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론가는 예술이 좋아서 예술에 대하여 생각하고 글을 쓰면서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비평가가 하는 일이란 작품을 설명하고, 해석하고, 평가하고 이론화한다. 비평을 여타의 글, 말과 구분시키는 핵심적인 차이라면 비평은 “예술작품에 관한 연구된 이야기(discourse)이며, 예술의 이해를 돕고 풍부하게 해 주는 언어의 사용”(바이츠)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비평은 예술의 이해와 감상을 돕기 위한, 예술에 관한 박식한 이야기이다. 아울러 비평의 궁극적인 목적은 ‘토론’이지 ‘선언’이 아니다. 비평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이 같은 인식이 무엇보다도 새삼스러운 한 해였다.
1. 미술가들이 처한 어려움
2003년도는 유난히 미술과 관련된 무수한 말과 비평이 등장했는데 그 주된 장은 인터넷 게시판이었다. 아마도 이런 점이 가장 큰 변화이자 결정적인 차이일 것이다. 이제 특정한 미술평론가만이 미술에 대해 이야기하는 존재가 아니다. 누구나 다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대담하고 적나라하게 ‘들이대는가’ 하면 너무 천박하고, 인신 공격적이고, 자신의 논점과 사고만을 절대화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글들도 눈에 띄었다. 특히나 익명으로 날리는 그 숱한 글들은 너무 원초적이고 즉발적인 반응으로 인해 뜨겁고 무섭기도 하다. 물론 상당히 긍정적인 측면도 분명 존재한다. 미술에 관한 관심을 집중시키고 이전과는 달리 미술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에 대한 여러 의견이 도출되면서 다양한 대안과 여론을 형성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러나 미술과 관련된 진정한 비평은 ‘연구된 이야기’이며 의미 있는 ‘토론’을 이끌어가기 위한 것이다. 그런 형식을 갖추기 위한 노력과 배려가 필요하다.
또한 생각해 보면 동시대 미술인들, 특히 젊은 작가들의 경우, 오늘날 미술계의 상황이 너무 어렵고 좁다 보니깐 이에 대한 극단적인 대응과 불만이 범람한다는 느낌이다. 그만큼 우리 미술계가 열악하고 각박해졌다는 것이다. 이제는 모두가 적대적이며 지나친 경쟁의식에 휩싸여 욕망적으로만 돌아가는 것은 아닌지 불안스럽다.
현재 이곳의 미술가들은 여러 측면에서 어려움에 처해 있다. 미술이라는 것이 상대적으로 위축되고 무가치한 것이 되어 간다는 느낌, 반면 시장은 확대되고, 세계화로 인한 교류가 늘어나며, 새로운 담론이 확대되는 등 미술의 장이 더욱 확장되는 데 반해, 구체적인 전망은 드러나지 않는 등 사정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전시장, 작가, 화상, 평론가와 큐레이터 모두의 어려움이다. 미술관들은 제 구실을 해 내지 못하고 있으며 어떤 전시, 이슈, 작가를 선정해 낼지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이는 미술관의 정체성과도 맞물려 있으며 유능한 큐레이터를 외면하고 있는 형국의 반영이다. 상업화랑들 역시 구멍가게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공공조형물만을 취급하거나 노골적인 장삿속 판매, 작고 작가 회고전 등으로 메워지는 형편이다. 그나마 소수의 메이저 화랑 2, 3군데만이 재벌그룹 하나에 목을 매고 살아가는 지경이다. 아울러 평론의 부재, 이슈의 상실, 의미 있는 기획전시의 부족 등 미술계를 이끌어 가는 주체들의 지난함은 곧바로 한국미술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작가들은 미술작업으로 최소한의 생존이 유지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어렵다. 경제적 가치 실현의 문제가 가장 크다고 하겠다. 그러니까 현재 작가들 대부분이 먹고 살기 어렵고 힘들어졌으며 미술에 대한 의미와 희망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나름의 의미 있는 미술작업의 방향 또한 찾을 수 없다거나 혹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움과 동시에 좋은 작업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 하는 구조적인 어려움도 있다. 여기에 평론의 결정적인 아쉬움이 노정된다. 현재 우리 미술계의 어려움과 지난함에 대해 평론계는 무척이나 무력하다.
2. 불신과 무기력 드러낸 한해
그래서인지 2003년 한 해는 미술평론계가 그 어느 때보다 불신과 무기력을 드러낸 한 해로 보인다. 기존 평론가들에 대한 작가들의 비난은 이제 그 존재를 무시하고 스스로 대안을 찾아 나서려는 열망(?)들을 분출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오늘날 인터넷이라는 광활하고 무서운 여론의 장은 미술인 모두를, 아니 미술에 관심이 있거나 클릭해서 들어오는 모든 이들에게 무한대로 개방되어 있다. 해서 모두들 미술계에 대해, 어떤 특정한 사안에 대해 거침없는 논조를 펼친다. 살벌하고 무시무시한 비난이 오가고 욕설이 난무하기도 한다. 때론 너무 천박하고 너무 무례하다는 인상도 든다.
한정된 미술잡지나 신문 지면은 이제 인터넷에 자리를 내주고 ‘죽은 말씀’으로만 채워지는 것도 같다. 반면 인터넷 게시판은 너무 뜨겁고 현실에서 충족되지 못한 욕구들을 마구 배설해 내는 하수구로 전락하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기존의 평론가들이 무기력과 무능을 드러내는 사이 젊은 신예 평론가들이 새롭게 치고 나온 해도 올해였다. 그만큼 글쓰는 젊은 평론가, 예비평론가들이 적지 않게 배출되었다. 전시를 기획하고 글을 쓰고 그러면서 미술계에 자신의 삶의 입지, 활동영역을 결사적으로 만들려는 지난한 노고가 엿보이기도 하고, 그것이 혹 지나치게 권력적으로, 욕망적으로 비추기도 했다.
어쨌든 미술과 관련된 담론이 적지 않게 흘러다닌 해였다. 담론은 그냥 말이 아니라 떠도는 말이고, 떠돌면서 작용하고 기능하여 주체를 일정하게 작동시키는 힘과 연루되어 있는데, 담론은 그 대상자뿐 아니라, 그것을 말하고 실천하는 당사자에게까지 영향을 끼친다. 그것은 인터넷시대에 미술에 대한 담론들이 마치 부메랑같이 말하고 그것을 말한 사람에게 곧바로 되돌아와 그 사람을 공격하는 수많은 경우에서 목격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어떤 작가나 평론가 혹은 일반 관객이 인터넷 게시판에 미술계의 여러 측면을 공격하거나 특정인을 비난하는 글을 올리면 거기에 해당하는 작가만 피해를 입는 것이 아니라 그 글을 올린 당사자도 담론의 폭격을 받는다는 지적이다. 즉, 담론이 특정한 전문가집단이나 계층 사이에서만 진리로서 통용되는 그런 상황이 아니라, 모든 경계를 넘어서 아메바처럼 마구 증식하기 때문에 어떤 틀 속에 가둬 두고 그 내부자들만 공유하는 것이 이제는 불가능해졌다는 점이 중요해졌다. 그리하여 문제는 어떤 담론을 어떻게 생산하여 어떤 효과를 낼 것인지가 문제가 아니라, 그런 담론의 폭격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가 문제인 것 같다는 지적도 들린다.
그런 면에서 주목되는 사건이 있었다. 『월간미술』은 2003년 1월호에 3545세대(35~45세 사이) 평론가44명이 3545작가를 추천하는 앙케트 분석조사를 해 기재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젊은 작가’라는 주제를 내세운 기획은 현재 한국현대미술의 허리라고 할 수 있는 작가들의 현황과 그들의 작품을 소개함으로써 우리 미술계의 모습을 점검하고 미래를 전망해 보고자 하는 취지에서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작가들이 선정되었다. 결과를 통해 추천인의 작가 선정기준과 시각이 획일적이고 정보의 폭이 다양하지 못한 아쉬움이 드러났다. 여전히 자신과 이해 관계, 학연이 있는 작가들만을 집중 거론함으로써 객관성이 떨어지는 아쉬움도 있었다. 혹은 자신의 미술관, 안목으로 선정하기보다는 기존의 평가와 논의에 기우는 측면이 눈에 두드러졌다. 무엇보다도 이 특집은 추천인을 좀 더 전문성과 안목에 입각해 추렸어야 했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결국 이 기사가 나간 후 인터넷 게시판은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무슨 기준으로 작가를 선정했으며, 작가를 인기 순위 매기듯이 할 수 있느냐는 등 여러 불만과 잡지의 선정성까지 싸잡아 비난하기 시작했으며, 추천한 평론가들에 대한 실망이 쏟아져 나왔다. 나아가 미술잡지 불매 운동으로까지 번져나갔는데 특정 편집자에 대한 인신 공격까지 노골적으로 자행되었다. 급기야 당사자는 “그래, 너희들은 떠들어라. 나는 나의 길을 가련다. 너희들이 있지도 않는 사실로 단내 나는 말을 지어 내고, 황혼에서 새벽까지 정액 썩는 골방에서 난교질을 하는 동안 나는 나의 벗들과 함께 또 하나의 생명을 잉태하겠다. 나는 진실만큼의 고통만을 달게 받겠다… 근거 없는 사실에 혈안하는 자, 사실 없는 근거로 실명하리라”라는 응답을 섬뜩하게 올렸다. 그래서인지 다음 호 『월간미술』의 특집은 ‘한국미술비평의 어제와 오늘’(2003년 2월호)이었다.
김진엽의 「비평이란 무엇인가?」 김인환의 「한국미술비평의 어제와 오늘」, 심상용의 「비평의 역류 또는 역퓨적 비평의 실천을 향해」, K.해리스의 「스스로 탐구하는 예술」 등의 논문과 ‘미술가가 본 미술비평’, ‘큐레이터가 본 미술비평’, ‘작가가 본 미술비평’의 제목으로 앙케트가 실렸다. 거론된 의견들을 종합해 보면 오늘날 미술비평이 죽었거나 살아 있거나 상관없이 과거 비평이 담아 오던 문맥은 소멸하였다는 것이다. 종래 미술비평이라고 불러오던 협의의 글쓰기나 형식비평, 인상비평, 관념비평, 현장비평, 이념비평 등의 비평 방식은 한계에 부닥친 지가 오래다. 미술이 지향해 온 시각 예술적 존재 영역이 너무나 확장되었기 때문에 종전의 비평이론으로는 비평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의 비평 용어는 이미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적 의미론과 함께 정보 혁명, 인터넷, 디지털 과학기술을 모두 활용하여야 한다. 기존 한국미술비평계는 미술비평 방식의 한계와 방법론의 협소함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비평가협회나 조직하여 권익 옹호에 나서는 가족주의적 협의체에서 벗어나 담론의 현장들을 찾아 나서는 진정한 글쓰기가 요구되는 시대라는 인식이 확산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오늘날 광의의 인문학 안에서 비평이론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심상용의 주목되는 글에서는 지난 10여 년 동안 우리 미술비평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도 열정적으로 아메리카와 유럽에서 조성된 용어들의 동시적인 확장과 분배에 힘을 다했다고 진단하다. 그는 우리 미술비평의 언설들이 줄곧 자유방임주의, 신우익적 태도를 취해 왔다면서 비평은 현재의 미학과 질서를 두둔하기 위해 종사해 왔다고 말한다.
“예술작품이 하나의 사건이라면, 비평은 이 사건이 ‘처녀적’일수록, 흥분을 간직할 수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생산되는 대다수 작품들은 더 이상 사건이 아니며, 처녀적 사건은 더더욱 아니다. 많은 경우, 그것들은 현실의 직접적인 반영이거나 현실 자체고, 아니면 이론의 시각적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 심각한 것은 더 이상 예술의 비밀, 혹 비결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비평은 식상한 현실 보도나 이차적 해설, 이론의 답습이다. 학습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제 비평은 예술의 잊혀져 가는 본령을 환기하고, 그 욕망의 물꼬를 그것이 몸 담고 있는 공동체와 사회로 돌림으로써 예술의 반성과 회복의 추이에 관여할 수 있다. 동시대의 ‘이웃들’에게 삶의 지식과 존재의 울림을 더 전하고, 그들의 미래를 밝히려는 의지를 지닌 미술의 편이 됨으로써 주도적으로 역사에 참여할 수 있다. 그것은 시선을 집중시키고 그 안에서만 생존이 가능한 것처럼 위협하는 권력적인 주류 미학을 거부하려는 사람들을 지원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지금 이곳에서 미술비평은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는 주류, 시류 미학의 눈가리개를 벗어 던지는 일이고, 둘째는 기꺼이 그렇게 하는 예술가들의 이념과 시도를 주목하고 평가함으로써 그들이 우울한 자폐와 소외감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도록 하는 일이다”
3. 현대미술의 표현방식 범위확장
김현도 역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미술관이 늘어나고, 화랑은 고급화되고 있으며, 각종 미술교육기관이나 대안공간, 그리고 미디어를 통한 교양 프로그램도 다양해지고 있다. 무엇보다 대형 국제비엔날레가 국내 세 군데 지역에서 열리고 있다. 여기서 영역의 팽창은 수준에 대한 의심을 증폭시킨다. 차라리 그것은 제도적 팽창에 따른 명실상부한 수준에 대한 요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저 주어진 제도를 부지런히 걸레질하고, 지분을 관리하며, 텃세를 챙기는 식의 현장 비평으로는 결코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 그런 식의 잡담으로는 미술을 제도화된 잡기 수준으로 인식시킬 우려가 있다. 냉정하게 볼 때, 미술비평은 현실적으로 어떤 담론도 생산하지 못 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는 이 관문의 열쇠를 쥐고 있는 저널리즘이 세대적 요구에 전혀 부응하지 못 하고 있다는 점이다. 각종 저널리즘이 비평 의식의 정당한 지표를 제시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담론화 가능성을 자의적으로 파편화하기 일쑤다. 최근에 온라인 미술 관련 사이트를 통한 익명적 채팅들은 이러한 현실적 불만의 당연한 매체적 대안이며 시위적 반응의 성격을 띤다. 그러나 온라인에서 익명적 참여에 의한 음성적 자유의 역기능에 대해서는 따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담론적 실천이나 사회 문화적 행동주의의 정당성 등 어느 각도의 취지에서 보더라도 이러한 음성적 참여의 지속력은 의외로 빨리 소진될지도 모른다. 요컨대 지금은 비평과 저널의 기능 부전이 당면 문제이며 당분간 익명적 비난의 쓴소리까지 약으로 받아들여야 할 처지인 것이다”
아울러 설치ㆍ영상 등 신매체에 밀려 회화가 설 곳을 잃고 있다는 진단과 그에 따른 모색도 여전히 평단의 관심을 끌었다. ‘회화의 출구는 어디인가?’란 특집(『아트인 컬쳐』 3월호)에 실린 ‘회화를 넘어선 회화, 여기까지 왔다’(이영철)란 글은 동시대 회화의 상황에 대한 흥미로운 지적으로 일관되어 있다. 오늘날 회화의 죽음은 30여 년 동안 미술의 중심이었던 모더니즘 회화의 죽음일 뿐, 근본적인 회화의 죽음은 아니라는 것이다. 회화는 새로운 영역 속에서 새로운 비상을 꿈꾸고 있으며 이미지와 물성, 평면성이라는 고정관념을 넘어 시간성을 도입하고 공간성으로 진입하고 있다. 설치와 회화가 접목되고 사진, 비디오, 인터넷과 회화가 만난다. 화가의 손과 촉각적 가치는 그 속에서 여전하며 오늘날 회화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어서 ‘후기 미니멀적 추상’, ‘모노크롬 이후의 새로운 이름’(진휘연), ‘개념회화, 논리와 감각의 화해’(유경희), ‘한국화의 침체,극복의 해법은?’(김학량), ‘신세대 회화, 그 다중적 정체성’(김미진), ‘비디오, 회화로서의 가능성’(정용도) 등의 글(『아트인 컬쳐』 4월호)은 현재 한국 회화의 상황을 다각도로 진단해 본 글들이다.
최근 현대미술의 표현 방식은 설치와 영상 매체의 적극적인 도입으로 그 범위가 무한히 확장되고 있는 추세는 다른 어느 미술 장르보다도 재현의 문제에 고민해 온 조각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상황에 따라 ‘한국 구상조각의 정체성 찾기’(『월간미술』 5월호)란 특집을 마련했다. 급변하는 현대미술의 흐름 속에서 오랜 전통과 양식적 특성을 간직해 온 구상조각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면서 1980년대 이후 서구 미술에 나타난 형상조각 사례를 통해 구상조각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앞으로 전개될 가능성에 대한 글을 실었다. 최태만의 ‘한국 구상조각의 역사와 계보’, 조은정의 ‘타자화의 길을 걸어온 한국 구상조각과 그 가능성’, 김정희의 ‘1980년대 이후 서구의 인간 형상 조각’이 그것이다. 결론적으로 재현의 가능성에 대한 전반적인 회의와 관련된 구상조각의 위축은 필연적이지만, 반면 구상이기 때문에 진부한 것이 아니라 사고와 방법이 진부하기 때문에 그 결과인 작품이 상투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2003년은 독일현대미술에 대한 관심이 유난했는데 관련 전시가 줄을 이었기 때문이다. <독일현대미술3인전>(갤러리현대), <게르하르트 리히터전>(대림미술관), <독일현대미술전>(부산시립미술관), <볼프강 라이프전>(국립현대미술관) 등이 있었다.
‘독일 현대회화와 사진’(『월간미술』 6월호) 특집에서 김혜련은 ‘신표현주의와 리히터, 그리고 독일 현대회화’, 박정기의 ‘회화의 종말과 독일 현대회화’, 진동선의 ‘현대미술과 유형학적 독일 사진’ 등은 현재 독일 미술과 사진에 대한 친절한 설명과 이해를 준 글들이다.
역시 아시아 미술에 대한 관심과 조명이 비평계에 크게 대두되었던 한 해였다. 글로벌 시대에 아시아 미술에 대한 관심이 부쩍 고조되었다. 현재 전세계 주요 미술관, 화랑 등에서는 아시아 미술전시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지금 아시아 미술은 국제 미술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새로이 떠오르는 무한한 가능성의 영역이며,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반면 글로벌리즘의 미명 아래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아시아의 대규모 국제전들은 결과적으로 아시아 미술을 점점 더 서구 미술에 동화시켜 왔다는 지적도 있다. 그에 따라 다시 아시아 미술의 정체성이 새삼 논의되는 형편이다. 따라서 아시아 미술의 현재를 진지하게 고찰하고 제대로 이해하려는 욕구들이 그만큼 커졌다고 본다. ‘새로운 아시아 미술’이란 특집(『아트인 컬쳐』 1월호)을 통해 ‘아시아, 글로벌과 정체성의 얼굴’(이용우), ‘신세대 작가들, 역동적 공사 현장 속으로’(김성원)등의 글을 실었으며 이어서 ‘유목시대, 아시아는 어디에 있는가?’(윤재갑, 『아트인 컬쳐』 2월호)란 글도 발표되었다. ‘동아시아 미술의 구도와 정체성’(『월간미술』 12월호)이란 특집에서는 아시아 현대미술을 이끌어가는 동아시아 삼국 큐레이터 및 비평가의 목소리를 통해 아시아 미술 교류의 현주소와 각 국의 현대미술과 바람직한 교류 방법을 점검하면서 이를 올해 아시아 미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서구 미술과 견줄 수 있는 아시아 네트워크 강화를 위한 초석을 기대했다. ‘아시아 네트워킹의 생산적 지평’(이원일), ‘아시아의 다원성, 아시아의 독자성’(이태호) 등의 글이 실렸다. 다양한 전시를 통해서도 아시아 미술이 대거 소개된 한 해이기도 했다.
4. 눈여겨 봐야 할 논문들
주목되는 논문으로는 정영목의 「미술과 정치-피카소의 한국전쟁 관련 작품과 한국ㆍ일본의 추상미술 1950-1960」(『월간미술』 6월호)이란 글이다. 그는 이 글을 통해 미술과 정치 권력의 문제, 피카소의 작품과 전후의 추상미술을 살펴본다. 무엇보다도 치밀한 고증과 자료의 제시를 통해 설득력 있게 논리를 전개해 나간 보기 드문 글이었다. 반공정책 아래 남한의 검열과 통제 가운데에서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는 국가 차원의 지원을 받으며 냉전체제 하에서 그들의 문화를 전파하기 위한 미국의 무기처럼 사용되었다면서 당시 남한에서 서구의 문물과 정보를 획득한 그 자체가 권력으로, 지식으로 둔갑하던 시대였던 미술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만큼은 확실하다는 결론이다.
아트 에세이를 통해 심층적이고 논리적인 글쓰기, 깊이 있는 인문학자의 안목을 보여 준 이들의 글도 미술잡지에서 눈에 띄었는데 그만큼 타 분야 전공자들이 미술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독문학자인 고려대 교수 문광훈은 ‘모네의 <생라자르역>-정거장에서의 중얼거림’(『월간미술』 6월호)이란 글을 통해 격조 있는 에세이로 모네의 그림을 분석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정화열은 ‘정화열의 몸 철학’이란 코너를 통해 ‘예술, 죽음과 불멸성’(『아트인컬쳐』 2월호)을 발표하였다. 그 외에도 여러 학자들의 글쓰기가 이어지는 등 인문학자들이 미술잡지에 적극적인 글쓰기를 보여 준 한 해로 기억된다. 타 장르의 학자, 필자들의 미술에 관한 글쓰기는 이곳 미술평단에 자극이 되는 동시에 또 다른 시각과 이해의 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무척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평론가들의 개별 작가에 대한 작가론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진휘연은 ‘마이클 주-자의적으로 진화한 개념 미술’(『월간미술』 1월호)에서 개념미술이 미술의 독자성을 스스로 파괴하면서 수학, 철학, 논리학, 언어학 등을 이용한 확대된 비미술적 담론을 발전시켰다면 마이클 주의 작업은 여기에다 2002년이라는 시간의 축을 적절히 이용하고 한국인과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더함으로써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고 진단한다. 그의 또 다른 작가론은 ‘이동기-낭만적 상상력의 만화 주인공’(『월간미술』 3월호)이 있다.
강태희의 ‘이불-이불의 몸 짓기, 당신은 몸을 어떻게 입으세요?’(『월간미술』 2월호)는 오랜 미술사의 흐름 속에서 예술가의 끊임없는 관심 대상으로 존재해 온 ‘몸’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이불의 작품세계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 작가의 초기 작부터 최근 작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나타나는 ‘몸’의 사회, 문화적 코드를 해외작가의 사례와 연관지어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김원방의 ‘김영진-타자의 얼굴로 바라보기’(『월간미술』 2월호)에서 김영진의 작품들은 하나의 충동이나 결핍 동기에 의해 연속적이고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진행형의 사건들’과 같다면서 그 사건들은 거의 예외 없이 몸, 변신, 이탈, 동일성의 해체, 분열, 억압된 것, 타자성, 이질적 교환, 기이함 등의 문제에 밀착되어 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김영진은 1990년대 한국의 가장 중요하고 시사적인 작가 중 한 사람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고충환은 ‘김창겸-실재와 이미지 사이에서 길을 잃다’(『월간미술』 4월호)에서 “김창겸의 작업은 슬라이드 프로젝트와 비디오 설치를 근간으로 하며, 여기에다가 실물을 그대로 흉내 낸 석고 모형과 텍스트 등 최소한의 오브제를 도입하고 있다. 그리고 선명한 개념과 그 개념의 형상화를 통해 재현의 두 축인 실재와 이미지의 관계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동)영상 매체를 오히려 금욕적일 만큼 절제되고 정적인 방식으로 역류시킴으로써 이미지의 문제로부터 시작된 사고의 부피를 인간 실존에까지 증폭시킨다. 사고의 깊이에서 오는 아름다움이 있다.”
오혜주의 ‘윤석남-주체적 언어와 재현 방식을 소유한 작가’(『월간미술』 5월호)에서 가부장제에서 보편적이라고 통용되는 언어와 중요하다고 통용되는 가치와 지켜져야 한다고 통용되는 질서를 혼란스럽게 할 수 있는 코드를 필요할 만큼 개발해 품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지은의 ‘김명희-경계에서 바라보는 안과 밖’(『월간미술』 6월호)디아스포라의 측면에서 김명희의 작업 세계를 살펴본 이 글은 이산과 파종의 문화, 혼혈과 대립의 갈등, 이동의 자취를 추적하는 거대한 지도에서 이어지는 동과 서의 연결 부위에서 작가의 작품을 조명하고 있다.
성완경은 ‘김지원-무거운 그림, 가벼운 그림’이란 글을 통해 일상에서 체험한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본다는 것’과 ‘그린다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회화적 조형 어법으로 형상화한 작가의 그림을 논의하고 있다. “ ‘그림에 관한 그림’, ‘그림에 대해 회의하는 그림’이 어쩌면 한 문화와 제도의 자기 최면이 아닌지를 비평해야 할지도 모른다… 대중문화의 막강함 앞에서 회화와 예술의 자기 질의가 있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질의 방식은 새로워야 할 것이다. 작가의 자의식도 변해야 하고 재구조화되어야 할지 모른다… 문제는 필요한 만큼의 역사적, 미학적 성찰과 예술로서의 강도를 가졌는가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송미숙의 ‘서도호의 소제국-안과 밖의 뒤집기’(『월간미술』 8월호)는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집단 속에서 야기되는 개인의 동질화와 차이, 집단적 힘, 공간의 경험 등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서도호의 작업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심상용의 ‘이기봉-근대와의 결별, 대서사의 연장에서’(『월간미술』 10월호)필자는 이기봉의 작품의 형식적 특성과 주제 의식을 사각형의 패러다임의 숙청, 글쓰기의 일탈, 책의 반란, 그리고 속도의 인간화처럼 근대성으로부터 탈피하려는 ‘후기’ 시대의 명제와 일치한다고 진단하면서도 담론의 주체로서보다는 시각주의자로서의 작가의 재능에 대해 말하고 있다.
5. 돋보이는 단행본들
미술비평과 관련된 단행본으로는 우선 심상용의 「천재는 죽었다」(『아트북스』 2003)가 돋보인다. 저자는 천재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외치며, 현대사회의 물신화된 욕망과 매스미디어가, 예술계의 오랜 관습이 어떻게 한 사람의 작가를 ‘천재’로 ‘만드는’가를 이야기한다. 이를 통해 창조적 천재의 등장을 가로막는 정체되고 시스템화된 현실을 폭로하고 진정한 천재를 기대하고자 한다.
박용숙의 「한국현대미술사 이야기」(예경, 2003)도 눈에 띤다. 오랫동안 미술비평가로 활동해 온 박용숙은 작품과 그것을 배출한 시대 상황을 날줄과 씨줄로 삼아 우리 현대미술 100년의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제 14회 석주미술상을 수상한 김홍희는 두 권의 책을 출간했는데 각 권이 400쪽이 넘는 방대한 양으로 제 1권 『여성과 미술』은 1부 ‘여성 미술과 페미니즘’과 2부 ‘한국 여성 미술과 페미니즘’으로 구성되어 있고, 제 2권 『한국 화단과 현대미술』은 ‘한국현대미술 포럼’과 ‘참여와 소통의 예술’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한국현대미술의 흐름과 여러 경향을 한눈에 조감할 수 있게 편집되었다.
식물성을 화두로 삼아 한국현대미술 읽기를 시도한 박영택의 「식물성의 사유」(마음산책, 2003)은 풀, 꽃, 씨앗, 사군자 등 식물성에 대한 14개의 항목을 통해 우리 미술의 진경에 대한 의견을 담고 있다. 100명의 한국현대작가와 104점의 작품을 소개한다.
역서로 눈에 띄는 것은 「실재의 귀환」(헬 포스터, 이영욱 외 옮김, 경성대학교 출판부, 2003)이다. 『옥토버』지의 공동 편집자이자 현재 프린스턴대 현대미술사 교수로 있는 저자의 「The Return of Real」(The MIT Press, 1996)을 번역한 것이다. 이 책에서 필자는 1960년대 이후 30여 년에 걸쳐 북미와 서유럽의 미술 현장에서 일어난 이론 및 주요 변동들에 초점을 맞추어 이 시기를 모더니즘으로부터 단절되고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전환한 시기라고 진단한다. 또 그는 1960년대 이후 네오아방가르드와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을 고찰하고 있다. 그의 글은 20세기 말 뉴욕이라는 특정한 시공간에서 보여 준 미술의 가능성으로 한국미술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6. 비평관련 학술행사들
비평 관련 학술행사로는 2003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추계학술세미나가 홍익대학교 조형관에서 열렸다. 이번 주제는 ‘평론가와 작가 사이’라는 흥미로운 테마였다. 고충환은 ‘구경숙의 작업-존재를 투영하는 몸 오브제’, 신항섭은 ‘강관욱의 작품세계’, 최태만의 ‘안창홍-오만과 자긍심’이란 발표를 했다. 구체적인 작가, 작품을 발표하고 논의를 주고받는 생산적인 자리였다. 아울러 ‘한국미술이론학회’가 새롭게 창립되어 12월 6일 서울대학교에서 창립총회와 학술대회를 가졌다. 이번 주제는 ‘미술의 이론과 실제’였으며 미술 창작과 해석에 필요한 제반 이론 및 다양한 미술 활동 연구를 목적으로 하였다.
◈ 筆者 : 박영택 미술평론가 | 경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