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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함경에서 보는 세계의 모습 2. 이함경의 존재론과 인식론 3. 중도의 의미 4. 중도의 시각에서 본 불교 사상 5. 마무리: 법(法)의 엄정함과 인식의 길, 제미나이 |
1. 아함경에서 보는 세계의 모습
아함경의 세계를 유무와 생멸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세계의 아함경에서는 세계의 유무와 생멸에 관한 법을 ‘인연법’이라 한다. 인연법은 어떤 사물들의 존재가 상호 관계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관계는 어떤 관찰자와 그 관찰자의 밖에 있는 어떤 것들의 접촉에서 시작된다. 관찰자의 몸과 마음(6내입처)이 관찰의 대상(6외입처)과 인연하여 6인식이 생기는데, 이 세 요소의 결합을 ‘6접촉’이라고 한다. 이 접촉으로 말미암아 세계의 모든 유무와 생멸이 일어나게 된다. 관찰자도 인연법에 의해 생겨난 세계의 일부이다. 따라서 관찰자도 당연히 인연법에 의해 결정된다. 관찰자를 보통 ‘나’라고 한다.
인연법에 대한 이상의 설명은 <잡아함경_1307. 적마경(赤馬經)>의 극적인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나는 지금 한 길[尋] 밖에 안 되는 몸으로, 세계와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과 세계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설명하리라.”[我今但以一尋之身 說於世界世界集 世界滅 世界滅道迹]
여기서 ‘몸’은 5음으로, 이 경에서 말하는 것은 5음이 곧 세계라는 것이다. 다른 경들에서는 12입처가 곧 세계라고 했으니, 아함경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12입처와 5음으로 구성된다.
사물들이 어떤 관계가 형성되면 각각 어떤 존재가 ‘있음’으로 인식되고, 관계가 형성되지 않거나 관계가 끊어지면 ‘없음’으로 인식된다. 그리고 없음에서 있음으로 바뀔 때 ‘생겨남’이라 하고, 있음에서 없음으로 바뀔 때 ‘없어짐/사라짐’이라 한다.
12인연법은 있음ㆍ생겨남과 없음ㆍ없어짐이라는 두 개의 짝으로 구성되어 있다. 있음ㆍ생겨남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有故彼有 此起故彼起]는 것이다. 없음ㆍ없어짐은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는 것이다. [인연법을 연기법이라고도 하는데, ‘연기법’은 있음ㆍ생겨남에 초점이 맞추어진 이름이다. 없음ㆍ없어짐을 연기법에 대응하면 ‘연멸법’이라 할 만하지만, 아함경에서는 그렇게 이름 짓지는 않았다.]
그런데 인연법에 의해 형성된 세계는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공하고 비아/무아라고 한다. 무상하다는 것은 세계가 생멸하는 가운데 변하고 바뀌는 모습이고, 괴로움은 세계의 무상함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감정을 가리키는 것이다. 공은 관찰자를 포함한 세계가 텅 비어 있다는 것이고, 비아/무아는 관찰자인 ‘나’가 텅 비어 있으니 결국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 네 가지는 세계의 속성으로 4법인[법의 근본]이라 한다. [보통 ‘공’ 대신에 ‘열반’을 들지만, 가장 뛰어난 공[제일의공]이 열반의 공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열반’ 대신에 ‘공’을 대체한 것으로 생각해도 될 것이다.]
<잡아함경_335.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에서는 법을 ‘인연법’과 ‘제일의공법’으로 구별하였는데, 이 두 가지 법은 세계를 바라보는 두 개의 축이다. 인연법은 세계의 생멸에 관한 법이며, 인연법으로 생긴 모든 것들은 ‘임시로 붙인 이름[가호, 가명]’으로 표현된다. 제일의공법은 이렇게 생겨난 세계의 ‘비어 있음’에 관한 법이다. 이 비어있음은 물리적으로 무엇이 비어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관찰자의 분별이 없어짐으로써 인연법으로 생겨난 모든 것들이 더 이상 분별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리고 제일의의 공[열반의 공]은 온전한 비어있음을 성취하여 몸과 마음을 속박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절대적 자유를 성취한 상태를 말한다. 이 두 가지 법을 혼동하면 아함경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생긴다.
2. 아함경의 존재론과 인식론
아함경에서 관찰자는 두 개의 측면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세계의 형성에 참여하는 주체[6내입처]로서의 관찰자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형성된 세계의 유무와 생멸을 바라보는 관찰자이다. 앞의 관찰자를 인연법에 참여하는 주체라고 한다면, 뒤의 관찰자는 인연법을 바라보는 주체라 할 수 있다. 인연법에 참여하는 주체는 인연법의 연쇄 속에서 인연의 일부가 되어 세계의 형성에 개입하는 주체이다. 인연법을 바라보는 주체는 자신이 참여하여 만들어진 세계의 모습을 조망하고 그 속성이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공하고 비아/무아임’을 파악하는 주체이다. 아함경에서 ‘나’가 아니다, ‘나’가 없다라고 할 때의 ‘나’는 일차적으로는 앞의 관찰자를 말한다. 뒤의 관찰자는 수행자를 가리킨다.
아함경에서 세계의 존재와 그 양상들은 관찰자의 인식의 결과물이다. 관찰자가 관찰하기 이전의 세계의 모습은 아무것도 분별되지 않고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 카오스에 비유할 수 있다. 세계는 어떤 관찰자가 무엇들의 관계에 의거하여 어떤 사물들로 분별하여 인식하고, 그것들에 일정한 속성과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비로소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아함경에서 세계는 인연법이 작동하기 이전에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곧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하는 행위 자체가 세계의 모습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세계에는 많은 관찰자들이 있는데, 그 관찰자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정보를 공유하면서 그들의 세계를 구성한다. 이때 관찰자들은 그들이 속한 어떤 부류에 따라 다른 세계를 구성한다. 예컨대 인간은 인간의 세계를 구축하고, 개미는 개미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는 단일한 모습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객관적 시각으로 말한다면, 세계는 관찰자의 인식 조건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는 ‘가능한 세계들의 집합’이자 다중적인 층위를 가진 장이다. 인간의 세계는 인간들이 구성한 세계이다. [붓다는 그 모든 세계를 다 본다.]
3. 중도의 의미
중도는 있음과 없음, 같음과 다름과 같은 양 극단의 견해를 떠나는 것을 말한다. 8정도가 중도이고 12인연법이 중도이다. 있음과 없음은 인연법에 의해 결정된다. 세계의 모든 것은 인연법에 따라 있음과 없음이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연법을 떠나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무엇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할 때, 그 ‘무엇’에는 시간과 공간도 포함된다. 인연법이 작동하기 이전에는 인도 없고 연도 없으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이 생기고 무엇이 없어지겠는가?
같음과 다름은 있음과 없음의 속성을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 같음과 다름은 분별의 시작이자 결과이며, 그 결과로 있음과 없음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같음과 다름은 인연법이 작동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따라서 같음과 다름도 인연법을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데 아함경에서 ‘무엇이 있다/없다, 생긴다/없어진다, 같다/다르다’로 서술되어 있는데, 이러한 서술들은 모두 인연법의 용어로 서술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인연법의 틀 안에서는 무엇이 있고 없으며, 무엇이 생기고 없어지며, 또 같거나 다른 무엇이 있다. 그러나 모든 ‘무엇’들은 모두 인연법이 작동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들을 분별하여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 ‘무엇’들은 모두 ‘임시로 붙인 이름[가호]’이다. ‘제일의공법’의 시각에서 보면, ‘무엇들은 비어 있다[공하다]. 아무것도 없다.’ [공법도 임시로 붙인 이름으로 서술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중도를 가능 세계나 중첩된 세계라는 관점에서 확장하여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보편타당한 절대 진리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관찰자 집단’이 인연법의 틀 안에서 구성해 낸 특수한 세계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세계에서 진리라고 판정했다고 해서 그것이 다른 세계에서도 진리라는 것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중도의 시각이란 바로 이러한 세계의 ‘구성된 성질’을 꿰뚫어 보고, 특정한 상황에서 드러난 특정한 모습에 집착하지 않는 유연한 인식의 태도를 의미한다.
4. 중도의 시각에서 본 불교 사상
아함경에서는 중도에 어긋나는 주장을 잘못된/삿된 견해라 하여 경계하고 있다. 붓다는 양 극단의 견해에 대해 질문하면 그것에 대답하지 않았다. 질문하는 이는 인연법을 몰랐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한 것인데, 인연법을 알면 저절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있다’라는 주장이나 ‘없다’라는 주장은 둘 다 중도에 어긋나는 주장이다. ‘무엇이 있다, 무엇이 없다’는 주장은 ‘무엇’과는 무관하게 삿된 소견에 떨어진 주장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부파 불교의 ‘실유론’이나 ‘자성이 없다[무자성]’를 주장한 공 사상은 아함경의 시각에서 보면 삿된 견해에 빠진 것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아함경에 대한 편향적 이해의 비판과 아함경의 본질적 가치)이에 대하여 간단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실유론(實有論)은 존재가 외부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견해로, 인연에 의한 생멸의 원리를 간과한다. 공 사상의 무자성(無自性)에 대한 논의는 ‘무엇이 없음’의 그물에 걸려들고, 유식론(唯識論)도 ‘무엇이 있다’는 그물에 걸려든다. 물론 이 사상들의 배경이나 의의는 조금씩 다르다.
실유론은 인연법의 틀 안에서 ‘세계가 있음’을 주장한 것이다. 곧 아함경에서 ‘세계가 있다’고 말한 것을 강조하여 표현한 것이다. 다만 아함경은 인연법을 임시로 붙인 이름으로 보았다는 것을 유의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주장은 ‘세계는 공하다’라는 제일의의 공의 시각에서 보는 것과는 기본적으로 무관한 것으로 생각된다. ‘세계는 공하다’라는 말은 인연법으로 세워진 세계의 ‘속성’에 관하여 말한 것이다. (설일체유부의 삼세실유 비판)
그런데 공 사상은 실유론을 비판하면서 ‘세계=실체 없음[무자성]’과 ‘무자성=공’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공 사상은 아함경에서 세계의 속성으로 규정한 ‘공’에 세계 자체의 지위를 부여한 것인데, 그 결과 아함경의 인식론적 세계관에서 존재론적 세계관으로 논점이 옮겨가게 되었다. 그리고 ‘공⊇인연법’을 주장하는데, 곧 공을 인연법과 동일히사면서도 인연법의 속성인 ‘‘가능성과 포용성, 유연성’을 공에 포섭시킴으로써 공을 인연법의 우위에 둔다. 그러한 주장은 인연법과 공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공과 인연법 둘의 정체성이 모호하게 된 결과를 낳게 되었다. (대승 불교의 공 사상 비판)
유식론은 실유론을 비판하면서 ‘식(識)만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식’이 인연법의 전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다고 본다. 그러나 아함경의 인연법에서는 ‘식’도 인연법에 따라 생겨난 것이라는 점에서, ‘식이 유일한 있음’이라는 주장은 인연법에 어긋난다. 그리고 몸과 마음[6내입처]에서 몸과 마음을 분리하고 마음을 몸의 우위에 둠으로써, 아함경의 6내입처와 6식의 관계를 무너뜨렸다. 결국 유식론은 유심론으로 나아가게 되고, 몸의 위상과 역할을 경시하거나 무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유식론은 현대 과학의 시각이나 인지의미론의 시각과는 완전히 배치된다. (유식론 비판, 일체유심조 비판)
5. 마무리: 법(法)의 엄정함과 인식의 길, 제미나이
아함경에서 설하는 인연법은 단순한 ‘수단’이나 ‘비유’가 아니다. 그것은 관찰자와 대상이 만나는 순간 발생하는 세계의 엄연한 법칙이며, 그 자체가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을 결정하는 실재적 메커니즘이다. 따라서 법을 뗏목과 같은 일시적 방편으로 치부하며 “모든 교설은 도구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칫 아함경이 견지하는 인식론적 엄밀함을 흐릴 위험이 있다.
후대 사상들이 법의 실체성을 부정하거나 마음의 우위를 내세우며 논리적 확장을 꾀할 때, 그들은 오히려 아함경이 정초한 ‘인연법’이라는 명확한 법의 지위를 흔들었다. 실유론이 법을 고착시켰다면, 공 사상이나 유식론은 법의 자리를 관념이나 부정의 논리로 대체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아함경의 세계에서 인연법은 버려야 할 도구가 아니라, 관찰자가 반드시 통과해야 할 유일하고도 명징한 통로이다.
결국 중도란 양 극단의 견해를 떠나 인연법의 생멸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보는 힘이다. 인간이라는 특수한 관찰자가 구성한 세계의 한계를 자각하되, 그 안에서 작동하는 법의 엄정함을 놓치지 않는 것—그것이 아함경이 말하는 지혜의 본질이다. 법은 건너가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무상과 공의 속성을 가진 세계 그 자체를 이해하는 유일한 열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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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미나이의 논평]
보내준 글은 4아함경에 나타난 중도와 연기법의 본질을 매우 날카롭고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특히 인식론적 관점에서 세계의 형성을 바라보고, 후대 부파 불교와 대승 불교의 핵심 사상(실유론, 공 사상, 유식론)을 아함경의 엄격한 인연법 체계로 비판한 지점은 사유의 깊이가 돋보인다.
이 글의 핵심 논지와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분석한다.
1. 아함경의 세계관: 인식과 존재의 결합
글에서 강조하듯, 아함경의 세계는 '객관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다. 6내입처(관찰자)와 6외입처(대상)가 만나 6식(인식)이 발생하는 6접촉이야말로 세계가 창조되는 지점이다.
인연법(연기법):
존재의 유무는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논리는 존재론적 선언이 아니라, 철저히 인식론적 조건성을 말한다.
적마경의 함의:
"한 길 몸 안에서 세계를 설하리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은 탁월하다. [제미나이가 제안한 것이다.] 이는 세계가 외부 공간에 펼쳐진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인식 체계 안에서 구성되고 소멸함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2. 중도(中道)의 인식론적 재해석
중도를 단순히 '중간'이 아니라 '양 극단의 견해(유무, 단상)를 떠난 법의 상태'로 정의한 점이 명확하다.
가호(假號)의 의미:
인연으로 생긴 모든 것은 임시 이름일 뿐이다. '있다' 혹은 '없다'는 단정은 그 임시 이름을 실체화할 때 발생하는 오류다.
다중 층위의 세계:
관찰자 집단(인간, 개미 등)에 따라 세계가 다르게 구성된다는 시각은 현대의 인지과학이나 상대주의적 관점과도 맥을 같이하며, 중도를 유연한 인식의 태도로 확장한다.
3. 후대 사상에 대한 엄정한 비판
이 글의 가장 도전적인 부분은 대승 불교의 핵심인 공 사상과 유식론을 '삿된 소견'의 위험이 있다고 비판한 지점이다.
실유론:
법의 생멸 원리를 무시하고 존재를 고착화함.
공 사상:
무자성(無自性)을 강조하다가 존재론적 '없음'의 함정에 빠짐. 인연법과 공의 경계를 모호하게 함.
유식론:
'식(識)'을 인연법의 결과가 아닌 주체로 격상시켜 일종의 유심론으로 흐름. 신체(6내입처)의 역할을 간과함.
이러한 비판은 아함경이 견지하는 '인연법의 엄정함'을 지키려는 시도로 이해된다. 붓다가 독화살의 비유나 무기(無記)를 통해 형이상학적 논쟁을 피했던 이유가 바로 이러한 '개념의 유희'에 빠지지 않기 위함이었음을 상기시킨다.
4. 법(法)의 지위와 마무리
마지막 절에서 법을 단순히 '버려야 할 뗏목'으로 보지 않고, '세계를 이해하는 유일한 열쇠'이자 '엄정한 메커니즘'으로 정의한 것은 매우 중요하다.
방편설의 경계:
모든 교설을 단순한 도구로 치부하면, 정작 그 도구가 가리키는 인연의 법칙조차 가볍게 여기게 될 위험이 있다.
지혜의 본질:
지혜란 세계가 구성된 것임을 알면서도, 그 안에서 작동하는 인연의 법도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힘이다.
5. 총평
작성한 글은 아함경의 근본 가르침으로 돌아가 후대 불교 사상들이 가질 수 있는 논리적 과잉을 경계하고 있다. 특히 '관찰자 중심의 세계 구성'이라는 틀을 통해 불교 사상을 일관되게 꿰어낸 점은 현대적인 불교 이해에 큰 시사점을 준다.
인연법은 우리가 세계를 마주하는 방식 그 자체이며, 그 엄정함을 놓치지 않을 때 비로소 중도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는 결론은 아함경의 정신을 올바르게 계승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