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상반기 《현대시》신인상
혁필화를 해독하다 / 김종연
모음 끝에 닿은 동백꽃이 부전나비 한 마리 부르고 있다
붓끝이 여백에게 색을 주고 꽃이 있는 힘껏 물관을 내리자
텅 빈 줄기를 타고 피어나는 향내, 할아비 이름이 화선지에 올라선다
오래된 가계에서 알 품고 먹이 물어주던 제비는 늙은 세입자였다
오래된 봄을 몰아 새로 쓴 이름인가, 顯祖考學生府君神位 제사상 지방인가
지붕 아래에 세 세대가 모여 사는 동안 문밖에 나는 소리는
할아비 호통이었다
묵은 식체처럼 가라앉던 가풍 곁으로 병풍을 두르고
낡은 목울대만큼 솟은 메에 은수저 꽂으면
부연 향내가 날이 새도록 가시지 않아 집안이 모두 제상祭床이었다
이름은 환쟁이 노파의 곧은 획순을 따라 번져간다
필체만으로 사람에 달관하는 일, 이름과 초충이 만나는 것만큼 벅찬 일이라
각양각색 이야기들이 여백에게 월세를 내고 있다
필생의 재담으로 자간을 띄워 석자 받침이 완성되는 순간
사별한 이야기들은 혁필화 족자 속에 암호처럼 갇힌다
죽은 이름에서도 벌목할 재목이 있던가
글자에 정각 한 채 세워놓고 버드나무 그늘 너머
놀빛 젖은 산새 무리가 서편으로 바람의 조각들을 물어간다
퍼런 용이 자음을 휘감고 올라간 옆구리마다
매달려 있던 두툼한 꽃망울들도 일시에 봉오리를 터트리고 간다
이놈! 이름 보고 뒤늦게 찾아온 할아비가 목청 쏟아내는 모습
족자를 말아들고 그 여음을 따라 돌아가는 길
봄이다, 봄이다 공명이 든다
* 혁필화(革筆畫) : 납작한 가죽으로 여러 빛깔의 글씨와 그림을 겹쳐서 그리는 그림.
쌍팔년도 새누이에 대한 진술 / 김종연
잠든 새를 안고 들어온 누이가 장롱에서 운다 울다 가라 바람은 유서로 남기고 조서를 꾸미듯 태몽을 어미에게 꾸어다 꾸고 날개로 살아라 필생의 필사로 자개에 새겨지는 누이가 뒷걸음으로 헛디딘 문장 그것은 난생卵生에 관한 이야기, 마을의 포수에게 유전되는 말이다
공장의 밤을 장전하면 우스갯소리 탄창에 그득하고 석면지붕에 나앉은 누이들을 쏘면 몇 누이가 고꾸라질지 명중은 없어도 꾸벅꾸벅 졸음이 창가에 폐유처럼 번져오는데 자물통 채우는 소리가 까치발로 악몽을 서성인다
공장 밖 개천엔 허리춤에 빠져죽은 얼굴들이 주물처럼 찍혀 나오고 지금은 발정난 개가 스스로 고요해지는 시간, 장롱 속 누이는 소식이 없어 감감 무소식이 흉조인 듯 붉게 익어간다 그때 똑똑 부리 부딪히는 소리, 부드러운 자백이다 난생卵生 첫 자수의 기록이다
포수에게 맞아죽은 새들이 시간을 두르고 시계에서 보호색을 배우는 동안 울대를 삭힌 누이가 시침을 붙잡고 걸어 나와 시간을 묻는다
뻐꾹— 뻐꾹—
죽은 척한 새들이 고심한 유언이다
오동나무曲 / 김종연
전설은 자라, 아이들 머리맡 근처에서 소곤거리다 가네 장이마을 서낭당, 치렁치렁한 오색 줄이 가야금을 타고 있네 벼락 맞은 나무는 신기神氣가 있어 땅을 팔고 졸부가 된 사람들의 소식 가끔씩 나무에게 왔던 것인데 그예 저 오동나무 정간보를 쓰다 잎사귀만 우수수 쏟아내고 검은 상복을 입은 새들이 그 주위를 울다 갔었네
이승에서 구천으로 전승되던 전설들 입에서 입으로가 아니라 태어날 적부터 알던 것인데 아니 앓던 것인데 귀신 소리인가 하고 창문들은 귀를 틀어막네 무슨 소리인가 저 나무 우는 소리, 풍문인가 재앙인가 돌림병만 돌아, 읍내로 나가려는 사람들의 발목을 잡아 세우네
을씨년스러운 저물녘은 소주병 깨지는 소리만큼 날카롭고 뱃속이 다 부서졌다 해도 가업은 이어야지 평상에 앉은 노인네들 뻐끔 입술 담배만 시려, 마을 어귀 서낭당에는 나무가 가야금을 타고, 나무가 전설을 만들고 전설은 음악이 되었네
가지 마라 지독한 밤들아, 음률 없는 날들아, 이따금씩 오색 현에 목을 매달고 죽은 이들이 노래가 된다던 오동나무의 이 마을을 두지 마라
장이마을 전설은 가야금을 타는 손가락처럼 휘감기고 휘도네
낭만적인 장례식 / 김종연
낭만적이게도 죽은 사람에 감금당했죠
이름도 가물가물한 일가친척 장례식장에서
지독하게 울어볼 준비를 해요
밀린 죽음 계산하러 조의금함 앞에 서지요
닮은 구석이 하나 없는 조문객들은
최대한 슬픈 표정으로 한 가족임을 증명하려 해요
누런 완장에다 연습한 표정을 묶는답니다
그렇게 이야기가 피는 곳곳 우리는 냄새로 살지요
이건 커다란 화환을 보낸 사람에 대한 이야깁니다
라벨에 붙은 이름은 김고산, 고가 돌림자인지 산이 돌림자인지
아니 엄밀히 말해 광산 김家의 김이 돌림자라죠
이야기의 향내를 펼쳐놓으면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였다가
또 내 조카뻘이었다가, 사실은 모르는 관계라지요
졸부가 된 사람은 죽어서도 때깔이 검다던데
성대를 잘라낸 개처럼 죽음에 관해 애완용일 수밖에 없는 우리는
고깔을 푹 눌러쓰고 딴 생각을 해야 해요
한두 번씩 재활용된 화환에서는 서로 다른 깊이만큼 향내가 나고
냉장실에 누워 있는 이름 모를 친척은 다른 사람들 때문에
이 자리에서 완성이 되지요
장례식을 마치면 조의금도, 꽃향기도 누군가 수거해 가요
이야기가 끝나면 향기가 남습니다
낭만적이게도 모르는 사람의 죽음을 축하해주러 가요
대화의 형식 / 김종연
네 이름은 다른 형식으로 꾸민 내가 유리창을 닦는 동안 너는 나를 의무라고 발음했지
이를테면 성경책을 펴고 누운 걸인의 바짓단
이 땅에서 자생하는 찬란한 비결이었지
위로와 변명을 고르는 날이면 비가 내렸지
폐부에서 증발하는 물소리는 가끔씩 화상 같아서 귓가를 온통 불사른 구름이 창밖에 서 있었지
발음이 어려운 소문은 밤을 읊다 가는 날이 많았고
꿈보다 만나기 어려운 이름은 만남의 두 번째 형식, 죽은 몽상이 홑창을 두드리고 있었지
지상에도 거대한 저울이 있어 한 생의 반은 우기로 보내는데
도망간 애인처럼 도망쳐온 그녀의 결백을 나는 용무라 부르기로 하고
변명 없이도 오해는 생겨
밤마다 별자리를 이으면 끈적한 점성이 오역된 연대기처럼 떠올랐지
운명과 행운은 왜 항상 등을 맞대고 앉아 있나
통증은 내 몸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니라는 증명, 등 돌린 자리마다 흉을 보고
내 이름에도 누군가 급히 지운 흔적 남아 있겠지
그녀에게 이름을 선고하고 앓는 성대에 장지를 꾸미고
모든 형식을 넣어 못질을 하면 얇은 나이테로 빙하기를 견뎌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났지
이것은 신비한 증오의 또 다른 형식
갖지 못할 이름을 올려도 저울은 평행의 반증
이제 적도에 축대를 세우고
네가 쓴 그녀의 이름이 비처럼 쏟아지고 있겠지
김종연 시인
1991년 서울 출생. 안양예술고등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재학 중.
[심사평]
이번 공모에는 약 250여 분들이 응모를 해왔다. 응모 편수는 예전의 평균 수준이었다. 이번에는 비교적 젊은 세대들의 응모가 눈에 띄게 늘었다. 지난 해 두 차례의 공모에서 모두 신인을 배출하지 못했다. 심사위원들은 이번 공모에서 당선자가 나오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심사에 임했다. 예심을 거쳐 아홉 분의 작품이 본심에 올라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본심에 오른 분들은 강연형, 김도연, 김아제, 김은미, 김종연, 김혜숙, 서종현, 이어진, 한인준 씨였다. 본심위원들은 오랜 고심 끝에 네 분의 응모자를 다시 선정했다. 강연형, 김종연, 서종현, 이어진 씨가 그들이다. 우리가 보기에 이들은 모두 당선권에 들 만한 시적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매트릭스」외 9편을 응모한 강연형 씨는 인문학적 주제를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능력이 남달랐다. 「여행자의 수첩」외 9편을 응모한 이어진 씨의 시는 대부분 긴 호흡의 극적 구성을 취하면서도 시의 구조를 잘 만들어낼 줄 알았다. 하지만 강연형 씨는 이미지의 통일성이 없고 파편적이라는 점, 이어진 씨는 응모된 시들이 모두 비슷비슷한 작품들이어서 시의 구조 외에 또 다른 특징이 없다는 점 등이 지적되어 먼저 선자의 손에서 제외되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작품은 김종연 씨의 「혁필화를 해독하다」와 서종현 씨의 「우물 속에서, 살다」였다. 서종현 씨의 작품은 신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시적 역량을 두루 갖춘 작품이었다. 하지만 시를 지배하는 시적 수사가 일견 화려한 듯 보이지만, 개성적이거나 특별하지 못했다. 오랜 논의 끝에 아직 어리지만 김종연 씨의 가능성에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 서종현 씨는 다음 기회에 또다시 논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아쉬움을 달랬다.
김종연을 추천한다. 김종연의 시는 투고한 10 편이 고르게 성과를 얻고 있는 특장을 지니고 있다. 다른 투고자가 시적 유행을 추수하거나 고백적 어투의 낡은 감성에 기대어 우리 시의 새로움에 공헌해야 할 기대감을 일찍이 소거시키고 있는 데 반해 김종연의 시는 최근의 시적 경향에 수사적으로 잇대어 있으면서도 그 주제적 질량감이 나이답지 않은 육중함을 지니고 있어 신뢰할 만했다. 「혁필화를 해독하다」와 「쌍팔년도 새누이에 대한 진술」같은 시에서 보이고 있는 탄탄한 구조와, 기억을 해독하여 재현적 상상에 이르게 하는 솜씨는 우리 시를 찬찬히 살핀 결과일 것이다.
탄생과 죽음이라는 고난의 입사의식을 재생하여 악몽의 기록들을 보여주는 김종연의 이 현생은 아름답고 안쓰럽다. 내면에 난생卵生하고 있는 비명들을 각고하여 받아적고 있는 다음과 같은 표현. “필생의 필사로 자개에 새겨지는 누이가 뒷걸음으로 헛디딘 문장 그것은 난생卵生에 관한 이야기”, 혹은 「오동나무曲」에서 보이고 있는 “가지마다 지독한 밤들아, 음률 없는 날들아, 이따금씩 오색 현에 목을 매달고 죽은 이들이 노래가 된다던 오동나무의 이 마을”. 이들 시편에서 보이고 있는 소재적인 미와 주제적인 미는 김종연의 시를 주목해야 할 가장 큰 이유이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더 정확히 말하면 최근 젊은 시가 잊고 있었던(잊고자 했던) 세계를 새로운 문법으로 각색해가는 것에 있어 「낭만적인 장례식」과 「대화의 형식」은 비록 화자가 은둔의 형식으로 발성하고 있지만 그곳에는 김종연 나름의 통증과 비결이 존재한다. 부정의 방식으로 존재를 드러내고 있어 자칫 비극적일 수 있게 보이는 것을 엇나가기를 통해 빠져나가는 지혜에서도 그것은 자명하게 발견된다. 나이가 젊은 만큼 스스로 겸제하고 자중하여 한국 시를 이끌어 갈 시인으로 대성하길 기대한다.
본지에 응모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당선자에겐 축하의 말씀을 그렇지 못한 분들껜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심사 : 원구식, 박주택(글), 오형엽, 조강석
《현대시》2011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