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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이사야(35)/몰락
제목 : 애굽의 충격적인 몰락
성경 : 사 20:1~6
찬송 : 529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20824 낙양교회 수요예배
사 20:1 앗수르의 사르곤 왕이 다르단을 아스돗으로 보내매 그가 와서 아스돗을 쳐서 취하던 해니라
사 20:2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니라
사 20: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종 이사야가 삼 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며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징조와 예표가 되었느니라
사 20:4 이와 같이 애굽의 포로와 구스의 사로잡힌 자가 앗수르 왕에게 끌려갈 때에 젊은 자나 늙은 자가 다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볼기까지 드러내어 애굽의 수치를 보이리니
사 20:5 그들이 바라던 구스와 자랑하던 애굽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놀라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사 20:6 그 날에 이 해변 주민이 말하기를 우리가 믿던 나라 곧 우리가 앗수르 왕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달려가서 도움을 구하던 나라가 이같이 되었은즉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 하리라
20장은 18장부터 시작된 구스와 애굽에 대한 예언들을 마무리하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시대에 북방 앗수르의 세력이 팽창함에 따라 유다와 주변 나라들은 앗수르 제국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요즘도 보십시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하니까 주변나라들이 속으로 엄청 긴장하고 있습니다. 잘못하면 자기 나라들도 우크라이나처럼 침공을 당할까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앞 다퉈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이사야 시대는 약소국들끼리 서로 동맹을 맺고 또 남쪽의 강대국 구스와 애굽을 의지하면서 앗수르에 저항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구스와 애굽은 앗수르의 세력을 막을 수 있는 피난처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블레셋 나라의 아스돗이 함락된 것이 바로 그 증거였습니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분명한 증거가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유다 백성 가운데는 여전히 구스와 애굽을 의지하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서 구스와 애굽마저 앗수르에 정복당할 것을 알게 하시고 그 길로 가지 않도록 권고하셨습니다.
√이해하기 힘든 하나님의 명령(1~2절)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에게 이해하기 힘든 명령을 주십니다. 그것은 3년 동안 벗은 몸과 발로 백성 앞에서 다니라는 명령입니다. 이상하게 보이는 이 명령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사 20:1 앗수르의 사르곤 왕이 다르단을 아스돗으로 보내매 그가 와서 아스돗을 쳐서 취하던 해니라
오늘 본문을 보면 이사야에게 예언이 임한 구체적인 때와 배경을 설명합니다. 그래서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역사적인 배경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절에 나타난 ‘앗수르 사르곤 왕’은 디글랏빌레셀 3세의 아들이고, 산헤립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선왕이자 그의 형제 살만에셀이 북 이스라엘을 침략해서 수도 사마리아를 3년 간 포위하고 있을 때(왕하 17:3~6; 18:9~11), 그를 죽이고 앗수르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마리아를 완전히 정복했습니다(BC 722). 더 나아가 주변나라들을 정복하고 앗수르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BC 705년까지 앗수르를 다스리고 그의 아들 산헤립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
사르곤이 왕위에 있을 때 블레셋이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는데, 그때 다르단(참조, 왕하 18:17; 군대 장관의 직명)을 보내어 아스돗을 정복하게 했습니다(BC 713~711). 아스돗은 블레셋의 5대 도시 중 하나인데(수13:3), 해변을 따라 팔레스타인을 통과하는 군사 도로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애굽은 앗수르를 경계하기 위해 블레셋의 반란을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앗수르가 아스돗을 점령할 때 애굽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아스돗의 통치자 야마니(Yamani)가 애굽으로 도망 와 피난처를 찾았을 때, 애굽은 앗수르 군대의 기세에 눌려 그를 넘겨주기까지 했습니다.
애굽의 입장에서 아스돗이 앗수르에 정복된 것은 치명적인 일이었습니다. 완충 지대가 사라진 것입니다. 이제 애굽이 앗수르의 위협에 직면하게 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애굽이 유다에게 지원을 약속하면서 앗수르에 저항하도록 유도했습니다. 마침 유다도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사마리아를 무너뜨리는 것을 보고서 두려움을 느껴 앗수르의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 줄 동맹 세력을 찾고자 했던 때입니다.
그러나 과연 애굽이 유다를 앗수르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해줄 수 있을까요?
블레셋이 애굽을 믿고 앗수르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아스돗이 함락 당했는데, 과연 유다가 앗수르에 대항했을 때 애굽이 유다를 보호해 줄 수 있을까요? 이것이 본문의 역사적 배경이 제기하는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사 20:2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니라
사르곤 왕이 자기 부하 군대 장관을 보내어 아스돗을 공격하게 했는데, 아스돗이 워낙 튼튼한 성이어서 한 번에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삼 년 뒤에 사르곤이 직접 와서 아스돗을 함락시켰다고 합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왜 하나님께서 앗수르 왕이 블레셋 아스돗을 공격하는 내용을 이사야에게 말씀하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것도 이사야 선지자를 삼 년이나 거의 벌거벗고 수치스럽게 살도록 하면서 말입니다. 여기서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라는 것은 이사야가 단순히 허리띠를 풀어 헤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겉옷을 벗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베옷이라는 것은 결코 부드러운 천으로 만든 옷이 아닙니다. 아마도 이사야는 평소에도 좋은 옷을 입고 다니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예 그 베옷조차도 벗고 노예나 전쟁 포로와 같이 거의 치부만 가린 모습으로 지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갈지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이사야에게 그런 복장을 한 채 밖으로 나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옷을 벗고 반바지나 속옷만 입은 상태로, 그것도 맨발로 사람들을 만나서 상담도 하고 성전에서 설교도 하고 왕궁에 들어가서 왕도 만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이런 명령을 내리셨을까요?
원래 선지자는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자신의 행동으로 무엇인가를 보여 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한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무엇인가 항의할 때 잘 사용하는 방법이 ‘삭발’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삼보일배’(오체투지)라는 것도 했습니다. 이것은 정부나 기관에 대해 가장 강력하게 항의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종종 선지자들에게 상징적인 행위를 하도록 하셔서 백성에게 보다 생생한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하게 하셨습니다.
호세아가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한 것이나(호 1, 3장), 에스겔이 오랫동안 한쪽으로 눕고, 부정한 떡을 먹는 등 기이한 행동을 하게 한 경우가 그 예입니다(겔 4~5장, 12장), 이사야는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녔습니다.
왜 이사야는 말로 하지 않고 행동으로 무엇인가를 보여 줍니까?
그 이유는 말로는 더 이상 유다 백성이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선지자가 말로 하지 않고 행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사태의 시급함을 보여 주며, 그들이 지금의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면 반드시 이사야의 모습처럼 포로로 끌려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순종이 우선입니다(3~4절)
그러면 하나님께서 도대체 유다 왕실의 선지자인 이사야를 가장 수치스럽게 만들어서 다니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앞으로 유다가 보게 될 미래를 선지자의 고통과 수치를 통해서 미리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사 20: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종 이사야가 삼 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며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징조와 예표가 되었느니라
사 20:4 이와 같이 애굽의 포로와 구스의 사로잡힌 자가 앗수르 왕에게 끌려갈 때에 젊은 자나 늙은 자가 다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볼기까지 드러내어 애굽의 수치를 보이리니
지금 앗수르의 공격을 당하고 있는 나라는 아스돗이라는 블레셋 도시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에게 보여 주시려는 것은 아스돗 뒤에 있는 애굽과 구스의 실체였습니다. 이 당시 유다가 세상적으로 기댈 수 있는 나라는 애굽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많은 유다 귀족들은 애굽을 의지하는 마음이 있었고, 많은 돈을 애굽에 주어서 자기 나라를 지켜 줄 것을 부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애굽은 그들 자체가 앗수르에 의해 붙들려 나갈 나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로 하여금 겉옷을 다 벗고 신발도 다 벗고 노예나 전쟁 포로 같은 모습으로 다니게 하신 것은, 얼마 있지 않아서 유다 백성이 기대하던 애굽의 귀족이나 젊은이들이 모두 이런 모습으로 앗수르로 포로로 끌려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애굽 사람들이 포로가 되어 겉옷을 다 벗기고 볼기까지 다 드러낸 채 벗은 발로 앗수르까지 끌려 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은 전혀 유다를 도울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이 당시 애굽은 말로는 유다를 돕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애굽의 지도자들도 스스로 힘이 아직 남아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애굽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망하게 될 나라이고, 전혀 유다를 도울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 지도자들은 애굽의 긴 역사와 지난날 화려했던 그 군사력만 생각해서 돈을 주고 애굽의 도움을 받으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서 애굽이 전혀 유다를 도울 수 없음을 보여 주십니다.
실제로 삼 년 뒤에 아스돗이 망했습니다. 이번에는 사르곤 왕이 직접 와서 아스돗을 철저하게 멸망시켰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40년 후(BC 671년)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구스 왕 디르하가가 이끄는 애굽 군대를 이기고 멤피스를 점령한 사건으로 성취됩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이 일을 미리 예고하시고 애굽과 구스를 의지하는 것이 무익함을 알리신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아스돗의 제안처럼 모든 나라가 힘을 합쳐서 애굽을 중심으로 앗수르를 막아 내는 것이 참 훌륭한 계획 같지만, 실제로 유다는 그런 일에 참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나라의 흥망과 하나님 백성의 흥망은 원리 자체가 틀리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 나라는 자신들의 힘을 모으면 성공하게 되고 힘이 다 빠져 버리면 당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말씀이 있으면 부흥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아무리 돈이 있고 힘이 있어도 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도 보십시오. 우리나라의 안보가 미국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입니다. 그러나 미국이 결코 우리나라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미국도 자기 나라의 이익을 철저히 챙기고 있습니다. 방위비 분담금을 엄청나게 올리는 것을 보십시오. 자기 나라에 이익이 없다면 우리나라에 미군이 주둔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미국만 의지하면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의지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힘이시요, 안전 보장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애굽과 구스에 일어날 비참한 현실을 보여 주시기 위해 이사야 선지자에게 그런 수치스러운 행동을 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이었지만 이사야 선지자는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순종하면 그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참된 피난처(5~6절)
√사 20:5 그들이 바라던 구스와 자랑하던 애굽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놀라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사 20:6 그 날에 이 해변 주민이 말하기를 우리가 믿던 나라 곧 우리가 앗수르 왕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달려가서 도움을 구하던 나라가 이같이 되었은즉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 하리라
하나님은 왜 이사야에게 이런 극단적인 명령을 내리셨을까요? 이사야가 왜 애굽과 구스를 위해 벌거벗고 다니는 능욕을 당해야 할까요? 앞에서도 말씀드린 대로 유다는 국가적 재난과 위기가 찾아 왔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애굽을 더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유다에게 애굽은 희망이었습니다. 유다는 심지어 구스도 의존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하심으로써 애굽과 구스가 처참하게 패배한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유다가 얼마나 놀랍고 당황스러웠을까요? 그들은 애굽이 해가지지 않는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애굽이 무너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애굽의 패망으로 유다는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유다가 구원을 얻기 위해 달려가 도움을 구해야 할 곳은 애굽도 구스도 아니었습니다. 참된 피난처 되신 하나님께 달려와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는 인생의 부끄러운 결말을 잘 보여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힘은 우리 눈에 강해 보입니다. 그러나 지금 강하다고 언제나 강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한계를 망각합니다. 오늘 잘 되었다고 내일도 잘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우리는 내일을 모릅니다.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애굽과 구스가 지금은 힘이 있다고 해서 그 힘이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 보장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내일도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피난처이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 헛된 것을 의지하는 사람의 절망을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세상을 의지하는 삶은 절망과 부끄러움으로 끝납니다. 세상은 의지할 대상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힘과 도움이십니다. 애굽의 충격적인 몰락을 보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따르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