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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 안드레아
2010년 7월 2일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배워라. (마태오 9,9-13) "Those who are well do not need a physician,
말씀의 초대 아모스는, 빈곤한 이를 짓밟고, 가난한 이를 망하게 하는 자들에게 비판을 가한다. 그리고 마지막 때가 눈앞에 다가왔음을 선포하면서, 축제가 슬픔으로, 기쁨이 탄식으로 변할 것이라고 경고한다(제1독서). 예수님 시대에 세금 징수원들은 로마의 통치에 빌붙어 산다고 경멸과 소외를 당하였다. 그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인 마태오를 부르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정의와 사랑을 드러내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마태오는 세금을 거둬들이는 사람으로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제법 부유하게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위로는 하느님께 죄송스럽고, 아래로는 백성에게 미안한 감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로마에 빌붙어서, 가난한 백성에게 세금을 거두어, 일부는 로마에 바치고, 일부는 자신의 가산을 일으켜 세우는 데 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언제나 편치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인간적으로 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청산하고, 하느님 말씀에 따라 살려고 노력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를 로마의 앞잡이라고 하면서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재산은 넉넉했지만, 언제나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외톨이로 살아왔습니다. ☆☆☆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비는 그만큼 좋은 행동입니다. 하느님을 움직이는 힘이 되는 행동입니다. 타고난 자비심은 없습니다. 자비는 노력과 희생의 결과입니다. 참을 줄 알아야 자비를 베풀 수 있습니다. 참는 것은 결코 멍청한 행동이 아닙니다. 비웃음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참된 자비심에 닿을 수 없습니다. ☆☆☆ 사람들은 화려한 식탁을 선호합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과 사귀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을 더 선호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당신이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아드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같이 보잘것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이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but the sick do.
Go and learn the meaning of the words,
I desire mercy, not sacrifice.
어느 날, 예수님께서 그곳을 지나가시면서 그에게 손을 내미십니다. “나를 따라라.” 마태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그렇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다가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자신의 현재 심정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함께하자고 제의하시는 예수님 말씀은 곧 하느님 말씀과도 같았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당장 응답하고, 예수님과 그 일행을 자기 집으로 초대할 뿐 아니라, 주변의 다른 세리들과 죄인들도 불러 모아 잔치를 베풉니다. 마태오는 그길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함께 걸어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변의 수많은 반대자들의 비판에,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당신의 사명을 밝히십니다.
우리는 매사에 너무 참지 못합니다. 오히려 조금 가졌다고 큰소리칩니다. 조금 안다고 거들먹거립니다. 조금 높은 자리에 있다고 사람을 우습게 여깁니다. 이래서야 어찌 자비심을 깨달을 수 있을는지요?
마태오는 세리였습니다. 바리사이들은 그를 가소롭게 여겼습니다. 그러한 사람과 어울리는 예수님 역시 하찮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찮게 여겨져야 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남을 그렇게 여기면 그 역시 나를 그렇게 생각합니다.
‘자리가 사람을 빛나게 한다.’는 말도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앉으면 ‘아니 앉음’만도 못합니다. 들썩 앉았다가 자신도 망가지고 공동체도 멍들게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부족한 사람을 ‘챙겨 줄 줄 아는 이’가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챙겨 주는 이가 진정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 주님께서 함께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자비심 없이 어찌 그분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을는지요?
주님께서 누구신지를 잘 모르는 까닭입니다. 유색 인종을 차별하는 미국 사회의 백인 앞에서 황색 인종이 흑색 인종을 차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의 세관 - 강신모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리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마태오는 세관에 앉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 일에 푹 빠져 있는 상태입니다. 마태오는 일과 놀이와 욕심과 죄에 빠져 하느님의 길을 따라 걷지 못하는 우리 모습을 상징합니다.
그런 마태오에게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이처럼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욕심과 죄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그곳에서 떨쳐 일어나 나올 것을 요청하십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을 하란에서 불러내셨듯,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구해내셨듯, 오늘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태오뿐만 아니라 또 다른 사람들도 부르고 계십니다. 마태오 같은 죄인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고 있는 바리사이들도 부르고 계십니다. 그들은 마태오처럼 욕심과 죄에 물들어 있지는 않지만, 그들도 무언가에 얽매여 있고, 그래서 거기서 나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을 얽어매고 있는 것은 선입관이고, 자기들만 열심히 신앙생활한다고 자랑하는 교만인 것입니다. 마태오가 세관에서 나와야 하듯, 그들도 교만과 선입관에서 나오지 못하면 하느님을 진정으로 섬길 수 없고, 그들의 삶은 방향을 잃고 맙니다.
우리가 너무나 푹 빠져 있어 죄인 줄도 모르고 살고 있는 ‘나의 세관’은 무엇이며, 거기서 빠져나올 회개의 은총을 청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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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을 잘 보지는 않지만, 언젠가 우연히 텔레비전의 광고들을 자세히 본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평소에는 그 광고들이 단순히 물건을 팔기 위한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그 광고에도 내용이 있으며 또 멋과 재미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튼 지금까지 보아온 광고가 한 두 개가 아닐 텐데요. 언젠가 우리나라 국민들의 뇌 속에 가장 인상적인 광고가 무엇이냐는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어떤 광고일까요?
1위를 차지한 광고는 라면 광고라고 합니다. 아마 기억나실 것입니다. 라면 한 그릇을 앞에 놓고 “형님 먼저, 아우 먼저”를 외치면서 라면을 양보하던 광고 말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1위를 차지한 광고가 글쎄 광고 역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만들어진 광고라고 하네요. 딱 한 번 연습을 하고 촬영해서 딱 1분 만에 끝났다고 합니다.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겼다면 광고 본연의 역할을 가장 드러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 정도하려면 촬영 시간도 많고 재정적인 투자도 많을 것이라고 일반적인 생각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사람의 마음속에 따뜻함을 던져줄 수 있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광고라는 것임을 알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도 이래야 하지 않을까요? 물질적인 공세로 화려한 모습만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이웃들에게 따뜻함을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아쉽게도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모습만을 추구할 때가 얼마나 많았던 지요? 즉, 겉모습보다는 그 안에 담긴 따뜻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겉모습보다는 그 안에 담긴 따뜻함을 추구하셨습니다. 만약 겉모습을 더욱 더 강조하셨다면, 오늘 복음에 나타나듯이 세리 마태오를 당신의 제자로 뽑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겉으로 보이는 부분은 분명히 제자의 자격이 없는 큰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겉모습보다는 그의 마음 안에 있는 하느님을 향한 따뜻한 마음을 보셨고 그래서 “나를 따라라.”라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지금 나는 과연 어떤 마음을 추구하고 있을까요? 혹시 겉모습만을 추구하는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내 모습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따르기로 했다면 그래서 주님처럼 살겠다고 다짐했다면, 겉모습만을 보고서 판단하고 단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기위해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겉모습만을 보고서 섣부르게 판단하지 맙시다.
-장경선 수사-
구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죄인들이 구원받기 위한 길로 나아가는 과정에는
율법에서 명시하는 희생제물을 바치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 의식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중요하고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희생제물만 바쳐놓고 나면 다 된 것으로 여겨버리면서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깨끗하고 올바르게 살기 위한
여러 희생의 행위가 있습니다.
생활 중에 금식이나 금욕, 절제된 생활을 하기도 하고, 수도자들도
나름대로의 극기나 고행을 합니다. 내적 외적으로 이탈을 위한 서원을 합니다.
그러한 것도 어떤 의미에서 희생제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께
아주 귀한 희생제물을 드리고자 한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 어떤 것도 사랑을 뛰어넘는 희생은 없을 것입니다. 아주 작은 사랑의 실천
하나도 힘든 고행을 하는 것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지는 복음적 삶입니다.
세상 속에서 알게 모르게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분명 많습니다.
그들은 주위의 연약한 사람들, 지친 사람들, 위로를 받지 못한 사람들,
자신이 지은 죄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 사람들과 항상 함께하려 합니다.
자기 자신의 희생이 있는지 없는지에 관심을 가지기보다 다른 이들과
함께하려는 그들의 열린 마음은 분명 하느님의 마음을 담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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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와 범법자
-송동림 신부-
지난해 교통사고로 1년 가까이 투병 생활을 하시던 어머니를 종종 찾아뵈었습니다. 다리를 다쳐 거동이 많이 불편하셨는데 혹시나 나중에 걷는 데 장애가 있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필요한 사람이 된다 함은? †♡†♡†♡†♡†♡†♡†♡†♡†♡†♡†♡†♡†♡†♡†♡†♡†♡†♡†♡†♡†♡†♡† 우리 모두는 병자이다 †♡†♡†♡†♡†♡†♡†♡†♡†♡†♡†♡†♡†♡†♡†♡†♡†♡†♡†♡†♡†♡†♡† 하느님 안에서 행복을 구하는 신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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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이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입니다. 환자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누구든지 두려움을 느낀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첫째, 헤어짐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안전을 느끼게 해주는 집을 떠나 낯선 장소에서 때로는 혼자 지내야 한다는 두려움입니다. 둘째, 의존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달리 거의 전적으로 의사·간호사·영양사 등에 의존해야 하는 현실에서 불안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셋째, 통제 상실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지정된 병실에 입원해야 하고, 환자복을 입어야 하고, 병원에서 제공하는 음식만 먹어야 하는 데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넷째, 통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병에서 오는 통증과 그로 인한 고통, 경우에 따라서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환자를 사로잡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를 상실한 환자들은 근심·걱정·염려·두려움 등으로 불면의 밤을 보내기도 합니다. 결국 투병 생활에서 의사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특이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병든 사람으로 바라보신다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처럼 죄인들을 범법자로 보지 않고 영혼의 병자로 바라보십니다. 흔히 사람들은 죄인을 범법자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처벌받아야 할 나쁜 사람이 아니라 치료받아야 할 환자로 보십니다. 죄인을 범법자로 바라볼 때는 차가운 시선·선입견·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병든 사람, 앓는 사람, 환자로 보셨습니다. 그들을 멸시하거나 냉대하지 않고 불쌍한 마음으로 대하십니다.
그러기에 누구보다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우리가 그들을 바라볼 때 불쌍한 마음을 갖는다면 상대방에 대한 마음이 조금은 너그러워질 것입니다. 나아가 그들을 아픈 사람으로 인정한다면 오히려 고쳐주고 돌봐주거나 배려할 수 있습니다. 사회에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심리적·정신적·영적인 환자로 바라본다면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질 것입니다. 나아가 죄인이 병자라면 누군가에게 진정한 도움을 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그러기에 죄인을 수감하는 교도소가 감옥이 아닌 죄인(병자)들을 치료하는 병원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김찬선신부-
우리는 누구나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만일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너무도 비참할 것이고
내가 불필요한 사람이라고 누가 얘기한다면
아마 대단히 자존심 상해하며 팔팔 뛸 것입니다.
반면 저 사람은 누구나 필요로 하는 사람이야 하면
최고의 칭찬으로 여기며 으쓱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필요한 사람은 능력이 있고
그래서 소중한 사람이고,
불필요한 사람은 쓸 데 없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는 통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누구에게나 필요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꽤 오래 전의 이야기지만
누구라고 하면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명망이 있는 분에게
어떤 책임을 맡아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부탁을 하면서도 사람들이 보기에는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있는 일이니
맡기를 꺼려하거나 맡더라도
저와의 친분 관계 때문에 억지로 맡을 것이라는 예상은 했습니다.
역시 정중하게 사양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 후 정치권의 제의를 받았고 그리로 가셨습니다.
이런 일이 그 후에도 몇 번 있었기에
그때부터 저는 위치나 능력을 보고 부탁치 않고
자기를 내어줄 수 있는 사랑이 있는지 보고 부탁케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저의 경우입니다.
얼마 전 할머니 한 분에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당신이 누구신지,
왜 전화하셨는지는 말씀하시지 않고
저의 직책이 무엇이고
나이는 얼마나 되는지 등등을 계속해서 예의 없이 묻는 것이었습니다.
기분이 슬며시 상하여 왜 그렇게 꼬치꼬치 묻느냐고
짜증을 최대한 숨기고 제가 여쭈었습니다.
그랬더니 그제야 자식들 문제로 면담하고 싶은데
면담해 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면담할 뜻이 있는지 저의 의사를 알아보기 전에
면담할 만한 자격이 제게 있는지 알아본 것이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니 기분이 더 상했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의지를 발동하여 친절하게 약속을 한 다음
기분 나빠하는 저 자신을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정말 누가 나를 필요로 해도 내어줄 수 있는가?
아주 가난한 사람이 나를 필요로 해도 내어줄 수 있는가?
아주 하찮은 일로 나를 필요로 해도 내어줄 수 있는가?
겸손하지 않은 태도로 부탁을 해도 내어줄 수 있는가?
진정 사랑이 동기일 경우는 오늘 복음의 주님처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중심입니다.
귀찮기만 하고 얻는 것이 별로 없을 지라도
인정과 칭찬이 되기는커녕 비판이 될 지라도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한다면 그 필요에 응답합니다.
그리고 누가 나를 더 필요로 하느냐에 따라 응답합니다.
유력한 사람이 아니라 아주 하찮은 사람이 필요로 하면
하찮은 사람이 나를 더 필요로 하기에 그 필요에 응답하고
그 반대로
내가 돕고 싶은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유력한 사람이 나를 필요로 하면
오늘 복음의 마태오처럼
그 또한 다른 차원의 가난한 사람으로 나를 더 필요로 하기에
그 필요에 응답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능력 때문에 필요한 사람이 되려 하기보다는
사랑 때문에 필요한 사람이 되려 합니다.
그리하여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전서 13장에서 노래하듯
있는 능력마저 아무 소용이 없는
사랑 없는 능력자가 되기보다는
없는 능력까지 다 발휘하여 필요에 응답하는
능력 없는 사랑이 되고자 합니다.
-이제민신부-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가 다가 왔다”는 복음을 입으로 선포하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 만나는 모든 사람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보셨다. 예수님에게 세상은 천국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었다. 그분께 사람들은 하느님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들이었다. 그분을 만나는 사람들은 그분의 느낌을 공유하면서 자기가 귀한 하느님의 자녀임을 깨달았고, 그들 또한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새로운 세상이 그들에게 열린 것이다.
하느님의 현존을 믿는 사람은 사람들을 마음으로 만나고, 또 마음으로 사람들을 만날 때 그들 마음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오늘 복음(마태 9,9-13)에 나오는 바리사이들은 사람들을 마음으로 만나지 못하고 자기의 눈높이로 사람들을 대하였다. 그들은 사람의 겉모양만을 보고 “저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다. 저 사람은 죄인이다.” 판단하는가하면, “어떻게 세리와 죄인과 같이 식사할 수 있는가?”(마태 9,10-11) 하며 남을 죄인으로 자기를 거룩한 이들의 반열에 올리기도 한다.
예수님은 오늘, 그런 잣대를 가진 사람을 병자라고 말씀하신다. 남을 죄인 취급하면서 자기는 경건한 척 하는 사람을 병자에 비유하신 것이다. 육체적으로 병을 앓는 사람만이 병자가 아니다. 남을 죄인이라고 판단하며 무시하는 마음이 병든 사람이 진짜 병자이다. 감기, 디스크, 암 등 육체가 않는 병만이 병이 아니다. 하느님이 와 계심을 보지 못하는 병, 이웃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병, 남을 사랑하지 못하는 병, 이것이 진짜 인류가 앓고 있는 심각한 병이다. 지금 온 인류가 병을 앓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2-13)
우리 모두는, 세상의 모든 사람이 병을 앓고 있다. 우리 모두는 인생을 살면서 의사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신앙한다면 그 자체로 우리가 병자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분을 마음에 받아 모시기 위한 미사를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우리의 병을 고쳐 달라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였다. 바리사이의 병은 자기가 의사를 기다리는 병자임을 모르는데 있다. 그러기에 그는 빌 잘못도 없고 하느님께 베풀 자비도 입지 못한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인류의 병을 고발한다. “빈곤한 이를 짓밟고 이 땅의 가난한 이를 망하게 하는 자들아, 이 말을 들어라!”(아모 8,4) 내 이익을 위하여 빈곤한 이를 짓밟는 것, 내가 부자가 되기 위하여 가난한 이를 망하게 하는 것, 그것이 병이다. 아모스는 또 말한다. “언제면 초하룻날이 지나서 곡식을 내다 팔지?”(아모 8,5) 남들을 짓밟고 망하게 하면서 끌어 모은 재산을 언제 팔아 부자가 될까 궁리하는 것, 나눔이 아니라 축적을 성공으로 여기는 것, 그것이 인간이 앓고 있는 병이다. “언제면 안식일이 지나서 밀을 내놓지?”(아모 8,5) 안식일은 거룩한 날이므로 일을 해서는 안 되는 날이다. 그래서 그들은 일을 하지 않는다. 대신 누가 안식일에 일을 하는지 안 하는지 지켜보면서 안식일 어긴 사람을 고발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동시에 그들의 머릿속은 언제 안식일이 끝나는가, 언제 이 밀을 내다 팔까, 이 밀 가격은 얼마나 될까 하는 계산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게 인류가 앓고 있는 병이다. 저울을 속이고, 힘없는 자를 돈으로 사들이고, 빈곤한 자에게 신 한 켤레 사주며 도우는 척 하면서 실지로는 자기의 이익을 챙기는 것, 그것이 병이다. 안식을 어기는 병보다 더 큰 병을 그들은 앓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병인 줄 모르는 병을 앓고 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다면 이런 병을 고쳐주시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병이 잘 고쳐지지 않는다. 가장 큰 원인은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아모 8,11)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재물과 명예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귀를 기울인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한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은 지금 이들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계신다.
아모스에 나오는 병은 지금 우리 민족이 앓고 있는 병이다. 이 병은 경제 논리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전국적으로 타오르는 촛불이 그것을 증명한다. 아모스는 말한다. 그날은 온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이 병이 치유되는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
-경규봉 신부-
예언자는 가진 자들의 죄를 고발한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절기인 초하루 축제와 안식일까지도 귀찮게 생각한다. 자신들이 가진 것을 거래하지 못하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가난한 이들을 많이 울렸다. 곡물을 되로 팔 때 속였고, 곡물 값을 은으로 받을 때 저울추로 속였으며, 등겨처럼 먹기 어려운 것까지 팔아먹고, 빚을 이용해 가난한 이들을 싼 값에 종으로 부려먹곤 하였다.
예언자는 이러한 죄에 대해 심판하실 날을 예언한다. 그날 어두움과 죽음이 함께 땅을 덮칠 것이다. 출애굽 때에는 맏아들이 죽었지만 이 날에는 외아들이 죽은 것처럼 울부짖고 통곡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백성이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만 때가 너무 늦었다. 하느님의 말씀이 이제는 더 이상 없고, 제사장이나 예언자를 통한 지시나 위로도 없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사람은 다른 모든 피조물과 달리 만드셨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 하고 사람을 당신의 모습대로 지어내셨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먼저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셨다. 그러자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창세 2,7). 이처럼 사람은 진흙으로 빚어진 형상에 하느님의 입김(영)이 불어넣어져 만들어졌기 때문에 세상적인 요소와 하느님적인 요소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한편 세상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끊어버리지 못한다.
사람은 먼저 진흙으로 빚어졌기 때문에 육신과 세상을 먼저 본다. 육신의 기쁨과 즐거움, 편안함과 안락함을 추구한다. 이를 위해서 세상적인 것을 구한다. 더 많은 재물을 가지려 하고, 더 높은 지위에 오르려고 하며, 뭇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추앙을 받고자 한다. 물론 이 자체는 전혀 나쁘지 않다. 사람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신을 수련하게 하고, 자신의 최선을 다하게 하기 때문에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다.
그러나 육신과 세상만 바라보고, 그로 인하여 하느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다. 육신은 흙으로 빚어진 것이고,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무리 많이 가지고, 높은 지위에 올라 이름을 날려도, 그 모든 것은 비천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멀리 보지 못한다. 우선 눈앞에 있는 것만을 바라본다. 그래서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하여 속이고, 사기를 치며, 해를 끼친다. 자신의 이익만을 얻기 위하여 다른 이들을 괴롭힌다. 중요한 것은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쓰는”(요한 6,27) 것임을 생각해야 한다.
아모스가 질타하는 가진 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육신의 편안함을 위하여 속이고, 손해를 끼치는 등 죄를 지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절기까지도 못마땅하게 생각할 정도로 하느님을 전혀 바라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한 그들에게 아모스 예언자는 하느님의 심판을 예언한다. 외아들이 죽은 것처럼 울부짖으며 통곡하게 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으리라고 예언한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9)
사람의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비천한 존재이다.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것도 하느님의 입김(영)이 불어넣어졌기 때문이다. 사람이 숨을 쉬고 살게 된 것도 하느님의 입김이 불어넣어졌기 때문이다. 오직 영원하신 분은 하느님이며, 육신을 포함하여 이 세상 모든 것은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비천한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육신이 아니라 영혼이 얻는 것이며, 영혼이 곧 사람의 본질이다. 하느님의 입김으로 숨쉬며 살게 된 사람은 결코 흙만으로 만족하고 행복을 누릴 수 없으며, 오직 하느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오늘 이 점을 깊이 묵상하며, 세상의 소리에만 귀 기울이지 말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자. 세상만 바라보지 말고, 하느님을 바라보며 살아가자. 세상을 통해 행복을 얻으려 하지 말고, 하느님 안에서 행복을 구하자................◆
-주영돈 신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연중 13주일 금요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마태오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으로 히브리식 이름은 '레위'(마르코 2,14)이며. 직업은 세리(루가 5,27)였습니다. 세리는 직업상, 돈에 묻혀 지내는 사람이고 그 결과 영적이거나 종교적인 면에 대한 감각은 거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관세는 지방세로서 갈릴래아에서는 그 지방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가 거두어들였습니다. 그러나 관리를 두어 직접 징수하지 않고, 세관별로 임차료만 받고 일정한 기간 동안 관세 징수권을 민간인에게 빌려 주었습니다. 임차대 계약에 따라 실제로 관세를 징수하는 민간인이 곧 “세관원”입니다.
세관원은 자주 이방인들과 접촉할 뿐 아니라 터무니없는 관세를 많이 매겨 부당하게 치부했기 때문에 직책상으로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유대교를 올바로 믿으려면 세관원직을 떠나야만 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하므로, 반종교적이고 이교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마태오를 보신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 오너라"하시고 그를 당신의 제자로 선택하십니다.
마태오는 부름 받음의 기쁨과 친구들에게 이별을 고하려고 큰 잔치를 차려, 그의 집은 동료들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도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이를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어찌하여 죄인들과 어울리느냐'고 질타를 합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죄인들이라며 상종하지 않았고, 세리들과 창녀들을 대표적인 죄인들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런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매우 수치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서슴없이 죄인들과 어울리셨습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관원들과 죄인들의 친구로구나!”(마태 11, 19; 루가 7. 34)하는 비방을 들으셨겠습니까!
어쩌면 표면상으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이 질책은 옳은 듯합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엄격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자신들을 축성된 사람들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거룩하게 행동하며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과의 접촉을 멀리해서 양심의 지순(至純)성을 보전하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이 올바르다면, 성인(聖人)들인 자신들을 먼저 불러야 하며, 경건하지 못한 세리들은 부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의 대답과 행동이 세리와 죄인들을 칭찬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분명히 병자라고 하셨고, 죄인을 분명히 죄인이라고 부르십니다. 의사가 환자들에게 관심을 두는 것은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도 죄인을 부르는 것은 죄인을 회개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리나 죄인이 되어야 한다는 이론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마음의 태도이며 그 태도에 따라 참된 하느님 나라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토록 거칠게 저항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어찌해서 잘못된 것입니까?
그들은 한 마디로 모세의 율법을 철저하게 지킴으로써,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고, 하느님의 구원을 쟁취할 수 있다는 종교적 신념을 갖고 살았던 자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이 삶의 전부였습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는 대 원칙을 온몸으로 살았던 그들은 종교 지도자로서 백성에게 율법을 통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을 가르쳤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실천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는가 하면, 율법 제일주의적인 폐쇄적 사고로 기피와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율법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스며들 공간을 근본적으로 차단해 버린, 그들의 폐쇄적인 사고였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그들의 논리는, 우리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머무를 공간마저 빼앗아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참된 거룩함은 자신의 죄의 상태를 인정하고 거기서 해방되고자 하는 겸손한 마음에 있습니다. 이 죄인은 자기에게 없는 것도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비움을 괴로워하며 그 비움이 채워지기를 열망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높은 곳으로부터의 도움을 갈구합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은총을 받기 위해 갖추어야 할 근본조건입니다.
죄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용서받을 수도 받은 것에 대한 감사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멘.................◆
새벽을 열며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똑같은 음식을 먹었지요. 그러나 형은 하나의 그릇에 먹고, 동생은 두 개의 그릇에 먹었습니다. 두 개의 그릇에 먹는 동생은 그의 음식을 두 그릇에 나누어 담았어요. 한 그릇에는 쓴 음식, 다른 한 그릇에는 단 음식을. 반면 한 개의 그릇에 먹은 형은 단 음식과 쓴 음식을 섞어 먹어야 했지요.
세월이 흐름에 따라 동생은 점점 쇠약해졌습니다. 반면에 형은 건강해졌습니다. 마침내 동생은 심각한 병을 앓았고, 죽음을 앞두게 되었어요. 동생은 형에게 물었습니다.
“형과 똑같은 음식을 먹었는데, 형은 건강하고 나는 왜 이렇게 아픈거지?”
형이 말했습니다.
“너는 두 그릇으로 음식을 먹었지. 너는 오직 음식의 단맛을 제일로 여겼던 거야. 음식의 영양가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지. 그러나 나는 맛보다도 영양가를 소중히 했던 거야. 내가 쓴 음식과 단 음식을 한곳에 섞어 먹은 것이 바로 이 때문이지. 어떤 맛의 음식이라도 나는 버리지 않았다. 나는 모든 음식을 영양가로서 섭취했던 거야. 그랬더니 그 음식들은 나의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동생은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두 개의 그릇에 담긴 쓴 음식과 단 음식을 한 그릇에 섞어 먹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후 동생은 잃었던 원기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요. 단 음식이 내 몸에도 좋을 것 같지만, 그 모든 것을 골고루 섭취했을 때 더욱 더 몸에 좋은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인간 세상의 삶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우리들은 좋은 사람들만을 만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꼭 좋은 사람들만 만날 수 있을까요? 때로는 나쁜 사람을 만날 수도 있는 것이며, 이런 이들과의 만남을 피할 수만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좋은 사람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그 과정 안에서 내 자신도 좋은 사람이 되어가니까요.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세리와 죄인과 함께 하는 예수님을 못마땅해 합니다. 당시에는 부정한 죄인들과 함께 하는 사람 역시 부정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부정한 죄인들이야말로 구원받아야 할 대상임을 분명히 하시면서, 바리사이들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지은 죄를……. 나의 죄를 보고서 “너의 죄를 보니 나는 너와 도저히 함께 하지 못하겠다.”고 주님께서 나를 내치신다면 어떨까요? 이 사실은 도저히 인정하지 않으면서, 내가 생각하는 죄인인 저 사람과는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우리들의 모습들……. 얼마나 이기적인가요?
이 세상은 죄인과 의인. 이렇게 둘로 정확히 나누어서 만날 수 없는 세상입니다. 아니 그렇게 살 수도 없습니다. 음식을 나누지 않고 섭취해야 건강해질 수 있는 것처럼, 죄인과 의인이 함께 하는 이 세상에서 주님의 말씀을 따르면서 사는 것이 영적으로 건강해지는 비결인 것입니다.
지금 나는 어떤가요? 건강하십니까?
편식하지 맙시다.
빠다킹신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정희 수녀-
◆내가 어렸을 때 우리집에는 사랑채가 있었다. 사랑채에는 늘 손님이 묵어가곤 했다. 그러나 가까운 친척이나 절친한 사람이 오면 안채에 들어와 함께 식사를 했다. 안채에서 같은 식탁에 앉는다는 것은 서로 허물이 없는 사이에만 가능한 것이다.
예수님 당시 세리는 죄인 취급을 받았다. 세리들은 관세를 거둬들이느라 이방인들과 접촉을 하였으며 터무니없이 세금을 많이 받아 치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평판이 나쁜 세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신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인간적인 기준이 아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마태오는 세리였으므로 그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었고 율법에서 소외된 자였으며 그래서 외로운 삶을 살았을 것이다. 예수께서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오를 보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자 마태오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 나섰다.
예수께서는 마태오뿐만 아니라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을 식탁 공동체에 초대하셨다. 식탁 공동체에 초대받는다는 것은 모든 것이 수용되었다는 의미이다. 유다인들에게 식사는 중요하게 생각되었으며 식탁은 성스러운 자리였다. 유다인들은 불결한 자와 함께 식사를 하면 더러워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에게 더러운 자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고 비난했던 것이다.
마태오와 죄인들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과 한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고 나서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을 것이다. 한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한다는 것은 친밀한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예수께서는 마태오와 죄인들을 한 인격체로 받아들인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신앙의 틀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예수께서는 마태오와 죄인들의 죄를 따져 묻지 않으신다. 이제 용서의 체험을 한 마태오와 죄인들은 예수님의 공동체 안으로 깊이 들어오게 되고 이들은 전존재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고 또 그 공동체를 위하여 투신했을 것이다. 나는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던 큰 회심의 체험이 언제 있었던가?
“나를 따라라.”
-양승국신부-
<죄 중에 있을 때의 느낌>
후배 수사님들의 여름 세미나 겸 회의 차 바닷가에 위치한 캠프장에 다녀왔습니다. 어디 가나 염불은 뒷전이고 잿밥에만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지요. 저 역시 틈틈이 ‘손맛’ 좀 보러 갯바위로 나갔었는데, 오랜만에 풍성한 수확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낚싯대 끝이 휘청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강력한 어신이 왔었는데, 겨우 끌어올려보니 족히 2kg는 나갈 정도의 시커먼 돌 우럭 한 마리가 걸려있었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솥뚜껑만한 ‘눈먼’ 광어까지 4마리나 협조를 해줘서 정말 신바람이 났습니다.
열심히 낚시를 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넓은 바다로 힘차게 릴낚시를 던지는 그 활기찬 얼굴로, 그 설레는 마음으로, 그런 큰 기대를 안고 주님께로, 성체 앞으로 나아가야 할 텐데, 하는 생각 말입니다.
이번에도 돌아오면서 어김없이 이런 반성이 되더군요. 흥미진진한 빅 매치 축구시합이라면 꼭두새벽에라도 일어나면서, ‘손맛’ 좀 보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수고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주님과의 만남, 그분 현존 체험을 위해서는 얼마나 투자하는가, 하는 반성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짜릿한 손맛, 갯바위 위에서 맛본 그 쫀득쫀득한 우럭 회 맛이 아직도 생생하니 참으로 큰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죄인 중의 죄인이었던 세리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심각한 죄 중에 있을 때, 아무리 기를 써도 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할 때, 그래서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의 느낌은 어떠합니까?
맑고 따뜻한 온탕 속에 온 몸을 담그고 있는 포근한 느낌이 절대로 아닐 것입니다. 투명하고 시원한 냉탕 속에 들어가 있는 서늘한 느낌도 아니겠지요. 아마도 시궁창 냄새가 나는 미지근한 구정물 속에 쳐 박혀 있는 느낌일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맞이하는 하루 역시 팍팍할 것입니다. 피곤할 것입니다. 짜증날 것입니다. 아무리 날씨가 청명해도 하늘은 회색빛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발걸음도 무겁겠지요. 매일이 기쁨과 보람으로 다가오기보다는 그저 부담스럽기만 할 것입니다. 매사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심각한 영혼의 질병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리 마태오가 그랬습니다. 그가 택한 직업상 어쩔 수 없이 그의 일거수일투족 전체, 그의 삶 자체가 죄였습니다. 그는 눈만 뜨면 하느님께, 동족들에게, 가족들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밥 먹듯이 습관처럼 죄를 지으며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마음으로는 하루 빨리 이런 죄로부터 벗어나야겠다는 간절한 열망이 있었지만 마음뿐이었습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생각으로는 수백 번도 더 죄의 수렁에서 빠져나와야겠다고 다짐했었지만, 생각과는 달리 몸은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이런 마태오에게 한 줄기 강렬한 구원의 빛이 다가옵니다. 생명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바로 예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나를 따라라.”
오늘도 세관 앞에 하릴없이 앉아 의미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던 마태오, 과연 이렇게 살아도 되나, 돌파구는 없을까, 고민을 거듭하던 마태오에게 예수님의 음성이 전달됩니다.
“나를 따라라.”
다행히 자신의 영적 상황을 제대로 진단하고 있었던 마태오였습니다. 죄로 인해 비참해진 오늘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던 마태오였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 나름대로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던 마태오였습니다.
그런 연유로 인해 마태오는 주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처지가 필설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비관적이었지만, 주님의 따뜻한 음성에 힘을 얻습니다. 마침내 그 오랜 죄의 사슬을 끊고 힘차게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부족하고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오늘 다시금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보시다시피 너무도 연약하니 주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멀고도 험한 우리 각자의 성소여정, 다시금 힘차게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주시길 청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정호신부-
죄인들을 위해서, 죄인들 가운데서, 죄인들과 함께 하신 예수님
사람을 대하시는 하느님에 대해 사람들은 순간 순간 착각을 일으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완전하심 때문인지 몰라도 사람들은 하느님이 당신을 닮은 완전한 사람만을 좋아하신다 생각하는 일이 자주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뉘우치는 회개의 생활은 우리에게 분명 중요합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거룩함을 닮도록 초대하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우리는 하느님처럼 거룩하게 사랑으로 온전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처음 만나는 우리의 모습마저 온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말은 하느님을 알기 전 사람들의 모습은 하느님에게도 사람에게도 온전하지 못함이 당연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사람에게 주어져 있는 하느님의 모상은 사라질리가 없지만 하느님을 모른채 세상을 사는 사람은 세상의 법대로 살기 마련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그런 이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시고 당신의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예수님을 따르고자 회개로 돌아선 사람이 아닌 죄인 상태 그대로 머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우리가 너무 잘아는 마태오입니다. 세리였던 그가 세관 앞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삶을 정리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주님 곁에 모여듭니다. 같은 자리에 앉아서 음식을 먹고 마십니다. 누가 죄인인지 누가 의인인지 구분도 안됩니다. 그런 상황 속에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의 생각 속의 하느님과는 너무도 다릅니다.
그런 혼란함은 어찌보면 예수님의 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의 생각에 우리를 동참시킵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께 어울리는 사람은 따로 있으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냥 불쌍한 사람이라는 하나의 틀로 불평등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우리의 생각에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언젠가 주님을 만나고 알게 되면서 우리가 그분 앞에서 모두 죄인이었음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의 자녀가 될 때 모든 죄를 우리의 회개보다 당신 사랑 안에서 씻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죄인이었으나 그분을 만났고, 그 죄를 다 정리하기 전에 그 다짐만으로도 그분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느님을 정성껏 섬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듯 모든 이가 그렇게 사랑하며 사는 것이 주님의 뜻임을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세리가 세관 앞에 앉아 있습니다. 언젠가 그 세리가 바로 나였음을 잊지 맙시다. 그러니 이제 길에서 마주치는 세리에게 경멸의 시선을 던지지 마십시오. 언젠가 그가 하느님 곁에 있을 때 우리의 입과 맘이 막히지 않게 말입니다.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아모 8,4-6.9-12 (내가 이 땅에 굶주림을 보내리라. 양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
복 음 : 마태 9,9-13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오늘 복음은 마치 법정에서 죄인을 놓고 벌이는 변호사와 검사의 한 판의 대결 장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범인은 세리 마태오를 말하는데 마태오를 사이에 두고, 그런 죄인은 영구히 추방하여 선한 사람들이 물들지 않도록 격리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검사격인 율법 학자들과,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살려고 애쓰는 사람에게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변론하는 예수님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지요.
오늘 죄인으로 등장하는 마태오의 직업은 세리입니다. 세금을 거두는 사람으로 예수님 시대에 가장 부정한 사람의 대명사로 불렸었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리를 아주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만나는 것만으로도 재수 없게 여기고 손가락질을 하며 부정타는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단지 세금을 걷기만 했다면 그렇게까지 미움을 받지는 않았을 터인데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세리는 식민 지배하의 로마의 앞잡이로서 로마에 바칠 세금을 거둘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재물을 축재하기 위해서 훨씬 더 많은 돈을 거두어들이면서 동족을 괴롭혔고, 협조하지 않으면 로마 군인들을 불러서 칼과 창으로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이제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이스라엘 사회의 지탄의 대상자가 되어 오직 돈만을 믿으며 살 수밖에 없게 되었지요.
이 세리 중의 한 사람인 마태오라는 사람이 이제는 인간답게 살고 싶어졌는가 봅니다. 새로운 길을 가고 싶어하는 그를 보시고 예수님께서 부르시지요.
?’나를 따라라.?“(마태9,9)
세리 마태오는 얼른 따라나섭니다. 그 동안의 삶에서 얼마나 떠나고 싶었으면 그 한마디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겠습니까? 마태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 하였다.?“(마태9,10)
이렇게 누구도 상대하지 않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거두어 주시고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시지요.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어울리는 예수님을 율법 학자들은 봐줄 수가 없었습니다. 죄인이요 악인인 세리들을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따져 묻습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9,11)
뒤에서 들으라는 듯이 제자들에게 따져 묻는 율법 학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2-13)
이렇게 마태오를 변론해 주시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이 위선적인 사회가 악인으로 몰아세우는 사람들을 거두고 희망을 주는데 있음을 드러내시지요.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약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은 선인과 악인으로 이웃을 나누는 사회 통념이 아니라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에 사랑을 지닌 사람은 강한 사람보다 약한 사람에게 정이 더 가게 되어 있지요. 마음에 사랑이 없는 사람은 있는 사람들 편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 하느님의 마음은 어떠실까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4,8)
하느님의 마음이 어디로 흘러가실지는 너무나도 명약관화한 일이지요.
부모의 마음도 똑같습니다. 어떤 부모에게 성한 자식과 장애가 있는 자식이 있다고 한 번 가정해 보십시오. 부모의 마음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부모에게 정말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당연히 장애가 있는 자식에게로 기울 것입니다. 또 하는 대로 성공하는 자식이 있는 반면에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하는 것마다 실망을 안겨주는 자식이 있다고 했을 때 부모의 마음이 어디로 더 가겠습니까? 말할 것도 없지요. 이것이 바로 부모의 마음이고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역시 그런 마음으로 살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이렇게 생각합니다.
??열심히 미사에 잘 나오고, 신앙 생활 잘 하고, 나쁜 짓 안 하면 그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준비된 나?‘에서 ??실천하는 나?‘로 결단을 내릴 것을 예수님께서는 늘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실천을 통해서 신앙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대로 회개하는 사람의 잘못을 감싸주고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 이것이 사람을 살리는 길이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기회와 용기를 주시고 새로운 길을 제시했던 세리 마태오는 후에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가 되지요.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처벌이 아니라 용서이며, 무엇보다도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방탕한 삶에 젖어 살던 한 젊은 청년이 있었습니다. 얼마 후 청년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방탕한 삶을 청산했습니다. 청년은 가로등불을 켜고 끄는 새로운 직업을 갖게 됐지요. 하루는 주정뱅이 친구들이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친구,예수 믿는 재미가 어떤가??“
청년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가로등불을 끌 때마다 뒤를 돌아본다네. 그것은 내 과거의 어둠이었네. 그러나 내 앞에 펼쳐진 등불의 긴 행렬을 보며 위안을 받지. 그것은 내 미래의 모습일세.?“
주정뱅이 친구들이 낄낄거리며 다시 물었습니다.
?’이 멍청한 친구야. 그러면 마지막 등불이 꺼지고 나면 어디로 갈 것인가??“
청년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말게. 마지막 등불이 꺼지면 새벽이 온다네. 아침이 오면 등불은 필요 없다네.?“
그렇지요. 우리는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특히 신자라면 끊임없이 자기의 잘못을 정화하며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지요.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들은 세리 마태오를 끝없이 단죄하고 죄인으로 몰아 부치며 그를 감싸는 예수님까지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뉘우치는 마태오에게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주시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셨지요. 바로 이것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산 제물이요, 이웃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제물을 잡아바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것, 그리고 이웃과 희망을 나누는 것이지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경솔한 언행으로 자칫 오늘 율법학자들처럼 사람을 죽일 수가 있습니다. 절대 해서는 안될 일이지요. 병자를 찾아오신 예수님의 마음이 되어 불우한 이웃에게 희망을 주는 것, 이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큰 제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 “혹시, 저더러 따르라는 말씀입니까?” †
-박상대 신부 -
“Mens sana in corpore sano!”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했던가? 병든 자의 아픔은 육체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은 라틴어 속담이다. 육체가 약해지면 영혼도 약해지기 마련이다.
예수님 시대에 한센병(나병) 등 모든 종류의 피부병 환자들을 물론이고 갖가지 육체의 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은 죄인으로 취급받았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다. 그러나 실제로 모세의 율법이 규정하는 바에 의하면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은 사제의 선언에 의해 스스로 ‘부정(不淨)한 사람’이라고 외쳐야 하며, 병이 있는 동안 그 사람은 진지 밖에 자리를 잡고 따로 살아야 하기는 했다.(레위 13,46)
그러나 율법이 그를 죄인(罪人)으로 규정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누가 병자들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격리시키고 소외시켰는가? 바로 사람들이다. 그들이 바로 스스로의 죄를 씻기 위해 하느님께 날마다 제사를 드려야 했던 사제들이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다.
물론 하느님 앞에 죄인이 아닌 사람은 없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라도 사람이 사람을 죄인으로 규정하지 못한다. 죄인은 스스로에 의해 고백되거나 하느님에 의해서만 선언될 뿐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람을 죄인으로 규정하기보다 가급적 죄를 묻지 않으시며, 묻더라도 용서하기 위해 물으시는 분이시다. 어제 복음에서 중풍병자의 육체적인 병보다 정신적인 병을 더 걱정하신 예수께서 그의 병을 치유하기에 앞서 죄를 먼저 용서하여 주신 점만 보아도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다. 이제 예수께서는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그릇된 사고(思考)를 바로잡아 주신다.
오늘 복음을 보자. 전직이 세리였던 마태오가 제자로 불림을 받는다. “나를 따라 오라.”는 예수님의 한 말씀에 즉각 따라 나선 마태오다. 단 한 구절의 간략한 이 대목은 사실상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가파르나움 도읍의 나들목에 자리를 잡고 로마제국을 위해 각종 세금을 거둬들이는 세리 마태오는 이미 당대의 상업적 죄인으로 취급받았다.
만약 내가 세리였다면 어떻게 했겠는가?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이 설마 나를 향한 말씀이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왜? 본인 스스로가 죄인임을 알기 때문이다. 복음의 이 대목을 기록한 마태오복음사가 스스로가 자신을 죄인의 그룹에 넣고 있다. 그러면서 누구를 부르는 것인지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을 것이다.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마태오는 자신을 가리키며 “혹시, 저 말입니까?”하고 반문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태오의 반신반의가 믿음으로 기울었다. 이미 여러 제자들뿐 아니라 무리를 거느리고 다니시는 예수께서 자신을 지목한 것이다. 기회는 왔다. 언젠가는 그만 두어야겠다고 생각한 세리의 직업을 벗어 던지고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그래서 마태오는 아무런 미련 없이 예수를 따라 나선 것이다.
하느님께서 예수와 함께 예수 안에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신다. 하느님의 말씀과 행동의 핵심은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과 스스로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대한 자비와 용서이다. 마태오는 자신의 복음 안에서 이러한 핵심적인 내용들을 계속해서 피력한다. 오늘 복음도 마르코가 전하는 세리의 소명사화(마르 2,14-17)를 옮겨 쓰고 있다. 그런 와중에도 마태오는 자신의 편집의도에 집중한다.
마태오의 편집 의도는 소외된 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관심이다. 그래서 세관원의 소명사화에서 마르코가 말하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는 이름을 자신을 지칭하는 마태오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결국 마태오는 소명사화의 주인공을 자신의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이것은 마르코가 정작 예수의 제자로 불림 받은 알패오의 아들 세관원 레위의 이름을(마르 2,14) 12제자의 명단에는 마태오(마르 3,18)로 기록하고 있는 부분을 감안하여 합리적으로 고쳤다고 볼 수 있다.
이로써 예수님 시대에 죄인으로 분류되었던 세관원이 제자의 반열에 들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마태오를 당신의 제자로 불러 그냥 따라다니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을 제자로 삼은(마태 4,19) 뒤에 베드로의 집에 들러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시자 일어나 예수께 시중을 들었다는 일(마태 8,14-15)을 보더라도 추종은 곧 친교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당신을 따라나선 마태오의 집을 방문하여 그의 동료 세리들과 많은 죄인들과 함께 식탁공동체를 주관하시면서 친교(親交)를 선물로 주신다.(10절)
물론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를 보고 못마땅해 한다.(11절) 그래서 제자들에게 “당신네 선생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음식을 나누는 것이냐?”고 물었던 것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흑백(黑白) 친교 불가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흑백의 논리를 ‘의사와 병자’(12절), ‘제사와 자선’(호세 6,6 참조), ‘죄인과 구원’(13절)의 원리로 보시면서 이 둘은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대상임을 천명하신 것이다.
이 땅에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신 이래로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일이 율법의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되었다. 걸어 다니시고 말씀하시며 행하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자연과 마귀와 죄 위에 군림하는 최고의 권위로써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선물을 이 땅에 선사하시는 것이다.
남을 부정하다고 하여 자신이 정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남을 죄인으로 규정한다고 자신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다. 세리 마태오와 같이 오직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며 ‘나를 따르라’는 거룩한 부르심을 추종하여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스스로 실천할 때 하느님 앞에 거룩한 자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다.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 19,2).........◆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전례중심)> : † 내가 반기는 것은 사랑이다 †
우리는 산상수훈 이후 주님의 모습에서 우리 인간에게 무한한 용서와 자선을 주시는 내용을 계속 묵상하고 있습니다. 어제복음의 중풍병자에 대한 용서와 자비에 이어 오늘복음에서도 용서와 자선에 대한 내용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에게는 우리 인류 모두가 용서와 자선의 대상입니다. 다시말하면 열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는 손가락이 없다는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열손가락 모두가 다 소중하고 유용하고 이쁘게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스 민담에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동물학교에서 소풍가는 날, 엄마 토끼는 자기 아이가 도시락을 가져가지 않은 것을 알고 부리나케 도시락을 가지고 학교로 달려가는 중이었습니다.
거의 학교에 다 왔는데 뒤에서 다람쥐가 헐레벌떡 뛰어와서 토끼에게 말합니다. "부탁이 있는데요 제 자식이 오늘 도시락을 잊고 갔지 뭐예요, 제 아이의 도시락도 좀 갖다 주세요." "그렇게 하지요. 그런데 댁의 아이를 어떻게 찾지요. 내가 얼굴을 모르는데" 그러나 다람쥐는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학교에서 제일 잘 생긴 아이를 찾으면 되니까요. 부탁합니다."
토끼는 다람쥐의 도시락을 받아 학교에 가서, 자기 아이 도시락을 전해주고 다음 다람쥐 아이를 찾아보았습니다.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람쥐에게 도시락을 되돌려 주면서 말하길 "죄송해요 어쩔 수 없었어요. 아무리 눈 씻고 찾아보아도 댁의 아이가 누군지 알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제 아이보다 더 잘생긴 아이는 그 학교에 없었거든요" ............자녀에 대한 부모의 마음이 곧 주님의 마음입니다.
오늘복음에 등장하는 인물인 세리도 세상에서는 미운털같은 왕따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세리라는 직업이 이스라엘 사람에게서 세금을 거두어 침략자인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세리는 용서받기 어려운 미운 털이 박힌 죄인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눈에 비친 그 세리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 맞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세리를 제3자적인 이웃으로 보지 않고 부모와 같은 심정으로 바라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부모의 마음으로 죄인이었던 세리를 용서해 주시고 사랑하고 계십니다.
며칠전 전방부대에서 젊은 군인이 뚜렷한 이유도 없이 많은 동료군인들을 사살했습니다. 세상은 그 청년을 죄인으로 볼 것입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청년과 그 가족들은 상대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살인자 군인의 부모는 비록 죄인이지만 자기 자식을 어떻게 바라볼까요? 남의 관점에서 보는 것과 부모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마음의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 살인자의 부모는 지금 그 자식이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울고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등장인물인 세리도 당시 세상 사람들로부터 용서받지 못할 미움의 대상인지는 모르지만, 부모의 마음에서 보는 예수님은 세리 마태오를 자비와 사랑으로 마음으로 거두어 들이십니다. 즉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온 인류에게 전하고 있는 장면을 우리는 보고 감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복음에서 혼자만 감동하지 말고 주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허물 많은 죄인임에 틀림없지만 우리를 용서하시고 다시금 불러주시는 주님의 넘치는 사랑과 자비 때문에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고, 용기를 내어 주님의 자선을 본 받아 실천하는 마음으로 이웃에게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돈몇푼 들고와서 형식적으로 미사에 참례하고 봉헌한다고 올바른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용서와 자비의 마음으로 이웃에 가서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올바른 신자라고......말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배워라.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좀 더 자세하게 묵상해 보기로 합시다.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한 일들 중의 하나는 제자를 뽑는 것이었습니다. 마태 9,9-13은 예수님이 세관에 앉아있던 세리 마태오를 뽑은 뒤에 그의 집에서 식사를 나눈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본문을 따온 마르 2,14-17과 비교하면 몇 가지 차이점이 눈에 띕니다. 우선 세리의 이름(마태오)을 밝혀놓았고, "내가 원하는 것은 자비이지 제사가 아니다"(13절)라는 말씀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흐름은 마르코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활동하던 당시 이스라엘에서 '세리'라는 직업은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세리는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일을 대신 해 주는 자들이었으니 비록 같은 민족이라 해도 다른 유다인들의 미움을 산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의 법칙에 따르면, 점잖은 유다인이라면 그들과 식사는 커녕 대면도 안 하는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의 집에 들러 밥상을 받았음은 물론, 많은 동료 세리들과 죄인들까지 몰려들어 같이 식사를 했습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시비를 겁니다.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는 것이오?"(11절) 어떤 연유로 바리사이들이 세리의 집에까지 왔는지는 모르나, 그들의 지적은 바리사이의 기준으로 볼 때 정확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름지기 종교 지도자였으니 의인임이 분명했고, 세리는 죄인이었으니 한 상에 둘러앉을 수 없는 법이었습니다. 그 때 예수는 '의사는 건장한 자가 아니라 병자에게 필요하다'는 말씀을 합니다.
위와 같이 '상황'으로 시작해 '말씀'으로 끝나는 이야기 구조를 두고 '상황어'라 부릅니다. 이는 예수님이 활동하던 당시의 문학양식으로, 어떤 말씀이 갖는 의미를 올바르게 전달하기 위해 적절한 상황과 묶어 주는 방법입니다. 만일 앞 뒤 상황 없이 예수님이 그저 '의사는 건장한 자가 아니라 병자에게 필요하다'라고 했다면, 독자는 틀림없이 이 말씀의 뜻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과 식사 - 바리사이의 도전'이라는 상황을 정확히 지정해 줌으로써 말씀의 뜻이 훨씬 좁혀질 수 있는 것입니다.
호세 6,3-6은 야훼가 제사보다는 정의를 바라는 분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왕정이 시작되면서 제사는 보다 화려해지고 규격화되었습니다. 그러나 형식만 그럴 듯할 뿐 하느님의 진정한 뜻인 사랑은 실천하지 못하고 있었지요. 예언자 호세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합니다.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6절). 로마 4,18-25은 신앙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이어받아,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이 장차 구원을 받으리라는 바오로의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진 이들이 구원을 받지, 결코 유다인이라는 민족적인 기준이 하느님의 구원을 좌지우지 못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언행에서 우리는 언제나 혁명적인 측면을 발견합니다. 으례 그러려니하고 넘어가던 일들을 더 이상 넘어가지 못하게 만듭니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을 똑같이 창조했으며, 죄인으로 분류되어 지레 겁먹고 있는 이들에게도 같은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차이가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러니 사회적으로 잘 나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천대받고 멸시받는 죄인들의 권리를 찾아 주는 일이 하느님의 뜻일 겁니다. 의사는 병자에게 특히 필요합니다.
우리는 오늘복음의 마태오를 변화시킨 성찬과 같은 것을 매일 주님께서 마련하신 거룩한 집에서 미사를 동해서 성찬에 초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성찬이 얼마나 축복된 것인지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몇십만원짜리 식사를 하는 것은 흡족한 성찬이라고 생각하면서 흥분해 이웃에게 자랑하려고 부산을 떨지만, 그보다 더 가치있는 예수님의 몸을 먹은(영한) 성찬 식사는 이웃에게 자랑하지도 못합니다. 아니 아예 자랑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들은 세속적으로 인정받는 것에 목말라 하기 때문에 예수님께 인정받는 가치를 과소 평가함으로써 성찬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복음에서 마태오를 비롯한 죄인들은 예수님과의 성찬 한번에 모두 감동하고 완전히 변화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님께 인정받고 사는 삶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할 때 우리의 삶도 마태오와 같이 변화될 것입니다. ......◆
[두올묵상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