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리움직임연구소 창단 20주년 기획 공연 <굴레방다리의 소극>
원작 – Edna Walsh, <The Walworth Farce> (2007년 에딘버러 프린지 “First Award”)
연출 – 임도완 연출, 2019, 6, 26일 예그린씨어터.
출연 - 김대식 역(이상일), 김한철 역(성원), 김두철 역(이중현), 김리 역(박신혜)
![](https://t1.daumcdn.net/cfile/cafe/99D602425D13A0EB15)
보러가기 전 어떤 연극인지 전혀 사전 오리엔테이션이 없었다. 대부분의 연극, 영화 사전 정보 없이 본다. 현장성이 주는 긴장감과 몰입감이 좋아서다. 낯선 길을 처음 같이 가는 즐거운 긴장감.
극의 제목에서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허름한 빈민가의 인물들을 다룬 희극 정도 아닐까, 하는 것. “굴레방 다리”에서 전해지는 옛날 ‘다리 밑’ 하던 그 느낌과 소극(笑劇)에서 전해오는 comedy의 정서. 그리고 포스터에 있는 “연극 속의 연극”에서 극중극이라는 형식적 특성이 있겠구나 정도. 결론부터 말하자면 2시간이 어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였다. 집중하지 않으면 처음엔 이야기가 조금 산만하게 느껴질 수 있다. 같은 장면을 반복하여 극중극의 형식으로 재현하는 인물들의 연기에도 불구하고 처음 얼마 동안 집중하고 나서야 무언가 예전에 벌어졌던 사건 혹은 상황의 얼개가 보인다. 그럼에도 의상만으로 여성, 남성을, 그것도 각기 다른 인물과 공간을 빠르게 연기하는 극의 전개가 익숙해지려면 집중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집중이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연기자들 간의 잘 어우러진 뛰어난 연기가 관객들로 하여금 긴장감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유지하며 극을 따라가게 해준다.
대략의 줄거리는 이렇다.
허름한 집, 아버지와 두 아들은 연극을 한다. 아버지 대식은 감독 역할을 하며 어떤 사건을 재구성하는 극을 두 아들, 한철, 두철과 함께 연기한다. 극의 내용은 대식이 연변을 떠나오던 대식 모친의 장례식 날의 장면. 대식 부부와 동생 대환 부부가 어머니의 주검을 담은 관 앞에서 어머니의 유언을 읽으며 재산을 나누는 장면을 연기하는 대식과 두 아들. 어머니는 ‘깜장 말’이 떨어지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었는데, 이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도 극중극을 통해 등장한다.
대식과 두 아들이 행하는 이 극은 여러 번 수정을 거친 극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고, 그 수정된 극을 재현하는 과정에 애란과 용길 부부, 그리고 애란의 동생인 현구가 등장하고, 재산을 노린 현구가 용길과 합세해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현구 아버지의 관을 운반하다 생긴 사고로 날아간 바로 그 ‘깜장 말’이 대식 어머니의 죽음의 원인이라는 것도 드러난다. 거기에 더해 대식과 애란, 그리고 대환의 부인과 현구 사이의 불륜도 등장하는 등, 온통 돈과 부도덕을 둘러싼 음모와 계략으로 가득한 장면들이 등장한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5F174E5D13A12020)
대식의 아들인 한철과 두철의 어린시절로 극 속에 나타나는데, 둘은 우주비행사와 버스운전사가 되려는 꿈을 지닌 평범한 아이들이었지만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고 이웃집 개를 죽이는 잔인한 면모도 연기한다. 이 두 아이가 그렇게 잔혹한 모습으로 연기를 하도록 만든 것이 실제 그들의 어린시절 모습이었는지, 아니면 아버지인 대식이 아이들을 그렇게 묘사하도록 극을 만든 것인지는 조금 분명치 않지만, 극의 전개상 아버지가 쓴 각본일 확률이 높아 보인다. (이 점은 다음에 한 번 더 볼 때 다시 확인!) 결국 극이 진행 될수록 드러나는 것은 아버지가 두 아들들에게 시키는 극이 진실보다는 무언가 이면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대식은 어머니의 재산을 탐내는 과정에서 동생 대환 부부를 살해하고 연변을 도망쳐 동생 대환이 살던 굴레방다리의 이 집으로 온 것이고, 나중에 대환 부인이 두 아들을 그에게 보낸 것이었다. 그렇게 아들들을 자신이 만든 극본에 따라 매일 같은 연기를 시키며 집밖에 나가지도 못하게 하며 감금하듯 숨어지내는 이들 중 유일하게 외부를 나가는 이가 작은 아들 두철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이들의 연극은 파국을 맞이한다.
아침마다 마트에 식료품을 사러 가던 두철이 어느 날 물건꾸러미를 바꿔들고 오고, 바뀐 꾸러미를 들고 필리핀 계 마트 여직원인 김리가 찾아온다. 두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김리의 출현으로 폐쇄되었던 이들의 생활은, 그리고 연극은 엇나고 흔들리기 시작하며, 이들의 생활이 드러나고 깨지는 것이 두려웠던 대식은 김리마저 감금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친절을 베푸는 김리에게 호감이 있던 두철의 마음이 흔들리고, 그런 동생을 바라보는 한철도 갈등한다. 그러나 정작 결정적인 파국은 이미 이들 속에 내재되어 있었다. 사실 형 한철과 달리 두철은 할머니의 장례식날 있었던 일, 즉 아버지의 삼촌 부부 살해와 도주지를 목격했고 기억하고 있었다. 한철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이를 알게 된 한철은 대식에게서 두철과 김리를 구해주고자 마지막 연극을 하면서 대식을 살해하고, 김리를 해코지 하는 것처럼 두철에게 오해하게 해서 두철의 칼에 목숨을 잃는다. 모든 연극이 끝나고 대식과 한철의 죽음, 그리고 떠나버린 김리, 그 빈자리에서 처음에는 달아났던 두철은 다시 돌아와 연극이 끝나고 죽음만이 가득한 방에서 객석을 향해 손을 내밀며 연극은 끝난다.
대식 가족의 연극은 두철을 제외한 모두의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막을 내렸지만 이제는 누구도 연기할 수 없다. 물론 홀로 남은 두철은 연기와 함께 이제 삶도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 극중극에서는 소극(笑劇)이었으나 실제 그들의 삶은 비극으로 바뀌었다. 아니 애초부터 비극이었다. 다만, 비극을 소극처럼 연기해 왔던 것일뿐. 그동안 선반의 트로피를 독차지했던 최고의 배우, 즉 실제와 가장 다른 극 속의 인물을 연기한 것은 언제나 대식이었다는 점은 그래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 장면을 통해 이 극중극의 내용에서 실재와 가장 왜곡되게 그려지고 연기한 인물이 다름아닌 대식이었음을 처음부터 보여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EF7D445D13A16D1C)
2008년 초연 후 지금까지 네 차례 공연되었다는 <굴레방다리의 소극>은 제목과는 다르게 굉장히 묵직한 주제와 내용을 지닌 연극이었다. 재산을 둘러싼 친족 살인과 가족 간 음모, 폭력으로 얼룩진 일상, 위선과 불륜, 소외된 주체들의 고립, ‘깜장 말’ 사건에서 나타나듯 우연으로 야기된 비극, 어린아이들에게 까지 만연된 잔인한 폭력, 그리고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디아스포라의 주체 문제까지.
그러나 그 모든 이야기를 떠나 가장 중요한 것은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였다. 2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 세 명의 인물이 열 명의 남녀 인물들을 번갈아가며, 그것도 어떨 때는 관객들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연기하는 세 명의 배우는 훌륭했다. 보이지 않는 시간에 텅 빈 객석을 두고 어두운 무대 위에서 쏟았을 이상일, 성원, 이중현, 배우들의 진솔한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극은 김리역을 연기한 박신혜 배우의 등장 전과 후로 나뉘었다. 극이 한참 진행되고 나서야 등장한 박신혜 배우의 연기 장면이 나오면서 객석에서는 비로소 웃음이 터지고 환호성이 나왔다. 팽팽하기만 하던 극의 긴장감이 박신혜 배우의 등장으로 무언가 여유와 숨 쉴 공간을 찾은 듯 했다. 세 남자 배우들의 연기는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 같았고, 박신혜 배우의 연기는 당겨진 시위의 긴장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조용히 손을 얹어 시위를 내려주는 편안함과 유머가 있었다. 아무런 준비도 사전 지식도 없이 가서 보았던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굴레방다리의 소극>!! 못, 혹은 안 보신 분들에게 꼭 한 번 가서 보시기를 강추드린다! 나도 다른 배우 출연일에 혹은 이번 공연 배우들 버전으로도 다시 한 번 보려고 한다.
훌륭한 연극 준비해주신 임도완 연출가님과 연기하신 배우분들, 함께 준비하시느라 애쓰셨을 <사다리움직임연구소> 극단의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BFB94E5D13A19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