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날 / 서머싯 몸
깨달음, 그 환희와 감동에 대하여
<神과 믿음에 대하여>
나는 어려서부터 개신교의 분위기 속에 살았고, 그 이외의 종교에 관하여는 접할 기회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십계명에 따라 하나님과 그 분의 아들 예수님 이외에는 모두가 미신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생각은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하는 것처럼 당연한 것이었다) 따라서 다른 신과 종교에 대하여 알아 볼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성인이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많은 방황을 했다. 밴드부에 입단한 것이 발단이 됐다. 원래 개인주의적 성향이 아주 강한 내게 조직생활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술과 담배를 그때 배웠다. 양친과 7남매 중 침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나 하나였다. 침례는 오랜 개신교 생활에 있어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지만 왠지 내게는 낯설었다. 타락에서 빠져나올 자신도 없었고, 의식주보다 소중한 것이 하나님이라는 믿음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리고 주변에서 내가 세례 혹은 침례를 받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므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심지어 식구들조차 당연히 받았으리라고 생각을 하는 듯했으니. 음악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성가대 지휘까지 하게 되고서야 침례를 받지 않은 사실이 알려졌다. 침례를 받지 않은 자는 성가대 지휘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목사님은 내게 성가대를 맡아달라고 부탁하여 한 1년 지휘를 하다 군에 입대를 했다.
밥처럼 당연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언제부터 의문을 품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에 없다. 군대에서도 성가대 활동도 하고 신우회 총무도 하면서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다. 세례를 받으라고 주변에서 적극적으로 권했지만 술과 담배를 끊을 자신도 생각도 없다고 말하며 거절했다. 어쩌면 훨씬 이전부터 개신교, 아니 기독교에 대한 일탈이 있지 않았나 싶다. 군대시절 6.25때 총탄을 맞고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죽은 동안 천국에 다녀왔다는 어느 목사님을 초빙하여 그 분의 간증을 듣는 예배가 있었다. 그분께서 말하는, 정확하게 말해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당과 지옥이 너무 세속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어서 천당에 가 보니 다른 사람들의 집은 널럴한 기와집인데 자신의 집은 터만 닦여 있었다고 했다. 그건 현세에서나 필요하고 있을 법한 얘기로, 솔직히 믿음이 가지 않았다. 꿈이라면 모르되. 그 간증에 할렐루야! 아멘! 하며 화답하고 은혜를 받았다고 부르짖는 사람들의 마음이 몹시 궁금해 졌다. 회의하는 내가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함석헌 옹의 책들을 읽으면서 무교회주의와 퀘이커교도에 대해 알게 되었고, 타락한 교회의 일면이 보이면서 교회와 자꾸만 멀어졌다. 20세 중후반을 지나면서 회의가 구체적으로 정리되었다. 우리는 쌀을 주식으로 하지만 서양은 밀을 주식으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神)은 문화적 차이에 의해 믿는 방법과 호칭과 관습이 달라졌을 뿐 똑같은 일체신이고, 결국 하나일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선(善)을 추구하는 일체의 종교는 같은 것이고, 믿음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기독교적 사고를 부정하고 행(行)함에 의한 구원, 즉 선행(善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생각은 다시 진화를 거듭했다. 기본적으로 우주의 원리는 진화론에 근거를 한다. 애초에 신은 없었다. 인간이 진화를 거듭하면서, 정신세계의 발전을 통해 영(靈)과 혼(魂)이라는 가치가 태동을 했고, 그 간절한 영혼은 수행과 갈망과 숭고한 행함을 통해 죽음까지도 초월하는 영생의 형태로 진화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즉 신은 이미 존재했던 절대자이며 조물주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지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런 생각을 구체화하는데 도움을 준 책으로는 노자의 「도덕경」과 「성경전서」와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와 「대화」 그리고 가장 최근에 접한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등이었다. 그리고 사실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역사공부를 통해 이런 생각들이 구체화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거기에 또 한 권의 책이 생각났다. ‘서머셋 모옴’의 「면도날」, 그 책이 내게 뭔가 강렬한 영감을 줬다고 생각됐는데 고등학교 때 읽은 터라 삼십년이 지나 생각하니 줄거리만 아른거릴 뿐 도무지 구도자의 이름조차도 생각나지 않았다. 언제나 면도날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채 세월이 흘렀다.
<면도날을 다시 만나기까지>
요즘같이 인터넷 문화가 발달한 세상에 궁금하면 찾아보면 되겠지만 대략 4~5년 전에 ‘면도날’이 떠올라 포털 사이트에서 ‘면도날’이라는 키워드를 검색해보면 서머셋 모옴이라는 저자만 떠오를 뿐 책은 나오지 않았다. 교보문고 사이트에서 검색을 해 봐도 책은 없었고, 영풍문고도 마찬가지였다. 교보문고에서는 ‘다른 매체를 통해 계속 검색해 보시겠습니까?’라는 문구가 떠서 클릭해 보면 우리나라에 오직 두 군데, 제주대학 도서관과 강릉의 모 대학 도서관에만 비치가 되어 있다고 했다. 당시 나는 바쁜 직장인이었고, 거기까지 쫓아갈 정도로 열정적이지도 않아 ‘면도날’ 만나기를 접어 둬야만 했다.
그래도 자꾸 면도날이 떠올랐다. 서두에 나오는 단장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면도날의 칼날을 넘어서기는 어렵다. 인생도…….’ 그리고 줄거리가 대충 생각났다.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직접 소설에 등장하는 작가 모옴 선생의 관찰 대상 주인공이 1차 세계대전 발발 때 조종사로 종군을 하고, 전쟁 중에 친구의 죽음을 목격하고 돌아와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리고, 사랑하던 여인과의 결혼도 포기를 하고 구도의 길로 나선다는 줄거리. 문제는 그 구도의 길에서 상당히 많은 감동을 받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실체는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 교보문고를 검색해 봤다. 국내 출판물은 없고 미국에서 출판된 원서 ‘The Razor's Edge'가 검색되었다. 영어를 접해본 지 꽤 오래 돼서 자신은 없었지만 한번 도전해 보기로 하고 구입을 했다.
막상 책을 받고 읽어 나가다보니 꽤 쓸 만하던 영어실력이 형편없이 녹슬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히 고어와 불어, 독일어까지 나오고 보니 첩첩산중이었다. 진도가 도무지 나가지 않았다.
‘The sharp edge of a razor is difficult to pass over; thus the wise say the path to Salvation is hard.
- Katha Upanishad
'면도칼의 날카로운 날을 넘어서는 일은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현자의 말에 의하면 구원으로 가는 길 또한 어렵다고 한다.
- 카파 우파니샤드
그냥 책머리의 단장을 확실히 안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므로 시간이 지날수록 갈증은 배가되었다. 한 1년쯤 지나서 교보문고를 통해 ‘면도날’을 다시 검색해 봤다. 신기하게도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 중에 ‘면도날’이 있는 것이었다. 얼른 구입해서 가장 먼저 본 것이 출판일자였다. 그만큼 신기했다. 2009년 6월 25일 1판 1쇄 찍음이라고 되어있었다. 그랬었구나. 장롱 안에 잠들어있던 면도날이 작년 6월 말에서야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구나.
면도날을 읽어가면서, 점점 처음 읽을 때의 감정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읽었다. 가급적이면 삼십 년 전에 읽었던 기억을 더듬으면서 그 흔적을 찾고 싶었다. 총 529페이지 분량의 책을 읽는데 1주일이나 걸렸다. 그만큼 한자 한자가 소중하여 놓치고 싶지 않았다.
비로소 알게 되었다. 왜 내가 왜 내가 세례나 침례 받기를 거부했는지. 왜 의식주보다 소중한 기독교에 회의를 갖게 됐는지. 왜 좀 더 자유롭게 다른 종교와 사상에 대해 접해 볼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를……. 깨달음이라하니 거창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의 깨달음은 이런 정도에 불과하다. 도를 터득하고 삶의 이치를 깨달은 것이 아니다. 전자의 깨달음만 가지고도 행복이 넘쳤다. 환희와 감동이라는 표현을 붙였지만 사실 그 정도로도 모자랄 지경이다. 그러니 도(道)를 깨닫고 구원을 깨닫는다면 얼마나 가슴 벅찰까를 생각하면 너무 큰 호들갑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마 도나 구원의 길을 깨닫는다면 그것을 표현할 어휘는 다시 만들어 져야할 것이리라.
<줄거리>
서머셋 모옴의 면도날은 실존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독특한 형식을 띠고 있다. 작가중심의 1인칭 관찰자적 시점으로 쓰여 있다. 그 형식부터 무척 마음에 들었던 기억이 난다.
자칭 상류층 사교계의 대부라고 생각하는 ‘엘리엇 템플턴’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모옴보다 대략 15년 정도 연상인 듯하다. 이 소설은 1919년,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는 삼일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에 ‘대한독립만세’의 외침으로 물들여 놓은 그 시점에 모옴과 엘리엇 템플턴의 만남으로 시작을 한다. 모옴이 엘리엇을 처음 만난 게 그때(1919년)부터 15년 전이라고 했으니 모옴이 삼십대 중반, 엘리엇이 사십대 후반이었을 것이다. 당시 모옴은 평범한 작가였으므로 엘리엇은 모옴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러다 모옴이 성공을 하고 유명해지기 시작하자 엘리엇은 친밀감을 나타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 엘리엇은 친족들 이외에 죽을 때까지 모옴에게 가장 큰 믿음을 주고 아낌없이 베푸는 친구가 된다.
엘리엇의 여동생은 시카고에 살았다. 여동생에게는 딸이 있는데 약관의 아름다운 이사벨이었다. 이사벨에게는 로렌스 대런이라는 약혼자가 있었는데 애칭으로 래리라고 불렀다. 그 사내는 과묵하고 신중하지만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매력남이었다. 1919년 모옴이 시카고에 가는 길에 엘리엇과 함께 이들을 만나는 것이 이 소설의 발단이다.
래리는 기계 만지는 일에 능숙했고, 그래서 일찍 비행기 조종기술을 배웠다. 그것이 1차 세계대전이 나자 조종사로 종군하는 계기가 된다. 전쟁 중에 자신을 구하다 죽은 친구의 주검을 보고 충격을 받아 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 일에 대하여는 이미 말한 바와 같다. 그는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사벨을 포함한 누구도 빈둥거리는 래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 모옴이 나타났고, 도서관에서 우연히 다시 마주치게 된 모옴은 래리의 놀라운 집중력에 감탄을 한다. 그가 찾고자하는 궁극적 실체에 대해서 모옴은 상상해 본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오로지 일을 하고 그 대가로 돈을 벌고 사교계에 진출하여 인정을 받는 것만이 사람 사는 방법일 뿐 래리의 방황에 전혀 관심이 없다. 래리는 이사벨에게 결혼을 하자고 하지만 이사벨은 결혼 후의 자신을 생각해 본다. 뭔지 모르는 것을 찾기 위해 빈둥거리는 래리를 뒤치다꺼리하며 사교계와 멀어지고 멋진 드레스와 장신구로 치장하는 등의 삶을 포기할 자신이 없다. 그래서 파혼을 선언한다. 래리는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이사벨은 자신을 죽도록 사랑하고 재산도 많고 자상하고 넉넉한 품성의 그레이와 결혼을 하고 래리는 시카고를 떠나 파리로 간다. 모옴 또한 영국과 파리를 오고 가며 생활한다. 2년쯤 지나 모옴이 파리에서 우연히 래리를 만났을 때 그는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들의 만남은 계속된다. 모옴과 엘리엇의 만남도 계속되고. 래리는 어느 날 탄광에 가서 일을 하고 싶다며 떠난다. 그는 탄광에서 일하고 독일의 빈으로 갔다가 인도로 향한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체험을 한다.
한편 미국이 대공황의 상황에 빠지면서 그레이의 가족은 파산을 하고 그레이는 빈털터리가 된다. 그레이 부자는 주식투자 펀드매니저였다. 그들은 고객들의 재산을 자기 몸처럼 아끼는 것을 자부심으로 여기는 자들이었다. 그레이의 아버지는 자신의 사재를 출연하여 고객들의 손해를 보전해 줬다. 그리고 아버지는 죽었다. 엘리엇은 불쌍한 이사벨 부부를 파리로 오도록 한다. 자신은 독일로 가서 살 테니 파리의 아파트와 별장 등에서 생활하면서 마음을 추스르라고 한다. 엘리엇은 대공황 속에서도 전혀 손실을 입지 않았다. 그는 피붙이를 끔찍이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모옴과 엘리엇, 이사벨, 그레이, 래리 등은 수시로 만났다 헤어졌다를 반복하며 많은 시간들을 보내다. 특별한 사람이 있다면 이사벨 등의 옛 친구 모옴이 만난 수잔이다. 소피는 미국에서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다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은 후 폐인이 되어 파리로 쫓겨 와 창부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래리는 그녀가 어렸을 적에 남이 모를 우정이 있었던 듯하다. 소피가 시 쓰기를 좋아하고 이해심이 많았던 여인으로 생각하고 진심으로 동정한다. 하지만 이사벨과 엘리엇, 그레이 등은 그녀를 경멸한다. 특히 이사벨이 무척 심했다.
어느 날 래리가 소피와 결혼하겠다는 선언을 한다. 모두가 미친 짓이라고 한다. 특히 이사벨은 광적으로 흥분하여 도저히 용납을 할 수 없다고 한다. 나중에 모옴선생에 의해 밝혀지지만 이사벨의 간교한 흉계에 의해 소피는 결국 드레스 가봉을 하러 가기 직전에 사라져 버린다. 충격을 받은 래리 또한 파리를 떠난다.
수잔도 흥미로운 여자다. 그녀는 예쁜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매력적인 여자다. 직업은 모델이다. 부업으로 자신을 모델로 쓰는 화가에게 몸을 팔기도 한다. 가급적이면 함께 생활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몸은 물론 밥을 해 주고 빨래와 청소를 해 주는 것이다. 능숙한 음식솜씨와 재빠른 능력으로 모든 화가들이 만족해한다. 나중에는 꽤 많은 돈을 모으기도 한다. 이참에 나도 그림을 그려보자. 틈틈이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들은 적어도 형편없는 그림은 아니었다.
래리는 인도에서 많은 체험과 사람들을 만난다. 어느 날 뜬금없이 왔다가 사라지는 그를 다시 만나고 그를 통해 래리가 채득한 인간의 삶에 관하여 긴 대화를 나눈다. 낮에 시작한 대화는 밤이 지나고 다시 아침이 되도록 계속되었다. 래리는 모든 재산을 봉사단체에 기부하고 빈털터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정신적 자유를 통해 삶의 행복을 추구하려는 것이리라. 모옴은 적어도 돈이 삶에 있어 얼마나 편리한 것인 지를 말하지만 반대로 래리는 그 편리함이 바로 속박이라고 한다. 래리는 필요하면 일하고 그러면서 누구든지 함께 부딪히고 이해하며 살아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결국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하고 떠난다.
엘리엇도 죽었다. 모옴에게 장례 후의 모든 절차를 위임하고 떠났다. 재산은 상당한 액수를 자신이 세운 캍톨릭 성당에 기부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이사벨에게 상속을 한다. 물론 모옴에게도 여러 가지 유산을 남겼다. 이사벨과 그레이도 미국으로 떠나 그곳에서 새로운 사업을 하기로 한다. 소피가 죽었다. 부랑자의 총탄에 맞은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전에 말한 이사벨의 간교함을 모옴이 밝혀낸다. 이사벨은 모옴에게 제발 래리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달라고 한다. 모옴도 굳이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수잔은 오랫동안 파리에 오면 자신의 집에서 머물던 정부 아시유와 정식으로 결혼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 사내의 아내가 죽은 것이었다. 그것이 경비도 절감되고 도덕적으로도 깨끗하지요. 정부를 숨겨 놓고 산다는 부도덕의 탈을 벗을 수 있으니까. 도 재미있는 말. 결혼은 여자에게 다할 나위 없는 일자리예요. 게다가 커가는 딸아이를 생각해서도 좋은 일이지요.
그녀는 파리의 가장 유명한 마이어하임 화랑에서 개인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모옴이 놀랄만한 화랑이었다. 그녀의 그림 수준이 그렇게 발전했단 말인가? 그녀가 말한다. 아시유의 생각이지요. 생각해 보세요. 사회적 지위도 있는데 저를 뭐라고 사람들에게 소개하겠어요. 숨겨 뒀던 정부라고는 할 수 없잖아요. 파리의 마이어하임에서 개인전을 가진 화가라고 소개하면 전혀 꿀릴 게 없지 않겠어요. 안 그래요?
이 소설은 실존적인 해답으로 끝을 맺는다. 사회 속에서,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가면서. 가급적이면 물질적인 만족보다는 궁극적인 실체 즉, 정신적인 삶 속에서 궁극적인 만족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작가가 내리는 이 거대한 장편소설의 해답이 된다.
<구도의 길에 관하여>
이 책은 전체 7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 6장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제 6장과 관련하여 모옴은 서두에서 말한다.
“독자들에게 이 장은 굳이 읽지 않아도 문맥과 스토리를 이해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음을 말해두고자 한다. 단지 래리를 만나 대화를 한 많은 얘기들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제6장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책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읽지 말라는 말이 반드시 읽으라는 말보다 더 무섭게 들린다. 반어적으로 6장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리라.
래리가 전쟁에 나가 죽음을 목격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의 삶도 엘리엇이나 그래이, 이사벨 등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끔찍한 친구의 죽음을 보고 그 죽음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다. 죽음에 대한 의문은 결국 현재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로 연결이 되며, 내세의 존재 유무와 사후의 세계에 이르는 길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그것이 바로 구도의 길이 아니겠는가?
래리는 미국의 대부분 국민들이 그러하듯이 개신교 신도였다. 그러므로 우선은 기독교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찾았을 것이다. 마치 밥 먹는 것과 같은 기독교 생활에서 도저히 길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의문은 모옴의 말에 의해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을 희생시키는 순간 하나님보다 훨씬 더 위대한 존재가 되지. 왜냐하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도 자신을 희생시키진 못했으니까. 기껏해야 자신의 독생자, 그러니까 예수만 희생시켰지.”
실제 예수의 희생을 돌이켜 보자. 그것은 짜여 진 각본에 의한 것이었다. 구약에서부터 예수의 강림과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을 예언하고 있고, 예수 또한 생전에 제자들에게 그런 뜻을 시사한다. 그리고 예수는 죽었지만 부활하여 하늘에 올랐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탄성을 부르짖었다는 이 말은 사실 작위적이다. 버린 게 아니라는 것을, 아버지의 바로 이런 뜻을 위해 자신이 세상에 왔다는 것을, 사흘 후에 부활할 것을 알고도 이런 말을 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래리의 기독교적 부정을 한마디 인용해 보자.
“저도 믿고 싶었는데, 평범한 사람들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는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더군요. 수사들이 그랬죠.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하지만 그건 그리 가치가 있는 목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베토벤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교향곡들을 만들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그저 마음속에 존재하던 음악을 어떻게든 표현해야 했고, 그래서 자신이 아는 방법을 총동원하여 최대한 완벽하게 만든 것뿐이죠. 주기도문을 듣고 있으면 저들이 어떻게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꾸준히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걸까하는 의문이 들었죠. 아이들이 이 땅에 있는 자기 아버지한테 양식을 달라고 간청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중략) 오히려 낳아 놓고 제대로 못 먹이거나 안 먹이면 우린 그런 사람을 비난합니다. 전능하신 창조주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당신의 피조물들에게 물질적으로든 영적으로든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제공할 준비가 안 됐다면 그들을 창조하지 말았어야죠. (중략) 하나님이 대놓고 칭송받길 원한다는 것도 믿을 수가 없었죠. (중략) 집요하게 아첨해서 교묘하게 구원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실까요? (중략)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죄악에 대한 선입견과 타협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죠. (중략) 범죄가 사회의 책임이 아니라고, 그들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제가 하나님이라면 아무리 질이 나쁘다 해도 영원한 저주를 내리진 않을 겁니다. (중략) 선량하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대체 악은 왜 창조한 겁니까? (중략) 저는 아무리 현명하다 해도 상식이 없는 하나님은 믿을 수 없었어요. 그보다는 세상을 창조하진 않았지만 악행을 발견하면 최선을 다해 바로잡는 인간보다 훨씬 더 선량하고 현명하고 위대한 신을 믿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죠.”
래리는 의문을 풀기 위해 파리의 도서관에서 오랜 시간 공부에 전념한다. 그는 유럽에서 뚜렷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가 가고 싶은 곳은 인도였다. 불타, 석가모니의 고향이자 라마교와 브라만교, 힌두교 등 종교의 최대 발상지이자 성지라고 할 수 있는 인도. 그는 인도에서 많은 고행과 체험을 통해 서양과는 다른 독특한 종교적 실체를 깨닫는다. 윤회의 사상을 접하고 동서(東西)의 차이를 확연하게 느끼며, 명상을 통해 변하는 자아를 발견한다.
그렇다고 그가 라마교나 브라만교에 귀의하여 그 종교를 믿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세상의 많은 종교와 사상가들을 통해 독특한 자기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구도자가 아니겠는가. 그의 앞에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졌다.
“자아는 피조물이 아니라 영겁토록 존재해 온 것이기 때문에, 마침내 일곱 가지 무지의 베일을 벗게 되면 다시 처음의 상태, 즉 무한의 상태로 돌아간다.”
그 무한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 이를테면 불교로 치면 해탈과 비슷한 이치이겠지만, 그것은 곧 자신의 영혼에서 위안과 용기를 얻어야 한다는 게 래리의 생각이었다. 그는 「인식을 통해 실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에 천착한 느낌을 준다. 래리의 한 마디를 더 인용해 보자.
“인도의 현인들도 인간의 결점을 깨닫고 사랑을 통해 혹은 의로운 행위를 통해 구원을 얻을 수도 있다고 시인하긴 했지만, 가장 어렵고도 고귀한 구원의 수단은 단연 인식이라는 점은 결코 부인하지 않았죠. 인식이라는 수단은 인간의 가장 귀한 능력, 즉 이성입니다.”
그렇다고 래리가 구도에 성공했다는 것은 아니다. 애초부터 어차피 해답은 없는 것이다. 래리 또한 그것을 모를 만큼 멍청하지 않다. 구도는 구도로써 평생을 가는 것이다. 하지만 래리는 분명히 인간을 초월한 미지의 인식이 자신을 소유하는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내 그는 모옴 선생에게 자신의 거대한 꿈을 선언한다. 상속받은 많은 재산을 버리고 금욕의 길로 나가기로 한 것.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가 평범함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과 똑같이 호흡하며 살겠다는 것. 돈이 꼭 필요하게 되면 어떤 일, 이를테면 탄광의 잡부 같은 일을 해서 보충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정신적인 삶을 선택한 것이었다. 궁극적인 만족은 오직 정신적인 삶을 통해서만 구할 수 있다는 가장 기초적인 생활방식을 실천함으로써 평생 구도에 힘쓰겠다는 것. 그것이 래리의 결론이고, 이 책 면도날의 주제가 된다.
그 래리를 설명하기 위해 사교계의 거장의 삶을 죽을 때까지 가장 고귀한 삶으로 여겼던 엘리엇과 우아하고 풍족한 삶을 위해 사랑을 버린 이사벨, 성실한 일꾼 그래이, 현실감각으로 무장한 수잔, 청순한 소녀시인에서 창녀로 변신하고 끝내 죽음에 이른 소피 등을 등장시켰다. 한 마디 래리의 음성이 마치 뇌성처럼 머리를 때린다.
“이 세상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들도 오직 악과 결합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굳이 결론을 내리자면, 피할 수 없다면 그것을 최대한 이용해라.”
필요는 창조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엘리엇이 필요하고 이사벨이 필요하듯이 래리 또한 필요한 게 사회일 것이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사람. 영혼을 살찌게 하고 위안을 주는 존재. 래리가 있어, 아니 래리의 구도행각을 우리에게 전달해 준 저자 서머셋 모옴이 있어 행복한 독자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