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 시대(1644~1911) "홍,백옥수"(紅,白玉髓)
옥수(玉髓)는 석영(石英)의 일종이라고 한다.
불순물의 함유에 따라 백색과 적색, 녹색등이 있다고 한다.
청(淸) 시대(1644~1911) 마노석(瑪瑙石) 공예품(工藝品)
淸代 취옥(翠玉)으로 만든 작품.
중화민국 1940년 "비취 화조병"(翡翠花鳥甁)
중일전쟁(中日戰爭) 중 "왕정웨이"(汪精衛 : 1883~1944)가 일본 황후에게 기증한 것으로 전후(戰後)에 반환되었다고 한다.
청(淸) 건륭제(乾隆帝)때 서양 기법으로 만든 그릇.
청淸 건륭(乾隆)시대 "청화운룡오공환이화삽"(靑花雲龍五孔環耳花揷)
청(淸) 건륭(乾隆)시대(1736~1795) "粉彩모자걸이"(粉彩套甁)
청(淸) 강희(康熙)시대(1662~1722) "선흥태화법랑"(宜興胎畵琺瑯)
북송(北宋)시대 정요(定窯 : 12세기 관립 도자기 공장) "백자영아침"(白瓷嬰兒枕)
남송(南宋)시대 용천요(龍川窯:13세기) "청자봉이병"(靑瓷鳳耳甁)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이야기를 여기서 보다니,,,,,,
1780년(정조 4) 박지원(朴趾源)은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칠순연(七旬宴)을 축하하기 위하여 사행(使行)하는
삼종형(三從兄) 박명원(朴明源)을 수행하여 연경(燕京)으로 갔으나 황제는 이미 열하(熱河)로 피서를 간 후였다.
연경(燕京)에 겨우 도착한 사신 일행이 열하(熱河)로 피서가 있는 황제를 좇아 밤을 새워 달려가는 동안에
열하(熱河)로 가기까지의 이야기를 "박지원"이 기록한 것이 열하일기(熱河日記)중에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이다.
이것이 "피서산장"(避暑山莊) 코너에 있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도 어떻게 이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원본이 여기에 있는지는 의문이다.
북위(北魏) 태화 원년(太和 元年) "청동도금석가모니불좌상"(靑銅鍍金釋迦牟尼佛坐像)
단단한 "회양목"으로 만든 필통.
"상아투화운룡문투구"(象牙透花雲龍紋套球)
3代에 걸쳐 "상아"(象牙)를 조각한 것으로 공(球) 속에 공(球)이 17개나 들어 있다고 한다.
겉에서부터 조각을 하여 공(球) 하나를 만든 후 그 안에 공(球)을 깎아서 공(球)을 또 만들고, 같은 작업을 반복해서
총 17개의 공(球)을 조각한 작품으로 각각의 공(球)들이 따로따로 자유롭게 움직임이 가능하다고 한다.
청나라 시대 황제의 장난감으로 쓰였던 유물인 "상아투화운룡문투구"(象牙透花雲龍紋套球),
구 안에 또 구가 있어서 17개의 구(球)로 이루어진 놀이감으로 밖에서부터 안으로 파 들어간 것이라고 한다.
17개의 구는 따라 움직이도록 만들어졌다.
속이 꽉 찬 상아(象牙) 덩어리의 겉면을 먼저 조각한 다음 그 안쪽을 파서 조각한 작품으로 3대에 걸쳐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대 기술로는 14개까지는 만들 수 있다는데 학자들이 같은 제품을 제작해보기 위해
장인(匠人)들에게 의뢰해 봤더니 아직 12구(球) 이상을 제작해 낸 사람이 없다고 한다.
12개도 대단한 작업인데 그 옛날에 17개를 만들 수있었다니
당시 조각기술 수준이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알 수있겠다.
이것 역시 상아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청(淸)나라 시대의 "산호조각화분"(珊瑚彫刻花盆)
관람을 끝내고 이번에는 정문쪽으로 나온다.
루(樓)에서내려다 본 앞 뜰.
그런데 여기 건물앞에 써진 현판은 "중산박물원"(中山博物院)이다.
"국부 백년 탄신"(國父 百年 誕辰)기념으로 만들었단다.
정문 위에 씌어진 "천하위공"(天下爲公)은 "예기"(禮記)에 나오는 이야기로,
"대도 지행"(大道之行) "천하위공"(天下爲公)의 뒷부분이다.
대도(大道)가 행해지면 "천하"(天下)는 "만민"(萬民)의 것이라는 뜻이다.
반나절에 저 안의 유물을 모두 감상한다는 것은 말도 안돼는 이야기이고 그나마 이 정도 본 것만 해도 다행이다.
과식하면 체하는 법.
이정도 본것만해도 많이 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