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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만나는 예수 1973
Meeting Jesus Anew
가룟유다는 일처리에 있어
서 빈틈이 없고 명확하였
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회계를 담당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요.
비록 재정규모가 크지 않
았다고 해도 언제나 돈관
리는 큰 책임과 수고가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가룟유다는 재정관리에
전혀 문제점을 드러내지
않았고, 뛰어난 재능을
보여 줌으로 동료들로부
터 칭찬과 존경을 받았습
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가 배신하는 날까지
제자들은 아무도 그의
배신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요.
적어도 가룟유다는 남들
에게 흠을 잡히지 않을
정도로 자기 관리를 잘
했습니다. 그것이 비록
위선일지라도 남들이 눈
치를 채지 못할 정도였으
니 대단한 내공을 지녔다
고 할 수 있지요.
그가 하는 의심과 비판은
합리적인 것으로 보였고
부정적인 의식 조차도
지혜와 통찰로 보일 정도
로 철저히 자신을 감추는
능력을 내 보였습니다.
성경 복음서에는 마치
그가 도둑으로 공적인
돈을 훔치는 자로 묘사
하고, 향유를 붓는 여인
을 보면서 돈이 아까워서
예수를 배신하게 된 것
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유란시아서는 이 점에
대해서 철저하게 반대하
고 있습니다.
최소한 그는 돈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깨끗했고
정직했다고 단언을 하고
있지요. 돈이 주를 배신
하게 하는 요인은 결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 Meeting Jesus Anew (1973)
Judas Iscariot was meticulous and clear in his work. Even now, managing finances is not an easy task. Although the financial scale was not large, managing money always involved significant responsibility and effort.
Judas never showed any issues in financial management and demonstrated outstanding talent, earning praise and respect from his fellow disciples. Because of this, none of the disciples suspected his betrayal until the very day it happened.
Judas maintained himself so well that no one could find fault with him. Even if it was hypocrisy, he was skilled enough to keep it hidden from others, showing remarkable internal control.
His doubts and criticisms seemed rational, and even his negative mindset appeared as wisdom and insight, demonstrating his ability to thoroughly conceal his true nature. The Gospels portray him as a thief who stole from public funds and betrayed Jesus out of greed for money after witnessing the woman pouring perfume. However, the Urantia Book strongly opposes this view.
According to the Urantia Book, Judas was clean and honest in financial matters. It firmly states that money was never the reason for his betrayal of Jesus.
새롭게 만나는 예수 1974
Meeting Jesus Anew
만일 가룟유다가 돈에 대한
탐욕을 품고 있었다면 그렇게
동료들의 신뢰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많으나 적으나
사람들은 '돈'에 대해 아주
민감하지요.
따라서 조금만 허튼 짓을 해도
금방 들통이 나는 것이 돈 문제
입니다.
특히 당시처럼 늘 함께 지내는
상황에서 가룟유다가 돈 궤에서
돈을 훔쳐 착복한다는 것은
쉽게 상상하기 어렵지요.
어쨋든 가룟유다가 회계를
맡고 있음으로, 또 나중에
예수를 은 30에 판 것 때문
에 그의 배신에 '돈'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하게
하지만 사실 가룟유다는 돈을
요구한 적이 없었을 뿐 아니라
은 30을 받은 후 도리어 모멸
감을 느끼고 그 돈을 던져버린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뒤에 나오겠지만 가룟유다가
기대한 것은 돈보다 어떤 명
예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노
예 하나의 값에 해당하는 은
30이 주어지자 그는 크게 실
망하고 모멸감을 느끼게 되어
돈을 도로 던져주었다고 기록
하고 있지요. 이 점이 성경의
기록과 유란시아서의 차이를
보이는 부분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돈문
제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
는 극히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는 경우거나 비교적 큰
금액의 이익을 추구하는 경
우지요. 뻔히 들통날 것을
알면서도 적은 금액을 훔치
거나 욕심을 내는 경우는 그
리 흔하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예수의 제자들은 어떤
사업을 하는 상황도 아니
었고 영리를 목적으로 하
는 모임도 아니었기 때문에
돈이 주목적이 된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최소한 가룟
유다가 돈 때문에 예수를
배신 했다는 누명은 벗겨주
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누명을 벗겨주기 위함
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이고
중요한 요인이 있음을 강조
하기 위함이지요.
가룟유다에게서 발견되는
치명적인 문제는 '돈에 대
한 욕심'이 아니라 '예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우리도 이 근원적
인 문제에 더 신경과 관심
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 Meeting Jesus Anew (1974)
If Judas Iscariot had harbored greed for money, he would not have earned the trust of his fellow disciples. People, both then and now, are very sensitive about money. Even a small indiscretion involving money is quickly noticed.
Especially in a setting where they were constantly together, it is hard to imagine Judas stealing money from the treasury without being caught. Although Judas was the treasurer and later sold Jesus for 30 pieces of silver, suggesting money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his betrayal, Judas never demanded money. In fact, after receiving the silver, he felt humiliated and threw the money away.
As we will see later, Judas sought honor rather than money. When he received 30 pieces of silver, equivalent to the price of a slave, he felt deeply disappointed and humiliated, throwing the money back. This difference highlights a distinction between the Biblical account and the Urantia Book.
Even today, people committing crimes over money typically do so out of extreme poverty or in pursuit of significant financial gain. It is rare for someone to steal a small amount of money, knowing they will likely be caught.
Jesus's disciples were not engaged in business or profit-seeking activities, so it is evident that money was not their primary focus. Therefore, we should clear Judas of the accusation that he betrayed Jesus for money.
This clarification is not just to clear his name but to emphasize a more fundamental and significant issue. The fatal flaw in Judas was not greed for money but his lack of love for Jesus. We must pay more attention to this core issue.
The critical lesson here is that Judas's failure stemmed from not loving Jesus. His betrayal was rooted in this lack of love, rather than any financial motive. This is a reminder for us to focus on nurturing our love for Jesus and not allow other distractions to lead us astray.
새롭게 만나는 예수 1975
Meeting Jesus Anew
성경 잠언에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는
말씀이 두 번 나오지요.
(잠언 14:12, 16:25)
유란시아서는 가룟유다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고 지
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동료들의 보기에는
유능하고 정직하며, 빈 틈
이 없이 충실한 사람으로
보여 마지막 순간까지 의
심을 받지 않고 신뢰를 확
보하고 있었지만 그 누구
도 깊은 마음 속에 있는
의심과 불만, 교만과 비난
등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예수 외에는 말이지요.
안드레가 조금 낌새를 눈
치채기는 했어도 그는 설
마 하며 모른척 넘어가 버
렸을 정도였으니 가룟유다
의 위선과 포장은 아마도
최상급 배우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자기 스
스스로도 속였을지도 모
를 일이고요.
이런 자기 기만과 남들의
눈을 속이는 현상은 지금
도 많이 나타나고 있는
아주 무섭고 끔찍한 일입
니다. 이런 경우는 철저히
남을 의식하며 외적인 행위
에만 집중하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지요.
이들의 자기성찰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남
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
에 대한 판단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남들이 나를 어
떻게 생각할까?' 아마 남들
은 모두 나를 좋은 사람으로
여기고 있을거야'하는 식의
자기성찰일 뿐 진실되게
양심과 하나님 앞에서 자신
을 돌아보는 차원은 결코
아니지요.
그러니 이런 자기 성찰은
오히려 '자기 합리화'와
'자기기만'으로 더욱 상황
을 악화시키게 됩니다.
루시퍼와 사탄이 빠져서
결국 나오지 못한 수렁이
바로 이런 차원이지요.
그로 인해 영원히 자신을
잃어버리고 파멸에서 나
올 기회마져 스스로 내팽
개쳐 버리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가룟유다도 바로 이 길을
따라가고 말았습니다.
### Meeting Jesus Anew (1975)
The Bible's Proverbs state twice, "There is a way that appears to be right, but in the end, it leads to death" (Proverbs 14:12, 16:25). The Urantia Book points out that Judas Iscariot is a prime example of this.
To his fellow disciples, Judas appeared competent, honest, and meticulously faithful, maintaining their trust until the very end. However, none of them could see the deep-seated doubts, dissatisfaction, pride, and criticism within him, except for Jesus.
Even Andrew, who noticed something was amiss, dismissed his suspicions, thinking it impossible. This indicates that Judas's hypocrisy and facade were of the highest caliber, perhaps even deceiving himself.
This phenomenon of self-deception and fooling others is a terrifying reality that persists today. It often manifests in those who are deeply conscious of others' opinions and focus solely on external actions. Their self-reflection is not genuine introspection before their conscience and God but rather a consideration of how others perceive them.
Such self-reflection merely asks, "How do others view me? Surely, they see me as a good person," rather than sincerely examining themselves before their conscience and God. This kind of self-examination worsens the situation through self-justification and self-deception.
This is the same pitfall that Lucifer and Satan fell into, a pit from which they never emerged. As a result, they lost themselves eternally, forfeiting any opportunity for redemption. Judas Iscariot followed this same path.
The true lesson here is the danger of self-deception and the importance of genuine self-examination before God. It's a reminder to continually reflect honestly and sincerely, avoiding the pitfalls of pride and hypocrisy, and nurturing a deep and sincere love for Jesus.
새롭게 만나는 예수 1976
Meeting Jesus Anew
모든 것 중에 가장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했지요. 따라서 이 마음이
속이는 일은 결코 마음이
포착할 수 없을 정도로 아
주 교활하고 간교합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에 대한
판단은 결코 남들이나 자
기 자신의 마음에 맡겨두
어서는 안된다는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심지어 양심 조차도 얼마
든지 무디어지거나 화인을
맞을 수 있으니 그 또한
완전히 믿어서 안되고요.
사회의 규범이나 법 등은
시대마다, 상황에 따라 얼
마든지 바뀔 수 있으니 결
코 판단과 신뢰의 기준으
로 삼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직 신뢰할 수
있는 평가는 '진리'와 '하
나님' 뿐이라는 것인데 이
또한 마음과 지성의 작용
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믿을 수 없지요. 여전히 하
나님과 진리의 이름을 띠
고 자신을 속일 수 있는 것
이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도무지 길이 없는 것
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이 절대로 하지 못하는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부정'입니다.
물론 피상적으로 행하는
자기 부정은 마음이 얼마
든지 속일 수 있고, 만들어
낼 수 있으니 여기에 속아
서도 안되지요.
하지만 마음이 절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철저한 회개'
입니다.
특히 눈물과 고통을 동반한
회개는 절대로 마음이 만들
어 내지 못하지요.
이 일은 오직 하나님과 진리,
그리고 참된 나의 자아만이
일으키는 그 누구도 속일
수 없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 Meeting Jesus Anew (1976)
It is said that the most corrupt thing is the "human heart." Therefore, the heart's deceit is so cunning and insidious that it is almost impossible for the heart itself to detect. Consequently, we should never leave the judgment of ourselves to others or even to our own hearts.
Even the conscience can become dulled or seared, so it cannot be fully trusted. Societal norms and laws change with time and circumstances, so they cannot serve as reliable standards for judgment and trust either.
Thus, the only trustworthy evaluations are those based on "truth" and "God." However, since these too are linked to the operations of the mind and intellect, they can still be subject to deception. The heart can deceive itself even under the guise of God's truth.
Is there no way out, then? There is indeed a way. There is one thing that the heart absolutely cannot do: "self-denial." While superficial self-denial can be easily fabricated by the heart and should not deceive us, there is something the heart can never achieve on its own, and that is "thorough repentance."
Especially repentance accompanied by tears and suffering is something the heart cannot manufacture. This act is initiated solely by God, truth, and the true self, serving as an undeniable and decisive evidence of genuine transformation.
True repentance, accompanied by deep emotional pain and tears, is a definitive sign of a profound inner change that cannot be fabricated. This level of self-denial and repentance is beyond the capacity of the deceitful heart and mind, confirming an authentic spiritual experience initiated by God and the truth.
새롭게 만나는 예수 1977
Meeting Jesus Anew
가룟유다와 다른 제자들의
결정적인 차이도 여기서
나타났지요.
가룟유다는 후회와 반성까
지는 나아갔습니다. 그것은
마음과 양심의 작용이요,
세상의 눈치와 멸시가 일으
킬 수 있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그가 후회와 자책을
하고 결국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 지경으로 나간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
을 속이는 마음의 미혹이었
지요. 한마디로 끝까지 자아
의 몸부림과 발악이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가룟유다가 예수와
영적 존재들의 권면과 책
망을 따라 '철저한 회개'로
들어갔다면 그가 아무리
스승을 배신하고 팔았어
도 구원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철저한 회개'라는 현상 그
자체가 이미 '영적인 치유'
와 '구원의 현상'이기 때문
이지요.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회
개를 '죄사함'의 차원에
서 강조하고 있다보니
본질적인 핵심을 파악하
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런 차원의 회개
는 '자아의 자기 만족'차
원을 넘어설 수 없지요.
'회개했으니 됐다' 하며
안도하는 현상은 그 회개
가 진정한 회개가 아니라
'자아의 자기 만족'이라
는 '기만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뚜렷한 증거가 이런 식
의 회개를 밥 먹듯이, 물
마시듯이, 약 먹듯이 하
고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진정한 회개는 그렇지 않
지요. 자아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자
아를 죽이고 파멸시키는
행위입니다. 자기자신의
비참함과 악함, 추함, 거짓
됨 등을 직시하고 그것들을
양분 삼아 기생하고 자라
고 있는 자아에 대해서 전
쟁을 선포하고 뿌리 뽑고자
취하는 행위가 바로 철저한
회개이기 때문에 자아는 결
코 이런 차원의 회개를 일으
킬 수 없다는 것이지요.
### Meeting Jesus Anew (1977)
The critical difference between Judas Iscariot and the other disciples is evident here. Judas experienced regret and remorse, which are the workings of the mind and conscience, influenced by societal scorn and shame. However, his remorse and self-condemnation, ultimately leading to his suicide, were due to the heart's deceit and self-deception until the very end. In short, it was his ego's final struggle and desperation.
Had Judas heeded the admonitions and rebukes of Jesus and spiritual beings and entered into "thorough repentance," he could have found salvation despite betraying his master. The act of "thorough repentance" itself is a phenomenon of "spiritual healing" and "salvation."
In contemporary Christianity, repentance is often emphasized from the perspective of "forgiveness of sins," missing the essential core. This type of repentance often fails to surpass the level of "self-satisfaction of the ego." The phenomenon of feeling relieved after saying, "I have repented," indicates that the repentance is not genuine but rather a "self-satisfaction" of the ego—a deceptive act.
Clear evidence of this is seen in the frequency of such repentance, as if it were a routine like eating, drinking, or taking medicine. True repentance is not like this. It does not satisfy the ego but rather kills and destroys it. It involves facing one's misery, wickedness, ugliness, and falsehood, and declaring war against the ego that feeds and grows on these elements, aiming to uproot it. Thus, the ego can never induce this level of repentance.
True repentance is not about comforting the ego but about a profound and painful transformation that the ego cannot initiate on its own. It is an act that involves seeing one's own despicable state and striving to eradicate the ego's hold, which is why genuine repentance is so powerful and transformative.
새롭게 만나는 예수 1978
Meeting Jesus Anew
그리고 이 후로 나타나는
특징은 항상 겸손하게 자
신을 살피며 혹시나 또 자아
에 속지 않을까, 금방 또
부정적인 생각이나 교만과
비난 등의 의식이 발동되지
않을까 하는 의식이 날로
강화됩니다.
한 번의 철저한 회개를 경
험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
는 마치 손발을 씻듯이 자
신의 의식을 정화시키는 것
이지요. 혹시 또 자아가 부
활하여 주도권을 행사할까
늘 경계하며 방책을 마련하
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나는 언제나
틀릴 수 있다. 항상 깨어
경계하고 조심하여 자아와
마귀의 속임에 넘어가지
않아야 한다'는 의식이 늘
작동하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스스로 확인
할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자아에게 속지 않는 자가
됩니다.
반대로 지금도 거짓된 마음,
즉 자아에게 속고 있는 자
에게서는 이런 '점검작용'
이 없습니다. 도리어 더 발
달하는 것은 '남들이 나를
뭐라고 할까?'하는 의식만
강화되고 그에 따라 '좋게
보이려고 하는 마음'이 모
든 생각과 말, 행동을 주도
하게 되지요.
가룟유다는 루시퍼와 사탄
의 뒤를 좇아 끝까지 자아에
게 속임을 당하고,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결국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영원히 거역하는 자리
에 서고 말았습니다.
가룟유다가 자기 목숨을 스
스로 끊는 극단적인 행위조
차도 '자아의 발악'일 뿐이었
던 것이지요.
여전히 루시퍼와 사탄이 거
역하고 대적하는 행위도 마
찬가지로 '거짓된 자아'가
끝까지 자기주장을 하고 있는
증거이고요.
### Meeting Jesus Anew (1978)
Following a thorough repentance, a distinguishing feature that emerges is a heightened sense of humility and constant self-examination to avoid falling prey to the ego again. There is a growing awareness and vigilance against the resurgence of negative thoughts, pride, and criticism.
After experiencing such deep repentance, one begins to cleanse their consciousness regularly, akin to washing hands and feet. This involves being perpetually on guard against the ego's reassertion and ensuring defensive measures are in place.
The evidence of this is the constant awareness that "I can always be wrong. I must always be alert, vigilant, and cautious not to fall into the deceptions of the ego and the devil." When this awareness is consistently present, it indicates that the individual is no longer deceived by the ego.
Conversely, those who are still deceived by their false selves, or egos, lack this "self-checking mechanism." Instead, they become increasingly preoccupied with "What do others think of me?" and their thoughts, words, and actions are dominated by the desire to be seen favorably.
Judas Iscariot, following in the footsteps of Lucifer and Satan, remained ensnared by his ego until the end, unable to break free from its control. Consequently, he became an eternal adversary of God. Even his extreme act of taking his own life was merely another manifestation of his ego's desperation.
Similarly, Lucifer and Satan's continued rebellion and opposition to God are also evidence of their "false egos" making their final stand.
In essence, Judas’s and Lucifer’s ultimate failures underscore the critical importance of genuine repentance and constant vigilance against the ego’s deceit. True humility and continuous self-examination are vital to avoid the traps of pride and self-deception, ensuring a path aligned with truth and love.
새롭게 만나는 예수 1979
Meeting Jesus Anew
예수는 가룟유다의 약점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핑계로 그를 배척
하거나 정죄하지 않았습니
다. 그리고 예수는 누구나
자아의 속임과 미혹으로
인해 스스로 자아의 제물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
었지요. 동시에 그 누구라도
스스로 하나님을 찾고 영
생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
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당시나
지금이나 하늘 문은 활짝
열려 있으면서도, 동시에
모든 사람은 깨어서 두렵
고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
을 이루도록 애를 써야 할
책임이 있게 된 것입니다.
무지와 두려움으로 위축
되는 것도 극복되어야 할
문제지만, 교만과 만용으
로 방심하는 것도 반드시
경계해야 할 위험요소라
는 것을 깨닫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 때문에 누구든지 베드
로 같은 자가 될 수도 있
고, 동시에 가룟유다의 운
명에 처할 수도 있는 것이
지요.
하늘은 차별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는 더 나은 기회를
제공하고, 누구는 애초부터
싹을 잘라버리는 그런 차별
은 결코 없습니다.
다만 하늘의 자비는 끝까지
어리석게 자아의 미혹에
빠져 하나님을 거역하고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에게
'소멸'의 심판을 내리시는
것으로 그 어떤 부정적인
흔적을 남기지 않지요.
지금 가룟유다는 여전히
이름과 행적이 남아서 우
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지
만 그의 존재는 이미 소멸
되어 '없었던 자'처럼 사라
지고 없을 것입니다.
그 어디에서도 그의 존재
는 찾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루시퍼와 사탄의 운명도
그 상황에 놓여있고, 끝까
지 하나님을 거역하고 진
리를 대적하는 자들, 철저
하게 자아의 욕심을 따라
헛되고 거짓된 자아를 실
체로 여기고 사는 자들의
운명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 Meeting Jesus Anew (1979)
Jesus was aware of Judas Iscariot's weaknesses but did not reject or condemn him because of them. Jesus understood that anyone could fall victim to the deceptions and temptations of the ego, becoming its prey. At the same time, He knew that everyone possesses the ability to seek God and enter the path of eternal life.
This is why, both then and now, the gates of Heaven remain wide open, while every individual bears the responsibility to work out their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It is crucial to overcome ignorance and fear that lead to withdrawal, but it is equally important to guard against pride and complacency, which can lead to overconfidence. Therefore, anyone can potentially become like Peter or face the fate of Judas Iscariot.
Heaven does not discriminate. It does not offer better opportunities to some while cutting off others from the start. Heaven's mercy extends to all, but it ultimately brings the judgment of 'obliteration' to those who foolishly persist in defying God and opposing the truth, leaving no trace of their negativity.
Although Judas's name and actions remain to serve as lessons for us, his existence has been erased, as if he never existed. His presence can no longer be found anywhere.
Lucifer and Satan face a similar fate, as do those who continue to defy God and oppose the truth, living in pursuit of their vain and false egos. Their destiny is the same: complete obliteration.
새롭게 만나는 예수 1980
Meeting Jesus Anew
진리를 지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으로 그치게 되면 그
의 영적 인격의 성숙은
기대할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반드시 진리를
만나게 되면 지식적인 이
해 차원을 넘어서 '실천'
을 통한 실험을 해야 하
고 그로부터 증거를 얻
어내야 합니다.
'신해행증'이라고 하여
'믿음에서 이해로, 이해
에서 행동으로, 행동에
서 증거로'나아가야 한다
는 것이 모든 생명의 가
르침의 본질을 형성하고
있지요.
예수도 모래 위에 세운
집과 반석 위에 세운 집
을 예로 들어서 듣고 행
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를 극명하게
대립시켜서 시각적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가룟유다는 비록 예수의
가르침에서 지적인 이해
는 많이 키워왔을지 모르
나 그의 부정적이고 의심
과 비난의 자아로 인해
영적이며 인격적인 성숙
으로 나아가는데는 실패
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실패는 단
순한 정체나 일시적인
침체로 그치지 않지요.
반드시 퇴보와 악화의 길
로 들어서게 만듭니다.
가룟유다는 점점 더 개인
적으로 겪은 실망에 갈수
록 더 속을 끓이는 사람이
되었고, 마침내 분개심에
희생제물이 되고 말았습
니다.
자주 기분을 상했을 뿐 아
니라 동료들과 심지어 주와
스승이신 예수에게까지도
비정상적인 의심과 불만을
품게 되었습니다.
결국 향유를 붓는 여인의
사건과 함께 자신의 생각
과 견해가 무시되고 거부
되었다고 여기게 되면서
배신과 앙갚음의 마음으로
까지 악화되고 말았지요.
### Meeting Jesus Anew (1980)
If the acceptance and understanding of truth remain only on an intellectual level, spiritual and personal maturity cannot be expected. Therefore, encountering the truth must go beyond intellectual comprehension to involve 'practice,' through which evidence and proof are obtained.
This concept is encapsulated in the progression from 'faith to understanding, understanding to action, and action to evidence,' which forms the essence of all teachings on life. Jesus illustrated this vividly with the parable of the houses built on sand and rock, contrasting those who hear and act on His words with those who do not.
Judas Iscariot may have developed a substantial intellectual understanding of Jesus's teachings, but his negative, doubting, and critical ego prevented him from achieving spiritual and personal maturity.
Such failure is not merely stagnation or temporary setback; it inevitably leads to regression and deterioration. Judas increasingly became embittered by personal disappointments and ultimately fell victim to his resentment.
He frequently felt aggrieved and harbored irrational suspicions and dissatisfaction towards his fellow disciples and even towards Jesus, his Lord and Teacher. The incident with the woman anointing Jesus with perfume was a tipping point. Judas felt that his thoughts and opinions were disregarded and rejected, leading to his decision to betray Jesus out of a sense of vengeance and betrayal.
This shows that without transforming intellectual understanding into actionable practice, and without aligning one's heart with humility and love, one risks falling into deeper negativity and spiritual decay, as exemplified by Judas's tragic end.
새롭게 만나는 예수 1981
Meeting Jesus Anew
향유를 부은 사건이
있던 당일 가룟유다는
공개적으로 그 행위에
대해 비난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모든 사람들이 보고 있
는 가운데 예수로부터
제재를 당하고 책망을
받자 그 순간 그는 그
동안 쌓였던 모든 불만
과 악감정이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상황을
'마귀가 들어갔다'고
표현하지만 유란시아서
에서는 스스로 그동안
품어왔던 모든 악감정들,
즉 미움과 상처, 악의,
질투, 편견, 원한을 응집
하여 내부에서 폭발을
시켰다고 진술합니다.
그렇게 그는 스스로 쌓은
악에서 악을 키워서 자기
판단과 결정으로 '악의 세계
로 건너가고 말았'던 것이지요.
그동안 예수는 가룟유다
에게 직간접적으로 경고
도 하고 책망도 하면서
그의 마음을 돌이켜 보려
고 애를 썼지만 그리 큰 효
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인
간의 악한 생각을 억지로
바꿀 수는 없으니 가룟유
다나 우리나 '악의 길, 사
망의 길'을 선택한다면 달
리 구원할 길이 없게 됩니다.
아마 우리 입장에서는 억
지로라도, 때려서라도 돌
이켜 구원을 얻게 하는 것
을 원할지 모르나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시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한 이상 이런 헛
된 기대는 속히 접는 것이
유익하겠지요.
에스겔서를 보면 하나님이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 매와
징계를 일곱배 강도로 계속
높여도 끝까지 거역하는 모
습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에라 내일 죽을
터이니 오늘 즐기자'는 식
으로까지 나아가는 인간의
모습에 하나님 자신이 놀라
기도 하지요.
### Meeting Jesus Anew (1981)
On the day of the incident with the woman anointing Jesus with perfume, Judas Iscariot publicly criticized her actions. When Jesus rebuked him in front of everyone, all of Judas's pent-up resentment and negative feelings erupted.
The Bible describes this moment as "Satan entering into him," but the Urantia Book explains it as Judas's internal explosion of accumulated negative emotions—hatred, hurt, malice, jealousy, prejudice, and resentment. Consequently, he nurtured these evils within himself, ultimately making a conscious decision to cross over into a "world of evil."
Throughout this period, Jesus had indirectly and directly warned and rebuked Judas, attempting to turn his heart back. Despite these efforts, Judas's heart did not change significantly. Even God cannot forcibly alter a person's wicked thoughts, so if Judas or any of us chooses the "path of evil and death," there is no way to be saved.
From a human perspective, we might wish for a forced or punitive turn towards salvation, but it is clear that God has not ordained such a method, making it beneficial to abandon such futile expectations quickly.
The Book of Ezekiel demonstrates that even when God increases punishment and discipline sevenfold to prompt repentance, humans often persist in rebellion. This persistent defiance, sometimes expressed with the mindset of "let us eat and drink, for tomorrow we die," even astonishes God Himself.
This story of Judas serves as a stark reminder of the importance of aligning our hearts with truth and love, not merely understanding it intellectually, but practicing it in our lives to avoid the pitfalls of pride, resentment, and spiritual decay.
새롭게 만나는 예수 1982
Meeting Jesus Anew
하지만 이러한 기록은 가장
극단적인 상황을 나타내는
것일 뿐 결과가 비극으로 끝
날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
지요. 오히려 정 반대로 이처
럼 인간이 자유의지를 오용
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
역하는 길을 선택한다고 하
더라도 결국은 선과 사랑이
승리할 것이라는 대 반전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감당도 하
지 못하면서 자유의지를
주셨다면 그 자체로 자신의
지혜와 능력, 사랑의 한계
를 증명하는 것이 되고 말
지요. 우리는 이런 결론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
이지요. 따라서 오히려 어둠
이 짙을수록 빛이 더 강력하
게 드러나는 현상처럼 가룟
유다를 비롯한 가장 극악한
경우조차도 완전한 영광과
승리로 바꾸실 하나님을 우
리는 믿고 확신합니다.
가룟유다는 배신을 신속하
게 실행으로 옮겼고 몇 번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했으나 '주가 스스로 자신
을 구원하실지도 몰라'하
는 마음으로 자아를 위로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은 30을 받으면서
가장 멸시섞인 시선과 말
을 들은 그의 자아는 견딜
수 없는 충격과 상처를 받
았고 이로부터 피하고자
하는 자아는 결국 스스로의
목숨, 즉 의식을 끊는 방법
을 택하도록 내 몰았습니다.
그러니까 끝까지, 마지막
결정까지 '자아'의 판단에
따라서 행하고 만 것이지요.
### Meeting Jesus Anew (1982)
However, such records represent the most extreme situations and do not necessarily mean the outcome must be tragic. On the contrary, they hint at a grand reversal where even when humans misuse their free will to oppose and defy God, ultimately, good and love will triumph.
If God had given free will without the capacity to manage it, it would suggest limitations in His wisdom, power, and love. This is an unacceptable conclusion, as it contradicts the nature of God. Thus, just as darkness makes light shine more brightly, we believe and trust that even the most wicked cases, including Judas Iscariot, will ultimately be transformed into complete glory and victory by God.
Judas quickly acted on his betrayal and felt pangs of conscience several times. However, he comforted himself with the thought that "the Lord might save Himself."
When he received the 30 pieces of silver and faced the most contemptuous looks and words, his ego suffered unbearable shock and hurt. To escape this, his ego eventually pushed him to choose to end his life, or consciousness. Thus, in the end, even his final decision was driven by his ego's judgment.
This teaches us that even in extreme rebellion and failure, there remains a divine hope and assurance that God's ultimate plan will prevail, turning every situation into a manifestation of His glory and victory.
새롭게 만나는 예수 1983
Meeting Jesus Anew
가룟유다의 배신에 제자
들은 소스라치게 놀랐고,
예수는 그저 불쌍하게
여길 뿐이었습니다.
온 우주는 이 배신자를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고
그의 이름을 회피하게
되었으며, 그를 용서하기
어렵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가룟유다는 가장
큰 복과 헤택, 영광을 받
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버렸을 뿐 아니라 가장
어리석고 악한 판단과 결
정을 내린 존재로 온 우주
에서 부정적인 모델로 회
자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상당히
자세하게 가룟유다에 대해
공부를 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에 대한
공부가 그치지 않지요.
앞으로 그의 생각과 말,
그리고 행위에 대한 내용
들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
까지 지속적으로 등장하
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최후의 상
황은 아주 자세하게 묘사
되어 우리로 하여금 더욱
깊은 인상과 교훈을 줄 것
이고요.
가장 어둡고 악한 사례지
만 이렇게 자세하게 우리에
게 알리는 이유는 가룟유다
의 실패를 피상적으로만
보고 평가하지 말라는 의미
가 들어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 속에도 충분히
이런 요소가 있음을 경계
하여 같은 미혹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를 주고자 하는
의도가 강하게 들어있지요.
그만큼 우리의 생명, 특히
영원한 생명은 소중하고
진지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강한 메시지를 발견하고
항상 깨어서 자신을 살피며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
루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 Meeting Jesus Anew (1983)
Judas Iscariot's betrayal shocked the disciples profoundly, while Jesus felt only pity for him. The entire universe views Judas with deep shame, avoiding his name and recognizing how difficult it is to forgive him.
Thus, Judas not only forfeited the greatest blessings, benefits, and glory but also made the most foolish and evil decisions, becoming a negative model throughout the universe.
We have studied Judas Iscariot in considerable detail, but our exploration of him does not end here. His thoughts, words, and actions will continue to appear, particularly in relation to the events leading to Jesus's crucifixion.
The final moments are described in great detail, providing us with deeper impressions and lessons. Despite being the darkest and most evil example, the detailed account of Judas's failure serves a purpose beyond superficial judgment.
This story strongly warns us that we, too, possess the potential for such traits within ourselves and must remain vigilant to avoid falling into similar deceptions. It underscores the importance of managing our lives, especially our eternal lives, with seriousness and care. We must stay awake, continually examining ourselves, and work out our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