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소당(참소중한당신) 8월호에 실린 졸고 6월 성지산행기입니다.. 오늘 책을 받아봤구요. 분량이 많아져 5페이지나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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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꽃처럼 피고 또 피고..
- 홍주순교성지를 다녀와서
고계연 베드로(서울경제신문 편집부)
요리 빼고 조리 미적대다가..
"천주를 버리지 않은 죄로 몽둥이로 두들겨 죽지 않자 추운 겨울 물을 뿌려 얼어 순교한 눈물 나는 순교의 현장 홍성성지산행은 백제장수 흑치상지가 마지막 전투를 치른 임존산성.." 산악회 오바오로 총무님의 참가 독려 문자에 흔들렸다. 개인적인 일정이 겹찬 탓도 있지만, 하루 꼬박 시간을 낸다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 매번 함께 하지 못하더라도 이번엔 머릿수를 채워볼까. 처음엔 그랬다. 그러나 끌림이 있었던 것도 사실. 무엇보다 홍성이란 이름은 익숙하지만 홍주라는 낯선 곳에 호기심이 생겼다. 가보지 않은 곳이, 아니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그곳으로 이끈 것이다.
80번의 발걸음.. 아름답지 아니한가
가언산(가톨릭언론인산악회)이 매달 네쨋주 정기 성지순례 산행을 한지 80회째(6년8개월)가 됐다, 가본 곳이 중첩될 수 있음을 감안해도 팔십 곳 가까이를 다녀온 셈. 이 정도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성지는 대부분 섭렵한게 아닐까. 가뭄에 콩 나듯 뜨문뜨문 얼굴을 내민 나로서도 감회가 새롭다. 강산이 일곱번은 바뀌었을 시간. 성지순례 산행에 찍었던 그 발걸음들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싶다. 지도신부님들과 초대 최홍운(베드로) 회장님, 특히 살림살이를 도맡아 온 오완수(바오로) 총무님의 노고 덕분이다. 시야를 넓혀본다면 주님과 성모님께서 이끄시고 보살펴주신 은총이다.
80회를 맞아 지도부의 교체가 있었다. 신임 이건복(프란치스코, 도서출판 동녘 대표) 회장님의 큰 봉사를 기대해본다. 무엇보다 100회 특별이벤트(내년 2월께 유럽 성지순례)를 구상하고 계시니 벌써부터 기대감이 두근두근.. 새로 첫선을 보인 세분의 부회장님(황진선, 전홍구,한순애)과 더블 포스트 산행대장님(유희남 박영숙)도 파이팅!!
홍주(홍성) 성지는 처음이어라
6월 23일 토요일 오전 덕수궁에서 출발한 정기산행에 25분의 회원님들이 함께 했다. 낯 익은 분도 계시고, 처음 뵙는 분도 여럿이다. 오랜만에 안성철(바오로) 지도신부님을 뵈니 반갑다. 권마리아 수녀님(바오로수녀회)과 멀리 아프리카 앙골라 출신의 에밀리아 수녀님(자비의 메르세다리아스 수녀회)도 합류. 10년 정도 한국에서 지내다 보니 우리말을 아주 잘 하신다. 내가 외국에서 그 정도 생활하며 그 나라말을 저렇게 유창하게 할 수 있을까. 그건 미지수. 아무튼 홍성성지는 그분에게 아주 특별한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토요일 오전 충청도 가는 길은 부분 정체를 거듭한다. 누군가는 안면도 꽃 축제에 가는 차량들 때문에 막힌다고도 했다.
두시간 여를 달려 홍성에 닿자 미리 연락이 된 성지 해설사가 우리를 맞아준다. 홍성성당의 성지분과장인 조현옥(프란치스카.44) 자매님. 본당에 성지분과를 두고 있다는 얘기도 특이하다. 그의 해설은 듣는 이의 귀에 쏙쏙 박힌다. 세례받은 지 10년쯤 되신 자매님은 성지 해설만 7년 가까이 하신 베테랑.
버스는 옛 남대문을 연상케 하는 조양문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홍주 목사의 동헌(지금은 홍성군청 뒤뜰)으로 향한다. 그 근처에 있는 순교터는 모두 3곳. 그 가운데 대표적인 곳이 홍주옥으로 무려 113명이 목숨을 바친 순교터다. 그밖에 생매장터, 참수터. 순교자의 핏빛 넋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현장에서 숱한 세월이 지났건만 처연함은 어쩔 수 없다.
예전 홍주산성 터에는 6월의 잔디가 푸르름을 더한다. 신앙증거터 비석(당시 목사의 동헌 자리) 앞에 빙 둘러선 일행. 오늘의 순례에 앞서 기도를 바치고 이곳의 역사를 미루어 짐작해볼 뿐이다.
홍주순교성지 팸플릿을 훑어봤다. 홍주는 박해 초기 원시장(베드로)이 체포돼 1792년 12월 순교하여 충청도 최초의 순교자가 됐다. 홍주영장과 목사로부터 숱한 매질과 고문을 받았지만 목숨이 끊어지지 않자 하얗게 질린 홍주 목사. "저 놈은 틀림없이 귀신을 부리는 놈"이라고 외치며 엄동설한 한 밤중에 온 몸에 물을 뿌려 동사시켰다는데.. 무엇이 원베드로를 이토록 단련시켰을까. 이후 병인박해(1866~1870)까지 이 지역에서 자그만치 212명이 순교했다. 전 박해기간 꾸준히 목숨 바쳐 신앙을 증거한 곳이다. 대표적인 순교자로는 원베드로를 비롯해 방 프란치스코, 박취득 라우렌시오, 황일광 시몬. 이여삼 바오로. 이들 가운데 앞쪽 네분은 하느님의 종으로 올라 있다.
홍성은 아산, 청양, 태안에서 가깝고 주변으로 다락골줄무덤, 신리, 배나드리, 여사울, 해미, 갈매못 성지가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던가. 홍성군청 뒤뜰 잔디밭에서 빙 둘러앉아 김밥과 도시락으로 점심 식사를 하니 꿀맛이 따로 없다. 주위로 눈길을 돌리니 산성 터를 가로지르는 찻길이 보인다. 원래 없었는데 일제가 길을 낸 것. 우리의 정기를 말살한다고 산 정수리에 대못을 박았던 일제의 심술이 느껴진다. 산성 안에 당시 현대식 건물을 낸 것도 그들의 흉측한 소행. 옥터를 오가며 140여년 전의 신앙 선조들의 가시밭길 같았던 삶을 어렴풋이 떠올려본다.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한 장소로는 또 세곳이 있다. 경사당과 동헌, 성내 저자거리. 일정이 빠듯한 탓에 다 둘러보지 못한게 아쉽다. 다시 버스에 올라 생매장터로 향한다. 이곳 성지 대부분은 홍성성당이나 대전교구에서 조성한 것이 아니란다. 신앙공동체의 살림살이가 팍팍한 탓일까. 군청에서 나랏돈을 써 단장한 것이라니 미안함이 고개를 든다. 그 송구함의 정체는 뭘까. 홍성은 원래 충절과 효행을 중시하는 유림의 고장. 그러니 가톨릭이 발 붙이기가 워낙 어려웠을 터. 처절한 순교는 일종의 시범케이스가 돼 전교의 발목을 잡았을 것이다. 지금도 그 영향이 남아 신앙 전파가 힘들다는 믿기 어려운 후문. 아무튼 해설사의 말이 지금도 귓가를 때린다. "민들레를 밟고 뽑아내도 잠시뿐. 그 뿌리와 씨앗은 되레 늘어납니다."
아름다운 예산성당
예정했던 스케줄을 맞추기에는 시간이 촉박하고.. 흑치상지의 무대 임존성 산행은 없던 일이 됐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짜투리 시간을 내서 예산 수덕사로 향한다. 주차장부터 사찰 입구까지는 예의 관광지처럼 식당과 가게가 즐비하다. 나들이에, 출사에, 관광에.. 무더운 6월 산사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잠시 불사에서 머리를 식히며 드는 생각. 聖俗이 따로가 아니고 하나가 아닐까. 발걸음은 오후 4시를 넘겨 예산 성당에 도착했다. 지은지 80년 가까이 되는 아담하고 고풍스런 내외관이 눈길을 끈다. 한국인 신부님이 건축한 이 성당은 8년 전 충남 기념물로 지정됐다. 성당 주변을 카메라에 담느라 분주한 일행. 아름답고 아늑한 성당에서 특전미사를 봉헌했다. "주님, 순교성지를 순례하는 저희의 발걸음을 축복하소서. 아멘"
덧붙인다면..
귀경 길에 궁평항(화성시 서신면)에 들렀다. 때는 저녁이라 푸짐한 회와 조촐한 반주로 화기애애한 뒤풀이. 방파제 길을 따라 산책을 하기도 하고 몇몇 회원님들은 소리를 모아 한곡조 뽑아올린다. 잔잔한 합창에 잠시 7080 속으로.. 늦은 밤 버스 안에선 마이크가 분주하다. 한분 한분 오늘 순례에 대한 소감 나누기. 저마다 순교자들의 영성을 닮아 삶의 현장에서 제대로 살아가자는 다짐들.. 내 마음을 두드리는 또다른 목소리. "탈리다 쿰"(어서 일어나거라. 마르코 5,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