 개의 돌로 되어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과 복발이 남아 있다.
옥개석은 넓어서 매우 안정감이 있으며 각부위의 비례 등 조형미가 뛰어나다.
기단부에 안상을 장식함은 다른 탑신에서도 볼 수 있지만 혼치않은 사례 중의 하나이며
상층 기단 갑석(甲石)의 전각과 반각은 전혀 새로운 양식이며 각 우각(隅角)에 풍령공(風鈴孔)이 남아 있다.
'옥동(玉洞)'이라고 지칭된 것은 당시 이곳이 옥동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안동 영명학교 입구에 위치한다.
이천동 석불상(石佛像)
보물 제 115호. 고려시대. 안동시 이천동 산 2. 속칭 '제비원미륵'
이천동 석불상은 안동시 북쪽 이천동 태화산 기슭의 산록 '제비원'에 있는 고려시대의 마애불 입상이다.
높이 9.95미터 너비 7.2미터의 암벽을 동체로 하고 그 위에 2.43미터 높이의 머리 부분을 조각하여 얹은
이 거대한 불상은 인자하게 뻗은 긴 눈과 두터운 입술 그리고 잔잔한 미소가 어려있는 표정으로
토속적인 느낌이 강한 고려시대 불상 양식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석불상이 위치한 제비원은 "성주의 본향 어드메냐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이본일러라..."라고
시작되는 성주풀이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제비원미륵'으로 친숙하다. 연미사(燕尾寺) 옛 터에 있는 석불상인데
지금은 작은 규모이기는 하지만 연미사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거대한 화강암 석벽에 12.38m에 달하는 신상(身像)을 새기고 다시 그 위에 별개석인 두부를 얹은 구조이다.
이미 안동소주의 등록상표로 호응을 받은 바 있는 등 외부에 안동을 상징하는 물건 중의 하나이다.
제비원은 '성주의 본향 어드메냐 안동땅 제비원이 본일러라……' 고 시작되는 성주풀이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또한 많은 전설도 지니고 있는데, 명(明)나라 장수 이여송이 칼을 빼어 불상의 목을 쳤다는 등이 그것이다.
석불산 바로 뒷편에는 지방 유형문화재 제99호로 지정된 3층 석탑이 있다.
임청각 정침 군자정
석빙고(石氷庫)
보물 제305호. 조선 영조 13년(1737). 안동시 성곡동 산 225-1 민속경관지 내
당초 안동 석빙고는 예안면 소재지에서 낙동강 상류를 따라 개설된 청량산행 도로로 약 1.2km되는 산 기슭에 있었다.
예안현 읍지인 『선성지(宣城誌)』에는 이매신(李梅臣) 현감이 영조 13년(1737)에 부임하여
3년 재임기간 중 봉록을 털어 석빙고를 축조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석빙고는 낙동강에서 많이 잡히는 은어(銀魚)를 국왕에게 진공(進貢)하기 위해 축조되었다고 한다.
안으로 계단이 있고 중앙에는 배수로가 있다. 4개의 홍예가 천장을 지탱하고 있으며 3곳에 환기 구멍이 있다.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게 되어 1976년 1월 안동군 도산면 동부리에서 현위치로 이건하였다.
태사묘(太師墓)삼공신(三功臣) 유물(遺物)
농암 이현보 영정
농암 이현보 종손가 소장 문적
차전놀이
홍씨(洪氏) 수의(壽衣)
중요민속자료 제40호. 현종 11년(1670). 안동시 송천동 388 안동대학교 박물관
1670년에 사망한 부림홍씨(缶林洪氏) 홍극가(洪克加)의 수의로
1974년 5월 안동군 월곡면 절강리 안동댐 수몰지역 내의 이장 묘소에서 출토된 구중(柩中)에서 나온 것이다.
중치막 1점, 도포 1점 누비바지 1점, 버선 1족 등 4점이다.
법흥동 고성이씨 종택
월영대(月映臺)
지방 유형문화재 제22호. 조선후기. 안동시 성곡동 산 225-1 민속경관지 내
원래 월곡면 사무소에서 남쪽으로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금하재(錦下齋)란 정자에 당도하는데
그 아래 길죽한 자연 암벽을 다듬어 월영대(月映臺)라고 새겼다.
월영대는 상사(庠士) 월계(月溪) 권공(權公)이 시를 읊조리던 곳으로,
그의 종질인 병한(丙漢)이 자취가 사라질까 걱정하여 대를 쌓고 돌에다 대명(臺名)을 세긴 것이다.
금역당(琴易堂) 사당(祠堂) 및 종가(宗家)
지방 유형문화재 제25호. 안동시 송천동 1017
금역당 사당 종가등 총 3동의 건물은 일명 '임연재(臨淵齋) 도목촌(桃木村)'이라고 하며
안동댐 수몰로 1973년 12워 월곡면 도목리에서 현위치로 이건된 것이다.
'임연재'는 퇴계선생의 제자인 배삼익(裵三益, 1534∼1588)의 당호이며,
글씨는 직접 스승으로부터 하사받았다고 하며 현재 종택에 소장되고 있다.
금역당은 임연재의 맏아들 배용길(裵龍吉, 1556∼1609)의 당호이다.
선성현(宣城縣) 객사(客舍)
지방 유형문화재 제29호. 안동시 성곡동 산 225-1 민속경관지 내
이 건물은 숙종 38년(1712)에 예안현감 김성유(金聖遊)가 개수한 것으로 '일(一)'자형 객사(客舍)이다.
중간부에 솟음을 두어 주사(主舍)로 하고 그 양 협부는 낮추어 양익사(兩翼舍)를 삼은 것은
조선조 객사건물은 전형적인 모습이다.
객사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했던 관사(館舍) 객관(客館)이라고 하는 건물이다.
객사로는 조선 전기에 지어진 강릉의 객사에는 고유한 명칭이 있었는데
경주 객사의 경우 동경관(東京館)등이 그 예이다.
일반적으로 객사는 조선조 목조 건축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안동군 도산면 서부리에서 안동댐 수몰로 1976년 6월 2일 현위치로 이건했다.
은곡서당(隱谷書堂)
지방 유형문화재 제36호. 안동시 송천동 337-3.
조선 중종 32년(1537)에 반남박씨 박진(朴璡)이 창건한 서당으로서
오랜 동안 황폐해 있던 것을 인조 23년(1645) 사림에 의해 중건되었다.
이 서당에는 그의 교지 및 서책 등 유물이 보관되고 있다.
안동댐 수몰로 안동군 임하면 천전 2리에서 현위치로 이건하였다.
추원재(追遠齋)
지방 유형문화재 제37호. 안동시 안기동 산 101-1
고려말 충신이며 효자인 상촌 김자수(桑村 金自粹)의 어머니 일직 손씨의 묘소 아래에 있었던 제사(齋舍)이다.
이 재사는 월곡면 노산리 마을 어귀의 산 기슭에 있었다. 추원재 현판과 그의 15대손이 쓴 기문이 게판되어 있다.
상촌 김자수는 고려 충정왕 3년(1351) 현 안동시 금곡동에서 태어났다.
금곡동은 지금도 '김씨 골'로 통하는데 그것은 경주 김씨들이 세거했기 때문이었다 한다.
그는 고려 공민왕 23년 문과에 급제하여 충청도 관찰사 등 현달한 지위에 올랐으나
나라가 망하자 절의를 지켜 은둔하였는데 조선 태종이 형조판서를 제수하여 부르자
아들에게 관을 준비하고 뒤따르게 하여 경기도 광주 추현에서 자결하였다.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신현리에 신도비와 비각 그리고 묘소가 있다.
1973년 12월 안동댐 수몰로 안동군 월곡면 노산리에서 현위치로 이건하였다.
효자비(孝子碑)
지방 유형문화재 제38호. 안동시 안기동 산 101-1
이 비는 고려말 충신이요 상촌 김자수의 효행비로 정려각 안에 있다.
원래 이 효자비는 고려 공양왕 때에 이미 건립된 것으로 안동부 성 남문 밖에 세워져 있었다.
비 전면은 '효자고려도관찰사김자수지리(孝子高麗都觀察使金自粹之里)' 라고 썼으며,
뒷면에는 그의 행적과 효행 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비각 안에는 순조 18년 김노경(金魯敬)이 글을 짓고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가 쓴 편액이 있으며
추녀 아래는 비각 이건기가 게판되어 있다.
그의 어머니 손씨 부인이 돌아가자 그는 삼년상을 지성으로 모셔서
세상에서는 그가 여묘살이 하던 곳을 '시묘(侍墓)골'이라 불러 효행을 칭송했다 한다.
이 비와 비각은 안동댐 수몰로 안동군 월곡면 노산리에서 1973년 12월 현위치로 이건되었다.
어은정(漁隱亭) 및 재사(齋舍)
지방유형문화재 제42호. 경북 안동시 정상동 510-1
조선 선조 3년(1570)에 어은 이용이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누정이다.
원래는 와룡면 도곡동에 있던 것을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지은 것이다.
어은정과 재사, 부속건물이 흙담에 둘러싸여 있다.
어은정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정자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팔작지붕집이다.
재사는 앞면 5칸ㆍ옆면 6칸의 ㅁ자형 건물이다.
안방ㆍ대청ㆍ건넌방이 ㅡ자로 배치되어 있고,
맞은편 아래채에 방ㆍ마루ㆍ대청ㆍ외양간ㆍ대문ㆍ서고ㆍ부엌ㆍ헛간이 있다.
부속채는 앞면 4칸ㆍ옆면 1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간결한 맞배지붕집이다.
농암영정후사본(聾巖影幀後寫本) 및 금서대(金犀帶)
이천동(泥川洞) 삼층 석탑(石塔)
지방 유형문화재 제99호.
고려시대 석탑으로 추정되며 보물 제115호로 지정된 안동 이천동 석불상과 동일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석불상 뒤편에 흩어져 있던 탑재들을 모아 복원한 것으로, 단층기단위에 3층 탑신부를 세웠다.
주위의 자연석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연미사(燕尾寺) 경내에서 탑으로 오르는 좁은길이 있다.
운흥동(雲興洞) 당간지주(幢竿支柱)
지방 유형문화재 제100호. 통일신라. 안동시 운흥동 231
이 당간지주는 역시 안동역 구내에 위치한 보물 제56호인 안동 동부동 오층전탑 서편 5m 거리에 있다.
이 지주는 통일신라시대 절 마당에 세운 것으로
오층전탑과 함께 이곳이 법림사(法林寺) 옛 터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자료이다.
6·25전란시 파손되었으며 지주 사이 지면에는 깃대를 받추었던 둥근 주좌(柱坐)돌이 남아 있다.
간결하고 소박한 모양이다.
놋다리 밟기
안동소주
태사묘
송천동(松川洞) 모감주나무
지방 기념물 제50호. 안동시 송천동 산 30-2
모감주나무는 무환자나무과에 속하는 낙엽 소교목이다.
이 나무는 소교목이지만 흔히 관목같이 자라고 황해도와 강원도 이남에서 자생하고 있다.
이 나무 꽃은 한방에서 감염, 이질 등 치료제로 쓰기도 하며 둥글고 검은 열매는 염주를 만들기도 한다.
이 나무는 동래정씨(東萊鄭氏) 석문공파(石門公派) 종중 소유이다.
전하는 바로는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 1577∼1650) 선생께서 생시에 아끼던 것으로
사후에 그의 아들이 1651년 봄 영양군 입암면(立巖面) 연당리(蓮塘里) 자양산에서 이식(移植)한 것이라 한다.
선어대 도로변에 있어 누구나 쉽게 만날 수 있는 나무이다.
의촌동(宜村洞) 초가(草家) 도토마리집
지방 민속자료 제6호. 안동시 성곡동 산 225-1.
19세기 말 전형적인 농가가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는 것과는 달리
웃방이 '중방'으로서 정지 한쪽에 붙어 마치 베틀의 도토마리 모양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도토마리 초가집은 '까치구멍집', '봉당집'과 더불어 이 지방 민가의 독특한 유형이다.
안동시 도산면 의촌리 501번에 있었으나 안동댐 수몰로 1976년 6월 2일 현위치로 이건했다.
토계동(土溪洞) 향산고택(響山古宅)
지방 민속자료 제9호. 안동시 안막동 119. 조선 고종
순국의사(殉國義士) 향산 이만도(響山 李晩燾, 1842∼1910)의 고택이다.
고종 3년(1866)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교리, 웅교, 양산군수 등 직을 역임했고
1907년 자헌대부의 직첩이 내렸으나 나가지 않았다.
1910년 나라가 일제에 의해 병탄되자 유서를 지어 고결한 뒤 24일간 단식하여 순국했다.
1949년에는 순국한 장소인 청구리에 유허비를 세웠다(위당 정인보 글, 백범 김구 글씨).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단장이 수여되었으며,
1986년 3월 1일에는 한 집안 삼대의 독립유공한 업적을 기려 '삼대 독립운동 가문'으로 지정 받았다.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248번지에 있었으나 안동댐 수몰로 1976년 4월 현위치로 이건했다.
이육사(李陸史) 생가(生家)
지방 민속자료 제10호. 안동시 태화동 672-9.
조선 철종 일정시대 애국시인 이육사(본명은 源綠 개명은 活, 1904∼1944)의 생가로
1975년 12월 31일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882번지에서 안동댐 수몰로 현위치로 이건했다.
안동시 태화동 현 소재지는 이건 당시와는 주위 환경의 변화가 많아
도심 주택가 가운데로 변해 관리와 선양(宣楊) 두 측면 모두에 문제점을 안고 있다.
현재 안동댐 민속경관지 내에 육사시비(1968년 건립, 전면에 광야시가 새겨짐)가 이건되어 있고,
최근에는 그의 생가터에 시비(1993년 건립, 정면에 ‘청포도’시가 새겨짐)를 건립했다.
원천동(遠川洞) 치암고택(恥巖故宅)
지방 민속자료 제11호. 안동시 안막동 119-1.
조선 고종 1910년 나라가 일제에 의해 병탄되자 비분강개 와병하여
세상을 떠난 홍문관교리 치암 이만현(恥巖 李晩鉉)의 고택이다.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수몰로 현위치로 이건했다. 현재 전통혼례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사월리(沙月里) 초가(草家) 토담집
지방 민속자료 제14호. 안동시 성곡동 산 225-1 민속경관지 내. 조선 고종
이 집은 권영락의 집이었는데 두꺼운 초가지붕으로 추위와 더위를 효율적으로 방지하여
쾌적한 주거공간을 제공하는 장점이 있다.
안동시 월곡면 사월리에서 1976년 6월 안동댐 수몰로 현위치로 이건했다.
관왕묘(關王廟)
지방 민속자료 제30호. 안동시 태화동 604. 선조 31년(1598)
이 묘우는 중국의 명장 관우(關羽)를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명나라 초부터 관왕묘를 건립하여 서민에까지도 그 신앙이 전파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임진왜란을 전후로 명나라 군사에 의해 관왕묘가 건립되었다.
1598년 서울 남대문 밖에 남관왕묘가 건립됨을 위시해 같은 시기에 상주, 강진, 안동, 남원 등지에서도 건립했다.
안동의 관왕묘는 명나라 진정영도사(眞定營都司)인 설호신(薛虎臣)이 건립하였다.
묘 안에는 석상(화강암)을 봉안했으며 당초에는 안동 부성(府城) 서쪽 향교 맞은편에 있었으나
향인들이 문묘(文廟)와 마주보고 있는 것을 꺼려
선조 39년(1606)에 서악(西岳)의 동대(東臺) 현위치로 이안(移安)했다. 무안왕비(武安王碑) 1기(基)가 묘우 안에 있다.
귀래정(歸來亭)
지방 문화재자료 제17호. 안동시 정상동 777. 중종 5년(1510)
고성이씨 안동 입향조 이증(李增)의 둘째 아들인 낙포(洛浦) 이굉(李?)이 지은 정자이다.
공은 25세에 진사, 40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 상주목사, 개성유수 등 직을 지내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귀양을 가기도 했다.
중종 8년(1513) 벼슬에서 물러나 안동으로 퇴거하여
부성(府城) 건너편 낙동강이 합수(合水)되는 경승지에 정자를 짓고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글 뜻과 너무나 흡사해 그것으로 정자의 명칭을 삼았다 한다.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誌)>에는 안동의 수많은 정자 가운데
귀래정(歸來亭), 임청각(臨淸閣), 군자정(君子亭), 하회의 옥연정(玉淵亭)을 으뜸으로 꼽고 있다.
이곳에는 주인을 비롯해 농암 이현보ㆍ 송재 이우ㆍ택당 이식ㆍ백사 윤훤 등 30여분의 시판이 게판되어 있다.
임천서원(臨川書院) 강당(講堂)
중요민속자료 제185호. 안동시 송현동 740. 고종 31년(1894)
조선 중기의 명신인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1538∼1593)의 도학(道學)을 숭앙하여
선조 40년(1620) 임하현에 건립하였으나 광해 12년(1620) 위패를 여강서원에 배향함에 따라 주원(主院)이 폐지되었다. 헌종 13년(1847) 사림에서 주원을 석문정사(石門精舍) 서쪽 엄곡에 복설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뒤에 사림의 공의로 1908년 현위치로 안동시 송현동 속칭 호암마을에 임천서원을 중건하여
이듬해에 그의 위패를 묘우인 숭정사(崇正祠)에 봉안하여 춘추로 제향하고 있다.
경내에는 묘우를 비롯하여 동서재, 강당, 전사청, 주사 등 건물이 있다.
학봉은 선조 원년(1568) 문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당시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진주성에서 순국하였다.
시호는 문충공(문충공)이다.
석사자(石獅子)
지방 문화재자료 제19호. 안동시 송천동 388 안동대학교. 고려(?)
이 한쌍의 석조(石造) 사자상(獅子像)은 길이가 약 1m이나 앞 뒤 다리가 똑같이 절단되었다.
원 위치는 미상이나 안동향교 옛터에 있던 것을 안동대학에서 보관하게 되었다.
<영가지>에는 '안동향교 대문 좌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석사자는 어떤 용도로 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신라시대에서 보여주는 사실적이고도 간결한 조각 솜씨가 없고 비만하게 조각된 점으로 미루어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며
주변에 연화대석(蓮花臺石) 등이 산재하는 것으로 보아 사찰에서 사용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태형(李泰衡)고택(古宅)
지방 문화재자료 제47호. 안동시 송천동 1226. 숙종 36년(1710).
이 건물은 1710년 건립된 고성이씨 지례종택(知禮宗宅)으로
입향조 이후장(李後章)의 손자인 이원보(李元輔)공이 창건했다. 이태형씨는 입향조의 주손이다.
안동시 임동면 지례리 118번지에 있던 것을 임하댐 수몰로 1989년 현위치로 이건했다.
반구정(伴鷗亭) 재사(齋舍)
지방 문화재자료 제258호.
이 정자는 임청각을 지은 이명의 여섯째 아들로 임청각 종통을 이은 반구옹 이굉(伴鷗翁 李肱)이 창건한 정자이다.
원래 임청각을 지은 이명은 귀래정 동쪽의 수려한 강산을 즐겨
그곳에다 정자를 짓고 형제들과 노경의 단란함을 기약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아들인 창건주는 그 뜻을 이어받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이 정자를 지은 것이다.
그의 아들 어은 이용(漁隱 李容) 역시 환로(宦路)에 뜻이 없어 이곳에 돌아와 은거하니
고성이씨 연(連) 삼세(三世)에 벼슬을 버리고 은둔한 장소가 되었다.
후세에 이를 기념하여 '고성이씨삼세유허비(固城李氏三世遺墟碑)'를 세워 기리고 있다.
비문은 영의정 귀록 조현명(歸鹿 趙顯命)이 찬했으며, 지방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었다.
송강 조사수(松岡 趙士秀)ㆍ퇴계 이황(退溪 李滉)ㆍ금계 황준량(錦溪 黃俊良) 등 제현들의 시판이 게판되어 있다.
1945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에 중건했다.
안기동 석수암(石水庵) 향나무
지방기념물 제106호.
경북 안동시 안기동 276
향나무는 우리나라 중부 이남을 비롯해 울릉도와 일본 등에 분포하고 있으며,
상나무ㆍ노송나무로도 불린다. 이 나무는 강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 제사 때 향을 피우는 용도로도 쓰이며
정원수ㆍ공원수로 많이 심는다. 안동 석수암 향나무의 나이는 400년 정도로 추정된다.
전설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 때 의상대사가 석수암을 처음 세우면서 심었다고 한다.
보통은 정자나 사당의 뜰에 나무를 심는데, 이 나무는 산의 경사면에 심어져 있다.
나무의 가지가 나뉜 것인지 합쳐진 것인지 구분이 안되는 보기 드문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바로 서지 않고 옆으로 비스듬히 퍼지면서 자라는 것이 특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