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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A. H. 새비지-랜도어
20090629
역사학과
송현준
-들어가면서
A. H. 새비지-랜도어는 플로렌스 지방에서 태어나 파리로 갔다. 그 곳에서 공부를 하며 젊은 날을 보냈으며 특히 미술을 전공한 것으로 보인다. 공부를 마친 후 그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험을 하고 싶어 했고, 처음으로 향한 곳이 극동이었다. 일본과 중국을 거쳐, 조선을 여행했다. 조선의 경우에는 두 번에 걸쳐서 왔는데 이 책은 그의 두 번째 방문 때의 견문록을 주자료로 해서 쓴 견문록이다. 이후에 그는 대서양, 아프리카, 러시아, 인도, 네팔 등 각지를 돌아다니며 여행을 하고 서양과는 다른 사항들을 서양세계에 알려 놀라움을 전했다. 그는 여행자요, 탐험가요, 화가였고, 특히나 문장력이 뛰어나 당시 조선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실제로 책을 읽으면서 그 당시 사람들의 위트나 농담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웃음을 터트린 대목이 많다. 특히 ‘나는 어린 아이들이 밥을 너무 많이 먹는 바람에 조그만 배가 한없이 불러 거의 걷지도 못하고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다. 나는 이런 상태에 있는 자식을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한 어머니에게 「배가 터질까 걱정되지 않습니까?」라고 한번 물어보았다. 「아녜요! 보세요!」하면서 그는 어린이에게 서너 숟가락의 밥을 더 넣었다. 그 후로 나는 내가 조선의 어린이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되었다.’ 라는 대목에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요즘 시대에 봐도 작가의 필력은 사실감과 유머를 같이 선사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또한 그림을 전공한 그가 그려 넣은 삽화는 사실감과 그 당시의 조선시대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줘 글만으로는 막연하게 느껴질 수 있는 그 시대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점도 이 책의 큰 장점이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책을 쓴 지역이 잠깐의 부산과 제물포를 제외하면 한양이 중심이어서 지방의 생활까지는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민중 생활, 군중 생활을 전반위에 걸쳐 다루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책에서 나타난 조선시대 민중생활
조선시대 민중의 생활에 대해 상당히 소상히 다루고 있다. 서울의 풍물이나 의복체계, 여성과 어린 아이들의 삶, 주거 생활이나 결혼 양식, 문화와 종교 등에 대해서 파트별로 자세히 다루고 있다. 풍물 파트에서는 이정표나 마부, 조랑말, 소를 이용하는 문화, 화폐, 지게에 관한 제물포에서 서울을 가는 길에서 자신이 본 것을 적고 있는데 특히 장승을 보면서 이정표라고 생각하고 송장같이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있으며 특히 이빨이 토레스 해협의 상어 이빨을 연상케 하는 무시무시한 모양이라고 이야기하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작가는 조선인 중에는 아리안족에 아주 근사한 사람들이 있음을 보았으며, 이 외에도 티베트족과 힌두족에서 아프리카인 소아시아인과 비슷한 얼굴까지 한국인의 얼굴의 스펙트럼을 넓혔다. 마치 아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인종의 표본이 이 조그만 반도에 정착한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또한 조선의 기혼 남성들이 상투를 올리는 모습에 상당히 인상이 깊었는지 상투를 올리는 모습을 세심하게 묘사한다.
조선시대 여성과 아이들의 생활도 세심하게 묘사하는데 특히 여성의 장옷에 대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몰타의 여성들이 쓰고 다니는 것과 매우 흡사한 모양의 희거나 푸른색의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는데 자신이 처음 며칠 서울에서 머무르는 동안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모든 여성들이 갑자기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려고 해서 당황했었다고 회상한다. 또한 정말 아름다운 여성들은 바람이 뒤에서 불어와 장옷이 날라 가려고 할 때 손이 미끄러진 체하는 등의 구실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과시할 수 있는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여성들만이 다닐 수 있는 시간인 ‘여성의 시간’이 있었는데, 이 시기에 남성이 길을 돌아다니면 투옥과 태형으로 매우 엄하게 처벌받았다. 하지만 실제로 그 시간은 매우 늦은 시간이어서 호랑이가 민가로 내려오는 위험한 시간이었기에 실제로 그 시간을 이용해 이동하는 여성은 드물었다고 한다. 또한 어린아이들의 점잖음에 저자는 많이 놀란다. 특히 어린여자아이에게 사탕이나 장난감 등을 주어도 들을 수 있는 대답은 ‘고맙소.’ 라는 힘없는 한마디가 전부라고 말한다. 어린남자아이들은 팽이를 돌리고 연싸움을 하는 등 어릴 때부터 여러 가지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만, 여자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집안의 고된 일과 잡일을 시작한다고 보았으며 그래서 여성들의 삶은 노예처럼 비하되고 남자에게 충절을 바치는 사고 방식이 자연스럽게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각인된다고 하였다. 특히 인상 깊고 웃음을 유발했던 부분은 아이들을 잠재우는데 쓰는 조선인들의 방법을 설명한 부분이다. 아무리 생기 넘치고 시끄러운 아이라도 배를 쓰다듬으면 10분 내로 잠이 든다는 것이다. 그렇게 잠이든 아이를 보고 작가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그가 정말로 깊은 잠이 들어 다시는 깨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라는 대목에서 얼마나 그 아이에게 시달렸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이 조선인들의 식습관에 관한 관찰이다. 조선인들이 먹을 것을 개걸스럽게 먹는 모습을 묘사한 뒤, 이러한 식탐의 주된 이유는 엄청난 식욕 때문이 아니라 남에게 차른 음식에 대해서는 남기지 않고 먹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겨난 식습관이라고 관찰했다. 실제로 이러한 문화는 아직까지도 내려오고 있다.
우리나라의 결혼 풍습에 대한 관찰도 흥미롭다. 보통 10~12살에 그렇다고 바로 결혼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의 약혼과 비슷한 개념으로 보았다. 그 나이에 결혼을 하지만 좀 더 나이가 찬 19~20살 쯤부터 같이 산다. 그리고 결혼은 각 개인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 의해 중매되어서 결혼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 방법에서 서신이 주로 이용되어서, 서신으로 얘기한 것과 실제가 서로 다른 때가 많은데 그래서 신부가 어여쁜 여인이 아닌 곱사등이에 몰골이 흉한 절름발이인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미 혼례를 약조한 상태이기 때문에 부모는 눈물을 흘리며 결혼을 시키고 이후 빠르게 미모의 첩을 들이는 방법을 이용한다. 그래서 이런 결혼 방식에는 여러 가지 음모가 들어있게 되는데, 조선의 여인들은 남편의 뒤에 숨어서 그들을 조종해서 자신이 원하는대로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많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조선의 여성들은 천사일 때는 한없이 부드럽고 선량하며 헌신적이지만, 악마의 성향을 가진다면 모든 사악한 자질을 빠짐없이 가지고 있다고 묘사한다. 이러한 관찰에서 조선시대 후반 성리학이 지배하던 사회이고 여성의 지휘가 다른 국가에 비해 많이 낮았다고 생각되던 우리나라 역시 여성의 입김이 어느 정도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저자는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한 탐구가 아주 뛰어났다. 그냥 와서 보고 간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한 공부까지 하고 간 것 같다. 특히 종교 파트를 설명하는데에서 이러한 모습을 살펴 볼 수 있다. 저자는 불교를 설명하면서 승려들이 한때 실질적으로 왕을 움직일 만큼 국사 전반에 대해 권위를 행사했던 적이 있었으나 나라를 위험에 빠뜨리고 선동을 일삼은 탓에 혁명과 내분에 휘말리자, 그들을 탄압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그들은 그때부터 천한 신분으로 전락하였다고 설명하면서,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는 역성혁명 시대의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그로 인한 불교의 몰락도 잘 나타내고 있다. 또한 기우제나 굿과 같은 민간 신앙을 악마와의 교신으로 보고, 이교도적인 측면으로 본 것은 자신들의 종교적 시각에서 우리나라의 종교를 살핀 한계라고 볼 수 있다. 또 당시에는 천주교와 같은 서양의 종교들이 개항 이후 정식으로 들어왔다. 당시에 미국과 프랑스의 선교사들이 선교를 위해 사회복지사업을 그 수단으로 삼고 활동하였다는 점에서 그 특징이 있는데, 이 때문에 그들의 종교에 대해 배타적인 일부 시민들은 그들의 의료행위나 복지사업을 터무니없이 왜곡하여 한때 시민의 척외감정을 자극하기도 했다.
특히 저자의 화가적 특성이 남다른 관찰력을 가지고 바라본 것이 조선인의 성품에 대한 것이다. 조선인들은 표정 관리에 있어서 으뜸이고 그들은 감정을 억제하는 법을 어릴 때부터 배우기에 그들의 얼굴에는 이상하리만치 평온함이 깃들어있다고 본다. 또한 큰소리로 웃는 것이 결례라고 생각하여 양반들은 조용히 웃지만, 평민들의 경우에는 왁자지껄하게 웃는다고 보았다. 또한 평상시보다 크게 눈을 뜨고 눈썹을 치켜올리며 입술을 다소 벌린 채로 숨을 고르는 방법으로 감탄을 표현했다고 상세히 이야기한다. 특히 저자가 조선인들이 감탄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망원경을 이용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장면을 보면 조선인이 상당히 멍청한 사람인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절대로 조선인들이 미개하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조선인들이 흐리멍텅하고 답답한 인상을 주는 외모와는 달리 신속한 이해력과 현명한 추론 능력을 가지고 단기간에 지식을 습득하는 모습에 늘 압도당했다고 고백했다. 비숍은 한강 유역의 하층민들이 한글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북부지방을 여행했던 러시아 장교 알프탄도 마을마다 서당이 있고 읽고 쓰지 못하는 조선인을 만나는 것은 드물었다고 증언했다. 이처럼 조선인의 명민함과 똑똑함에 대해서는 외국인 교사나 선교사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그리고 또 주의 깊게 본 것이 조선 사람들의 보수주의이다. 조선은 죽어가는 나라이며 궁중으로부터 밑바닥 빈민가까지 개혁에 대해 끈질기게 저항한다. 따라서 버드와 커즌은 모두 ‘보수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한국을 변하지 않는 나라로 표상한다. 저자는 이러한 사고 방식은 그들이 삶을 영위하는 것을 하나의 범주에 두고 결코 삶의 문제를 걱정하지 않는 것에서 유래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실제로 아무런 종교와 도덕을 가지고 있지 않고, 조상 대대로의 관습에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변동이나 개혁을 무척 싫어해서 국가나 종교에 대해서도 자신들의 일상생활과 마찬가지로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이러한 측면과 함께 유교적인 충효 사상이 함께 곁들여져서 국가에 대한 맹목적이 충성이 사회적 분위기로 자리 잡은 것이 이러한 보수주의를 더욱 강화시킨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이와 다르게 종교에 관해서는 사회가 불안정해질수록 조선인들이 천주교나 동학 등에 끌렸던 사실을 생각해보면, 사회에 대해 막연하게 만족하고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는 분석은 틀린 것으로 본다. 결국 보수주의는 그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아서 이어진 것이지 이후에 동학농민운동을 통해서 보이는 그들의 진보적인 모습을 작가는 생각해내지 못했다.
-책에서 나타난 조선시대 궁중생활
궁은 높은 담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밖에서는 보기 힘들었고, 안은 넓어서 누구든지 처음 궐내에 들어간다면 길을 잃고 헤맬 각오를 해야 할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궁궐 경내 뒤편에는 러시아 양식의 작은 별궁이 있는데, 서양풍의 건물을 짓고자 했던 왕은 건축 기사가 없어서 사바틴(Seradin Sabatin)이라는 러시아 청년에게 러시아 양식의 궁궐을 건축하도록 위임했다. 그래서 왕이 만족하도록, 난방 장치와 다른 모든 근대 장치를 갖춘 매우 견고하고 멋있는 러시아 양식의 작은 별궁을 완공했다고 한다. 하궁(夏宮)을 둘러본 저자는 왕의 처소에서 특이함을 발견하지 못했다. 서울에 있는 귀족들의 집과 별다름이 없었고, 모든 장식들이 수수했으며 이곳이 왕이 거처하는 곳임을 나타내는 특별한 아무 것도 없었으며 오히려 권문세가들의 집이 궁궐보다 더 화려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왕은 왕족을 궁궐 가까이에 두고 밤이건 낮이건 자신이 필요할 때 마다 찾았으며 집무는 대부분 밤에 갖는데, 그렇게 하는 중요한 이유가 역모를 방지할 수 있고, 백성들이 어전회의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전혀 모르게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왕이 터키의 황제만큼이나 많은 후궁을 두고 있다는 세간의 생각은 큰 오해라고 설명한다. 특히 고종에 대해서는 자신보다 성숙한 여자와 결혼을 했기 때문에 행동에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책망을 듣지 않으려고 주의를 기울였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에서는 실제로 왕비가 왕을 조종해서 조선을 통치하고 있으며 왕은 자신의 아내를 매우 두려워하고 있다는 좋지 못한 소문이 나돌았다고 한다. 이 소문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저자는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데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보면, 민비와 그의 외척세력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국정 전반에서 힘을 썼던 것이 사실이다. 당시의 조선의 정세가 백성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져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또한 당시에 왕 이외의 사람이 왕비의 얼굴을 보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그런데 저자는 그러한 사정을 알지 못하고 날카로운 호각 소리에 수행하던 조선 관리들이 고개를 숙이고 병사들이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걸 보며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동행한 관리에게 도대체 무엇을 하는 것이냐고 물었으나 ‘목이 날아가기 싫으면 그냥 고개를 숙이고 있으라.’는 대답만 들었다. 하지만 저자는 전혀 의식하지 않고 주위를 살피다가 왕비와 눈이 마주쳤고 이후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다시 들리고 사람들이 다시 일어나고 나서 동행한 관리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 대화중에 자신이 왕비와 눈이 마주쳤다고 고백하자 관리는 자신의 목이 날아갈 것이라고 걱정을 하게 되었으나 평소 친분이 있던 민(閔)공의 도움으로 그 관리를 안심시킬 수 있었다고 서술한다. 그 두 번의 호각 소리는 왕비가 행차한다는 의미였고, 그 순간에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거나 자신의 눈을 가려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궁중에 초대되어 연회에 참석하였는데 무슨 음식이 차려졌는지 보다 무슨 음식이 빠졌는지를 말하는 것이 더 쉬울 정도로 식사의 종류와 양이 훌륭했다고 서술한다. 특히 식탁 위의 차려진 음식을 사양하는 것도 큰 결례이지만 음식을 다 먹지 않고 남기는 것은 식사 예의에 더욱 크게 어긋나는 결례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식사가 정오에 시작되어 저녁 7시가 되어서도 끝나지 않았다고 하며, 얼마나 곤욕스러웠는지를 이야기한다. 이후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가마가 흔들릴 때마다 목구멍으로 넘어간 대포알이 뱃속에서 사정없이 요동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는 묘사를 통해 그가 얼마나 많은 음식을 먹었는지를 잘 느낄 수 있었다.
또 하나 인상적인 장면은 그가 왕의 옥좌를 평가하는 것이었다. 왕의 옥좌의 모양은 간소하지만 위압적이었으나, 서구 문명의 유입으로 인해 왕이 용과 호랑이로 멋있게 조각되고 장식되어 있는 대리석 옥좌에는 좀처럼 앉지 않고, 녹색 융단이 깔려 있는 아주 보잘것없는 탁자 위에 팔꿈치를 기대고 대신 녹색 융단이 깔려있는 아주 보잘것없는 탁자 위에 팔꿈치를 기대고 값싼 서구식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여 주기를 더 좋아한다고 이야기하며, 아마도 그렇게 하면 유럽의 군주와 닮아 보이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며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고종의 이러한 모습에서 당시 서양문물에 대한 고종의 관심이 얼마나 컸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왕의 행차에 대해서도 인상적으로 묘사하였다. 왕이 행차할 때는 궁궐 앞 정문의 통로가 세 개의 좁고 평행한 길이었는데 어느샌가 집에 철거되고 하나의 큰 대로가 이어져있어서 놀랍다고 묘사한다. 또 왕이 행차할 때에는 왕의 가마가 지나고 나서, 똑같은 행렬이 다시 지나가고 또 다시 지나가는 것을 보며, 어느 가마에 왕이 타고 있는지 속이려는 궁중의 세심함에 놀랐다. 이후 왕이 귀가를 할 때까지 긴장은 놓이지 않았고, 왕이 마침내 궁문에 도착하자 수천명의 입가에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고 묘사한다. 조선시대 나라의 전부였던 왕이 움직일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경을 쓰고 또 호위를 하고, 만약의 변란에 대비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책에서 나타난 조선시대 사회제도
이 책에는 조선의 형제(形制)와 군제(軍制)에 대해서 잘 다루고 있다. 포졸들을 민첩하고 조직적인 경찰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떠한 제복을 입지 않고, 모든 계층의 사람들과 섞여있어서 거의 구분을 할 수가 없다. 그들은 변장을 해서 용의자들과 친숙한 관계를 맺은 후에 용의자가 자신의 범행을 털어놓으면 그때 체포하는 식으로 사건을 해결한다.
또한 죄인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서도 상세히 묘사하는데, 칼을 차는 사람, 착고를 차는 사람, 태형에 처해지는 사람, 유배를 보내는 사람, 참수를 당하는 사람 등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특히 태형을 집행할 때에 매 맞는 자와 포졸들을 묘사하고 있었는데, 잠시 태형이 멈춰진 동안에 포졸들이 어린아이처럼 엉엉 우는 모습을 보며, 동양인들이 외견상으로는 비록 냉혹하다고 해도 사람들의 속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역설한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가장 무자비한 계층인 포졸이 이렇게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조선 사람들은 타인에 대해서는 무감각하고 일체의 동정심도 없다고 느꼈던 선입견이 뒤바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서양인들이 조선이나 다른 동양 국가들의 전근대적 제도들(이것도 역시 그들의 기준에서 이지만) 때문에 동양을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국가로 생각하고, 그 안의 구성원들 역시 그렇다는 선입견이 분명 존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보편적인 부분이 있기에, 자신의 친구, 동료들을 매질하고 거기서 기쁨을 느꼈을 역사상의 제도는 아주 특수한 경우일 것이다.
또한 이 책에서는 처형을 당하는 장면을 한 챕터로 구성해서 서술하였다. 처형에 대한 이미지가 얼마나 인상 깊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저자가 직접 보게된 처형은 이근옹, 윤태선, 임하석, 승려 가허, 이상익. 정형석. 방병구의 처형인데, 왕을 시해할 음모를 꾸몄다가 목적을 실행하기 전에 발각되어 잡힌 죄인들이었다. 조선의 경우에는 중국과 다르게 머리를 자르는 기술이 발달되지 않아 죄인의 머리가 떨어져 나갈 때까지 수십번씩 칼을 내리치곤 했다. 가슴팍에 돌을 깔고 누워 머리가 지면에 몇 인치 가량 떠 있게 해서 보다 용이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게 했다. 사형이 집행된 다음 날 처형장을 다시 찾은 저자는 시체들이 야상 동물들에 의해 토막나 있는 소름끼치는 현장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중 한명의 아버지가 아들의 시체를 수습하기 위해 와있는 것을 보고 그와 대화를 나눈 부분이 인상적이다. 아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전 재산을 관리들에게 뇌물을 바쳐 탕진하였으나 이제는 아들마저 죽어서 슬퍼하고 있었다. 그리고 죄인의 시체를 옮기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기에, 그가 거기에 간 것이 관리의 귀에 들어가면 즉시 옥에 갇혀 공모자의 누명을 뒤집어 쓸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들의 시체를 옮기고 싶은 아버지의 부성애가 잘 나타났다. 그 중 한 시체 앞에서 ‘얘가 내 아들이에요. 손을 보니까 맞아요. 이렇게 붓고 포승줄에 살이 찢기다니...’ 라고 말하며 아들의 시체를 수습하는 장면에서 우리나라의 효문화 뿐만 아니라 부모님의 사랑이 담겨있는 문화를 느낄 수 있었다.
저자가 기병대의 모습을 본 것은 왕의 행차 때인데, 안장의 불안정성 때문에 기병의 옆에 그들을 돌보는 두 명의 남자가 딸려있어서, 전장에서 이들이 돌격하는 장면이 참으로 가관일 것이라고 서술했다. 하지만 이는 단지 의식용 행사를 위해 과도하게 멋을 부린 것이지 실제로 전쟁을 할 때에도 비실용적으로 두 명의 도우미를 데리고 싸우지는 않았다.
봉화를 통해 멀리까지 소식을 전달할 수 있었다. 조선의 해안선을 따라 주요 갑(岬)에 설치된 봉화대는 오랫동안 해안에 약탈자가 접근해 온다든가 그 외의 침략이 있을 때 수도에 알려주기 위해 이용되었다. 다섯 개의 화로를 이용해 소식을 전달했는데, 이 신호 방법의 단점은 밤에는 명확하게 보이나, 낮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낮에는 연기로 신호를 보냈으나 불 만큼 정확하지는 않았다.
군인들의 복장을 상당히 우스꽝스럽다고 저자는 생각했다. 서양식 제복에 우리나라식의 의복을 섞어서 만든듯한 군복은 갓을 썼으나 자신의 머리보다 더 작았기에 외국인들의 눈에는 상당히 우스꽝스러웠을 것이다. 검푸른 계통의 잘 표현할 수 없는 색깔의 사라사무늬 바지를 입고 있으며, 옷차림이 약간 헐렁했다. 당시 조선의 군인은 무기가 통일이 되어있지 않아 화승총에서 연발 후장총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와 시대를 망라해서 가지고 있었으며, 그래서 탄약을 조달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어서 사격훈련은 잘 시행하지 않았다.
이 책에서는 당시 조선시대 관리들의 수탈에 대한 민중들의 생각도 잘 나타나있다. 언제인가 조선 사람이 저자에게 ‘죽도록 일해서 돈벌어 봤자 뭐합니까?’ 라고 푸념을 늘어놓은 적이 있다고 한다. ‘고되게 일을 해서 돈을 벌어 봤자 관리가 그것을 뜯어 갑니다. 당신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늘 일에 지쳐 있지만 여전히 전처럼 가난합니다...’ 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관리들은 백성들에게서 돈을 수탈하여 기생이나 소실들과 어울리는 술잔치에서 그 돈을 다 쓴다고 이야기한다. 하급 관리들의 수탈로 말미암아 백성들은 거의 파멸에 이를 지경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당시 관리의 부정은 세금을 매개로 자행됐다. 법정세금은 탐욕스런 관리들이 백성에게서 빼앗아가는 금액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도량형기를 조작하거나 무명잡세를 거둬들이는 것은 이들의 상투적 수법으로 간주되었다. 지세에서만 법정세금의 200%이상을 징수했다고 한다. 이렇게 거둬들인 세금 가운데 상당액이 탐욕스러운 관리의 사금고 속에 들어감으로써 국고는 고갈되어 갔다고 한다. 이처럼 당시의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인해 농민들 사이에는 불만이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화폐는 제대로 발달하지 못했다. 각기 다른 시대에 만들어진 동전을 사용했고, 고려 시대만큼 오래된 동전뿐만 아니라 소위 조선이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좀 더 현대적인 동전도 있었으며, 동전들을 100개씩 꾀어서 사용했다. 그리고 화폐의 가치도 매우 낮아서 당시의 돈으로 10파운드나 20파운드의 돈을 조선의 돈으로 바꾸려면 두 필의 황소나 여섯 또는 여덟 명의 짐꾼이 고용되어야 할 정도로 화폐의 가치가 낮았다. 실제로 당시 화폐 주조권은 여러 행정기관과 각 부 대신 등에 속하는 등 국가차원에서 제대로 통제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화폐는 명목가치는 같지만 외형이 다르고 함유 금속이 다른 악화들이 주조 유통되기 쉬웠다고 한다. 더욱이 조선 정부는 액면가치와 실질가치를 일치시키는데 관심을 두지 않고 1830년 실질가치 1푼인 2푼짜리 악화, 1880년 당오전, 1883년 당백전과 같은 악화를 주조 유통시켰고, 그 결과 경제를 교란시켰다고 한다.
-마무리하며
외국인의 눈으로 본 조선은 상당히 흥미롭다. 자신과는 다른 문화를 바라보는 이들의 시각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며, 우리가 볼 수 없는 것들을 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당시의 서양인들은 동양인들에 대해서 상당히 제국주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동양인들을 야만하고 미개한 문명을 지닌 국가의 국민들로 생각하는 것이 책을 보면서 다분히 느껴졌다. 특히 굿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굿을 상당히 이상한 행위로 묘사한다. ‘한 여인에게 급작스레 다가가서 그의 몸 안에 악귀가 씌워 나오지 않으려고 한다면서 등을 격렬하게 두드리거나 흔들어 댄다. 그는 별도의 돈을 더 내서 특별한 굿을 함으로써 그 악귀를 쫓아내야 한다는 암시를 받을 것이다. 몸 안에 무엇인가 들어와 있다고 느낀 그는 공포 대문에 몸을 흔들고 손뼉을 치고 북을 두드리고 고함을 질러대는데, 결국 악귀를 내쫓은 후에는 무당이 특별히 요구하는 돈을 추가로 지불한다.’ 자신의 종교에 비추어 볼 때에는 상당히 이상한 장면이었겠지만, 이러한 종교적 의식을 돈에 집중해 봄으로써 ‘이러한 일들이 모두 무당이 돈을 벌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라는 식의 의식을 서구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서술이다.
하지만 이런 제국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있던 저자도 조선인들의 착한 성품에 감탄하며 그러한 사고방식을 바꾸는 계기가 있는데, 바로 화재가 진압된 뒤에 집과 재산을 모두 잃은 사람들을 향한 조선인들의 대처에서이다. 이웃의 재난과 빈곤을 그냥 넘어가지 않고 집을 짓도록 도와주며 그에게 옷가지와 생활에 필요한 가사용품 등을 빌려준다. 또한 집이 다 타버린 자를 친구들은 물론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조차도 데리고 가서 그가 다시 보금자리를 꾸밀 때까지 자신의 집에서 부양하는 것이 흔히 있는 일이라고 묘사한다. 그러면서 ‘전체적으로 보면 조선 사람들은 매우 많은 결점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나, 더 문명화되어 있고 더 자애롭다고 자부하는 우리들이 자랑할 수 없는 몇 가지의 장점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결국 이교도와 기독교 간에는 거의 차이가 없다는 점을 독자들은 믿어주기 바란다. 아니 이교도의 견실한 자애와 관용은 익히 알려진 기독교의 박애보다 간혹 더 위대하기까지 하다.’ 라고 서술하면서 박애롭다고 생각하는 자신들의 종교적 교리보다 더 박애를 실천할 줄 아는 조선인들에 대한 감탄이 느껴진다.
우리의 시각에서 벗어나 색다른 시각에서 조선을 바라보고자 할 때 특히나 세계화된 오늘날, 이 책은 조선의 사회를 바라보는 다른 문명의 사람들의 느낌을 잘 전달해준다. 어쩌면 오늘날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의 문화재를 찾으면서 느끼는 생각들이 지금 이 책에서 이 저자가 느끼는 생각과 비슷하지는 않을까?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역사적 시각으로 그들을 이해시키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 박지향, 「고요한 아침의 나라'와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 : 이자벨라 버드 비숍과 조지 커즌의 동아시아 여행기」『안과 밖』Vol.10, 2001
- 원재연, 「1880년대 문호개방(門戶開放)과 한성부(漢城府) 남문내(南門內) 명례방(明禮坊) 일대의 사회, 경제적 변화」,『서울학연구』No.14, 2000
- 정연태, 「19세기 후반 20세기초 서양인의 한국관」, 『역사와 현실』No.34, 1999
- A. H. 새비지-랜도어 지음, 신복룡, 장우영 역,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집문당, 1999
- 이사벨라 버드 비숍 지음, 이인화 옮김,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도서출판 살림, 1994
※각주는 한글파일에 달아놓았습니다.
20090629 송현준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을 읽고.hwp
첫댓글 재미있게 읽었음. 본문의 형제(形制)에서 한문이 틀렸음. 형이 형벌 刑자임.
동방견문록같은 유명한 견문록에서 알 수 있는 사실 외에도 외국인의 시각에서 알 수 있는 점을 잘 설명해주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