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백범일지
김구 지음
3 .1 운동의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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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동지들은 대개 무사함을 알고 다행히 생각하였다. 그러나 수색의 손이 날마다 움직이니 재류 동포가 안거할 수가 없고 또 애매한 동포들이 잡힐 우려가 있으므로 나는 동경 사건과 이번 홍구 폭탄 사건의 책임자는 나 김구라는 성명서를 즉시로 발표하려 하였으나, 안공근의 반대로 유예하다가 마침내 엄항섭으로 하여금 이 성명서를 기초케 하고 피취 부인에게 번역을 부탁하여 통신사에 발표하였다. 이리하여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 사건이나, 상해에 백천 대장 이하를 살상한 윤봉길 사건이나 그 주모자는 김구라는 것이 전 세계에 알려진 것이었다.
이 일이 생기자 은주부 주경란 같은 중국 명사가 내게 특별면회를 청하고 남경에 있던 남파 박찬익 형의 활동도 있어 물질로도 원조가 답지 하였다 만주사변, 만보산 사건 등으로 악화하였던 중국인의 우리 한인에게 대한 감정은 윤봉길 의사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극도로 호전하였다.
왜는 제1차로 내 몸에 20만원 현상을 하더니 제2차로 일본 외무성 조선 총독부 상해 주둔군 사령부의 3부 합작으로 60만원 현상으로 나를 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전에는 법조계에서 한발짝도 아니 나가던 나는 자동차로 영조계 법조계 할 것 없이 막 돌아다녔다. 하루는 전차 공사 인스펙터로 다니는 별명 박 대장 집에 혼인 국수를 먹으로 가는 것이 10여 명의 왜 경관대에게 발견되어 박 대장 집 아궁이까지 수색되었으나 나는 부엌에서 선 채로 국수를 얻어먹고 벌써 나온 뒤여서 아슬아스랗게 면하였다.
남경 정부에서는 내가 신변이 위험하다면 비행기를 보내마고 까지 말하여 왔다. 그러나 그들이 나를 데려가려 함은 반드시 무슨 요구가 있을 것인데 내게는 그들을 만족시킬 아무 도리도 없음을 생각하고 헛되이 남의 나라의 신세를 질 것이 없다 하여 모두 사절하여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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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하는 동안에 20여 일이 지났다.
하루는 피취 부인이 나를 보고 내가 피취 댁에 있는 것을 정탐이 알고 그들이 넌지시 집을 포위하고 지키고 있다 하므로 나는 피취 댁에 더 있을 수 없음을 깨닫고 피취 댁 자동차에 피취 부인과 나는 내외인 것처럼 동승하고 피취 씨가 운전수가 되어 대문을 나서 보니 과연 중국인 러시아 인 프랑스 인 정탐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사이로 피취 씨가 차를 빨리 법조계를 지나 중국 땅에 있는 정거장으로 가서 기차로 가홍 수륜사창 에 피신하였다. 이는 박남파가 은주부 저보성 제씨에게 주선하여 얻어 놓은 곳으로 이동녈 선생을 비롯하여 엄항섭 김의한 양군의 가족은 수일전에 벌서 반이해 와 있었다.
나중에 들은 즉 우리가 피취 댁에 숨은 것이 발각된 것은 우리가 그 집 전화를 남용한 데서 단서가 나온 것일 하였다. ▶다음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