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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던 그곳에서, 그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더럽기 그지없는 화장실이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사람들이 말하는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에 대해서 증거 했습니다. 곧 알 수 없는 누군가가 그런 그를 고발했습니다. “잡혀가서 두들겨 맞게 되지는 않을까?”라는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견디기 힘든 가혹 행위를 당하는 현장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체포되기 전, 그의 생활은 잠시도 쉴 틈이 없을 정도로 몹시 바빴습니다. 반면, 감옥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감옥생활도 한 가지 정도의 매력은 있었습니다. 농담처럼 “내가 쉴 수 있는 방법은 감옥에 들어가는 것밖에 없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농담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하루는, 감방 천정에 나 있던 작은 구멍을 통해 햇빛이 들어왔습니다. 하나의 작은 점이 되었습니다. 무심코 그 점을 바라보는 순간, 문득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찬송을 부르고 싶어졌습니다.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모든 죄수들은 감방의 정해진 수칙에 따라 하나같이 부동자세를 취한 상태로 앉아 있었습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불편한 자세 때문에 등 아래쪽이 쑤셔왔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목을 가다듬었습니다. 중얼거리듯 “감사의 마음으로 감사를 드리자.”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굳은 자세로 무표정하게 앉아 있던 사람들이 잠시 자세를 흐트러뜨렸습니다. 그를 쳐다보았습니다. 경비원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한 그는 조금 더 길게 “거룩한 분에게 감사하라...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으니 감사하라.”라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찬양을 모두 끝낸 그는 거대한 쇠문을 쳐다보았습니다. 경비원이 전기 충격봉을 들고 들이닥칠 때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경비원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감사하라”라고 찬양을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누군가 그를 따라 찬양했습니다. 놀랍게도 네 번째 반복에 들어갔을 때는 방안에 있던 모든 죄수들이 함께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부른 동기가 무엇이 되었든, 그날 감방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장소로 변했습니다. 그는 기쁨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움츠리고 있던 가슴을 활짝 펼 수 있었습니다. 이후, 익숙한 일들이 반복되었습니다. 경비원이 감방 문을 차고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자고 있던 그의 멱살을 잡고 깨웠습니다. 경비대장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는 상태였습니다.
끌려온 그에게 다짜고짜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경고했었잖아!”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침착하게 “복음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더욱 흥분한 대장은 다시 “하지만 감옥 전체가 네 미신적 노래를 따라 하도록 만들었잖아?”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저는 말씀하신대로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노래를 불렀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경비원은 그를 다시 감방에 던져버리듯 쳐 박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책망을 들은 죄수가 아니었습니다. 승리한 영웅 같았습니다. 모두가 자신을 존경하는 것 같았습니다.
또 다른 어느 날, 죄수들은 평소처럼 불편한 자세로 석고상처럼 앉아 있는 부동자세를 취했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이 다시 찬송가를 부르면 두들겨 맞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허밍humming으로 “감사하라.”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의 죄수들이 그의 허밍에 동참했습니다. 감옥은 다시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올려드리는 거대한 처소로 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였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나님의 종들이 감옥에 가는 경우를 의미하는 은어隱語인 “감옥 신학”을 자초했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대가를 기꺼이 치렀습니다.
복음을 잔혹하게 짓밟는 그곳에서 온갖 핍박을 견뎌내며 진짜 믿음을 살아냈습니다. 성경은 “때는 한밤중이었다.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었고 다른 죄수들은 그것을 듣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을 기초부터 온통 뒤흔들어놓는 바람에 문이 모두 열리고 죄수들을 묶어두었던 쇠사슬도 다 풀리고 말았다.”(행16:25-26)라고 말씀합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붙잡혔습니다. 관리는 그들의 옷을 벗겼습니다. 모질게 매질했습니다. 깊숙한 감옥에 가뒀습니다. 발에는 쇠고랑을 단단히 채웠습니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벽에 고정시키기까지 했습니다. 간수들에게는 한 눈 팔지 말고 잘 지키라고 명령했습니다. 한편, “찬미”에는 “찬양, 기도, 예배, 노래, 감사” 등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을 혹독한 고난의 상황에 버려두신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끝까지 잘 견뎌낼 수 있는 은혜를 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찬미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드리는 예배를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초자연적인 놀라운 능력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간수는 한밤중이었는데도 그 두 사람을 데려다가 상처를 씻어주었고 그 자리에서 그와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를 자기 집에 데리고 가서 음식을 대접하며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을 온 가족과 함께 기뻐하였다.”(행16:33-34)라는 말씀대로, 간수와 그의 가족들을 구원하시려는 당신의 놀라운 뜻을 이루어주셨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제물로 바치는 사람이 나를 높이 받드는 자이니, 올바른 제사를 드리는 사람에게...나의 구원을 보여주리라.”(시50:23)라는 약속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감사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제사입니다. 참된 영성입니다. 우리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과 구원의 통로입니다. 드려진 감사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훨씬 더 큰 감사를 부릅니다. 사도가 “예수의 이름으로 언제나 하나님께 찬미(찬양, 기도, 예배, 노래, 송축, 감사)의 제사를 드립시다.”(히13:15a)라고 독려했던 이유입니다. 오늘 우리는 2015년 추수 감사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환경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수 있는 바른 제사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그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눅12:1a)라고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모든 말씀(산상수훈)을 마치셨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는 다르게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마7:28-29)라는 말씀에 따르면, 주님의 강화講話는 하나님 나라에 집중되었습니다. 복음에 집중되었습니다. 영혼 구원에 집중되었습니다.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과는 달랐습니다. 범할 수 없는 권위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주님의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거기다 예수께서는 각종 희한한 이적들까지 행하셨습니다. 이런 주님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유대 전역으로 전해졌습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결코 이례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로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현상이었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듯이, 때로는 해가 저물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주님의 가르침에 매몰되다시피 했습니다. 열정만으로 볼 때,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할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예수께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예수께서 이번에는 그들이 지도자로 섬기면서 따르고 있던 바리새인들, 율법사들과 변론을 벌이고 계셨습니다.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누가 먼저라고도 할 것 없이 즉시 주님을 식사에 초대한 바리새인의 집 주변으로 삼삼오오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몰려드는 무리들의 행렬은, 변론을 마치신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서 나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많이 모였는지 수를 다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자칫 서로 밀고 밀리다 밟혀서 인사 사고가 날 수도 있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들은 변론을 마치고 나오시는 주님 주변을 둘러싸며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주님께 시선을 집중시켰습니다. 오늘은 과연 어떤 말씀을 해 주실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라는 단어를 간과하지 말아야합니다. 평소, 예수께서는 당신에게 나아오는 사람들 가운데 단 한 명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소홀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그러다 보면 정작 당신은 식사를 거르실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날만은 다르셨습니다. 그들을 제자들로부터 따로 분리하셨습니다. 이어지는 가르침으로부터 제외하셨습니다.
물론 이때, 주님 주변에 있던 제자의 범위를 열둘로만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70(72)명에서 500명까지 확대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열둘이 되었든, 70(72)명이 되었든, 500명이 되었든, 예수께서 제자들로부터 그들을 분리시키셨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습니다. 이후 12절까지 이어지는 주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상황이 주어지게 된다 할지라도 당신에 대한 신앙의 절개만큼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요청이었습니다. 당신을 믿고 따르고 있던 사람들 곧 제자들에게만 할 수 있는 요청이었습니다. 곧 그리스도인인 저와 여러분을 향한 요청이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열광적으로 몰려들고 있었던 무리들의 영적 상태가 어떠한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다음 날, 호수 반대편에 있던 군중은 그 곳에 배가 한 척밖에 없다는 것과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시지 않고 제자들만 떠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요6:22)라는 말씀에 따르면, 무리들은 전날 늦은 오후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사람들을 먹이시는 기적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감동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다시 주님을 찾아 나아왔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제자들은 이미 지난밤에 호수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떠난 뒤였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무리들이 함께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출발했습니다. 주님을 만나자마자 언제 도착하셨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너희가 (이렇게 열정적으로) 나를 찾(아 다니고 있)는 이유는...(단순히)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다. (육신을 위하는) 떡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썩어 없어지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영생을 주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 인자는 너희에게 그런 양식을 줄 것이다.”(요6:26b-27a)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영적 상태를 돌려서 지적하지 않으셨습니다. 썩을 양식을 얻기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있던 그들의 죄를 구체적이고 적나라하게 지적하셨습니다. 영생을 주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당신이 영생을 위한 양식을 줄 수 있다는 설명까지 덧붙이셨습니다. “그렇습니까? 주님께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양식을 주실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당장 저희에게 주십시오.”라고 말씀드리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6:28b)라고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일을 하면, 어떤 공로를 세우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율법이 궁극적으로 요구하는 정신인 의와 사랑은 버린 채, 하나님을 버린 채 형식과 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부끄러운 실체를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노력만으로도 얼마든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방인도 아니고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사람들이, 생명처럼 여긴다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꿰고 있다는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따라다니는 목적이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육신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주님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자신들이 추구하던 부와 명예와 권세와 자랑을 얻어내기 위한 하나의 수단 정도에 불과했었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이기적인 인본주의에서 비롯된 맘몬에 사로잡혀 있는 오늘 우리의 모습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너무나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일이란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을 믿는 것이다.”(요6:29b)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일”은 단수입니다. “바로 그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단 한 가지의 일 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율법이, 아니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이 요구하고 있던, 무리들이 지키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던 많은 일들과는 엄격하게 구별된 단 한 가지 일입니다. 유일한 일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 곧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입니다. 당시 무리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주님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유월절이 되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성전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성전 뜰 안에서 각종 짐승들을 팔고, 돈 바꿔 주는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즉시 채찍을 만드셨습니다. 모든 짐승들을 성전 뜰에서 쫓아내셨습니다.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은 뒤집어 엎어버리셨습니다. 그들의 돈을 쏟아버리셨습니다. “이것들을 여기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시장터로 만들지 마라!”(요2:16b)라고 외치셨습니다. 성전이 당신 아버지의 집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유월절을 맞아 성전을 찾은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또 세례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에게 성령을 한없이 주셨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그의 손에 맡기셨다.”(요3:34-35)라고 외쳤습니다.
결정적으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친다고 비난하는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을 향해서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항상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b)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위해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기 때문에, 아들인 당신도 일하고 계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을 범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은 감히 이름도 부르지 못하는 하나님을 당신의 친아버지라고 부르고, 당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신다는 이유로 죽이려고 했습니다. 당장 쳐 죽일 수가 없어서 안달이 났습니다.
살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을 죽이려는 그들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굴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아들은 어느 것 하나도 혼자서 할 수 없다. 아들은 다만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서야...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무엇을 행하시든 아들도 행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당신이 하시는 모든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요5:19-20a)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살기를 띠고 있던 그들을 더욱 자극하셨습니다. 거기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셨습니다.
계속해서 “너희에게는 놀랄 만한 일이겠지만 아버지께서는 이보다 더 큰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죽은 사람을 부활시키시며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에게 생명을 줄 것이다.”(요5:20b-21)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여기서 “이보다 더 큰 일”을 직역하면 “이 일들보다 더 큰 일”입니다.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일보다 훨씬 더 큰일입니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일입니다. 당신이 원하는 이들을 영원한 저주와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시는 일입니다. 부활시키는 일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놀라운 일입니다.
주님의 선포는 계속해서 “누구든지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요5:24b)라고 이어집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생명을 주는 일까지 맡기셨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있는데,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증언하는 것이다.”(요5:39)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당신이 그들이 부지런히 연구하는 성경이 증언하고 있고,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던 바로 그 메시아라고 분명히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은 주님의 선포를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여러 차례에 걸쳐서 예수께서 고쳐주신 사람을 불렀습니다. 예수께서 고쳐주셨다는 사실을 절대로 발설하지 말라고 협박했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처음에는 그분이 누군지 몰랐습니다. 나중에서야 알았죠. 그런 그를 유대교에서 출교시키고 말겠다고 협박까지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가서 예수를 어떻게 없앨지 모의를 하였습니다.”(마12:14)라는 말씀대로,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은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원하신 주님을 어떻게 죽일지 모의했습니다. 역시 유대인들의 명절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주님이라는 사실은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로 보내신 당신을 믿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은 또 다시 “당신은 어떤 표적을 행하여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게 하시겠습니까?”(요6:30b)라고 물었습니다. “휴!”라는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그들은 주님의 가르침이 특별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습니다. 권위까지 느꼈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시는 각종 이적들을 목격했습니다. 심지어 죽은 자까지도 거침없이 살려내시는 바로 그 현장에 함께 있었습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이적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메시아라는 결정적 증거들이었습니다. 충분했습니다. 더 이상 다른 표적을 구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또 다른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했습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이 아니라, 썩을 육신의 양식을 얻기 위해서 주님을 열광적으로 쫓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욕을 채우기 위해서 쫓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욕이 채워지지 않자, 곧 돌변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예수께서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상황이 주어지게 된다 할지라도 신앙의 절개만큼은 반드시 지켜야 된다고 요청할 수 없으셨던 이유입니다. 그들은 비록 열정적이었지만, 뜨거웠지만 영원한 생명과는 전혀 관계없는 버림받은 티끌들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한다는 사실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큰 복입니다. 봉사든, 기도든, 희생이든, 물질이든, 오지에서 살아내야 할 순교적인 삶이든,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공개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큰 복입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감사할 수밖에 없는 제목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결정적인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반역하고, 넘어지고, 원망하고, 거기다 내놓을 만한 것도 하나 없는 우리를 들어서 당신의 크고 위대한 일을 이루시는 선한 도구로 써 주시겠다는 놀라운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또 오늘 이렇게 예배드리고 있다는 사실은, 비록 눈에 보이지 않는 겨자씨만큼 작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은혜 안에서 선물로 주어진 믿음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께만 감사, 찬양, 영광, 존귀를 돌려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닙니다.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쏟아져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부어진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지 깨달아 알고 있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항상 즐거워하십시오.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살전5:16-18)라는 사도의 외침에 따르면,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주어진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보고 싶어 하시는 참된 영성입니다.
오늘 우리는 2015년 추수 감사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앞서 걸어가신 희생과 헌신과 죽음의 길, 외롭고 고독한 길, 좁고 협착한 길을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환경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끝까지 믿음의 절개를 지켜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별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당신의 크고 놀라운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도구로 구별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전부를 동원해서 하나님 한 분만 섬길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릴 수 있겠습니까? 참된 영성을 보여드릴 수 있겠습니까? 선지자는 “주께서 쏘신 화살이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주께서 던지신 번쩍이는 창을 보고 해와 달이 하늘에서 멈춰 섰습니다, 원수의 군대가 폭풍처럼 밀려와 우리를 흩어 버리고 가난한 사람을 아무도 모르게 삼키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바로 그 원수의 창으로 그 군대의 지도자를 찌르셨습니다. 주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를 지나시고 큰물을 휘저으셨습니다.”(합3:11, 14-15)라고 외쳤습니다.
범죄 한 유다와 바벨론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완벽했습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을 정도로 구체적이었습니다.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지 해와 달이 빛을 잃어버렸습니다.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신묘막측神妙莫測하게 돌아가고 있던 창조 질서마저 멈춰서고 말았습니다. 선지자의 외침은 “이 모든 것을 들으니 내 몸이 떨립니다. 그 소리를 들으니 내 입술이 떨립니다. 내 뼈에 힘이 빠지고 다리가 후들거립니다.”(합3:16a)라고 이어집니다. 사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날이 다가올수록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았습니다.
진정시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그가 참고 견딜 수 있는 한계를 훨씬 뛰어 넘어버렸습니다. 몸은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파랗게 변한 입술은 제어되지 않았습니다. 제멋대로 움직였습니다. 뼈에는 썩어 들어가는 듯한 통증이 엄습했습니다. 후들거렸습니다. 그때 그는 “그러나 나는 우리를 치러 오는 백성에게 닥칠 재앙의 날을 참고 기다리겠습니다.”(합3:16)라고 외쳤습니다. 아무리 두렵고 떨린다 할지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고 외쳤습니다. 끝까지 참고 견뎌 내겠다고, 참된 부흥을 위한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기다리겠다고 외쳤습니다.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고,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고, 올리브 나무에 거둘 것이 없고, 밭에 거둘 곡식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더라도 나는 여호와 때문에 기뻐하겠습니다.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겠습니다.”(합3:17-18)라고 외쳤습니다. 자신의 전부가 진토에 쏟아지게 된다 할지라도, 단 한 가지도 남지 않고 다 사라지게 된다 할지라도, 생존권 자체를 박탈당하게 된다 할지라도, 그곳에서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일으켜 세우시기 위해 위대한 일을 행하실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하겠다고 외쳤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 찬양하겠다고 외쳤습니다. 소망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는 절대절망 속에서도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진짜 복인 참된 부흥”을 선물하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고, 믿고, 의지하고, 신뢰하겠다고 외쳤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신앙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미 계시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기초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신구약 성경이 수없이 반복해서 외치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아야 되는 이유입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드리는 감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보기 원하시는 참된 영성입니다.
시인은 가장 탁월하고 존귀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서 가장 낮은 자리인 진토로 내팽개쳐지듯 버려졌습니다. “나는 사람도 아닌 벌레입니다. 사람들의 비방거리입니다. 백성들의 모욕거리일 뿐입니다. 나를 보는 사람은 누구나 나를 빗대어서 조롱하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면서 얄밉게 빈정댑니다.”(시22:6-7)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절대절망의 상황 속에 버려졌습니다. 그때 그는, “그러나 (하나님) 당신은 거룩한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찬양(과 감사와 존귀와 영광)을 받으실 (유일한) 분이십니다.”(시22:3)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들에게 받기 원하시는 참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의 고백은 계속해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지쳤던 내 몸에 생기가 넘친다...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원수들이 보라는 듯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부어 머리에 발라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영원히 주님의 집에 거하겠습니다.”(시23:1-6)라고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절망 속에서도 당신이 찾으시는 예배를 드리는 그를 진토로부터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가장 탁월하고 존귀한 왕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기름이 넘치는 삶을 살게 해 주셨습니다.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할 수밖에 없는,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는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노래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환경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기꺼이 희생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이 시간에도 우리를 향한 당신의 놀라운 뜻을 이루고 계시는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비록 옥에 갇히는 위기에 던져질 지라도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절개만큼은 반드시 지켜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모든 순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는 삶, 모든 상황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삶, 참된 만족과 기쁨과 평안과 안식과 풍요가 넘치는 삶, 무엇보다 드려진 작은 감사 위에 더 크고 위대한 감사의 제목들까지 더해지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