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에세이
인문학은 ‘괴테와 에커만’적인 만남이
이민숙 (시인)
모든 삶은 만남에서 비롯된다. 우주 만물은 태생이 단독적이지 못하다. 생물학적으로 수컷과 암컷이 만나야 또 다른 생명이 탄생하듯이, 모든 역사는 그 시초가 만남이다. “사물은 사물을 만나야 사물다워진다.” “인간은 인간을 만나야 인간다워진다.” 만남이라는 사태가 바로 인문학의 본질이다. 문자와 인간의 만남은 그 중 가장 필연적이며 인문학을 이루는 근간이다. 인간 정신은 언어의 소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1980년대 말을 장식한 친숙한 노래 중 ‘만남’이 있다. 노래 ‘만남’은 노랫말의 깊이를 떠나 대중들에게 꽤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지금도 어떤 프로그램의 처음 시간을 진행할 때 애창곡으로 불리곤 한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한 인연의 곡진함을 표현하며 시작하는 멜로디 ‘만 남’은 우리의 감성을 자극한다.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 마음을 나누고 차 한잔 마시며 관계 속 최초의 시간을 의미심장하게 마무리하기엔 안성맞춤인 노래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만남이라는 말처럼 다정한 말도 드물다. 어느 땐 그 말처럼 원망스러운 말도 없으리라.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사태라면 즐겨라!’라고 했듯이 우리는 그 어떤 만남도 선입견 없이 긍정적이며 소중한 태도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하물며, 거대한 인간형의 한 예술가를 만난다 함에랴.
요한 페터 에커만의 책 『괴테와의 대화』를 접했을 때, 가장 커다란 충격은 한 사람의 인생을 ‘한 만남’이 좌우해 버리는구나! 하는 것이었다. 한 사람이 그의 정신과 명성과 삶의 방식을 향해 그렇게 열정적으로 단호하게 아니, 포괄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니! 1792년 태생인 에커만은 그의 나이 31세, 괴테의 나이 74세 때 서로 만나 거의 10년을 함께 대화하고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의 삶에 크게 영향을 미칠, 맑고 깊은 우물을 판다.
그 책은 1838년에 첫 권을 출간하고 10년에 걸쳐 완간된다. 니체는 『괴테와의 대화』를 두고 ‘현존하는 독일 최고의 양서’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그 책은 한마디로 문학론의 총체이며 예술론의 본질적 안내서이면서 인생론의 최고봉이라 할 만하다. 한 인간이 어떤 과정을 통해 문학 작품을 통찰하며 창조해 가는지, 예술가의 어떤 면면이 그의 예술품을 더욱 격조 높게 만들어 가는지, 또한 인간의 삶 속에서 현재적 고민을, 어떤 지적 유산을 거름 삼아 풀어갈 수 있는지, 다감하면서도 보편적이 며 인문학적인 언어의 질서를 밑바탕으로 끊임없이 대화를 펼쳐 나아가는 지를 보여 준다.
둘의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텁텁하고 지루한 여름밤과 서리서리 긴 긴 겨울밤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성큼 시간을 건너뛰고 만다.
우리들은 아침에 가장 현명하다. 또한 근심도 가장 많다.
그러나 근심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현명함과 같은 것이다. 비록 수동적인 현명함이긴 하지만 여하간 어리석은 자에게는 근심이 없다. 근심이라는 인간의 일상적 사태를 현명함과 병렬관계에 놓음으로써 삶이 단순치 않다는 깨우침을 주는 말이다. 매일 눈 뜨면 이러저러한 걱정거리를 떠올리며 우리는 창문을 연다. 건너편 바다의 파도가 그 근심을 맞받는다. 그 사이 차차 하루의 일과를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한 마디를 내뱉는다. 그래 오늘은 이 일을 해결하러 가야겠다! 근심 걱정으로부터 오히려 지혜는 용솟음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자연에 대한 소박한 일상은 우리가 부딪친 뜨거운 여름날의 암담함을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 그 오랜 자연과학의 진실을 체험 속에서 녹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여기 조용한 곳에서 사랑하는 자가 그의 연인을 그리워하였도다.
돌에 새겨진 시구詩句에 감탄하는 에커만의 회상이다. “이것을 보는 순간 나 자신도 어느새 고전적인 장소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바로 곁에는 반쯤 자란 떡갈나무, 전나무, 자작나무, 그리고 너도밤나무들이 무리를 지어 서 있었다. 그 전나무 아래에서 맹금의 깃털 다발을 발견한 나는 그것을 괴테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그러한 것이 이 자리에서 종종 발견된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로 미루어 나는 이 전나무들이 이 지방에서 종종 발견되는 부엉이들이 즐겨 머무는 장소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중략〉
우리는 이 나무들 주위를 한 바퀴 돈 후에 다시 집 가까이의 큰길로 나왔다. 방금 지나온 떡갈나무, 전나무, 자작나무 그리고 너도밤나무는 서로 뒤섞인 채 여기에서는 반원을 그리며 그 내부의 공간을 마치 동굴이라도 되는 것처럼 감싸고 있었다. 우리는 그 안으로 들어가서 둥근 탁자 둘레에 놓여 있는 조그만 의자에 앉았다. 태양빛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에 이 잎사귀도 없는 나무들이 만드는 희미한 그늘조차도 일종의 은혜로 여겨졌다. 태양빛이 따가울 때면 이보다 나은 피난처는 없어. 이 나무들 모두를 나는 사십 년 전에 직접 심었고 그것 들이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을 낙으로 삼아왔었지...
괴테는 이러한 삶의 여유를 실제 환경의 부딪침, 손수 가꾸어가는 진정성을 근간으로 살아가면서 대가답게 창작을 왕성하게 해가는 충실한 리얼리스트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세상은 너무나 넓고 풍부하며 인생은 너무도 다양하기 때문에 시를 쓸 계기가 모자라는 일은 결코 없어. 하지만 모든 시는 어떤 계기에서 쓰여야 하네. 말하자면 시를 쓰는 동기와 소재가 현실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거지. 그때마다의 특수한 경우가 보편적이고 시적이 되는 것은 시인의 손길을 거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네. 이런 의미에서 나의 모든 시는
그 어떤 일을 계기로 쓰였으며 그 모두가 현실에서 자극을 받
고 현실에 그 뿌리와 기반을 두고 있어. 그러므로 나는 허공 에서 지어낸 시들을 존중하지 않는다네….
또한 괴테는 예술창작의 과정에서 삶의 순간성을 함께 향유하고 그 것을 어떻게 집합, 통일시키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담담히 피력하고 있다.
매너리즘이란 언제나 완성만을 염두에 두면서 창작하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태도야. 그러나 순수하고 진정으로 위대한 재능은 창작 과정에서 가장 커다란 행복을 누린다네. 로스는 염소와 양들의 모발과 털을 지치지도 않고 열심히 그렸는데, 그 끝없이 세세한 묘사에서 우리는 그가 작업을 하는 동안 나무도 순수한 행복감을 누렸을 뿐, 완성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네. 그러나 재능이 시원찮은 자들은 예술 그 자체에 만족하는 일이 없어. 그들은 창작을 하는 동안에도 완성된 작품이 가져다주리라고 예상되는 이득만을 눈앞에 그리고 있다네. 하지만 그러한 속물적인 목표와 방향으로부터는 아무런 위대한 것도 생겨날 수가 없겠지.
누군가는 삶의 일상적이며 창조적인 시간 속에서 지독한 행복을 누리 며 살아가고, 또 누군가는 예술가라는 특별한 시간을 영위하면서도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허명虛名을 지향하며 지지부진한 시간을 살아간다. 왜 그러한 차이가 생기는가를 괴테는 ‘삶의 경험적 몰입’과 ‘목표지향의 허구성’에 대해 이야기하며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순간의 삶 그 자체 를, 삶의 핵심 요소인 과정을 즐기고 창조하는 작가, 예술가들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 특히 예술가가 아닌 경우라 해도 모 든 평범성 속에서 개별적이며 창조적인 삶의 고갱이를 살아갈 한 방식 에 대한 통찰이라 하겠다. 그 어떤 욕구에 앞서 인문학적 일상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나는, 그의 작품을 통해 시 한 편을 일상의 감각 속에 서 가까스로, 그러나 행복한 진통 속에서 생산한 기억이 있다.
붉다 못해 뜨건 핏방울이 투두둑 떨어지면
한 알 한 알 손톱을 세워 줍고 있는 햇살 아래 서늘한
초록의 추억도 새빨간 초경을 제 몸에 두르고 일어선다
살구는 푹신! 입안에서 흰 식욕을 향해 침을 궁글린다
자두는 설컹! 언니의 젖무덤에 우주를 붓질하는데
원고지 화선지가 한 시인의 목에 목마를 탄다 시詩!
너는 무엇이더냐
네 생명조차 살구의 하루에 온몸으로 젖어드는구나
베르테르, 그 비통한 숭고로 울부짖던 자존이 자두를 닮았다 시詩!
마지막을 휘돌아 바톤터치할 이유가 있다면 베르테르,
한 육체의 목마름을 적셔줄 고귀한 한恨!
단 한 번의 이별, 그것으로 완성해 버린 만유인력은
바람이 세게 불 때마다 자두를 날려 보낸다, 살구!
떨어져 으깨어진 자리에서 언니는 비로소 아기를 밴다
으앙 으앙! 아이 좋아라 저 푸르른 새벽 종소리,
붉게 터져버린 지구 한 조각이 입안에서 녹아내린다
- 졸시, 「자두 살구, 그리고 베르테르」 전문.
그들의 끊임없는 대화 속에는 역사 속으로부터 구해온 대가들의 작품성에 대한 성찰, 빛나는 예술가들이 누려온 삶의 진정성에 대한 인생론 이 꿈틀거린다. 그 인생론이야말로 현대적이고 현세적이며 철학적인 담론이다. 그 밑바탕에 문학성과 예술이 있다. 그러므로 많은 예술가들은 오랜 세월을 지나온 지금에도 괴테의 사상과 삶의 치열성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에게는 대가의 면모를 직접 엿볼 수 있는 문장 속 생활철학과 하루하루의 치열한 생활경험을, 현실을 바탕으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자기계발의 지혜를 선물하는 책, 『괴테와의 대화』는 백 번 읽어도 싫증나지 않는 에너지를 선물 받을 수밖에 없는 인문학적 보물인 것이다. 만남은 인문학의 뼈대이며, 인문학적 만남은 삶의 뼈대이다. 예술이란 그러한 삶의 에너지를 가장 정통한 문제의식과 함께 해결하도록 부추기는 고급한 정신수련 과정이라 하겠다. 문자예술을 창조적으로 구현하는 문학적 일상이라면 더 귀한 그 무엇과 바꿀 것인가?
그러나 괴테는 인문학적 삶의 소중함과 예술가의 위대한 탄생에 이르기까지의 지난함, 대작의 탄생을 놓고 한마디 일갈한다.
“재능을 가진 어떤 사람이 신속하면서도 신나게 발전하려
면 국민 사이에 지성과 교양이 널리 퍼져 있어야 하는 거야.
우리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비극 작품에 경탄을 보내지만, 잘
생각해 보면 우리를 놀라게 하는 건 개개의 작가들이 아니라
그 작가들이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그 시대와 국민이라네. 왜
냐하면 이 작품들이 서로 간에 조금씩 차이가 나고, 또 그들
중의 어떤 시인이 다른 시인보다 다소간 위대하고 보다 더 완
벽해 보인다 하더라도, 전체를 통틀어 개관해 본다면 그 모든
것에는 단 하나의 일관된 특성만이 있기 때문이네. 그것은 바
로 웅대함, 유익함, 건강함, 인간적인 완전함, 거기에다가 고상
한 생활의 지혜와 숭고한 사고방식, 순수하고 강력한 직관이
라는 특성을 가진다네.… 요컨대 이러한 특성은 개개인에게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국민과 시대 전체에 속하는 것이
며 그 속에서 형성되고 있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네.”
인문학의 열풍은 차치하더라도 개별 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하는 각 각의 여건들은 줄어들거나 아예 고사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담보하지 못 하는 교육적 여건은 무엇일까. 중세 독일이 르네상스 시대의 그 어떤 총체적 국가체제와 비교해 열등하다 한들 이만하진 않을 것이다. 그 본질의 문제가 국가에 있다 해도, 또한 예술가, 시인 소설가들로 이루어진 문학인 집단의 개별적 위기의식은 또한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무엇을 위해서 인문학의 진정한 씨앗을 뿌려야 하는지를 결정하지 못한 사회적 결함 상태, 현 문학 그룹들의 블랙홀을 향하여 괴테는 포효한다!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차지하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만한
값이 있는 것이다.”
인간의 예지의 결론은 이런 것이다…… 그렇다! 나는 이런 정신에
모든 것을 바치겠다.
괴테 작『파우스트』의 마지막 장면 /‘파우스트’의 말에서
최선이 아니라면 차선도 있다. 교육의 최전방에 내세울 것들이 경제 구조와 맞물려 있고, 세계적 생존시스템이 인문학 기치로서만 해결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우리의 경쟁적 인문학 홀대는 결코 미래 지향적이 지 않다. 우리는 청춘들이 더욱 아름답게 인문학적 사태를 만나고, 괴테적的대가를 만나고, 에커만적 일상의 에너지를 나누는 사회적 신념화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며 문제를 직시함으로써 패러다임 쉬프트, 온고이지신의 시스템을 구체화해야 할 것이다. 인문학! 더 많이 끊임없이, 일상적으로 만나야 한다!
ㅡ『우리詩』2018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