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개 상상력의 계단 / 이 화 은
펜데믹 상황에서 TV는 내 친구뿐 아니라 전 국민의 친구였고 전 인류의 친구였을 것이다. 갇혀 사는 내내 재탕 삼탕 드라마나 영화를 돌려보다가 최근에 <매직 오브 벨 아일>이라는 한참 전에 보았던 영화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주인공 <모건 프리먼>의 묵직한 명연기는 말할 나위 없고 흑인 아저씨와 어린 소녀의 대화가 내게는 새삼 충격이었다. 그리고 진지한 공부였다. 소녀에게 글 선생 노릇을 하는 흑인 아저씨의 수업 방식이 너무 재미있고 경이로웠다. 아무것도 없는 길 끝을 가리키며 뭐가 보이느냐고 묻는다. 정직한 소녀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자 눈을 감고 다시 보라고 한다. 눈을 감아도 보이는 게 없다고 소녀가 짜증을 내도 보일 때까지 계속 보라고 한다.
상상력의 훈련이다. 성급하게 결론짓지 않고 보일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준다. 결국 소녀는 길 끝에서 무언가 이야기를 끌어낸다. 흑인 아저씨는 소설가를 꿈꾸는 소녀에게 상상력은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말해준다. 안 보이는 무언가를 찾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그 소녀 곁에 또 한 명의 늙은 한국 소녀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줄 명배우는 알았을까 몰라
영화 속에 오래 머물러 있다가 겨우 빠져나오면서 반성했다. 상상력이 창작의 필수라는 거 모르는 시인이 있을까마는 나는 보이는 것만 보려고 했구나 보이지 않는 저 무궁무진의 세상을, 보이지 않는 당신 마음을 애써 외면한 채 시를 써 왔구나 내가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구나 자책하며 문득 얼마 전 새벽 산책길에서 보았던 한 풍경을 떠올렸다.
옅은 안개가 낀 새벽 둑길을 걷는데 스마트한 제비 한 마리가 노란 풀꽃 한 송이를 입에 물고 유유히 내 눈앞을 날아가고 있었다. 그 시간은 제비가 많이 날아다니는 시간대도 아니고 또 잠이 없는 제비라 해도 벌레도 아닌 풀꽃을 물고 가는 모습이 너무나 생경스러웠다. 아 외박한 바깥양반 제비씨가 새벽 귀가를 하면서 제비 부인께 면피용으로 꽃다발을 들고 가는구나 하는 코믹한 생각을 하면서도 그 특이한 풍경에서 뭐 건질 게 없을까 낚시꾼의 욕심이 당연히 발동했지만 더 이상의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다. 제비씨와 제비 부인 생각은 상상력의 동원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그냥 카피일 뿐이었다.
내 상상력을 막은 건 결국 제비씨의 연출이 너무 과했던 탓이다. 극적인 풍경은 이미 제비의 몫이었고 나는 다만 관중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만약 옅은 안개의 침묵 속으로 빈손의 제비가 홀로 묵묵히, 쓸쓸하게 사라졌다면 거기서 내 상상력이 새판을 펼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흑인 아저씨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라는 말씀과 너무 보이는 것은 시가 되지 않더라는 제비 이야기가 일맥이라도 상통하는지 모르겠다.
필리핀에서 가장 절경이라는 <초콜릿 힐즈>는 240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고 한다. 시의 절경을 만나기 위해 240개 상상력의 계단을 올라야 할 터인데 무릎이 성할지 모르겠다.
어머니는 내 시의 사골 곰탕이다. 한우 꼬리다. 몇 번을 우려도 뽀얀 국물이 우러나온다. 정치인도 운동선수도 코미디언도 어머니 이야기를 할 때는 모두 눈가가 젖어들 듯 나도 어머니를 내 시 속에 모실 때는 감성과 눈물 세포들이 모두 일어선다. 기립한다.
어머니에 관해 쓴 첫 시가 <보청기>였다 난청이 온 어머니께 보청기를 사드리겠다고 했더니 완강하게 손을 저으시면서 이미 세상에서 들을 소리 다 들었다 더 들을 소리 없다고 거절하셨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한참 후에 이 시를 쓰면서 많이 울었다. 그 이후 어머니를 시로 쓸 때마다 나는 운다. 쓰면서 울고 써 놓고 운다. 독자가 울어야 하는데 시인이 울다니! 독자를 울리고 시인은 냉정해야 하는데, 나는 어머니에 관해서는 이 논리 밖이다.
100세 된 노인에게 임종 직전에 누가 제일 보고 싶냐고 물었더니 엄마라고 했다고 한다. 나도 엄마가 제일 보고 싶다. 돌아가신 지 스무 해가 지났지만 시 속에서 만나는 어머니는 늘 그때 그 어머니다. 그립고 서러워서 시를 쓰면서 나는 어머니께 위로를 받는다.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시를 쓰고 시 속에서 어머니께 한껏 어리광을 부리는지도 모르겠다.
눈물이 많으면 울 일이 많이 생긴다고, 유난히 눈물이 많은 나를 늘 걱정하셨는데 눈물로 어머니를 우려 시로 빚는 내가 결코 효녀는 못되겠지만 어쩌랴 내 눈물 속에는 늘 어머니가 피어있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