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 비를 맞으며 선자령을 오르다
선자령은 역시 눈 내린 겨울에 올라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는 산이라는 생각을 하며 장장 4시간 30분 코스를 걷는 동안 비바람은 왜 그리 몰아치는지-- 하산하고 보니 마치 시골에서 논을 삶다 나온 모습 그대로였다. ‘이럴 줄 알았다면 등산화 대신 장화를 신고 올 걸’ 누군가 농담조의 말 한마디가 실감나는 하루였다.
2011년 9월 4일(일요일) 오전 7시 30분 정시에 동대문역사박물관 역을 출발 한 제천산악회 (회장 김관호)회원 30명과 峰笑산우회 회원님들 아홉 분, 모두 39명을 태운 버스(대경투어)가 대관령 휴게소에 도착한 시간은 이날 오전 10시 40분. 서울을 벗어날 때 그토록 해맑던 가을 하늘은 온데간데없고 비옷 신세를 지지 않고는 도저히 오르기 힘든 날씨로 돌변해 버렸다.
삼삼오오 비날 우의를 챙기느라 바쁘다. 그럭저럭 11시가 가까워서야 등산로 초입에 다다랐다. 여기서 선자령(仙子嶺) 정상 까지는 5. 8키로, 짓궂은 날씨만 원망하며 좌우를 살펴보니 보이는 것이라곤 비바람으로 흙탕길이 된 오솔길이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드디어 선자령 정상, 시계를 보니 오후 한시가 가깝다. 비를 맞으며 정상에 섰으나 태풍의 영향인지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거센 돌풍이 시야를 가로 막는다. 선자령은 백두대간이 강릉시와 평창군 도암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대관령 북쪽에 위치한곳으로 해발 1,157m, 비교적 높은 산이지만 대관령휴게소가 840m로 정상과의 표고 차 317m를 긴 능선을 통해 산행하게 되므로 일반인들도 쉽게 오를 수 있다. 등산로는 누군가 말했듯이 동네 뒷산 가는 길 만큼이나 평탄하고 밋밋하다.
지형은 동쪽이 단애와 급사면을 이룬 반면 서쪽은 완만한 경사지를 형성한데다 토질도 좋아 일찍부터 목장이 들어서기 알맞은 조건을 갖추어 목장지대가 들어서 있다. 계곡과 능선의 높낮이가 유순하고 평탄하며 겨울에 눈이 올 경우 깊이 쌓이는 곳이다. 맑은 날 선자령 정상에 오르면 강릉시내와 동해가 한눈에 들어오고 멀리 남쪽으로 발왕산, 서쪽으로 계방산, 서북쪽으로 오대산, 북쪽의 황병산이 바라다 보이지만 이날따라 비구름이 우리를 시셈 했는지 우리가 보아야할 절묘한 시야를 가로막고 주능선 서편 일대 억새풀만이 초원을 이룬 체 바람을 막느라 뒤엉킨 몰골이다.
우뚝 선 백두대간 선자령 표지 석엔 “표고 1157미터, 위도 : 37 43‘ 10”, 경도 : 128. 44’ 50” 강원도 평창군 도암면 횡계리 산 1-134” 가 선명하고 사방으로 초지를 이룬 억새풀 위로는 풍력발전기 도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린다. 이곳엔 30기가 넘는 풍력 발전기가 있지만 비구름에 가려 탑은 보이지 않고 희미하게 보이는 날개만 둥근 원을 그리며 돌고 있다. 이 풍력 발전기는 한 기당 약 36억 원, 한 기에서 발전하는 전기로 2,000가구 정도가 쓸 수 있다고 한다.
기념촬영을 하는 둥 마는 둥 보현사 계곡 길로 하산 길을 택했지만 군데군데 소(沼)를 이룬 듯 한 오솔길은 자칫 한눈을 팔다가는 미끄러지기 십상이다. 정상에서 두어 시간쯤 내려 왔을까 쉼터가 보인다. 비만오지 않았다면 이곳에서 둘러 앉아 제법 술판이 벌어졌겠지만 간식으로 각자 가져간 빵과 떡으로 허기만 면할 정도, 그래도 비를 맞으며 마신 시원한 막걸리 한잔, ‘영원히 잊지 못 할 추억’거리가 될 것이라는 홍정식 선배(85세)님의 노익장에 감탄사가 꼬리를 문다.
내리는 비는 초가을 보슬비였지만 손은 벌써 초겨울 날씨, 털 장갑생각이 굴뚝같다. 가도 가도 버스정류장 대관령 휴게소는 보이지 않고 힘겹게 넘나들어야하는 고개만이 숨찬 발걸음을 재촉할 뿐, 서너 시간 비에 젖은 옷 속으로 싸늘한 한기가 온 몸으로 파고든다.
장장 4시간 넘게 고개를 오르내린 뒤 대관령 휴게소에 이르러 바지가랑이를 보니 영락없는 논 삶은 상일꾼이다. 어느새 수세식 화장실은 간이 세탁소로 변하고 얼굴을 씻는 둥 마는 둥, 차에 오르니 먼저 하산한 일행들이 존경스럽기만 하다.
귀경 예정시간을 10여분이나 앞당긴 오후 3시 15분, 대관령 휴게소에서 황태 요리로 소문난 식당 ‘황태덕장’까지는 불과 10여분 거리, 시장이 반찬이라 던 가. 시원한 막걸리를 곁들인 황태정식은 김관호 회장이 차에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극찬한 대로 꿀맛 같은 밥맛에 모두들 황태 한 마리를 순식간에 해치우는 왕성한 식성이 놀랍다.
이날따라 차내 분위기도 압권이었다. 윤준섭 제천산악회 사무국장의 해학과 지성미 넘치는 달변은 등산으로 피곤한 몸을 풀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봉소산우회 회원들이 정성껏 마련한 돼지 족발이 입맛을 돋우니 소주잔이 또한 바쁘게 오가지 않고 베기겠는가. 이날따라 미모의 여성 회원들이 다수 동참, 몇몇 분은 부부동반으로 선자령을 오르는 모습이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앞에서 끌어 주고 뒤에서 밀며 험준한 산행 길을 함께 오르는 모습이 부럽기 그지 없었다. 차내에서의 가무를 즐기고 싶은 일행도 없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시종일관 품위를 지켜준 인내심은 그런대로 평가할만한 차중 메너였다고나 할까. 하루 종일 차에 시달리고 흙탕길 등산로가 피로를 더해 주었을 법한데도 기분은 시제 말로 짱인 것은 선자령 등산이 우리에게 엔돌핀을 마냥 선물한 덕분이라 해서 지나친 말은 아닐 듯싶다. '등산보다 더 좋은 보약은 없다'는 홍정식 선배님의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맑은 날 다시 찾을 선자령 절경을 생각하며-- 글 정운종>
첫댓글 비와 함께한 선자령 산행 수고하셨습니다. 흡사 눈덮인 시베리아 벌판같은 겨울 선자령의 모습은 아니라도 여름 선자령의 장관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비때문에 망쳤군요. 아무래도 선자령은 겨울에 가야되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