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7만 년 전의 무덤, 시신 주변에 꽃가루가 있어, 무언가 장례 행사가 있지 않았나?
신석기 토기의 빗살, 지그재그 문양
신석기 무덤 내부의 문양들, 동심원, 타원형 문양이 보인다.
도항리, 동심원과 성혈(컵마크)
이집트 무덤 벽화,-- 상형문자이다.(그림문자)
갑골문 이전의 도자기 문양이다. 학자들은 문자로 보고 도문(陶文)아라고 한다. (山과 旦)
숭배에서 주술로, 문양에서 미술로
신석기가 되면 수만 년 동안이나 깊숙한 동굴 안에 머물던 그림들이 동굴 밖으로 나들이를 한다. 동굴 밖으로 나온 미술품은 점차 단순해지다가 마침내는 기하학적인 문양 형태로 변신한다. 그림의 목적이 보고 즐기는 용도가 아니고, 이미지 전달이라면 복잡한 그림보다는 문양이 훨씬 더 효과적인지도 모른다. 문양은 다시 의미 전달만을 전용하는 문자로 새롭게 태어난다. 이렇게 태어난 문자 중에 해독할 수 있는 것은 수멜 문자가 제일 오래 되었다. 그림에서 전용된 문자는 이집트 문자도 있다. 중국의 한문이 유명하다. 모두 읽을 수 있는 문자이다.
신석기인들이 남긴 유적의 대부분은 무덤과 관계있거나. 종교 의례를 베푼 곳이 많다. 당시의 사람들은 육신은 비록 소멸되어버린다고 하더라도 육신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영적 존재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고 믿으므로 무덤을 만들었다. 영혼불멸설은 사후 세계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믿게 하였다. 사후 세계에도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기원하는 의례를 시행하였다. 이런 이유로 이승에서 저승으로 건너가는 장례는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행사가 되었다. 사후의 삶을 상징하는 무덤도 점차 중요성을 더해가면서 규모가 커지고, 장식을 많이 하게 되었다. 사후 세계는 우리에게 종교라는 문화를 만들게 하였다.
신석기 시대의 암화나 암각화에는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들이 많이 그려져 있다. 그만큼 현실의 삶에 대한 욕구도 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무덤에는 사후 세계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지만, 현실 세계에서 복된 삶을 누리고자 하는 욕구도 무척 강하였다. 신석기 시대에는 신에 대한 믿음이 아주 강하였으므로 신과 소통하는 사람이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다. 신전은 정성을 다 바쳐서, 최고의 기술을 동원하여서 지으므로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미술품도 신과 관련지어진 것이 제일 많다.
신석기인들은 돌을 이용하여 무덤도 만들었고, 의례를 올리는 건축물도 축조하였다. 우리나라의 사례를 들자면 선돌과 고인돌이 있다. 유럽에는 거대한 돌을 세워서 만든 구조물(보기-스톤 헨지)이 남아 있다. 이 시대에 만들었던 무덤의 내부나, 암벽 등 신선한 장소로 생각되는 곳이거나, 토기의 벽면에 도식적인 그림(문양 또는 기호)이 많이 남아 있다. 이들이 남긴 고대의 기호는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숭배의 대상으로서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것도 있고, 종족 표시, 소유의 표시(인장으로 발달한다.), 이정표 등등을 나타내는 것도 있다.
기호가 의미를 가지면 상징이 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기호가 원래 가졌던 상징의 의미는 잊어져 버리고 문양의 역할이 장식적인 용도로 바뀌면서 오늘의 장식 도안에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고대인들은 상징물을 현실에서 종교적인 의미를 지녔으며, 삶에 주술적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였다. 기호와 문양이 구석기 시대의 동굴 그림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현실적인 삶에 많은 수확을 바라고, 현실 생활이 풍요로워지는 것을 바라는 주술 행위로 연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주술적 성격을 띄는 일부 소재나 문양, 장식물의 역할은 평안을 기원하는 주문이나 재앙을 막아주는 부적의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 부적은 인간에게 안도감을 준다. 부적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쁨의 감정을 느낀다. 기쁨 즉 쾌에서 아름다움의 감정이 태어난다는 것이 현대미학에서 미의 개념이다. 세월이 흐르고 인지가 발달하면서 주술로서 기호의 상징성은 잊혀졌다. 유학자들이 무당의 행위를 미신이라며 불신하게 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문양의 사용이 계속되면서 미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긍정적인 역할은 계속하여 수행한다. 오늘 날에도 장식 문양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은 문양이 종교적 상징성에서 미술로 태어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무덤이나 신전의 형태도 고대인들의 우주관을 나타내는 상징성을 지니면서 건축물을 도식에 의하여 축조하였다. 내부 장식도 상징성을 띈 기호를 사용하였다.(다음 기회에 살펴보겠다.)
선사인들이 남긴 무수한 문양들이 어떠한 상징적 의미를 지녔는지를 예를 들어서 살펴보기로 하자. 숭배의 대상으로서 상징물이 가장 많았다. 숭배적 상징물은 우리의 의식에서 아주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쉽게 바뀌지 않는 문화적 요소가 되어 있다. 관습이나, 의복 또는 여러 가지 형태의 물질적 문화 요소는 세월 따라 변하지만 상징적 요소는 단지 약간의 변형이나 ,또는 전혀 변화하지 않고 수 천 년을 지속한다. 이들의 기호들이 민속 문양이 되어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숭배나 사상이 변할 때조차도 민속 문양은 놀랄만치 안정성을 유지하는 문화 요소이다. 숭배적 문양 장식에는 긴 역사성으로 볼 때 공동체의 일정한 정신 문화가 반영되어 있다.
상징 문양은 종족이 다르고, 지역이 다르더라도 전 세계적으로 공통성을 지닌 것들이 많다. 원형이나, 지그재그 문양이 대표적이다. 이것은 인간 존재 자체가 객관성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어떤 학자들은 인간의 공통적인 심리구조를 반영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제 실제의 문양을 예로 들어서 그들의 상징적 의미를 더듬어 보기로 하자.
한국 미술사의 문을 열 때는 빗살무뉘 토기를 이야기하면서 시작한다. 빗살처럼 연속하여 줄을 긋거나, 지그재그 양식으로 선을 긋은 것이 한국 토기에 나타나는 최초의 문양이다. 이 문양의 연원을 따지자면 구석기 시대에도 나타나지만 토기의 벽면으로 거처를 옮기고 나서는 수없이 나타난다. 또 하나의 특징은 이런 문양은 농경지대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학자들은 이 문양이 비를 상징한다고 설명한다. 신석기 시대의 토기에서 태양 문양을 찾아보기는 힘들지만 비를 표현하는 문양은 아주 많다. 신석기가 시작하는 일 만 년 전부터 6000년 전까지는 기후가 지금보다 훨씬 더 따뜻하여 농부들은 태양보다 비를 더 절실하게 바랐다고 한다.
유럽의 고대 토기에는 직선, 지그재그 선, 물결의 선을 나타내는 문양과 더불어서 사람 모양의 문양이 그려진 것이 많다고 하였다. 토기에 그려진 사람 모양의 문양은 비를 관장하는 하늘의 여신이라고 하였다. 하늘의 신이라고 하여 모두가 남신인 것은 아니다. 여신을 숭배하던 고대 농경민들의 신앙 유산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태양을 숭배하는 지역에서는 남신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고대 문양을 통해서 우리는 남신이 신의 나라를 통치하기 이전에는 여신이 권력을 쥐고 통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구석기 미술에서 많은 여신상을 보았다.)
비를 상징하는 문양이 비의 모양을 나타낸 것이라면 빗살무뉘처럼 직선이면 충분할 것을 왜 지그재그로 표현하였을까?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고대인들에게 그림이나 문양은 단순히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누이 말하였다. 그들은 문양을 통하여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법을 구사하고 있다. 문양이 나타내는 것은 빗줄기가 아니고, 하늘에서 내려주는 수분(보통명사의 물)을 의미 하였다. 따라서 빗줄기가 아니라 물을 상징하는 수평의 물결문양이나, 지그재그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문양은 재현하는 것이 아니고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빗살무뉘 토기는 약 4-5000년 전에 만들어 졌다. 단군 할아버지가 이 땅에서 곰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나기 훨씬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만든 토기이다. 빗은 비와 비슷함으로 비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일본에서는 소나기 신의 부인 이름을 쿠시나도 히메 인데 쿠시는 빗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하였다. 빗은 단순히 비가 아니라 신을 향한 인간의 염원을 담은 상징어이고, 신 자체이기도 하였다. 단군 이전의 고대인들이(이들은 우리의 직접적인 조상인지 아닌지는 모른다고 한다.) 어머니 신인 여신을 숭배하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고대 문양이 남아 있는 곳으로는 토기 이외에 암각화가 있다. 반구대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암각화는 문양화 되어 있다. 우리나라 암각화에는 성혈, 원형 내지 동심원형, 그리고 검파형이라고 하여 칼자루 모양이거나, 석검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많다.(한국의 암각화에서 보았다.) 원모양의 문양은 후기 구석기 시대부터 나타난다. ‘쾨니히’는 원을 하늘을 의미한다. 원의 중심에 있는 점은 하늘의 배꼽 또는 눈동자로 여겼다.‘라고 설명하였다. 더 재미있는 설명은 구석기 시대에 보았던 임신한 여신상의 배(복부)로 보고 원형의 배에 배꼽이 있는 형태로 설명하였다. 성혈이 여성의 성기 상징에서 하늘 신으로 바꾸어서 설명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구석기의 여신상과 연결하면서 풍요와 다산의 하늘 여신을 나타내는 주술적 문양이 된다. 지모신에서 천신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원의 중심에 성혈이 뚫리어 있는 것을 두고 여성 성기를 상징한다고 설명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원과 동심원은 여성이 아닌 하늘 또는 태양의 상징으로 보는 해석이 더 일반적이다. 우리나라에서 비교적 많이 나타나는 암각화의 문양이다. 형태로는 동심원, 회오리 모양(나선형), 컵-반지형(성혈 주위에 한 개 내지 두 개의 원이 둘러 싼 형태), 컵(성혈)형으로 나눌 수 있다. 이중 동심형 문양은 흔히 태양을 상징한다고 설명한다. 작은 원형은 곡식의 상징이라는 설명도 있다. 도항리에 있는 동심원 문양은 밤하늘의 별을 상징한다고도 한다. 하기야 고호의 밤하늘 그림에 나타나는 별을 닮았다는 생각도 든다. 또 물이 솟는 샘을 나타낸 것이라고도 한다. 왜냐면 암각화가 있는 곳은 옛날에 기우제를 지냈던 곳이라 하여 물과 관련이 깊은 곳이다. 울산의 천전리, 고령 양전리 암각화는 물가에 위치하고 있다.
천전리 암각화에는 나선형 문양이 하나 있다. 이 문양은 선과 선의 간격이 일정하고, 선 형태에도 조형 질서가 적용되어 있어서 즉흥적으로 제작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치밀한 제작 의도를 가지고 만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나선형 암각화는 바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도 한다. 바람은 기(氣)의 개념으로 생명의 상징이 된다. 곡물이 자랄 때는 생명의 존속을 유지시켜주는 바람의 기능에 주술적인 신앙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였다. 바위에 구멍이 뚫린 것은 여성의 생식력을 상징하는 성혈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두 개의 동심원은 여성을 상징하는 반지로 해석한다.
종교적이고 주술적인 효능으로 만든 것이라고 하여 미감을 무시한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더 정성을 들이므로 미적 효과를 높이려 하였을 것이다. 천전리의 회오리 문양에는 시각적 효과를 계산에 넣어서 제작한 흔적을 볼 수 있다. 종교적인 행위이지만 미술로 탄생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 사례이다.
원형 문양은 동심원도 있고, 성혈도 있고, 나선형도 있고, 원판에서 선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형태도 있다. 상징하는 것도 다양하다. 그러나 태양이든, 하늘이든, 비의 상징이든 하늘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의 단군 신화를 이렇게 설명한다. 약 4000년 전에 북방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단군족은 천신을 믿고 있었다. 이들이 남하하여 이 땅에 살고 있던 토착민들과 혼인의 방법으로, 또는 무력으로 서로 결합하여서 우리 민족의 뿌리가 되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빗살무뉘를 사용하면서 여신을 숭배하던 신앙이 천신을 숭배하던 신앙으로 바뀌어 갔다. 신도 여신에서 남신으로 이동하였다. 그 과정에서 단군 신화가 탄생하였다. 빗살무뉘 토기는 여신적 의미가 강한 문양이라면 이후에 만들어진 암각화에는 하늘을 상징하는 문양이 나타난 것이다.
4000년 전이면 천신족이 남하하여 여신 숭배에서 남신 숭배로 바뀌는 것은 우리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나타난 역사적 사실이라고 한다. 단군신화는유대민족의 여호와 신이나 그리스인의 제우스 신처럼 남신이 등장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고대 미술은 이와 같이 문자가 없었던 시대의 사상이나 역사를 짐작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다른 문양에 대한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