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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 『밝은 방』 제37장~제42장 정리노트
[1] 제37장 — 정지
1. 소설의 빈약한 이미지와 사진의 충만한 이미지
(1) 바르트는 사르트르(Jean-Paul Sartre)가 소설 읽기와 정신적 이미지의 관계를 설명한 대목을 가져온다. 독자가 소설에 깊이 사로잡혀도, 그 읽기가 언제나 뚜렷하고 완전한 시각적 장면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소설은 언어의 연쇄를 따라가며 독자의 상상력을 움직이지만, 그 이미지의 모양은 고정되지 않고 독자마다 다르게 생겨난다.
(2) 사진은 이와 달리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이미지다. 사진은 구체적인 외양을 한꺼번에 제시한다. 바르트는 이 점을 사진 이미지의 충만함(fullness) 또는 완결성(integrality)으로 표현한다. 사진은 소설처럼 묘사를 이어가며 장면을 구성하지 않아도, 한 장의 이미지로 눈앞에 놓인다.
(3) 그렇다고 소설에 이미지가 전혀 없거나, 사진에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소설의 이미지는 언어를 따라 상상 속에서 구성되고, 사진은 시각적 형상이 직접 주어진다는 차이를 말한다. 소설에서는 의미의 흐름이 중요하게 작동하며, 사진에서는 구체적 이미지의 현존이 먼저 두드러진다.
(4) 사진이 충만하다는 말은 사진이 모든 진실을 담거나 더 이상 해석될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사진은 보이는 형상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관해서는 다양한 코드와 설명이 개입할 수 있다. 바르트가 강조하는 것은 사진의 존재감과 의미 해석을 구별하는 일이다.
2. 이미지의 충만함과 의미의 해석
(1) 한 문장은 독자에게 여러 상황과 표정을 상상하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가 방에 들어왔다”라는 문장은 그가 왜 들어왔는지, 방이 어떤 곳인지,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결정하지 않는다. 언어는 장면의 세부를 열어 둔 채 의미를 전개할 수 있다.
(2) 사진은 반대로 구체적인 외양을 제시한다. 그러나 사진 속 인물이 누구인지, 어떤 사건이 벌어졌는지, 그 장면이 왜 중요한지는 사진만 보고 모두 알 수 없다. 사진이 시각적으로 충만하다는 것과 사진의 의미가 완전히 확정된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3) 사진을 의미의 코드에 맞추어 읽을 때 우리는 이미지 자체를 본다기보다, 이미 알고 있는 문화적 범주와 연결해 해석할 수 있다. 이때 사진은 하나의 메시지나 상징으로 정리된다. 바르트가 구별하는 사진의 충만함은 그러한 의미 작용과 구분되는, 대상이 실제로 거기에 있었다는 감각과 연결된다.
(4)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아우라(aura) 논의와 비교하면, 사진의 대량 복제와 유통은 유일한 현존의 권위를 약화할 수 있다. 동시에 사진의 충만한 이미지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접근을 허용한다. 이 비교는 사진의 대중적 성격과 존재론적 흔적을 함께 생각하게 하지만, 바르트의 ‘그것은 존재했음’과 벤야민의 아우라를 같은 개념으로 볼 수는 없다.
(5) 신디 셔먼(Cindy Sherman), 빅터 버긴(Victor Burgin)과 같은 작가들의 작업은 사진 이미지를 사회적 기호와 담론 속에 다시 놓는다. 광고나 대중매체의 시각 언어를 가져오거나, 사진과 텍스트를 결합해 이미지가 어떤 권력과 젠더 규범을 반복하는지 드러낼 수 있다. 이는 사진이 의미를 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사진의 의미가 사회적 맥락 속에서 구성된다는 점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3. 사진과 영화의 차이
(1) 영화 화면에도 실제 촬영 대상이 존재한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이미지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며 앞뒤 장면과 관계를 맺는다. 한 장면은 다음 장면으로 밀려나거나 당겨지고, 관객의 시선은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간다. 사진 한 장처럼 그 순간에 오래 머물도록 붙잡히지는 않는다.
(2) 바르트에게 영화의 대상은 움직임과 연속성 속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실제 삶의 흐름을 그대로 복제하는 매체라기보다, 연속적인 편집과 서사로 삶의 흐름을 구성한다. 반면 사진은 그 흐름을 끊고 한순간을 따로 고정한다.
(3) 바르트는 사진이 연속적인 ‘구성적 스타일’을 깨뜨린다고 표현한다. 사진은 장면을 다음 장면으로 이어가지 않는다. 촬영된 순간을 정지시켜 관객 앞에 놓고, 그 이미지가 속했던 과거를 돌아보게 한다.
(4) 이 대목을 구성(composition)과 구축(construction)의 차이로 확장해 생각할 수 있다. 구성은 여러 요소를 화면 안에서 조화롭고 완결된 질서로 배치하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고, 구축은 이미지가 만들어진 과정과 요소들의 접합이 드러나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이 구분은 사진을 살펴보기 위한 해석의 틀이며, 바르트의 영화와 사진 구분이나 러시아 구성주의를 그대로 대체하는 공식은 아니다.
(5) 안셀 애덤스(Ansel Adams)의 풍경 사진은 정교한 구도와 명암의 조직을 살펴보는 사례가 될 수 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의 사진은 결정적 순간과 화면의 균형이라는 기준으로 읽히곤 한다. 반면 신디 셔먼, 빅터 버긴, 토마스 스트루스(Thomas Struth), 제프 월(Jeff Wall), 그레고리 크루드슨(Gregory Crewdson) 등의 작업은 연출·차용·텍스트·촬영 과정이 사진의 의미 형성에 어떻게 관여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이 작가들을 하나의 방식으로 묶거나 모든 동시대 사진이 같은 미학을 따른다고 할 수는 없다.
4. 미래가 없는 사진과 과거를 향한 역류
(1) 사진 속 대상은 한순간에 고정되어 있다. 그 이미지에는 다음 순간이 보이지 않는다. 사진을 바라보는 현재의 시선은 이미지가 기록한 과거로 되돌아간다. 바르트는 이 움직임을 과거를 향한 역류라고 설명한다.
(2) 사진은 미래를 제시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비장하고 우울하다. 사진 속 인물이 살아 움직였던 시간은 지나갔고, 이미지가 보여주는 순간은 다시 이어지지 않는다. 이 우울함은 사진 내용이 반드시 슬프기 때문이 아니라, 사진이 과거의 현존과 현재의 부재를 함께 드러내기 때문이다.
(3) 영화가 우울하지 않다는 말은 영화가 슬픈 내용을 담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바르트가 구별하는 것은 내용의 감정이 아니라 시간의 형식이다. 영화는 연속된 장면으로 앞으로 진행하는 듯한 시간을 만들고, 사진은 한 장면을 고정해 과거를 돌아보게 한다.
(4) 바르트는 사진을 카산드라(Cassandra)의 ‘거꾸로 된 예언’에 비유한다. 카산드라는 미래를 예언했지만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사진은 반대로 과거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현재에 내보인다. 사진은 한때 존재했던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것이 현재에는 이미 지나갔다는 사실도 알린다.
[2] 제38장 — 밋밋한 죽음
1. 사진작가와 죽음의 대리인
(1) 바르트는 시사 사진을 찍는 젊은 사진작가들이 자신을 죽음의 대리인으로 여기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사진은 현재의 사건과 살아 있는 사람들을 기록하지만, 촬영된 순간을 지나간 것으로 만들어 보존한다. 사진은 삶을 붙잡으려 하면서도 그 순간이 이미 사라졌다는 사실을 함께 드러낸다.
(2) 바르트는 사진의 역사적 출현을 19세기 후반에 일어난 죽음의 위기와 연결한다. 여기서 죽음의 위기는 종교적 의례가 약해지면서 사회가 죽음을 받아들이고 의미화하던 방식이 변했다는 그의 해석이다. 사진이 실제로 종교 의례를 대체하기 위해 발명되었다는 역사적 인과관계로 단정할 수는 없다.
(3) 바르트의 질문은 한 사회에서 죽음이 어디에 놓이는가 하는 것이다. 죽음이 종교적 의례에서 덜 다뤄진다면, 근대사회에서는 사진이 죽음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또 다른 자리로 기능할 수 있다. 사진은 살아 있는 모습을 남기는 동시에, 그 모습이 더 이상 현재의 생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담는다.
2. 의례 없는 죽음과 비변증법성
(1) 전통적 의례는 죽음을 공동체 안에서 다루고, 상실을 일정한 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게 했다. 바르트는 현대 사진이 그런 의례의 완충 없이 죽음을 이미지로 제시한다고 본다. 사진은 죽음을 숭고한 비극으로 고양하기보다, 한 존재가 있었다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담담하고 평평하게 보여준다.
(2) 바르트는 사진이 죽음과 고통을 해소하거나 다른 의미로 전환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비변증법적(undialectical)이라고 한다. 변증법(dialectic)은 대립과 부정을 거쳐 새로운 이해나 상태로 나아가는 사유 방식이다. 이에 비해 사진은 지나간 순간을 정지된 이미지로 붙잡고, 죽음을 다른 단계로 해결하거나 종합하지 않는다.
(3) 이 말은 사진이 언제나 치유와 위안을 줄 수 없다는 뜻으로 일반화하기보다, 바르트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사진 앞에서 겪는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는 어머니의 사진 앞에서 상실을 극복하는 카타르시스(catharsis)를 얻지 못한다. 그 사진은 어머니의 부재를 해소하지 않고, 살아 있었던 어머니와 지금 없는 어머니를 동시에 직면하게 한다.
(4)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의 효과로 설명한 카타르시스는 공포와 연민을 거쳐 감정의 정화에 이르는 경험이다. 바르트가 말하는 사진의 죽음은 이와 다르게, 고통을 이야기의 결말이나 정화로 바꾸지 않은 채 남긴다. 사진은 그에게 죽음을 매개하고 초월하는 장이라기보다, 죽음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붙들어 놓는 이미지다.
3. 사진을 응시하기 어려운 이유
(1) 바르트는 그림이나 조각을 찬미하며 감상할 수 있지만, 사진은 그와 다르게 견디기 어려운 충만함을 지닌다고 말한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은 그 사람을 다시 눈앞에 보이게 하면서 동시에 이미 부재한다는 사실을 강하게 제시한다.
(2) 그는 온실 사진을 똑바로 바라보는 일에서 벗어나려 하거나, 사진을 앨범과 책상 위에 놓는 의례적 행위로 다루기도 한다. 사진을 서랍에 넣거나 버리는 선택도 언급한다. 사진을 보지 않거나 정해진 자리에 두는 방식은 그 이미지가 일으키는 감정을 감당하기 위한 태도가 될 수 있다.
(3) 바르트는 이를 사람들이 성화상(holy image)을 직접 응시하지 않고 입을 맞추거나 그 앞을 지나가는 의례와 비교한다. 이때 사진은 미적으로 감상하는 이미지인 동시에, 죽은 사람과의 관계를 매개하는 개인적 물건이 된다. 모든 사진이 성물처럼 기능한다는 뜻이 아니라, 특정 사진이 개인의 사랑과 애도 속에서 의례적 가치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4) 벤야민의 아우라(aura)와도 비교할 수 있다. 벤야민은 기계복제 시대에 전통 예술의 아우라가 약화된다고 분석하면서, 사진에서 아우라가 인물 초상의 표정과 응시에 숨어들 수 있다고 보았다. 바르트의 사진 경험은 이미지가 관객을 향해 되돌아보는 듯한 감각과 맞닿는다. 두 사상가의 아우라 개념과 푼크툼은 동일하지 않으며, 여기서는 사진 앞에서 발생하는 응시와 의례의 경험을 견주어 볼 수 있다.
4. 사진의 정지와 활인화
(1) 사진이 멈추는 것은 대상의 움직임만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이다. 바르트는 사진의 정지를 과도하고 괴물 같은 상태로 표현한다. 사진은 현대적 매체이면서도 시간의 흐름을 멈춘다는 점에서 시대착오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성격을 지닌다.
(2) 그는 사진을 타블로 비방(tableau vivant), 즉 ‘살아 있는 그림’과 비교한다. 18~19세기 공연에서 사람들은 회화나 역사적 장면의 자세를 취한 채 움직이지 않고 서서 하나의 그림처럼 보였다. 사진도 살아 있는 인물이나 사물을 정지된 형상으로 붙잡는다.
(3) 이 비교는 사진 속 대상이 실제로 죽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촬영 순간의 움직임이 이미지 안에서는 멈추고, 관객은 살아 있던 대상이 정지된 모습으로 남은 것을 본다는 뜻이다. 제프 월이나 그레고리 크루드슨처럼 연출된 장면을 사진으로 만드는 작가의 작업을 타블로 비방과 비교할 수 있지만, 연출 사진과 사진의 일반적 정지성을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5. 사진은 추억과 같지 않다
(1) 바르트는 사진이 그 자체로 추억(memory)은 아니라고 말한다. 추억은 자신이 겪은 일을 특정한 시간과 관계 속에서 회상하는 방식이다. 사진은 과거의 흔적을 보여주지만, 그 흔적이 곧 관람자의 완성된 기억이 되는 것은 아니다.
(2) 친구들이 어린 시절의 사진을 보고 추억을 나누는 동안, 바르트는 자신의 과거 사진 앞에서 그들과 같은 추억을 얻지 못한다. 사진은 기억을 확인해 주기보다 오히려 사진 밖에서 살아 있던 기억의 흐름을 차단할 수도 있다. 그는 이를 대항 추억(counter-memory)이라고 부른다.
(3) 따라서 사진을 보며 과거의 일을 이야기하더라도 그 이야기는 사진 자체에 완성되어 있지 않다. 각자의 기억과 맥락이 더해진다. 같은 사진을 함께 보더라도 사람들이 떠올리는 경험과 정서는 같지 않을 수 있다.
6. 사진의 폭력성
(1) 바르트는 릴케(Rainer Maria Rilke)의 시처럼 추억이 방을 부드럽게 감싸는 방식과 사진을 대비한다. 사진에는 향기나 음악이 없고, 눈앞에 돌출된 사물의 모습이 놓인다. 사진은 감각의 흐름과 상상 속에서 번져가는 기억 대신, 한순간의 시각적 형상을 내민다.
(2) 사진이 폭력적이라는 말은 사진 내용이 폭력 장면이라는 뜻이 아니다. 사진이 시선을 강하게 점유하고, 한 번 제시한 형상을 관람자가 거부하거나 변화시키기 어렵게 만드는 형식적 힘을 가리킨다. 사진이 부드럽고 아름다울 수 있으면서도 폭력적일 수 있다는 말은 이 때문이다.
(3) 바르트는 설탕의 단맛도 지나치게 강하면 압도적일 수 있다는 비유를 든다. 사진의 충만함은 풍요로움인 동시에 부담이 된다. 사진은 많이 보여주기 때문에 편안한 것이 아니라, 보여준 것을 계속 바라보게 만들 수 있다.
[3] 제39장 — 푼크툼으로서의 시간
1. 세부에서 시간으로 확장되는 푼크툼
(1) 바르트는 앞부분에서 사진 속 세부 요소나 우연한 흔적을 푼크툼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형태나 사물이 아니라 시간 자체가 푼크툼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새로운 푼크툼은 특정한 세부의 모양보다 강도(intensity)의 경험이며, 그 강도는 시간과 죽음에서 온다.
(2) 사진의 노에마(noema), 즉 ‘그것은 존재했음(that-has-been)’은 단순한 과거 사실을 넘어선다. 사진을 보는 사람은 촬영된 순간에 대상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면서, 동시에 그 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낀다. 이때 시간의 불가역성(irreversibility)이 상처처럼 다가온다.
2. 루이스 페인의 사진: “그는 죽었고, 곧 죽을 것이다”
(1) 바르트는 알렉산더 가드너(Alexander Gardner)가 1865년에 촬영한 루이스 페인(Lewis Payne, 본명 Lewis Powell)의 초상을 예로 든다. 페인은 링컨 암살 음모와 연루되어 국무장관 윌리엄 수어드(William Seward)를 암살하려 했고, 사진은 그가 처형을 기다리던 시기의 모습을 담는다.
(2) 사진을 보는 관객은 페인이 사진 속에서 살아 있다는 것을 본다. 동시에 그는 처형될 것이고, 현재의 관객에게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바르트는 이 시간의 겹침을 “그는 죽었고, 곧 죽을 것이다”라는 역설로 표현한다. 과거에 살아 있던 모습과 이후의 죽음이 한 장 안에서 동시에 작동한다.
(3) 사진 속 페인의 잘생긴 얼굴은 스투디움(studium)의 관심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바르트에게 푼크툼은 그가 곧 죽는다는 사실이다. 사진은 그가 살아 있었음을 증언하면서도, 그의 미래가 이미 닫혀 있음을 알린다.
3. 어머니의 어린 시절 사진과 이미 일어난 재앙
(1) 바르트는 어머니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며 어머니가 언젠가 죽으리라는 사실을 떠올린다. 그는 위니컷(D. W. Winnicott)이 말한 ‘이미 일어난 재앙’에 대한 전율처럼, 아직 어린 소녀인 어머니의 사진 앞에서 미래의 죽음이 이미 벌어진 일인 것처럼 느낀다.
(2) 사진은 대상이 살아 있는 순간을 담을 수 있지만, 사진을 바라보는 현재에는 그 순간이 과거가 되어 있다. 따라서 사진은 살아 있는 모습을 보존하면서도 그 모습이 언젠가 사라질 운명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는 사진 속 인물이 이미 죽었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사진의 시간 구조에서 발생한다.
(3) 역사적 사진에서는 이 시간의 압도가 더 선명하게 나타날 수 있다. 현재의 사건을 다루는 사진은 그 사건의 맥락에 몰입하게 만들지만, 오래된 사진은 사진 속 인물이 이후에 살아왔거나 이미 죽었을 가능성을 관객에게 떠올리게 한다.
4. 살아 있는 소녀와 이미 지나간 삶
(1) 바르트는 마을 위를 나는 초기 비행기를 바라보는 두 소녀의 사진을 언급한다. 소녀들은 어린 시절의 어머니와 비슷한 옷을 입고 있다. 사진을 보는 순간 그들은 살아 있고, 앞으로 펼쳐질 삶을 앞에 둔 것처럼 보인다.
(2) 그러나 현재의 관객은 그들이 살았던 시대가 지나갔음을 안다. 그들은 살아 있었고, 지금은 이미 죽었을 수도 있다. 사진은 ‘그들은 살았다’와 ‘그들은 이미 사라졌다’는 시간의 층위를 겹친다. 다만 사진만으로 그 소녀들의 사후 생애나 현재 상태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5.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과 세 겹의 시간
(1) 바르트는 오귀스트 잘츠만(Auguste Salzmann)이 19세기 중반에 촬영한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의 사진을 예로 든다. 사진에는 돌이 많은 땅과 올리브나무가 보인다. 사진 속 풍경에 특별한 인물이 없어도, 바르트는 그 길을 예수의 시대와 연결해 생각한다.
(2) 이 사진에는 촬영 당시의 시간, 사진이 가리키는 성서적 과거, 사진을 바라보는 관객의 현재가 겹친다. 이러한 연결은 사진이 예수의 발자국을 객관적으로 증명한다는 뜻이 아니다. 바르트는 현실에 남은 사진의 흔적이 역사적·종교적 상상을 현재의 감각과 만나게 하는 방식을 말한다.
(3) 사진 앞에서 생기는 시간의 현기증은 상상만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실제 장소가 촬영되었다는 사진의 물질적 흔적이 과거와 현재의 거리를 동시에 느끼게 한다. 사진은 서로 다른 시간들을 한 화면 안에서 만나게 하는 매체다.
[4] 제40장 —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1. 공적 세계 속 사진과 개인의 죽음
(1) 사진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공적 세계와 연결된다. 시사 사진은 사건을 기록하고, 사회적·정치적 현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진은 동시에 각각의 관객에게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게 할 수 있다. 사진 속 사람의 과거와 관객의 미래가 한 장 안에서 교차하기 때문이다.
(2) 바르트는 이 점에서 사진이 일반적 의미만을 전달하지 않고 개인에게 말을 건다고 본다. 사진이 나에게 죽음을 환기하는 방식은 다른 사람의 경험과 같지 않다. 사진은 공적 이미지로 유통되지만, 그 앞에서 일어나는 푼크툼의 경험은 개별적이고 내밀할 수 있다.
2. 공적인 사진의 사적인 독해
(1) 바르트는 사진을 홀로 바라보고 싶어 한다. 영화는 관객들이 함께 보는 집단적 상영 경험과 잘 맞지만, 사진은 관객이 이미지 앞에 홀로 머무는 경험을 불러온다고 본다. 그는 중세의 집단적 기도와 개인적인 명상적 기도의 변화를 비유로 사용해, 사진의 감상이 점차 내면화되는 방식을 설명한다.
(2) 그렇다고 사진 감상이 언제나 혼자 이루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사진은 전시장·신문·책·온라인 매체에서 공적으로 공유될 수 있다. 바르트가 강조하는 것은 공적으로 유통되는 이미지도 관객 각자에게는 사적인 기억과 정서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3) 가족이나 과거의 사진을 보면 관객은 자기 청춘, 부모, 조부모와 가계의 역사를 연결해 생각할 수 있다. 가족과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이는 보도 사진도 사진 속 지시 대상이 이미 지나간 시간에 속한다는 사실 때문에 관객의 삶과 죽음에 맞닿을 수 있다.
3. 사적인 것과 내밀함
(1) 사적인 것(the private)은 법적 소유물이나 공개 여부의 문제만이 아니다. 바르트에게 사적인 영역은 자신의 이미지가 사라질 수 있는 장소이며, 자기에게 고유하고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는 내면과 연결된다.
(2) 사진은 사적인 이미지를 공적 공간으로 옮기고 유통시킬 수 있다. 스타의 사생활을 보도하는 잡지, 가족 사진의 공개, 현대의 온라인 플랫폼은 사적인 이미지가 공적 소비의 대상이 되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공개된 사진이 곧 인물의 내면까지 완전히 드러낸다는 뜻은 아니다.
(3) 바르트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경계를 다시 세우려는 저항을 말한다. 그는 사적인 삶의 세부를 그대로 드러내는 대신, 내면성(intimacy)을 말하고 싶어 한다. 내밀함은 감춰진 비밀의 목록이라기보다, 한 사람에게 고유한 관계와 정서의 깊이다.
4. 대량 이미지와 ‘나의 사진들’
(1) 바르트는 사진과 사진이 속한 세계를 두 영역으로 나눈다. 한쪽에는 대량으로 유통되는 이미지들이 있다. 이런 사진은 미끄러지고, 피로를 주며, 스투디움의 관심과 연결된다.
(2) 다른 한쪽에는 ‘나의 사진들’이 있다. 이는 반드시 바르트가 소유한 모든 사진을 뜻하지 않는다. 그를 강렬하게 사로잡고 상처 입히는 사진, 특히 어머니의 사진과 같은 개인적 푼크툼의 경험을 가리킨다.
(3) 사진의 공적 소비와 사적 경험은 서로 분리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공적인 사진이 한 사람에게 사적인 상처가 될 수 있고, 사적인 사진이 공개되는 순간 대중의 스투디움과 해석에 들어갈 수 있다.
5. 아마추어 사진가와 사진의 노에마
(1) 바르트는 일반적으로 예술적 미숙함으로 여겨지는 아마추어리즘(amateurism)을 사진에서는 다르게 바라본다. 전문적 숙련을 기준으로 하면 아마추어가 미성숙하게 보일 수 있지만, 사진의 노에마인 ‘그것은 존재했음’에 가까이 다가가는 태도는 오히려 아마추어의 사진에서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한다.
(2) 이 말은 기술을 모르는 사람이 언제나 더 진실한 사진을 찍는다거나, 전문 사진은 본질에서 멀다는 뜻이 아니다. 바르트가 강조하는 것은 기교적 완성도보다 사진에 찍힌 대상과 그 대상의 존재에 대한 관심이다. 일상의 사람을 기록하는 평범한 사진이 미학적 장식보다 인물과 관계의 흔적을 더 직접적으로 남길 수 있다는 역설이다.
[5] 제41장 — 탐색하기
1. 사진 앞에 머물며 어머니를 찾는다
(1) 바르트는 자신을 동요시키는 사진을 만나면 그 앞에 오래 머물며 탐색한다고 말한다. 사진이 나타내는 인물에 대해 더 알고 싶고, 그 인물이 어떤 존재였는지 확인하고 싶어 한다.
(2) 온실 사진 속 어머니의 얼굴은 희미하고 창백하다. 그런데 바르트는 그 사진을 보자마자 “어머니다. 마침내 찾았다”고 외친다. 그에게 이 사진은 단순히 어머니와 닮은 얼굴이 아니라, 어머니의 존재를 다시 만났다는 강렬한 감각을 일으킨다.
(3) 사진의 노에마인 ‘그것은 존재했음’은 애도의 욕망과 결합해 작동한다. 사진은 어머니를 현재로 되돌려 놓지는 않지만, 어머니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바르트에게 강하게 느끼게 한다.
2. 얼굴을 확대해 진실에 다가가려는 욕망
(1) 바르트는 사진 속 얼굴을 더 잘 보고, 더 잘 이해하고, 그 진실을 알고 싶어 한다. 이를 위해 이미지를 확대하거나 세부를 관찰한다. 그는 사진의 표면을 자세히 보면 사랑했던 사람의 내면적 진실에 닿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2) 이 욕망에는 과학적 관찰과 애도의 감정이 함께 들어 있다. 바르트는 사진을 실험실에서 분석하듯 들여다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진을 확대해 얻는 시각적 정보와 한 사람의 존재 전체를 아는 일은 같지 않다.
3. 사진의 분해와 연속 확대
(1) 바르트는 사진의 세부를 차례로 확대하면 점점 더 작은 세부에 도달하고, 마침내 어머니의 존재에 닿을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한다. 그는 사진 속 움직임을 분석한 에티엔쥘 마레(Étienne-Jules Marey)와 에드워드 머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의 작업을 떠올린다. 두 사람의 연속 사진은 운동을 여러 순간으로 나누어 분석했다.
(2) 바르트는 촬영자처럼 대상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으로서 이미지를 분해하고 시간을 늦추려 한다. 사진은 이런 탐색 욕망을 정당화한다. 확대하고 자세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진이 그러한 분석을 통해 어머니의 본질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4. 표면 아래의 진실이라는 환상
(1) 바르트는 자신이 사진의 노에마인 ‘그것은 존재했음’을 근거로, 이미지의 표면을 걷어내면 그 배후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고 돌아본다. 사진이 실제 대상을 지시한다는 사실이, 그 대상의 내면까지 알아낼 수 있다는 착각으로 이어진다.
(2) 그러나 사진은 표면을 넘어 숨겨진 본질을 자동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확대해도 드러나는 것은 인화지의 결, 사진의 입자와 질감이다. 이미지를 자세히 볼 수 있다는 기술적 가능성과 인물의 진실을 알 수 있다는 인식적 가능성은 구분되어야 한다.
(3) 바르트는 사진을 뒤집고 인화지의 깊이로 들어가려는 탐색을 말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서양 사상에서는 감춰진 것이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진실하다는 믿음이 반복되어 왔다. 바르트는 그 믿음이 사진에도 적용되리라 기대했지만, 사진은 그 내면의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5. 멜리장드처럼: 감추지 않지만 말하지 않는 사진
(1) 바르트는 사진의 침묵을 모리스 메테를링크(Maurice Maeterlinck)의 희곡 『펠레아스와 멜리장드』(Pelléas et Mélisande)에 빗댄다. 골로(Golaud)는 멜리장드에게서 진실을 알아내려 하지만, 멜리장드는 감추지 않는 듯 보이면서도 그가 원하는 설명을 말해주지 않는다.
(2)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사진이 거짓으로 숨긴다는 뜻이 아니라, 사진이 보여주면서도 의미를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진은 그 대상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이 어떤 존재였는지, 무엇을 느꼈는지, 사진의 장면이 무엇을 뜻하는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3) 바르트는 사진을 아무리 확대하고 탐색해도 어머니의 진실을 알아낼 수 없음을 깨닫는다. 사진은 어머니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증하지만, 어머니의 전부를 설명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진의 힘이면서 한계다.
[6] 제42장 — 닮음
1. 닮음과 동일성
(1) 바르트는 사진을 보며 “닮았다”고 판단하는 순간을 검토한다. 닮음(resemblance)은 사진 속 얼굴과 어떤 동일성(identity)이 일치한다는 판단이다. 그러나 그 동일성은 언제나 명확한 실체라기보다, 관객이 이미 알고 있거나 기대하는 인물의 모습에 영향을 받는다.
(2) 사진 속 인물이 누구인지 알기 전에도 우리는 그 사람이 “누구처럼 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닮음이 순수하게 객관적인 시각 정보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인물에 관해 이미 알고 있는 성격, 작품, 사회적 평판이 사진의 외양을 해석하는 데 개입한다.
2. 유명 인물의 사진과 사회적 신화
(1) 바르트는 나다르(Nadar)나 아베던(Richard Avedon)의 초상을 떠올리며 여러 인물의 사진이 우리가 기대하는 이미지와 일치할 때 닮았다고 느낀다고 말한다. 예컨대 기조(Guizot)의 엄숙함, 뒤마(Dumas)의 자신감과 활력, 오펜바흐(Offenbach)의 음악적 정신성, 로시니(Rossini)의 심술궂은 인상, 마르슬린 데보르드발모르(Marceline Desbordes-Valmore)의 시에 나타난 선함, 크로포트킨(Kropotkin)의 무정부주의적 이상주의가 사진 속 얼굴과 연결된다.
(2) 이때 사진이 그 사람의 본질을 객관적으로 드러냈다고 보기 어렵다. 관객은 그 인물에 대해 알고 있는 이야기와 평판을 얼굴에 투사한다. 바르트는 그런 사회적 신화가 사진의 닮음 판단에 개입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3) 따라서 “닮았다”는 말은 외모와 모델 사이의 단순한 일치만을 뜻하지 않는다. 사진 속 얼굴이 관객이 그 인물에게서 기대하는 특징과 들어맞을 때, 우리는 닮았다고 느낄 수 있다.
3. 자기 사진과 모사
(1) 닮음의 불확실성은 자기 사진을 볼 때에도 나타난다. 바르트는 자신이 어떤 사회적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고 느끼면, 자기 사진이 자신을 닮았는지 의심한다. 그는 자신이 자기 사진의 이상적 모습과 일치하는지를 판단하고, 그 판단은 다른 사진과 비교하며 계속 이어진다.
(2) 결국 한 장의 사진이 ‘나’를 완전히 재현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사진 속 나는 다른 사진 속 나와 닮았다고 여겨질 뿐이며, 그 닮음은 다시 여러 사진 사이의 비교에 의존한다. 바르트는 이런 반복적 모사를 시뮬라크르(simulacrum)의 문제로 연결한다.
(3) 사진은 법적·사회적 신원 확인에 쓰일 수 있다. 얼굴을 특정 인물의 것으로 식별하는 일은 민사적·형사적 절차와 연결된다. 그러나 신원 확인은 한 사람의 고유한 존재 전체를 아는 일과 같지 않다. 바르트는 신분상의 인물이 아니라 그 인물 자체에 도달하고 싶어 한다.
4. 본 적 없는 사람의 사진
(1) 바르트는 친구가 보여준 낯선 사람의 사진을 예로 든다. 그는 그 인물을 직접 본 적이 없는데도, 속으로 “그 사람은 그렇게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인물을 모르는 상태에서 닮음을 판단한다는 사실은, 닮음의 판단이 기대와 상상에 크게 좌우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2) 사진 속 인물이 특정한 성격을 가졌다는 설명을 듣지 못했다면, 관객은 외모만으로 그 사람의 본질을 알 수 없다. 우리는 사진 속 얼굴에 이미 알고 있는 인물상과 이야기를 덧붙일 수 있지만, 그것은 사진 자체가 말해준 사실과 구분해야 한다.
5. 어머니의 닮은 사진과 닮지 않은 사진
(1) 어머니의 보통 사진들에서 바르트는 외모의 닮음을 확인할 수 있지만, 그 사진들만으로 어머니의 고유한 진실을 되찾지는 못한다. 닮음은 사회적·법적 동일성을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어도, 그 사람이 자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전부 말해주지는 않는다.
(2) 역설적으로 어머니의 진실을 드러낸 온실 사진은 바르트가 알고 있던 어머니의 모습과 닮지 않았다. 사진 속에는 그가 한 번도 직접 만나지 못한 어린 소녀가 있었다. 얼굴의 외형적 유사성이 아니라, 소녀의 투명한 표정과 순진무구함을 통해 바르트는 어머니의 고유한 존재를 만났다고 느낀다.
(3) 랑드 해변의 사진도 같은 점을 보여준다. 어머니의 얼굴은 너무 멀어 알아보기 어렵지만, 바르트는 걸음걸이와 건강하고 밝은 기운에서 어머니를 알아본다. 사진의 진실은 얼굴의 닮음이나 선명한 재현에만 달려 있지 않다.
(4) 바르트에게 사진은 어머니를 닮게 그린 이미지의 모사가 아니라, 과거에 어머니가 실제로 있었다는 흔적이다. 닮음은 관객이 사회적 코드와 기대를 통해 만들어내는 판단일 수 있지만, 푼크툼은 개인의 기억과 관계 속에서 시간과 죽음을 경험하게 한다. 이 장에서 바르트는 사진의 진실을 닮음보다 ‘그것은 존재했음’과 그로부터 오는 정동의 경험에서 찾는다.
제37장~제42장의 흐름
1. 정지에서 죽음으로
(1) 사진은 영화처럼 시간을 연속적으로 흘려보내지 않고 한순간을 고정한다. 이 정지는 과거를 향한 시선을 만들고, 사진 속 존재가 이미 지나갔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사진의 정지성은 죽음과 상실의 감정을 불러온다.
2. 죽음에서 시간의 푼크툼으로
(1) 푼크툼은 사진 속 세부에서 시간 자체로 확장된다. 사진을 볼 때 관객은 대상이 과거에 살아 있었다는 사실과 그 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함께 경험한다. 사진은 삶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죽음을 예고한다.
3. 공적인 이미지에서 사적인 경험으로
(1) 사진은 공적으로 유통되지만, 각 관객에게는 서로 다른 기억과 정서를 불러올 수 있다. 바르트에게 어머니의 사진은 공통된 의미로 설명될 수 없는 사적인 푼크툼의 경험이다.
4. 탐색에서 닮음의 한계로
(1) 사진을 확대하고 해석하면 인물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좌절된다. 사진은 대상의 존재를 증언하지만 그 존재의 내면을 설명하지 않는다. 닮음도 사진 속 인물의 본질을 보증하지 않는다. 바르트가 사진의 진실을 찾는 곳은 외형적 재현이 아니라 시간과 상실을 직접 경험하게 하는 사진의 흔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