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想錄, 8(冠岳山)
관악산은 서울 관악구와 금천구, 경기도 안양시 과천시 의왕시에 걸쳐 있다. 높이는 632.2M 연주봉 이다. 연주봉은 마치 큰 바위기둥을 세워 놓은 것 같다. 그 옆에는 연주암이 제비집처럼 날렵하다. 그래서 " 갓 모습의 산" 이라는 뜻이다. 산은 수십 개의 봉우리와 바위 뿐만아니라 암자가 많다. 암자에서는 손없는 날은 굿 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렸었다. 계룡산 무속인 보다 더 많은 곳이 서울이다. 서울의 북한산, 남한산과 함께 삼각을 이룬 서울의 분지를 만들었다. 우리나라 7대 악산은 관악산, 설악산, 치악산, 북악산(북한산), 송악산(개성), 칠보산(함경북도), 월악산 이다. 관악산은 유일하게 성(城)이 없다. 그러나 필자가 주둔지 정찰(偵察)할 때는 남태령과 우면산 사이에 약 1KM 성(城) 잔해가 널브러져 있는 흔적이 있다. 삼국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이 없어 묻혀있는 역사의 흔적일 것이다. 정찰 목적은 대통령 긴급조치 9호(1975, 5, 13)는 유신헌법 5조다. 대통령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하는 기급조치를 할 수 있다. (집회, 시위 금지, 영장 없이 체포 등, " 베트남 공산화" 안보위기 명분이었다. (1979년 12월 해제) 결과는 서울대생 김상진의 유신철폐를 외치며 활복자살, 대학가에 유신반대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필자의 00부대는 서울대학 내로 진주(進駐) 못 하고 몇 개월을 서울대 인근 낙성대 뒷산에 주둔(駐屯)했다. 낙성대 주둔지에서 그리고 봉천동 산자락에 1개 소대가 상주(常駐)했다. 낙성대(落星垈)는 박정희 대통령이 역사 바로 세우기 위해 강감찬 장군 영전을 모신 곳이다. (강감찬이 태어난 곳)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호는 고려 시대 삼층석탑과 감감찬 장군의 사당이다. 요나라(거란)의 1차 침입, 고려는 송과 우호 관계, 거란을 적대시했다.(발해국을 명망) 거란의 소손녕이 80만 대군으로 서북면(압록강)으로 993년 침략했다. 서희 장군의 담판으로 강동 6주를 얻다. 2차 침입은 고려 현종(1010년), 강조는 통주(평북 선천)에서 대패 했다. 조정은 항복을 주장했으나 강감찬은 반대 해, 왕은 나주로 피신했다. 곽주(郭州)에서 양규(楊規) 장군이 적을 무찌르자, 화의가 성립됐다. 3차 침입은 8년 후(1018년)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으로 침략( 강동 6주를 달라고) 했다. 이에 강감찬은 청천강에서 대승을 거두었다.(귀주대첩)
낙성대 북쪽에는 동작동 현충원이있다.(서울 국립묘지) 현충원은 풍수의 객관적 요건을 갖춘 명당 중에 명당이다. 동작(銅雀) 이란 조조(위나라)가 구리로 만든 봉황새를 고사에서 왔다. 지형이 봉황새에 비유 " 봉황포란형(鳳凰抱卵形)의 땅이다. 풍수의 종산(宗山)은 관악산= 백두산) 주산(主山)은 서달산이다. 좌청룡과 우백호인, 봉황의 양 날개처럼 뻗은 양쪽 능선이다. 강변로와 올림픽대로 그리고 한강이 흐르고, 남산과 맞주 보고 있어 명당이다. 현충탑에는 무명용사 12만 유해가모셔져 있다. 그리고 5만여 묘비가 세워져 있다. 역대 대통령( 이승만, 박정희 육영수 부부, 김대중, 김영삼) 모셔져 있다. * 비화(秘話), 필자는 육영수 여사 안장(安葬) 하면서 경호를 했다. 현충원 영선중대 나팔수가 하루에 한번 진혼곡을 울리지 않으면 그날 밤 잠이 안 온다 했다. 그리고 육영수 여사를 안장하는 과정에 이승만 대통령 묘 앞에 해태상이 사라졌다. 이승만 양자 아들(이인수, 양녕대군 종중)이 들려보니, 없어져, 박 대통령이 그 얘기를 듣고 노발대발(怒發大發)하였다. 현충원 고랑창에 던져진 해태상을 원래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관악산과 관악산 자락은 (서초동, 방배동, 사당동, 봉천동,반포동) 한강 이남 방어선으로 군사보호 구역이었다. 상기동은 대부분 야산이였다. 관악산과 우면산은 주진지, 상기 동은 추진 진진지 였다. 1980년대 보호구역에서 해제 되었다. 여기에도 일화가 많지만 지면상 생략한다.) 우면산 북쭉, 도곡동 서초동 일대를 말죽거리라 불렸다. 화혜 단지 와 포도, 복숭아, 그리고 도시근교 채소밭이었다. 말죽거리는 연인들이 데이트 장소로 에덴동산이라 했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는 있을법한 1978년대 말죽거리 봄 얘기다. 관악산 자락(사당동)에는 예술인 촌이 있다. 당시, 김지미(영화배우)집에 안내받아 과일과 커피를 마셨다. 2층 양옥집이었다. 그 외 박암(영화배우 등)씨 등은 단층 기와 집이었다. 또한 현대채석장및 현대중기 소장(서울대 출신)과 일화(逸話)와 중석광산 여사장과 얘기도 있지만, 지면이라 그런내요. 서울 얘기는 책 한 권을 써도 될 것 같지만 품속에 간직하여 영혼까지 나 홀로 가겠습니다. 숱한 사연을 시(詩)_한 수로 마감하겠습니다. 서울외출 중 남산에서 회심(會心)
한강을 품은 북한산성 아 남한산성 아 관악산 아 아무리 철옹성이고 높은 산이지만 내 발(足)밑에 있는가 했는 데 비바람에 씻겨져, 잊었다가 다시 살아나 몽상가(夢想家) 처럼 그 숱한 애환(哀歡)을 종이(紙) 몇 장에 목숨을 바친다오.
虎山 |
첫댓글 지나간 것은 모두 아름답고...
현재는 언제나 힘들고...
명언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