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경미는 게슴츠레한 눈을 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행기 안은 조용했다.
승객들은 고개를 모로 꼬고서 잠이든 모습이었다.
고국행 비행기가 이륙할 때만 해도 설렘이 가득이었는데 잠에는 장사가 없는 모양이다.
15년 만에 가는 고국에 경미는
요 며칠 잠들 수 없었다.
고국을 떠날 때는 쫓기듯이 떠났었다.
빈 몸으로 떠나 학위를 받아서 고국에 교수 자리가 있다고 경미를
부르다니 만감이 교차했다.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해낼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경미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밖을 내다보니 여명이 밝아오는 사이로 하얀 뭉게구름이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창밖이 밝아오자 고국의 산천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보고
싶고 그리워했던가, 엄마의
품처럼 언제나 안기고 싶었던 산천이 발아래 펼쳐져 있었다.
향긋한 향기가 비행기 안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짙푸른 산야를 지나자 주먹만 한 집과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곧 비행기가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
하겠습니다."
안내 멘트가 나오자 승객들은 분주하게 움직임이 보였다.
푸른 바다 위에 떠 있는가 싶었는데
비행기가 이내 미끄러지더니 끽소리를 내며 멈추었다.
경미는 가벼운 짐을 챙겨 공항을 빠져나오자 따뜻한 바람이 코끝을 스치고 지났다. 광주 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광주에서 내려서 5.18 묘역을 가려고 택시에 올랐다.
택시 운전자는 밝고 친절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도 모두가
밝고 활기차고 여유로워 보였다.
경미가 고국을 떠날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어둡고 주눅 들고 짙은
회색을 띠고 있었는데 15년 만에
고국은 달라져있었다.
5.18 묘역에 도착해서 관리소에
들려 영식이의 묘를 확인하고 영식이의 묘역을 찾았다.
묘역은 잘 정돈돼 있었다.
"영식아 나 왔어, 얼른 일어나 봐!
나 왔다고 눈떠봐.
네가 왜 여기에 누워있니!
넌 한 번도 내게 일등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었지..
운동장에서 우렁찬 너의 구령 소리는 더 들을 수 없는 거니?
네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야,
나 같은 둔재도 학위를 따서 나의
자리를 찾았어.
근데 너는 왜!
여기에 누워있어!
영식아 대답해봐!"
두껍게 입은 옷 사이로 메서 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도로는 꽁꽁 언 얼음으로 변해 있었다.
그 미끄러운 길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며 경미는 전봇대에 학생
모집이라는 과외 전단을 붙이고
있었다.
경미는 5년간 공장에 다니며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해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악착 같이
모은 돈으로 봉천동 산비탈에 세를
얻어 신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국수만 먹고 어럽게 모은 돈이 등록금 몇 번 내자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과외학생들이 많이 와야 한다는 생각에 열심히 전단 붙이는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전단을 붙이다가 무언가 발에 걸려
넘어지려 하자 간신히 중심을 잡고
발아래를 내려다보니 무언가 발아래서 꿈틀대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경미는 저만치 도망갔다.
그러고 자세히 보니 사람 같았다.
노숙인인가 하며 이 추운 겨울에 길에 더 있으면 동사하겠다 싶어
옷이나 이불이라도 같다 주어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누구세요?"
그러자 "나 영식이야." 하며 비틀거리며 누군가 일어났다.
경미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다. 영식이 눈은 휑하고 옷은 세탁을 하지 않았는지
꾀죄죄했다.
네가 왜? 왜? 어떻게 여기에 이 행색은 뭘까...
교실 밖 운동장에서 왁자지껄 이는 동무들의 청아한 목소리를 유월의
꽃바람이 교실까지 실어 나르고 있었다.
짝꿍인 영식과 경미는 체육시간인데도 교실에 남아 공부하고 있었다.
둘 맛있는 교실에는 라일략항기가
가득했다.
경미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지 못하고 장에서 꼬막을 팔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 단정한 교복에 가방을
매고 오는 영식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었다.
이미 경미 몸은 꽈배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죽을힘을 다해 몸을 돌렸다. 멀어져 가는 영식이의 뒷모습에 고개를 숙였다.
몇 달이 지나자 영식이가 친척 동창생 남자아이와 경미 혼자 있는 집에 놀려왔었다.
셋은 앉은뱅이책상에 둘러앉아
고구마를 먹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다들 논밭으로 일하려 나갔셨는지 마을은 절간 같았다.
이따금 암탉의 꼬꼬댁 소리가 사람 사는 동네라고 알려 올뿐이었다.
한참 지나자 친척 동창생이 내 공책에다가 무엇인가 끄적이는 것이었다.
경미가 빼앗아 읽어보자 거기엔 '영식이가 경미를 좋아한대'
영식이는 얼굴이 빨개져서 경미의 공책을 들고는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고갯길을 넘어가는 영식이 그림자는 경미 발아래 떨어져 있었다.
경미는 영식이를 데리고 자취방으로 갔다.
"나 데모하다가 주동자로 몰려 도망 다니고 있어, 나 좀 숨겨줘."
영식이를 자취방에 숨겨주고서 경미는 독서실에서 생활했다.
옷가지를 챙기려 집에 들르자 방 안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영식이 몸은
불가마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경미는 찬물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며 열을 식히고 약국에서 약을 사다가 먹이고 밤새 간호했다.
무언가 뜨거운 것이 입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지자 경미는 화들짝 놀랐다.
간호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나 보다
정신이 든 영식이의 불같은 몸이 경미의 몸에 밀착해왔다.
둘이 한 몸이 되자 영식이는 환희에 몸을 떨었다. 경미는 환희에 전율을 느끼며 현기증이 몰려왔다.
방안에는 라일락 항기가 가득 찼다.
둘이 밥을 먹으며 오래된 티브이를 틀자 뉴스가 나왔다. 데모로 지명 수배된 자들은 자진군대에 입대하면은
지명수배를 해제하겠다는 대통령 령이 발효되고 있었다.
영식이는 경미를 지긋이 보며 "나 군대 갔다 올게, 기다려 줄 수 있니?"
경미는 고개만 끄덕였다.
1980년 5월 얼마 남지 않은 군생활 마지막 휴가를 나온다고 편지가 영식에게 왔다.
고향에 부모님 뵙고 경미에게 오겠다고 한지도 한참이 지났건만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때 광주사태로 나라가 어수선했다.
뭔가 잘못되지 않았나 불안감이 경미를 짓눌렸지만 무얼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광주사태도 수습이 되어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도 영식이한테는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경미는 참을 수가 없어서 고향으로 찾아가기로 했다.
고향에 내리자 들에는 이랴~이랴~
논갈이에 여념이 없고 평화로워 보였다.
영식이네 집에 도착해서 안을 살피자 조용했다.
깔끔했던 집은 어수선하고 폐가 같은 모습이었다.
계세요? 계세요?
외치자 안방 문이 열렸다.
누군가 걸어 나오는데 귀신을 보는 것 같았다.
영식이 아버지는 눈이 뒤통수에 붙어있고 얼굴은 검은 물감을 뒤집 쓴 듯이 검고 광대뼈만 얼굴에
남아있었다.
경미를 보더니 "어서 돌아가, 자네 보기 싫다고 영식이 놈 하늘의 별이 되었다네."
어수선한 소리에 이웃들이 몰려들었다.
혀들 끌끌 차면서 "저 양반도 아들들
따라가려나 봄 새구려."
"누군들 안 그러겠나,
큰 놈은 서울대 작은놈은 전남대
이 고을에서 자식 잘 키운 가장 모범적인 양반들이었는데
생때같은 자식을 하루아침에 도둑 당했으니.."
이때 누군가 "쉿!"
주변을 살피며 "누가 들으면 어쩌러 구" 하며 손을 들어 목에 갔다 댔다.
경미는 현기증을 느끼며 비틀대자
이웃 아주머니가 경미를 자신의 마루로 데려가 눕혀주었다.
그분이 사건의 전말을 들려주었다.
마지막 휴가를 받아서 집에 도착하자 집은 발깍 뒤집어 있었다고 했다.
영식이 남동생이 전남대 다니는데
전남대에서 데모를 한다고 하니 동생을 데리러 가는 문제로 옥신각신하고 있는 중이었다.
영식이가 동생을 데리려 전남대에 가서 보니 비무장 상태의 학생들을 군인들이 군화로 밟고 몽둥이로 학생들을 때리고 피를 흘리는 학생들을 질질 끌고 트럭에 짐 실듯이 던지는 것을 보고 영식이와
시민들이 분노를 느껴 항의하다가
시민군이 형성되어서 학생들을 지키려고 무기고를 털어서 군인들과 대치하다가 군인들이 쏜 총에 영식이는 즉사하고 동생은 끌려가다 군인들의 군홧발에 숨을 거두었다고 했다.
경미는 아득한 꿈을 꾸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전래동화에 나오는 악당들 이야기처럼 너무나 먼 나라 이야기
같았다.
'영식아 거기는 독재도 데모도 없지.
아까운 너희들의 희생으로 난 지금
자유를 만끽하며 사는 거니?
너희들 목숨 버려 원하는 것이 이것이었니!
내가 갈 때까지 잘 있어.. 너의 몫까지
이 땅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더 노력하다 갈게,
영식아 우리가 그 시절이 아닌 지금 만났다면 아들 딸 낳고 알콩달콩 살고 있었을까?"
멀리 산등성이에 무지개가 보였다.
그때 라일락꽃 향기가 영식이 묘역에 가득 찾다.
첫댓글 나국화님 소설 실감나게 쓰셨습니다.
소설가 등단하셔도
손색없으십니다.
미주님 부족한 글 읽어주시고 과찬의 칭찬까징 감사합니다 ~
실화도 있을 수 있는 소설~
잘읽었습니다~
좋은 사탕님 저가 살아오던 시간들을 소환해서 써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삭제된 댓글 입니다.
보리님 읽어주어서 감사합니다 ~
현직 소설가 이실거
같습니다.안개처럼
피어오르듯 과거 최루탄
연기 자욱햇던 그시절들이
잔잔하게 떠 올리게 합니다.
긴글 잘 읽어봣습니다.
앞으로 좋은작품
기대할께요.
저같은 무식쟁이가 소설가라니요
저가 살았던 시절들을 엮어 보았 습니다
비오는 션한 날되세요~
잘읽고 갑니다.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이 오버랩되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부족하고 엉성한 글 읽어주셔서 대작가의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을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비오는 목요일 편한하게 보내십시요~
15년만에 귀향후 첫사랑
묘를 찾아가며 회상하는 글
40년넘은 그 당시를 떠오르게
하는글..잘 감상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시고
정성스런 댓글까지
오늘도 편안한 하루되세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우영선배님
고운날 되세요~
현존하는 역사 소설 잘 보았습니다.
픽션&논픽션을 떠나서 그 분들이 아니
계셨더라면 우리는 아직도 체육관 대통 뽑고있을겁니다.
지금도 혹세무민에 부화뇌동하는 어리석은 이들을 보면서 부끄러운 마음 금할길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시고 댓글까지
편안한 오늘이었으면 합니다~
픽션이 아니고
논 픽션 같은
소설 입니다
단편소설 소재로
필요충분조건 입니다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시고 댓글까지
오늘저녁도 편안하게
보내세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감사합니다
저보다도 더 광주사태를 잘알겠군요
저는 바람결에 들리는
이야기를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봤습니다
불운한시대를 살다간 저와 동연배들의 이야기는 아픔으로
기억되곤 합니다
편한 저녁 보내세요 ~
그 분들의 희생으로 우리는 민주화로 나아갔지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5,18 광주사태
후손들이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운선작가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시고 댓글까지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소설로 쓰셨지만,
리얼하십니다.
소설을 써시는데
소양이 있어 보입니다.
꿈을 모아 모아,
소설가의 꿈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엉성하고 부족한 글
읽어주심에
소양이 있어보인다니
한번 용기를 내 볼까요
감사합니다
편안한 시간 되세요~
제 나라 군인이
제 나라 백성들에게
총뿌리를 겨누었던 시절이지요
지점을 개설 할당시인 81년 광주 들렸을때
문화방송국이 앙상하게 불타 방치되었던 모습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픈 기억들입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시고 댓글까지 감사합니다
저는 그 현장을 한번도
보지 못했지만 있을 수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
잘 읽었습니다
저도 서울에서 자라서
그곳소식은 나중에
들었지요
5.18 묘역에 잠드신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안타까운 첫사랑이 마음을
울립니다
그들의 부모님 더 안타깝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시고 댓글까지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