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독서일지 (5)
(24.05.04~05.25)
다시 화창한 봄날, 다른 책속으로
-5일차(24.05.08)
화창해서 봄날이다. 인생이 날마다 이렇게 화창하다면 어떨까. 아마 지루할 지도 모르겠다. 듣기 좋은 경복궁 타령도 한두 번 이랬던가. ‘말장난’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영원’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우리의 삶이 죽음이라는 단계 없이 영원하다면 어떠할까. 아마도 역시 지루할 것이다. 그런데 이건 모순이다. 영원히 살고 싶으면서도 지루해서 참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죽음의 긍정적인 면도 생각해보게 되는.
우리는 일상에서 가끔 이런 모순적인 감정이나 상황을 경험한다. 그래서 한동안 ‘모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러다 너무 몰입한 나머지 삶을 바라보는 시각에 ‘모순’이 자리 잡으며 부정적인 감정에 지배당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모순’은 부정적인 개념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문학 작품에서 ‘모순의 즐거움’이라는 어구를 발견하고는 순간적으로 그 울타리를 벗어나고 만다. 신나게 말이다.....
《남아 있는 나날》을 다 읽고 감상문을 쓴다. 창밖으로 보이는 날이 너무 좋아 점심 먹고 난 오후에는 운동이든 뭐든 구실을 엮어 외출을 해야 할 것 같다. 지금 하지 않으면 내 인생의 ‘남아 있는 나날’ 중에 언제 할 건가. 《사서 일기》에서 보여줄 다른 세계로 난 문을 조심스레 열어젖힌다. (아내가 내가 책을 읽는 모습을 보고 자기도 읽겠다면서 《작지만 큰 한국사, 인삼》를 들고갔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송은경 옮김/민음사 2022년판
삶과 시간의 의미
1
번역된, 특히 문학 작품일 경우에는 번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번역이 적절하지 않다고 느끼는(작품은 마음에 드는데) 경우에는 무척 실망하거나, 따로 원서를 펼쳐 감상하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한다. 지금까지 번역된 작품을 읽을 때마다 종종 있었던 일이다.
외국인이 외국어로 쓴 작품이지만 우리말로 번역된 작품을 읽을 때는 완벽한 우리말처럼 완성된 감동을 얻고 싶다. 이 작품은 번역이 잘 되어 책을 읽어나가는 도중에 틈틈이 번역자의 프로필을 확인했다. 그런데 번역자가 이 책의 출간을 앞두고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는 내용이 적혀있어서 마음이 아팠다. 번역 작가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2
어릴 때부터 태어나 살아온 자신의 나라 말에 아름답고 정제된 문체로 자국의 오랜 전통과 정서가 함양된 문화적 풍경을 문학 작품으로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하물며 외국인으로서 타국에 이민을 가-비록 어릴 적부터 이민간 나라에서 언어를 익히고 그 나라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았다고 하지만-그 나라 민족의 깊숙한 내면세계와 사회를 통찰력 있게 파악하고 문학 작품화하기란 더욱, 어려울 뿐만 아니라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진다.
영국의 유구한 문화적 전통과 정신뿐만 아니라, 1920년대에서 1950년대 사이에 전개되는 격변기의 영국 현대사를 관통하며 신념을 다해 살아온 한 인간의 삶에서 보편적 인생을 예리하게 파헤쳐낸 소설로서, 그 작품성을 인정받으려면 요구되는 작가의 경의로운 재능과 노력이 가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이기 때문이다.
일본 국적의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그런 점에서 특별한 문학적 재능과 함께 조금의 유전적 상속도 없는 국외자로서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영국적 삶과 정신을 영혼 깊숙이 내면화하는 동시에 인류의 보편적 인생을 작품화시켜 널리 보여줌으로서 지성의 지평을 폭넓게 하고 있는 작가인 것이다.
3
얼마 전 ‘서양 철학사’와 관련하여 읽은 어느 개론서에서 저자가 말미에 한 말이 떠오른다. ‘철학은 결국 혼자서 길을 찾아가는 학문이다’라고. 이 말을 조금 방향을 바꾸어 말한다면, ‘인생이란 결국 혼자서 길을 떠나는 여행이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영국의 ‘달링턴 홀’이라는 대저택의 집사라는 전문직에 신념과 자부심으로 거의 평생을 보내고 이제 은퇴시기로 접어든 주인공 ‘스티븐스’는 최근에 새로 바뀐 대저택의 주인의 권고로 영국의 서부지방을 여행하는 단기 휴가를 얻는다.
영국 서부지역을 차를 몰고 지나가면서 아름다운 자연이 선사하는 영국적 ‘위대함’을 느낀 주인공은 오랜 세월 명망 있는 신사였던 주인을 집사로서 가까이 모시며, 대저택 내부의 각종 국제적 연회를 그때마다 무사히 치러냄으로서 세계적인 역사 중심에서 일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명예를 마음껏 향유했다.
그러는 사이 그의 시간은 대부분 다 흘렀고, 대저택에서 일하는 동안 이루어질 수도 있었을 어느 아름다운 여인과의 사랑도 안타깝게 무산되었지만 주인이 바뀌면서 업무상 그녀의 도움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으로 여정을 꾸려 출발한다.
가는 도중 시간이 날 때마다 평생 집사일 외에는 해본 일이 없는 주인공으로서는 달리 할 게 마땅치 않아 과거의 기억을 반추하는 회상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소일한다.
누구에게나 인생 말년에는 일단의 회한과 후회가 뒤따르는 법일까. 안타깝게도 자신이 평생을 일궈가며 충성을 바친 주인은 2차 세계대전의 주범인 ‘히틀러’의 나치 협력자로 오해받으며 불명예를 떠안고 말았다. 그 바람에 자신이 섰던 자리와 충성을 다해 섬겼던 오랜 시간들은 허망한 물거품처럼 한순간에 사라지고 그는 그만 허탈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일말의 기대를 걸었던 옛 동료인 여인마저 결국 자신의 가정으로 돌아가는 대부분의 인생이 가는 평범한 길을 선택한다.
4
주인공 ‘스티븐스’는 그녀가 사랑인지조차 그때는 모를 정도로 자신의 일에만 몰두했다. 심지어 대저택의 연회를 지키느라 당시 같이 있었던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만다. 그는 때때로 대저택의 집사들만 모이는 회합에서 그런 자신의 업무 방식에 대해 위대한 자부심과 명예를 내세우기도 했는데, 이것은 그 전에 자신의 아버지(역시 일에 관한 한 철저해서 자랑스런 집사였다)가 살아온 방식이기도 하다.
여정의 끝 무렵 어느 버스 정거장에서, 옛 여자 동료와 헤어지던 장면을 떠올려 본다. 이별의 시간이 닥치자 양 눈가를 적시며 흘러내리는, 눈물에 젖은 애절한 그녀를 보고 잠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만, 곧바로 그녀를 위로하는 프로다운 면모를 연출하며 과거에 일 외에는 늘 외면했던, 사는 동안 늘 일관되게 해온 것처럼 그 순간을 그냥 지나가버린다.
그러니까 그는 이야기가 다 끝나가는 시점까지도 자신의 살아온 삶에 대한 명확한 깨달음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그의 주변에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 아니,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그렇게 말할 거요.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
(<여섯째 날 저녁 : 웨이머스> 중에서)
모든 일정을 마치고 저녁 선착장에 나와 바닷가 지평선으로 저물어가는 노을을 조용히 감상하려는 그에게 근처에 우연히 같이 있게 된 노인이 툭 던지듯 해준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주인공은 새로 모실 주인이 농담을 좋아하는 것 같아 그에 대해 적절히 대응해줌으로서 주인을 만족시킬 방안에만 몰두하는 것으로 이야기 《남아 있는 나날》은 끝을 맺는다.
(2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